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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길을 예비하라(사40장 3- 5)
성경본문: 이사야40:3-5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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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 그리고 지난주일 이웃초청잔치를 시작으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이웃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오늘도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의 영광스런 예언의 말씀을 계속 듣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먼저 이사야서 전체를 개괄적으로 살핀 후에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이사야 선지자의 영광스런 선포를 들어봅시다.
이사야서는 모두 6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 후반부로 대개 나눕니다.
전반부는 39장, 후반부는 27장으로 구성된 대 교향곡과 같습니다.
전반부 예언과 후반부 예언은 그 예언 시기가 각각 다르고 그 내용이 또한 다릅니다.
전반부는 포로되기 전 유다백성을 향해서 선포되었다면 후반부는 포로 중에 있는 백성을 향해 선포되었습니다.
교회를 조금 다닌 분이라고 하면 39, 27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비록 자기가 사는 아파트 번지는 몰라도 성경통독을 해 본 교인이라면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39, 27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구약과 신약의 책 권수입니다. 구약이 39권, 신약 27권, 성경은 모두 66권으로 되어있습니다.
이사야서 전, 후반부의 내용도 마치 구약과 신약이 서로 판이하듯이 서로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반부 39장은 그 내용이 구약 39권과 흡사하며 후반부 27장의 내용 역시 신약 27권과 유사합니다.
특히 후반부에는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사건에 대한 복음서와 같은 생생한 묘사가 있습니다.
또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 바울 서신과 같은 명쾌한 설명이 있습니다.
끝으로 사도 요한의 계시를 능가하는 영광스런 미래에 대한 환상이 후반부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40장 3-5절은 후반부 전체의 서곡의 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헨델의 <메시야>는 정확히 이사야서 40장 1절에서 시작합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지난주일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오시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멀리계신 분이 아닙니다. 두려운 분도 아닙니다. 우리 행복의 짓궂은 방해꾼도 아닙니다.
초연한 가운데 우리 운명의 조소 꾼도 더더욱 아닙니다.
이사야가 소개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죄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용서하시려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더 이상 목말라 하지 마십시오.
이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더 이상 행복을 찾아 헤매지 마십시오.
지금 행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만나봅시다.
우리 하나님은 죄 때문에 그 고통과 파멸 속에 살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죄로 인해 복역하는 죄수처럼 사는 것을 측은히 여기십니다.
마치 교도소에 갇힌 죄인처럼, 강제 노동에 동원된 포로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나머지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죄를 위해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위로의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한 다음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우리를 위로하시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서 1, 2절에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선언하고 여기 3-5절에서는 어떻게 위로하실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의 방법을 들어볼 차례입니다.
다시 이 자리를 찾은 이웃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로를 원하십니까?
생의 의미를 찾고 싶습니까?
사는 보람을 발견하고 싶습니까?
인생의 만족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용서받은 삶을 살기 원하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기를 소원하십니까?
더럽혀진 과거를 청산하고 깨끗한 새 삶을 살고 싶습니까?
사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으며 의미로 채워진 풍성한 삶을 누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죄용서 방법을 반드시 알아보십시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사역은 오시고 계신 한 왕을 떠나서는 결코 실현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오시는 왕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오시고 계신 왕을 맞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기 인생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오시고 있는 왕을 통하지 않고서는 행복해지려는 노력은 무지개를 잡으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오시고 계신 그 왕의 사역을 떠나서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은 신기루를 잡으려는 시도입니다.
여기에 오늘 본문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선지자 이사야의 귀에 들린 음성은 무슨 말입니까?
길을 만들라는 명령입니다.
지금부터 거의 3000년 전의 상황으로 옮겨가 봅시다.
당시 황제가 흔히 반포하던 포고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명령을 황제가 내립니까?
3천 년 전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여행 방법은 걷든지 짐승을 타든지 아니면 마차를 이용하든지 세 가지입니다.
처음 두 가지 방법만 알면 야만인이요 제 3의 방법-수레바퀴를 사용할 줄 알면 문명인의 대열로 분류됩니다.
흔히 문명사회 여부를 문자를 가졌는가, 바퀴를 이용하는 가로 판정합니다.
한 사회가 문명사회인 여부가 마차나 병거 등 바퀴를 이용한 도구 유무로 판정됩니다만 문명사회라고 해서 아무나 당시에 마차를 타고 다닌 것은 아닙니다.
왕후장상들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가 마차로 다니는 것입니다.
분문의 배경은 길이 잘 닦여져 있는 도시를 황제가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마차가 지나간 적이 없는 생판 광야에 길을 마련하라는 칙령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한 번 편의를 위해 어린 백성 수만 명을 동원시켜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부역을 하게 합니다.
광야의 길을, 사막의 대로를 만들라는 것은 임금이 여행하기 편리하도록 하는 조치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큐선 좋은 승용차나 헬리콥터나 전용 비행기를 사용하지만 그 옛날에는 스프링조차 없는 마차를 사용하는 것이 황제들이 누리던 호사의 전부입니다.
그러다 보니 애꿎은 백성들만 고생했습니다.
없는 길을 새로 만들고 높은 언덕을 낮추고 깊은 골짜기를 메웁니다.
굽은 길을 곧게 하고 울퉁불퉁한 길은 반반하게 만들라고 재촉합니다.
거창한 토목공사가 끝이 나면 드디어 황제가 그 길을 행차하게 됩니다.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길옆으로 몰려나와 그 장엄한 행렬을 멀리서 훔쳐보고 즐거워합니다.
아마 두고두고 아들, 손자들에게 들려줄 이야기 밑천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군대 갔다 온 이야기를 우려먹는 남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길 만들면서 고생한 것은 다 잊어 먹고 그 화려한 행렬 꽁무니밖에 고개 들고 바라본 것이 없는데 그걸 두고두고 우려먹는 의식화되기 전 어진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길 닦는 이야기 자체에 대한 설명은 이만해도 알아들겠지만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맨 먼저 오늘 본문의 포고를 당시에 바벨론의 포로 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살펴봅시다.
포로 되어 이주 당해,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그들의 해방 자를 위한 길을 준비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포로 된 백성을 구출하려오는 한 임금에 관한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포로 된 백성의 해방자로 오시는 왕을 위한 길을 마련하라는 외침을 이사야는 지금 듣고 있습니다.
포로 된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 억압받는 이스라엘의 위로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발해졌으니 이제 모든 장애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마치 광야에 새 길을 만들 듯이, 사막의 대로를 뚫듯이 모든 난관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석방에 관한 포고가 전달된 만큼 어떤 난관을 뚫고라도 성취되리라는 약속과 격려의 말씀입니다.
해방자, 구속자로서 오시는 한 임금을 위한 “길을 예비하라”는 칙령을 이사야의 귀는 듣고 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선지자의 귀입니다.
광야에 길을 새로 만들어서라도, 사막의 대로를 준비해서라도 이스라엘을 구출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약속의 선언이 오늘 우리 본문입니다.
아무 포로라도 스스로 자기를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항상 외부로부터 옵니다.
포로 된 이스라엘의 소망은 구출하려 오시는 임금에 달려 있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생은 결코 자신을 구출하려고도, 구출 할 수도 없습니다.
죄악의 늪 속에 빠져 들어가는 인생은 스스로 건져 낼 수 없습니다.
바깥에서 던져지는 밧줄이 필요합니다.
구원은 항상 밖에서부터 옵니다.
구원자의 오심만이 죄악의 포로 된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성취되었습니다.
포로된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한 해방자 고레스를 보내심으로 성취됩니다.
날로 강성해 가던 바벨론 제국이 하룻밤에 요절나고 맙니다. 광야에 새 길을 내듯이 예기치 못한 곳에서 상상치 못한 방법으로 앗수르를 패망케 하고 바사왕 고레스를 통한 해방이 성취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는 이러한 일반 역사 속에서 뿐 아니라 구원역사 속에서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고레스는 바벨론 포로된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왔지만, 이스라엘을 죄로부터 해방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정치적 해방은 가져다주었으나 인간을 얽어맨 죄악의 사슬에서는 벗어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이 이해한 대로 좀 더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본문의 성취를 죄악에서 우리를 구출하려 오신 새로운 왕 예수님의 사역에서 봅니다.
바벨론 포로 된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위해 그 때 고레스를 지명하여 부른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노예 된 여러분과 저의 구원자로서 예수님을 지명하셨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떠나서 성취될 수 없습니다.
예수란 이름의 뜻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자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 1:21)
하나님이 지명해서 세운 인류의 구원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성경은 밝힙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여러분은 생사 간에 유일한 위로가 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그 분의 이름이 자나 깨나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장 귀한 이름으로 자리할 때 여러분은 그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여러분을 구원하기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러분을 능히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해 스스로 탈출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비록 광야에 새 길을 닦더라도 구원자를 보내심으로 여러분을 구출하십니다.
하나님의 <엔테베 작전>이 예수님 사건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 사건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전혀 새로운 사건입니다. 전혀 특이한 사건입니다. 세상이 추측도, 상상도 못한 새로운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세상의 똑똑한 사람도 이 이야기를 설명해줘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이 예수님 사건입니다.
심지어는 사람 중에서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구원에 관해서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궁금해 합니다.
어떻게 타락한 인생이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스런 신분을 회복하게 되었는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다 아는 것 같습니다 .
그러나 구원 사건의 의미는 살피면 살필수록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도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느니라.”(고저1:21)
왜 전도는 미련합니까? 두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첫째는 전하는 방법이 미련해 보입니다.
특히 우리가 길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권하든지, 아파트의 문을 두드려 전하든지, 그것을 좋은 방법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여기 전도라고 하는 단어는 또한 설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길거리에서나 강단에서나 선포하는 일방적인 방법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요새는 모두 공부를 할 만큼 해서 같이 대화를 해야 하지 어떻게 혼자서 그렇게 선포를 하느냐 그것은 시대에 뒤진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전달의 혁명이 일어난 시대에 일방적 선포라니, 심지어 그것은지성인을 향한 모욕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전도는, 설교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선별한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르고 고르신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전도는 전하는 내용 그 자체가 어리석어 보입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저주받은 사람을 구원자라니- 미련한데는 약도 없어!! 그것이 유대인의 반응입니다.
당국자로부터 파송 받은 하속들이 그냥 돌아오자 내뱉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유대인의 귀에만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헬라인의 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다니, 신이 죽다니”,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이야기는 적어도 헬라인들의 귀에는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이야기입니다.
헬라인들은 신은 불멸이라고, 신은 죽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신과 인간의 분기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유한하냐 불멸하냐가 인간과 신을 구별하는 시금석입니다.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고 말하니까 그게 그들의 사고 속에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어리석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죽으면 그게 사람이지, 어떻게 신인가?”
“하나님은 죽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느냐? 어리석은 사람이나 그것을 믿을지 모르지만. 도대체 상식도 없고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이나 믿지 도대체 우리 같은 문명인이 그걸 어떻게 믿나”
헬라 사람들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소위 지성인들은 어떻습니까?
꼭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자라는 사람들 같아.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고 예수가 물 위를 걸어, 게다가 죽은 지 사흘 만에 어떻게 다시 살았다고 믿는지 모르겠다.”고 서슴지 않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어떻게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의 죄가 용서될 수 있냐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내용은 사람의 귀로는 듣고 납득할 수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 수 있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도를 깨치면 되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기 종들을 보내셔서 말합니까?
왜 자기 아들까지 보내셔서 죽는 자리까지 내어놓습니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역사상 전혀 새로운 소식입니다.
이사야는 이 새로운 사건에 관해 당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길 닦는 이야기로 알리고 있습니다.
당시 세상도 문명 세상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은 하무라비 법전을 내세우고, 후에 로마는 법의 통지를 자랑했습니다.
애굽은 당대에 예술을 자랑했으며 후에 그리스는 그 문명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이 알던 모든 한계를 초월한 소식 - 하늘의 천사마저 알아보려는 사건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파송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소식은 인간의 생각범주를 초월한 이야기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라는 격려가 아닙니다.
양심을 따라 살라는 도덕적 충고도 아닙니다.
도덕적 양념을 가미한 철학적 가르침도 아닙니다.
역사에 유비를 발견할 수 없는 사건의 성취이기에 광야에 새 길을 닦으라는 외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요 유일의 사건입니다. “때가 차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
복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여러분과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사람의 아들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베들레헴 구유에 태어나신 것은 비천한 인생들로 하여금 하늘의 영광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하늘에서 죄 용서를 통보하는 대신에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은 것은 그 길 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만이 죄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킵니다.
그 길만이 유일한 방법 - 하나님의 지혜가 선정한 단 하나의 방법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그의 흘린 보혈만이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 십자가상에 사건을 내다보시고 그 보혈에 근거해서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사40:2)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잘못된 것을, 죄악된 것을 적당히 눈감아 주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의 거룩한 성품은 죄에 대한 응분의 처벌을 요구합니다.
여기 우리가 난해해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적당히 넘어가는 일에 익숙합니다.
우리는 절대 죄인이기에 절대 거룩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응분의 처벌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인생의 죄에 대해서 응분의 처벌을 요구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처벌 받은 예수님의 공로로, 그의 십자가의 보혈로 마련된 그 길만이 용서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새로운 길로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여러분은 영접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옛 삶을 청산하십시오.
자기 죄악을 애무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짓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 없이 생각하고 자기 소견에 옳을 대로만 처신하는 죄악을 청산하십시오.
여러분을 죄로부터 구원하려 오시는 왕을 영접하시렵니까?
죄에 빠져, 거기에 머물면서 하나님이 용서하시리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죄라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서 자기 죄가 용서받는다고요?
천만에요.
예수님은 죄에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지, 죄에 그냥 두고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인생을 건지시는 분이지 옛 죄와 구습에 그대로 두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나오기 전과 돌아갈 때의 삶은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차이라도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한 왕이 오시고 있다는 소식이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40장 3절 이하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청중 여러분,
오늘, 왕 되신 주님을 영접하시렵니까?
그렇다면 황폐된 삶의 자리에 마련된 새 길로 나아오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사람들이 사는 곳이 사람 사는 곳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며느리로 한 가정에 들어가면 여러분 때문에 그 가정이 새로워집니다.
여러분이 한 학교에 들어가면 여러분 때문에 그 교실이 새로운 영역으로 바뀝니다.
여러분이 취직하면 그 직장이 새로운 빛이 비춰질 것입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는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40:3-4)
구원의 주 영광의 하나님이 오시는 길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는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서 심한 자기 비하와 절망 속에 헤어나지 못하는 분은 없습니까?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사막에 대로를, 광야에 길을 마련하기 위해 골짜기마다 돋우어져야 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제 나는 틀렸어” “더 이상 나는 소망이 없어”라고 내뱉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없는 것 가운데서 천지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무에서 만상을 불러내신 전능자이십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낮은 자존감은 돋우어져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곳에 소망이 끝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에는 25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상황을 바꾸기에는 이제는 늦었다고 자포자기 마십시오.
자기 생각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십시오.
전능하신 자, 구원의 주가 다가오십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그 영광을 비추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의 골짜기마다, 자포자기의 계곡마다 돋우어져야 합니다.
전능하신 왕, 구원의 주께서 다가오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오시고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영광 앞에 단연히 일어서십시오. 영광의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오.
혹 반대로 여러분 가운데 교만한 맘으로 하나님의 구원방법을 귓전에 넘겨듣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모든 교만한 인생의 마음은 낮아져야 합니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처럼 교만한 인생은 낮아져야 합니다.
스스로 높아진 인생의 마음은 낮추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법아래 정죄된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잘난 것처럼 내세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눈앞에는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합니다.
내세울 만한 모든 것도 여러분의 죄악을 가리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눈앞에, 영원히 타오르는 심판의 불 앞에 그의 자비하심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처절히 인식하십시오.
여러분이 살아온 대가대로 지불하면 지옥불만이 합당함을 인정하십시오.
유일한 살 길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는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40:4)
이제 말씀 맺습니다.
절망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교만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2천 년 전 세상에 오셨던 그분은 다시 오시고 있습니다.
처음에 오실 때는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이제는 죄를 심판하려고 오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을 구하시려 오셨던 그분께서 심판주로서 다시 오십니다.
죄인을 심판하시려 오시는 시간이 이제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시고 있는 그 분의 길을 평탄케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계속 그 길에 장애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누구든지 새 길을 마련하십시오.
자신을 도덕적인 사람으로 여기든지 종교적인 사람으로 여기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기든지 구제불능의 사람으로 여기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길을 예비하라”고 명하십니다.
절망 가운데 사는 분은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교만 가운데 사는 분은 하나님께 엎드리십시오.
지금 여러분은 광야의 외침을 듣고 있습니다.
길을 예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사40:5)
여호와의 영광이 곧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날들이 빨리 다가오도록 여러분의 삶을 드리십시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이 역사를 위해서 드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헌신을 통해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도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게 될 날이 속히 오도록 지금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주의 나라 위하여 최선의 헌신을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