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은 진실로 애석하게 생각한다: 장정과 이낙공 往事 惺惺相惜:张仃 与 李骆公
2021년 01월 29일 10:22 팽배뉴스 소스: 이페어케이
1917년생 이낙공과 장정.왕년에, 한 사람은 유화를 배우고, 한 사람은 만화를 그렸다.그 후, 유학의 날벤, 하나는 연안에 몸을 던진다.이낙공은 유화에서 전향하였다 전각 전초는 장인이 지날 때 쓴다.한 차례 화풍의 변화를 겪다만년에 초묵산으로물의 예술적 탐구. 하지만 그들은 특별한 역사의 시대에 비슷한 운명에 맞서서, 첫 만남부터 옛 친구처럼, 그리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서로 아끼는 자신만의 특별한 예술의 길을 걸어간다.본문은 두 사람의 만남과 교제를 기술하여, 사람들이 그 시절의 "백아와 종자기"를 볼 수 있게 하였다.
画家张仃(1917年05月19日—2010年02月21日)
이낙공(19171992)
장정와 이낙공은 평생 단짝이다.이들의 교제에 대해 장정은 이반공의 예술(1982년)이란 글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1946년, 나는 연안에서 하울로군모를 착용하고 오고 있는 것은 완전히, 각반 하나가 세상일에 허덕거리며 바삐 뛰어다니는 모습, 이 선임병으로 인해 일본에서 방금 공천은 가리온이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풍채가 늠름하고, 바로 양복과 가죽 구두 하나다.청년 양화가. "나는 흑사로크라고 해." 그의 당시 필명도 매우 서양이었지만, 그는 열정적이고 솔직하여 오랜 친구처럼 만났다.우리는 늘 예술상의 만담을 하는데, 매우 광범위하고,때때로 매우 깊이 파고든다.근대 화가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매우 흥분돼 있을 때,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온 일본의 그림책 한권 파블로 피카소. 나에게 큰그때는 정말 눈 속에서 숯을 나르는구나.그의 예술적 견해와 창작 태도, 그 사람 됨됨이의 열정과 강개함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겨 주었다.
이 단락의 글은 현묘함을 숨기고 있다: 장·이동.1917년생으로 1946년 하얼빈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서 있던 해에 장무인은 자신을 세상일에 허덕이는 노병이라고 불렀고, 이骆공은 풍채와 도량이 매우 뛰어났다.“양화가 청년”의 차원 편 자신은 명확하게 밝히다. 자, 이 연안에서 갓 귀국한 일본의 락들을 코믹한 듯 가볍게 ——은 필묵은 “일면이 여구하” 뒤에 있는 포석으로 보인다.무엇을 "한 번 보고 오랜 친구 같다"고 하는가?장무인과 이仃공은 인연이 깊다.자신이 이 일본에서 락에 대한 공천의 큰 그림책을 증정 피카소 장에 아낌없이 “설중 송탄.”로 간주하는 것이 좋고 정이 증명하는 것이다.
필자는 1982년 장정을 지적하고 싶다.이 글을 쓴 것은 당시 36년 만이다.삼십육의 창상세월, 풍뢰가 격동하고, 인생의 큰 기복과 신맛과 고달픔은, 지금의 심경과 심경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표현은, 당초의 역사 어경에는 미묘한 「수정 효과」를 일으킨다.어쩌면 이런 자기도 모르는 수정이 장·이 간의 '연'을 부각시키고 증폭시켰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이骆공에 대한 평론을 자세히 읽어 멀리 떨어져 있다.두 예술가의 생애 행상을 생각하니 흥미진진하다.장무인은 이 早공의 오래전 야수파 화풍인 "양화적이고 플라멩코에 가까운 스타일"을 감상하였다.그러나 극도의 희유로 중국 비단 위에 그려져 수묵화의 투명성을 발휘한 그의 유화 작업의 성과 중 하나인 '하얼빈시의 봄'을 칭송하며 장자하얼빈 화실에 걸어왔다.그러나 장은 "수십 년간의 예술적 실천에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소극적인 적이 없다.그는 '봄누에가 죽을 때까지 죽는다'는 정신으로 밤낮을 잊고 침식을 잊고 열심히 일하였다.그는 나중에 각도와 돌로 호의를 나타냈다.그가 새긴 돌은 논대가 메어준 것이다." -지인은 이 암울한 논조를 읽고 그 속에 감춰진 아픔과 어쩔 수 없는 슬픔, 슬픔을 꼭 느낄 수 있었다.이는 장 씨 자신의 솔직한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낙공초전(李 龟公草 寿 <거북은 장수하지만>.
이낙공은 그가 이불이라고 고백했다.전각이라는 방촌의 땅에 들어가도록 강요하다.1957년 그 기이한 운동에서, 이公공은 구소련의 경직된 사실주의 회화 교학 체계에 대한 불만과 대미원 건설에 대한 대담한 제안으로 '우파'로 몰려 교직과 임금, 일체의 대우를 잃고 농촌 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다.재능이 출중하고 장래가 원대한 유화 예술가가 이때부터 중국 미술계를 떠나게 되었다.이와 동시에 남다른 전각가가 외로움 속에서 조용히 태어났다.60~70년대 진문에서 쫓겨나 아내를 따라 서남쪽으로 내려간 이骆공은 광서영천문화관에서 소인서를 빌려주는 '모자 벗는 우파' 영감이 됐다.블랙코미디는 이것이 오히려 그의 예술적 탐구를 가능케 했
이낙공보인호보서양 동해(유해속상용인)
장정이 이낙공에게 이런 글을 썼을 때,그 깊은 속마음은 분명 '내 가슴에 척척함이 있다'는 것이다.그는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恩)의 '춘잠에서 죽을 때까지 죽자 살자(春蚕之死方 尽)'라는 우울하고 결연한 이 고시를 빌려 재난 이후 여생을 살아온 두 예술가의 변함없는 헌신과 예술에 대한 소망을 밝혔다.
이낙공과 장정은 인생역정·지식 배경이 서로 다르다.젊었을 때, 하나는 같은 유화로 한 그림을 배우고, 만화, 한 일본 유학 후에, 한 신분, 정치, 옌안을 찾아가다 하나는 군중을, 하나는 당원이다.그러나 그들은 비슷한 운명에 맞서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복제할 수 없는 기발한 예술의 길로 내몰려, 풍부한 생명력, 강인함에 의존한다.의지와 예술에 대한 경건한 마음.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장·이씨의 예술은 경로로 바뀌었다.청이 다릅니다. 이낙공은 유화에서 전각으로 전초를 새겼는데, 생계도 있고 정치적 이유도 있습니다.'우파'로 전락한 뒤 일가족 7명이 생활고에 시달려 먹고살기도 버거운데, 비용도 만만치 않은 유화를 어디서 공급할 수 있겠는가.후에 "우파" 딱지를 떼고, 강등되어 계속 유지되고, 사서 노릇을 하여, 생활이 약간 바뀌었다.선, 이公공도 더 이상 유화를 만지지 않는다.이유는 개성이 뚜렷한 현대화풍과 자유분방한 색채의 조형을 버리고, 주제가 선행되고 속물적인 소련식 사실주의 유화를 그리려면 그가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이런 상황에서는 오래되고 비인기적인 전각만이 투쟁을 피하고 정신을 안정시킬 수 있는 곳인 것 같다.전각 비용도 비교적 저렴해 이씨 일가의 생계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괴롭히다.
장정 초묵으로 사생하다.
비교해 보면 장정 의식적인 '예술의 전환'은 우여곡절과 복잡다단함을 보이며, '예술'과 '당성'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충돌, 마모, 박국 끝에 자연의 신명(예술)에 귀의하는 긴 과정으로 표현된다.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연안문예정풍운동에서 그의 화풍은 변형과 과장, 개성이 강한 표현주의에서 2위(공농병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정치봉사)라는 혁명적 현실주의로 첫 방향을 틀었다.1950년대 중반 쌍백방침과 방법회동 피카소의 이중 자극으로 그의 통령보옥이 유실되면서 신중국 미술사상 보기 드문 피카소가 성황당 예술실험이 시작됐다.이것은 무의화풍의 두 번째 방향 전환이다.7, 8년 만에 세 번째 전환이 이뤄진 문혁의 후반, 향산의 고즈넉한 품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오묵산수의 예술탐구가 시작된다.이때 그는 이미 화갑이 되었다.
장정과 피카소
장, 리의 예술전향은 20세기 중국 미술사에 의미 있는 '각서'를 남겼다.그 악운 후 여생의 예술적 성취는 경이롭고 경탄스럽다.이骆공은 "나의 스탬프 중 하나는 강한 감정과 예술관을 반영하는 정신세계"라고 말했다.또 "각자나 한 조를 새기려면 먼저 많은 원고를 그려야 하는데, 내 원고가 나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 때 나는 그림의 크기에 따라 돌을 고른다.이를 양피(量體)에 맞춰 옷을 재단하고, 발로 신발을 신는다"고 했다.장 감독은 "내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초등학생 때부터 초묵으로 사생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자연에 '빨갛게 그린다'며 눈·손·심장을 훈련시켜 눈·손·심장을 하나로 합치게 했다.실천에서 깨달은 것은 석도의 '한 그림'설은 허황된 것이 아니라 조맹륜부터 동기창의 '서화동원'론에 이르기까지 선을 조형 수단으로 중시하였다.부단한 실천을 통하여 인식은 향상되었고 어느덧 십여 년이 또 지나갔다.예술노동도 관성( 焦性)이 있을 수 있다. 초묵( 焦墨)으로 글을 써야 마음이 편해지고 더 편해졌다.장무족, 이公공은 모두 일반적인 예술 자질이 아니다. 만일 정상적인 환경에서 생활한다면 그들의 예술 천성은 틀림없이 더욱 자유롭고 더 충분한 발전을 얻을 것이다. 그들의 예술 에너지는 틀림없이 남김없이 방출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예술 성과는 더욱 무한하다.역사에 가설은 없다.
이러한 상황하에서피해자 간의 동정과 이해는 핵심을 더욱 잘 찌르다.예를 들어, 이仃공은 전통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안목을 지닌 예술가로서, 그의 창작은 '신'과 '형'을 겸비하고 '신'에 치중한 구조로 매우 세련되었으며, 그의 전각은 엄밀하고 새롭고 '골법용 붓'과 먹색 변화, 음악적 선율과 리듬을 중시하였다고 한다.이참공의 예술탐구(특히 초전)가 세간의 이해를 얻지 못한 시점에서 나온 견해들이다.그러나 그는 이참공의 예술적 탐구는 역사적 배경과 개인 특유의 조건이 있는 백화원의 꽃이라면서 중청년예술학도가 형식적으로 베끼거나 모방하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참공(李骆公)의 초서(草篆)는 복제할 수 없는 고급 예술로 그 시대에나 나올 수 있었던 독특한 사안으로 모방할 수 없는 '절사'라는 뜻을 담았다.장 씨의 말처럼 "모두가 하지 말라"는 장 씨의 권고를 떠올리게 한다.
장정 자갈산수
진심인 듯 애석해하다. 장, 장,이지연은 예술의 깊이와 미적 가치에 대한 높은 묵계가 맺어져 금강석처럼 시간의 부식을 견뎌낸다.이 披露공 가족이 최근 공개한 장각, 천포문이 이낙공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가 이를 생생히 뒷받침한다.이들은 이骆공의 예술과 미묘한 호응을 형성하고 있으며, 사신자찰이기 때문에 공개된 논문보다 자유로운 편성과 마음을 추스르는 사담의 성격을 띠고 있어 더욱 가독성과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소개할 수밖에 없다.
이낙공 부부, 장정(張仃) 부부는 1981년 봄에 이강에서 촬영하였다
제1통신은 1976년 9월 1일자로, 주요강연한 달 전 당산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경성의 피해 상황과 지진 이후 주변 문화인들의 방진 생활상을 설명하는 편지 두 장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장씨와 천씨는 지진 발생 후 광서에 멀리 있던 이씨 일가가 장씨 일가에 안위를 묻는 전보를 보내왔으며, 당시 향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교통이 막혀 여러 날 뒤에 전보를 보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두 잎의 편지지를 가득 담아 '말 속에 없는' 애틋한 호흡을 전한다.당시 신주는 사방이 흔들려 변방 광서(廣西)까지 '방진성'이 됐고, 거꾸로 장무(張仃)·천푸원(陳布文)이 이骆公 일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환난견진(難難見眞情)'이었다.
제2통은 1977년 6월 20일에 쓰여졌다.이骆공이 선물한 미작과 미주를 권하다.미작 즉 이낙공의 전초는 장무자, 천포문으로부터 "실내 주요 지점에 안치된 영광은 볼 때마다 탄성을 자아낸다"는 극찬을 받았다."한번 마실 때마다 '왜 술을 가져다 주느냐'며 네 병을 한꺼번에 가져가는 것은 지나치다.자, 기차에 오르자마자 두 병 깨버리다니 정말 아쉽네요. 특히 그 우정은... 우리는 베이징에서 뭐든 살 수 있는데, 이렇게 보내줄 줄은 몰랐어요...'
3통은 1981년 1월 6일에 쓰여졌다.이때 장은 조평반(早平反)하여 중앙공예미원 원장으로 부임한 지 3년째, 문산회해(文山會海)와 행정사무(行政事)에 골머리를 앓고 있어 '아마추어 화가'가 되려고 애를 먹고 있었다.편지에서 이骆공이 장무각으로 새겨진 명장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하며, 몇 쪽 더 새길 것을 요구하면서 이것을 "좋은 일이 많구나"라고 희롱하고, 또한 "이나라가 잘 새겼으니 돌도 많이 깎아야지"라고 말하는 장무적희망의 장명인 노랑, 그 산의 석삼여, 천공의 외로운 방법을 탐구하여 이骆公에게 참고하도록 하였다."낙공형님, 명춘우기가 지나면 가장 이상적입니다. 저는 매분마다 도경을 떠나고 싶습니다.만나서 자세히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진정한 예술적 지음만이 있을 수 있는 몫이죠.고산유수정(高山流水情)이 이때 더할 나위 없이 많이 표출되었다.
경자년 섣달 초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