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1-13
노승이 스스로를 미가불이라고 밝히자 군웅들은 모두 놀람의 탄성을
터뜨렸다. 무림맹의 다섯 호법과 강사옥, 옥필생의 얼굴에도 미미하게
놀람의 기색이 떠올랐다.
미가불이라면 흑룡보에서 초빙해 온 서장 라마 밀종의 고수였다. 그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명성은 이미 중
원 무림 전역에 퍼져 있었다.
미가불을 멀리서부터 불러온 것만 보아도 흑룡보가 암중에 계획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그들은 강북 무림의 패자만으로는 만족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강사옥은 그들 미가불 일행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내심 좋지 않다고 생
각했다. 그들은 모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을 발하고 있었는데, 군웅들에
게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굳은 기상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같이
내력이 깊은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미가불의 뒤에서 조용한 미소를 띤 채 섭선을 부치고 있는 미서
생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의아한 눈빛을 빛냈다. 흑룡보의 고수들이 은
연중에 미서생을 엄중히 호위하고 있는 듯했던 것이다.
백의 미서생은 강사옥의 형형한 눈길을 받자 그에게 우호적으로 웃어
보였다. 박속처럼 희고 가지런한 치아가 살짝 드러나 보이는 것이 그의
귀풍(貴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강사옥은 슬며시 눈길을 돌렸다.
(수상한 자들이다. 단지 유람을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다.)
그런 생각을 하며 경각심을 돋굴 때 옥필생이 가볍게 포권하며 미가불
을 응대했다.
『본인이 맹주의 중임을 맡고 있는 옥모(玉某)외다.』
잠시 그에게 시선을 준 미가불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강사
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분 대협께서는 명호가 어찌 되시는지......』
『하하, 그 분께서는 세인들이 중원의 철협(鐵俠)이라 부르는 바로 그
강대협이올시다.』
옥필생이 그를 소개하자 미가불과 미서생의 눈빛이 동시에 강렬하게
빛났다. 그러나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진 것이어서 강
사옥과 몇몇의 고수를 제외하고는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오래 전부터 대명을 듣고 흠모해 왔소이다.』
미가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 나서 눈으로 다시 태사의에 앉아 있
는 옥풍규를 가리켰다.
『하면 저 분 공자께서는 바로 신검문의 후계자인 옥공자가 틀림없겠
구려.』
단지 턱을 끄덕여 그를 가리키며 냉랭히 말하는 그의 오만함에 군웅들
의 눈에 분개의 기색이 어렸다.
『서장에서 온 야인들이라더니 실로 예의를 모르는 자들이로구나. 불
청객으로 와서 어찌 저리 도도하단 말이냐!』
군웅들 속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흑룡보의 고수들이 모두
흉흉하게 치켜 뜬 눈으로 소리난 곳을 바라보았다.
『어느 사내답지 못한 놈이 숨어서 남의 욕을 하느냐. 영웅 호한이라
는 자들이 고작 꼬리나 감추고 짖는 개 같다니!』
흑룡보의 무사 복장을 한 대한 한 명이 썩 나서며 얼굴을 험악하게 붉
히고 호통쳤다. 그러자 참고 있던 군웅들의 분노가 불붙듯 일었다.
『저 놈이 여기가 저희 집 안방인줄 아는가? 호굴에 들어와서 감히 큰
소리를 치다니!』
『흥!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로군.』
『큰소리 치는 만큼 실력도 있는지 보자!』
군웅들이 저마다 분하여 외치자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여러분, 조용히......』
옥필생이 손을 흔들며 만류했다. 그러나 군웅들의 분개한 술렁거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흐흐...... 어떤 놈이냐? 용기 있는 놈이라면 나서라. 나 마타가 버
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눈을 부라리고 나섰던 대한이 팔을 걷어붙이고 다시 두어 걸음 나서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군웅들을 쓸어 보았다. 그것이 불에 기름을 부은 꼴
이 되었다.
『찢어 죽일 흑룡보의 개! 본 어르신이다. 어쩔 테냐!』
군웅들을 헤치고 건장한 삼십 대의 장한 한 명이 성큼 걸어 나왔다.
그것을 본 옥필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말리기에는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마타라고 스스로를 밝힌 대한이 거무죽죽한 얼굴 가득 비웃
음을 띠고 바라보았다.
『흐흐...... 비록 흑룡보의 졸개지만 나 마타는 이름 없는 놈은 상대
하지 않는다. 이름을 밝혀라!』
장한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소리쳤다.
『무림맹의 향주인 타호장(打虎掌) 이국초가 바로 어르신이다!』
『흐흐...... 염라대왕 앞에 가서도 그렇게 똑똑히 말하거라!』
말이 끝나자마자 마타가 번개처럼 몸을 날리며 일권을 갈겼다. 흉흉한
바람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그의 주먹이 벌써 이국초를 때리고 있었다.
실로 빠르고 무섭기가 질풍 같은 신법이었고 권격이었다.
『헛!』
다급성을 터뜨린 이국초가 맹렬하게 신형을 회전시키며 연거푸 다섯
장을 쳐냈다. 그러나 마타의 손속은 더욱 신랄하고 재빠른 것이었다. 주
먹을 활짝 편 그가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려 좌우로 어지럽게 할퀴어
왔다. 그 일 초의 조법(爪法)은 괴이하고 악독하기 짝이 없었다.
『어헉!』
탁한 비명과 함께 이국초는 목과 가슴이 길게 찢긴 채 쓰러져 움직이
지 못했다. 중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일이 순식간에 이렇게 변하고 말자 사태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이 되고
말았다.
『악독한 놈!』
『죽어라!』
쓰러진 이국초를 뛰어 넘은 무림맹의 다섯 고수가 이를 갈며 마타를
쳐 왔다.
쨍-!
맑은 검명과 함께 어느새 허리의 패검을 뽑아든 마타의 신속한 손속이
그들 다섯 고수의 권장을 헤치며 번개처럼 베어 갔다.
『으헛!』
『허억!』
몇 마디의 비명이 터져 나왔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검인에 세 명
의 고수가 심각한 검상을 입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다른 다섯 명의
흑룡보 무사들 역시 병장기를 뽑아 들고 군웅들을 향해 쳐 나갈 듯한 기
세를 보였다. 마타의 검이 허공에 은빛 호선을 그리며 다시 떨어지는 순
간,
『멈춰라!』
한 소리 호통과 함께 은빛 물체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들어 마타의 등
으로 파고들었다. 재빨리 신형을 돌린 마타의 검이 그것을 쳐냈다. 쨍,
하는 맑은 금속성과 함께 한 자루의 비도가 반 토막이 난 채 땅에 떨어
졌다. 이로 보아 마타의 손에 들린 검은 쇠를 무 베듯 하는 보검이 분명
했다.
마타가 주춤할 때, 흑룡보의 무사 복장을 한 자들은 이미 군웅들 속으
로 뛰어들어 신랄한 검격을 가하고 있었다. 장내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으
로 돌변했다.
마타에게 비수를 날려보낸 사람은 적엽도인(赤葉道人) 당운표(唐雲豹)
였는데, 경공절예가 중원이 일절로 꼽히는 공동파의 장문인이었다.
숨을 한 번 들이킨 순간 당운표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와 마타
의 면전에 떨어지며 쌍장을 내밀었다.
『흉악한 흑룡보의 적도들이 감히 함부로 날뛰는구나!』
공동의 절기인 산운장(散雲掌)이 마타의 눈을 어지럽히며 꼬리에 꼬리
를 물고 그를 장력의 경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속에서 마타가 두 다
리에 힘을 준 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보검을 휘둘러 마주쳐 나갔다.
두 사람이 얽혀 치열하게 손속을 나눈 지 순식간에 십여 초가 지났으
나 쉬 우열이 가려지지 않았다. 그것을 바라보던 중인들은 모두 의아하
게 생각했다. 한낱 흑룡보의 하위 무사 복장을 하고 있는 자가 공동의
장문인을 맞아 그처럼 용맹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멈추시오!』
옥필생의 호통 소리가 새벽 여명을 뚫고 항산의 하늘 위에 쩌르릉 울
려 퍼졌다. 사태가 순식간에 이처럼 어지러워지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
했기에 그는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진력이 충만한 일호성(一呼聲)에 놀란 군웅들이 분분히 손을 멈
추고 물러서자 옥필생은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미가불과 그의 일행
을 차례차례 쏘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본 맹의 집회 장소에 나타난 것은 이처럼 분쟁을 일으켜
싸우겠다는 의도이시오?』
『......』
『그렇다면 그것을 두려워 할 나 옥모가 아니외다. 허나, 오늘은 본
맹에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안건들이 아직 남아 있는 터. 더 이상 외인
을 모실 수 없음을 양해 바라는 바이올시다. 지금까지의 일들은 없던 것
으로 하겠으니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하오.』
강호에서 타방회의 집회를 훔쳐보는 것은 타인의 무공수련을 훔쳐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금기로 되어 있었다. 옥필생이 축객령을 내린 것은 더
이상 그들을 입회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니 미가불과 그의
일행은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미가불의 눈에 언뜻 망설임이 어렸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흥, 강산이 대명의 천자에게 속해 있고, 강북의 무림은 이미 흑룡방
의 세력에 들어 있는데 어찌 그대가 이곳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오? 설
마 무림맹이 대명의 천자로부터 항산을 하사 받기라도 했다는 거요?』
미가불의 뒤에서 낭랑히 소리치며 나선 자는 여태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없이 서 있던 미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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