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은 언제나 비온 뒤 맑음
안수현
고구마를 물에 씻는다
가을이 되면 박스채 사다 두고
구워 먹는다. 예전에 아부지 살아계실 때
우리 밭에서 캔 고구마가 그렇게 맛있었는데
엄마는 해남, 여주에서 캤다는 고구마보다
율암리 밤고구마가 진짜라고 아쉬워했다
함께 지나온 마지막 가을이었다
생전 그런 적이 없었다는데
와서 밭일 도와라 부르셔서, 그래서
나까지 데리고 갔다는데
고구마에 상처를 많이 냈다
괜찮아 고구마는 다쳐도 우리 딸만 안 다치면
엄마는 괜찮아
나는 괜찮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이 고구마에까지
생채기를 내는 내가 싫었다
할아버지는 괜찮아요?
아니,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도, 내 딸도
하얗게 벤 자국에 드러난 속은
다시 부드러워지지 않아
그대로 껍질을 대신해 견디는 거지
흙을, 다른 몸을, 삶을,
누군가 없어도 계속될 내일을,
할아버지는 말없이 고구마를 잔뜩 담고
엄마 한번, 나 한번
눈을 맞춘 뒤
파헤쳐진 고구마밭을 바라보았다
물에 씻긴 고구마,
매끈하게 빛나는 몸을 보며
일부러 피를 내보고 싶어진다
누군가 없어도 단단하게 굳어서 굴러갈,
새하얗고 저릿한 그런 상처,
우리 심장 깊은 곳에도 있는,
남겨둔 마음과 남겨지는 마음의 결절지
농부의 딸은 고구마를 맛있게 먹는다
농부의 딸의 딸이 구워준,
흙딱지 흰딱지와 구멍 여럿으로 더 달콤해진
그런 삶과 고구마
괜찮냐고 굳이 물어보지 않는다
고구마가 맑은 표정으로 오늘을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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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은 언제나 비온 뒤 맑음 / 안수현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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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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