[찬샘뉴스 308/201122]원적原籍 고향을 다녀오신 아버지
전북 장수군 산서면 백운리 ‘대삿골’마을. 이곳이 아버지가 태어나 여덟 살 때까지 사신 아버지의 원적原籍 고향이다. 기억력이 워낙 뛰어나시기에, 94세인데도 다섯 살 때부터의 일상을 대부분 기억하는 아버지, 얼마 전부터 그곳에 가보고 싶어 하셨다. 그러던 것을, 어제 우리집 여섯째이자 둘째여동생 내외가 모시고 다녀오셨다. 아버지 심중을 헤아리고 풀어드리는 것은 역시 아들이 아니고 딸이 최고인 것을. 아버지 팔순-부모 회혼 기념문집을 내고자, 그곳을 다녀온지 딱 15년만이다. 이제 마지막 방문이라고 생각하셨을 터이니 감회가 더욱 새로웠으리라.
생각하면 기구한 일생이다. 증조부가 그곳에 터를 잡았는데, 당신의 환갑 나이때 4대독자인 아들이 30세의 나이에 요절을 하셨으니 참척慘慽의 애통함이 오죽 했으랴. 그날부터 곡기를 끊고 5개월만에 당신마저 세상을 떠나셨으니. 오호라, 이 풍진 세상에 오직 일가친척 하나 없이 27세 청상과부와 여덟 살, 두 살 사내아이만 남은 것이다. 요즘같으면 개가改嫁도 했으련만, 할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피붙이들에게 의지하고자 친정마을을 찾은 게, 전북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 냉천(찬샘)마을. 아버지는 외가동네에서 86년을 사시며 한미한 집안을 일으켜세웠다. 마을어귀에 ‘진양하씨 채녀지려’ 효열비로 당신의 어머니를 기리고, 가족묘지를 조성하여 윗대를 모셨다. 어머니와 함께한 72년의 세월(지난해 작고) 동안 오직 땅만 파 칠남매를 낳아 키우며 가르쳤다.
15년 전만 해도 조부와 증조부를 기억하는 어르신을 만나 손을 부여잡았지만, 그 마을에는 이제 아무도 아버지와 조모를 기억하는 분들이 없었다한다. 산천은 의구한데 아버지가 기억하던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간신히 죽마고우의 아들을 수소문해 만나서 몇 가지 소식을 들었을 뿐이라 한다(뱅기떡 할머니의 큰손자). 그렇게 ‘한 세상’은 흐르는 것일 터, 무심한 것이 세월歲月(달구름)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진즉 한번쯤 모시고 갈 것을, 그러지 못해 아버지께 송구했다. 아버지와 아들, 언제 같이 살아본 적이 있던가. 초등학교 5학년때 대처인 전주로 유학을 온 이래, 한 지붕 밑에서 부모와 같이 살아본 적은 올해가 처음이다. 더구나 어머니의 영원한 부재 속에서 아버지와 둘이 처음으로 같이 산 지난 11개월. 나긋나긋한 효녀 딸들과 달리 데면데면한 아들은 일단 말수부터 형편없이 적을 수밖에. 부자지간이지만, 처음에는 어색하기조차 했다. 당신은 당신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 산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서로의 생활습관’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 근면勤勉 검소儉素가 뼈속 깊이 박힌 터라, 클리넥스 한 장조차 두 쪽으로 찢어 쓴다. ‘소비가 미덕’이라고 여러 번 말씀해도 소용이 없다. 게다가 아예 ‘동굴 속 원시인’처럼 ‘그놈의’ 전기세 좀 아끼려 어두컴컴한 데서 책을 읽는다. 아들이 돌아서기만 하면 거실의 전등을 신속하게 꺼버린다. 오 마이 갓! 아버지의 눈으로 보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얼마나 한심할 것인가.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게 아니고, 아버지가 육순의 아들을 ‘모시고’ 산다는 게 더 맞을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아들의 음주飮酒를 걱정해 당신이 즐기는 반주飯酒를 아들이 있을 때에는 안드시는 거다.
아버지의 흉을 보자는 게 아니다. 어찌 배우고 교훈 삼을 일이 한두 가지일까. 특히 대한민국에 일등 가는 프로농사꾼의 일생을 사셨으니, 농사일이라면 족탈불급足脫不及일 것은 당연한 일. 아들로서는 이 풍진 세상을 산 아버지와 아버지의 시대를 그저 가슴으로만 이해할 뿐, 머리로까지는 미치지 않는, 도리가 없는 일이다. 15년만에 당신이 나서 자란 고향마을을 딸내외와 함께 다녀오셨다는 소식을 전화로 들으며 든 생각은, 아버지의 심중을 전혀 헤아리지 않은 아들이야말로 불효자라는 것이다. 앞으로 사시면 얼마나 사신다고 그 ‘소원’ 하나를 미리 짐작하여 들어드리지 못했을까. 아들에게 말도 못하며 끙끙대다 딸에게 ‘거기 좀 가보면 안될까’ 털어놓게 하다니. 진정한 효도는 봉양奉養보다 양지養志라 배웠거늘. 그렇다고 식의주食衣住을 살펴드리는 봉양이라도 제대로 할까. 어림없는 일. 사사건건 툴툴거려 주위로부터 눈총까지 받는 것을, 아들의 눈치를 실실 보게 만드는 것을.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돌아가시면 많이 후회할 듯싶다. 아버지의 ‘노후여행’만큼은 본인이 책임지겠다고 호언한 둘째사위의 ‘남다른 효심’이 더욱 고마운 날이었다. 동갑내기 매제, 오서방아, 고맙다!
첫댓글 나역시 잊지않고 기억한다. 아버지의 본적은 진안군 주천면 운봉리262번지.나의 본적은 전주시금암동665번지.
예전엔 혼인하고도 분가를 안한 작은집들이 같이있어서 행여 호적등본이라도 떼러가면 면서기 양반 일일이 펜글씨로 쓰기에 한나절이 걸리곤하였다.
전주에서 주천까지버스도 하루에 두번다녔고
조금늦으면 주천 아저씨집에서 자고와야했다.그 시절 곰티재에서 버스 사고가 얼마나 많이 났던가? 꼬불꼬불 비포장 도로에
수십명씩 죽는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 도로를 두번씩이나 새로 내었고
지금도 다시 터널을 뚫어서 길을낸다고하니 위험천만한 도로이다.
ㆍ
항상 느끼지만 효자밑에서 효자난다고
친구는 정말 효자일세.
부모를 섬기고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 갸륵할수가있는가.
본시 어려서부터 아버님에게 보고 배웠을터
친구의 착한마음의 원조를 알겠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란 다하여라ㆍ
항상섬기고 섬김받는 친구
중늙은이 우리들 나이에 부모님 한분이라도 계시는 자식들은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고ㆍ
부럽기 그지없네.
우리 아버지 살아계시면 105살
울엄마 나랑 닭띠 동갑이니 100살
효도한번 못해보고 두분 다 돌아가셨으니
오늘도 우리부모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라 기도나 드려야겠다
따르릉님, 어찌그리 우천의 맘에 주파수를 잘 맞추시는 감? 강의 한번 부탁함세.
우천의 글에 청진기 딱 대고 잠시 정신몰두, 촉이 온다. 바로 그 것 귀소본능.
나도 지금 이 촉을 느끼면서 기억도 가물가물한 울 아버지 고향 무주읍 내도리 방주간마을을 떠올려본다.
우천과 9순 어르신 동행이 너무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