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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공민왕 5년(1356) -원나라 순제(順帝) 16년- 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유인우(柳仁雨)를 파견하여 쌍성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이에 지도(地圖)를 상고하여 화주(和州), 등주(登州), 정주(定州), 장주(長州), 예주(預州), 고주(高州), 문주(文州), 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 원흥진(元興鎭), 영인진(寧仁鎭), 요덕진(耀德鎭), 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이보다 앞서 삭방도(朔方道)에서 도련포를 경계로 삼아 장성(長城)을 수축하였는데, 원나라에게 함락당하였다가 99년 만인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수복한 것이다.” 하였다. ○ 함주(咸州)는 원나라에서 합란부(哈蘭府)라고 칭하였다. 공민왕 5년에 옛 강역을 수복하여 지함주사(知咸州事)로 삼았다. 길주(吉州)는 원나라에서 해양(海洋)이라고 칭하였다. 공민왕 5년에 수복하였다. 복주(福州)는 원나라에서 독로올(禿魯兀)이라고 칭하였다. 공민왕 때 수복하였다. -지금의 단천(端川)이다.- 북청주(北靑州)는 원나라 때 삼살(三撒)이라고 칭하였다. 공민왕 5년에 수복하였다. ○ 세가(世家)에 이르기를, “공민왕 6년(1357)에 도당(都堂)에서 원나라의 행성(行省)에 올린 글에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쌍성(雙城)과 삼살(三撒) 등지는 본디 우리나라의 땅으로, 북쪽으로 이판령(伊板嶺)까지를 경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날에 관방(關防)을 잘못함으로 인하여 여진 사람들이 토지와 인민을 취득해서는 멋대로 채금호계(採金戶計)라고 하였습니다. 화주의 이름을 쌍성이라고 고침에 미쳐서는 총관부(摠管府)와 천호소(千戶所)를 설치하였습니다. 근래에는 본국에서 죄를 짓고 도망친 무리들이 국경을 넘어 그곳으로 가서 숨어 있습니다. 만약 이판령의 좁은 길목에 관방을 설치하여 출입을 제한한다면 거의 후환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유인우(柳仁雨)가 수복한 8주와 5진은 모두 도련포 남쪽 지역에 있는바, 본디 고려조 경내 지역이다. 도련포 북쪽은 바로 윤관(尹瓘)이 개척한 9성의 지역인데, 곧바로 금나라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 뒤로는 금나라와 원나라에 함락되었으며, 240여 년이 지난 뒤인 이때에 이르러서 수복하여 다시 이판령으로 경계를 삼은 것이다. 이판령은 지금의 마천령(磨天嶺)으로, 이곳이 바로 9성의 옛 경계였다. ○ 대명(大明) 홍무(洪武) 연간에 명나라에서 안변(安邊)의 철령(鐵嶺) 북쪽 지역을 떼어 달라고 하여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고려에서 주청하여 중지되었다.
《명사(明史)》 조선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무 20년(1387) -고려 신우(辛禑) 13년- 7월에 고려에서 주달하기를, “요동(遼東)의 문주(文州),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 등은 모두 우리나라의 옛 영토이니, 철령(鐵嶺)에 나아가 둔수(屯守)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예부(禮部)가 아뢰기를, “이들 몇 주는 모두 원나라의 판도(版圖) 안으로 들어와서 요동에 속하였으며,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습니다. 지금 철령에 이미 위(衛)를 설치하였으니, 다시 진정(陳情)하여 청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12월에 황제가 호부(戶部)에 명하여 고려 왕에게 자문(咨文)을 보내게 하였는데, 그 자문에, “철령의 북쪽, 동쪽, 서쪽의 지역으로 예전에 개원로(開元路)에 소속되었던 곳은 요동에서 관할하고, 철령 남쪽의 예전에 고려에 소속되었던 곳은 고려에서 관할하라. 그리하여 각자 경계를 확실히 정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21년(1388) 4월에 신우가 표문을 올려서 아뢰기를, “철령의 땅은 실제로는 대대로 고려에서 지켜왔으니, 예전대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고려는 예전에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철령이 경계였다고 꾸며 대는바, 이는 속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짐이 말한 대로 효유하여 고려로 하여금 흔단을 일으키지 않게 하라.” 하였다. 《고려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우 14년(1388)에 설장수(偰長壽)가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구선(口宣)한 성지(聖旨)에 이르기를, “철령 북쪽은 본디 원(元)나라에 속한 지역이니 모두 요동에 속하게 하라.” 하였다.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고 하자, 신우가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경사에 보내어 표문을 올려 청하기를, “철령 북쪽의 문주, 고주, 화주, 정주, 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嶮鎭)에 이르기까지는 본디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원나라 초기에 몽고(蒙古)의 산길대왕(散吉大王) 보지관인(普只官人) 등이 여진(女眞)을 거두어들일 적에 본국의 정주(定州) 반민(叛民) 탁청(卓靑)과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가 화주(和州) 북쪽 땅을 들어 원나라에 항복하였는데, 이들이 금조(金朝)의 요동(遼東) 함주로(咸州路) 부근에 있는 심주(瀋州)에 쌍성현(雙城縣)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본국의 함주 근처의 화주에 옛적에 쌓은 작은 성 두 개가 있음을 인하여 애매하게 주청하면서 마침내 화주를 쌍성이라고 모칭(冒稱)하였습니다. 그 뒤 지정(至正) 16년(1356)에 이르러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화주 북쪽 지역을 본국으로 환속시켰습니다. 지금 성지를 흠봉(欽奉)하건대, ‘철령 북쪽, 동쪽, 서쪽 지역은 본디 개원로(開元路)에 속하는 곳이니 소관(所管) 군민(軍民)도 그대로 요동에 속하게 하라. 이를 공경히 시행하라.’ 하였습니다. 철령(鐵嶺)의 산은 왕경(王京)과의 거리가 겨우 300리 밖에 안 되며, 공험진으로 변방의 경계를 정한 지는 한두 해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들 몇 개의 주 지역을 그대로 하국(下國)의 강토로 삼게 해 주소서.” 하였다. 서북면 도안무사(西北面都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指揮) 2인을 보내어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江界)에 와서 장차 철령위를 세우려 합니다. 그런데 황제가 미리 철령위를 설치하였으므로 진무(鎭撫) 등의 관원들이 모두 요동에 이르렀으며, 요동으로부터 철령에 이르기까지 70참(站)을 설치하고서 참마다 백호(百戶)를 두었습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문주는 지금의 문천군(文川郡)이고, 고주는 지금의 고원군(高原郡)이다. -화주, 정주, 함주는 앞에 나온다.- 철령은 안변부(安邊府)에서 남쪽으로 83리 되는 곳에 있다. 명나라 초기에 압록강 서쪽의 봉황성(鳳凰城) 근처 지역에 철령위를 두고서 지금의 평안도 강계(江界)와 폐사군(廢四郡) 동쪽에서 철령 북쪽에 이르는 지역을 떼어서 경계로 삼았다. 그러므로 요동에서부터 철령에 이르는 지역에 70개의 참(站)을 늘어세우고서 요동의 지휘(指揮)가 먼저 강계부(江界府)에 이른 것이다. 대개 요동에 함주, 쌍성, 철령이란 호칭이 있으며, 우리나라 함경남도에도 역시 함주, 쌍성, 철령이란 호칭이 있어서 여지(輿地)를 상고하는 자가 쉽사리 의혹하게 된다. 고려에서 상주하여 밝혀 정지시킨 것은 이 때문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천부(奉天府) 철령현(鐵嶺縣)은 금나라와 원나라 때에는 함평부(咸平府)였고, 명나라 때에는 철령위로 고쳤다. 옛날에는 철령성이 철령위의 치소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에 있어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홍무 21년(1388)에 그곳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가 그 뒤 26년(1393)에 이곳으로 옮겨 오고서는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철령현이다.- 그대로 철령위라고 이름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봉천부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을 헤아려 보면 봉황성 근방에 이른다. 홍무 21년에 이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서 고려의 북계(北界) 지역을 떼어 여기에 예속시키려고 하다가 그 뒤에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26년에 이르러서는 봉천부(奉天府)의 북쪽으로 철령위의 치소를 옮겼는데, 지금의 철령현이 바로 그곳이다. ○ 고려 말기에 비로소 지금의 갑산, 삼수 등지를 수복하였는데, 이곳은 바로 휼품로(恤品路)의 옛 지역이다. 지금의 마천령(磨天嶺) 북쪽의 육진(六鎭) 등지는 오히려 여진이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갑주(甲州)는 본디 허천부(虛川府)인데, 오랫동안 여진이 차지하고 있어서 여러 차례 병화를 겪은 탓에 사는 사람이 없었다. 공양왕 3년(1391)에 비로소 갑주라고 칭하였다.” 하였다. -지금은 갑산부(甲山府)와 삼수부(三水府)로 되었다.- ○ 세가에 이르기를, “공양왕 4년(1392) 3월 경자에 알도리(斡都里) 올량합(兀良哈)의 여러 추장(酋長)에게 모두 만호(萬戶), 천호(千戶), 백호(百戶)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또 방문(牓文)을 보내어 여러 부락에 유시(諭示)하기를, ‘홍무 24년(1391) 7월에 이필(李必) 등을 차임하여 방문을 싸 가지고 여진의 지역인 두만(豆萬) 등지로 가서 불러 유시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해에 알도리 올량합의 만호ㆍ천호ㆍ두목(頭目) 등이 즉시 귀부하였으므로 상을 내리고 명호(名號)를 나누어서 그들 모두 각자가 생업에 복귀하도록 하였다. 그곳에 있는 속빈(速頻), 실적멱(失的覓), 몽골(蒙骨), 개양(改陽), 실련(實憐), 팔린(八隣), 안돈(安頓), 압란(押蘭), 희날올(喜刺兀), 올리인(兀里因), 고리한(古里罕), 노별(魯別), 올적개(兀的改) 등의 지역은 본디 우리나라 공험진(公嶮鎭)의 경내에 속하므로 일찍이 불러서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아직 귀부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치에 있어서 맞지 않으므로 다시금 이필 등을 보내어 방문을 가지고 가서 불러 유시하게 하니, 방문이 도착하는 날에 각자 와서 귀부하면 상을 주고 명호를 나누는 것은 일체 앞서 귀부한 알도리 올량합의 예에 의하여 할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알도리(斡都里)는 알타리(斡朶里)라고도 한다. 《문헌비고》에, “회령부는 본디 여진 알타리부락의 맹가첩목아(孟哥帖木兒)가 차지해 살던 곳이다.”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두만(豆萬)은 도문수(徒門水)이다. 속빈(速頻)은 휼품(恤品)이다. 압란(押蘭)은 합라(合懶)이다. -또한 압라(押懶)라고도 한다.- 올적개(兀的改)는 호리개(胡里改)이다. 이들은 모두 《금사》에 나오는데, 지금의 단천(端川), 길주(吉州) 북쪽의 육진 지역이 그곳이다. 이 당시에는 육진 지역을 모두 여진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합라와 휼품 지역은 고려가 비록 수복하기는 하였으나, 예전의 여진 부락들 가운데에는 아직도 귀부하지 않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지역도 역시 방문에 아울러서 칭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철령 북쪽을 일러 북관(北關)이라고 하는데, 옛날의 옥저(沃沮) 지역이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초기에 이곳에 현도군(玄菟郡)을 두었다가, 그 뒤에 구려현(句驪縣) -지금의 흥경(興京)이다.- 으로 옮겼다. 위(魏)나라 때에는 현도 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가 고구려 왕을 추격하여 남옥저(南沃沮)를 지나 1000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한나라와 위나라 때 우리나라 북관 지역과 통하면서는 모두 요동으로부터 흥경(興京) 지방을 지나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넌 다음 황초령(黃草嶺)을 넘어서 왕래하였던 것이다. 이 뒤로는 일찍이 중국에서 이 지역을 엿본 적이 없었다. 발해의 대씨(大氏)가 망하자 함흥 북쪽 및 평안도 북계 지역이 모두 여진의 차지가 되어 동여진(東女眞), 서여진(西女眞)의 칭호가 생겼다. 동여진이 갈라전(曷懶甸) -바로 함흥(咸興)이다.- 에서 일어나 드디어 서여진 -지금의 평안도 북계에 있었다.- 을 병합하였는바, 《금사》에서 “수국(收國) 1년(1115, 예종10)에 보주(保州) -바로 의주(義州)이다.- 의 제부(諸部) 여진이 모두 항복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에 서쪽으로 압록강을 건너가 요주(遼州), 심주(瀋州) 지역을 차지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국토를 확장하길 좋아하여 개원(開元)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이다.- 에서부터 휼품(恤品) -지금의 삼수부 등지이다.- 까지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와서는 함흥에 합란부(合蘭府)를 설치하였다. 명나라 초기에 이르러서는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기로 의논하여 역시 요동에서부터 역참(驛站)을 죽 연결시켰는데, 길은 강계(江界)를 경유하였다. 대개 두만강 북쪽의 영고탑(寧古塔) 등지는 예로부터 읍루(挹婁), 말갈(靺鞨), 여진(女眞)의 구역으로, 중국에서 경략(經略)하면서는 일찍이 이 지역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 러므로 중국에서 북관(北關)으로 통하는 길은 반드시 압록강을 경유하는 것이 편하고 빨랐던 것인바, 지금 북관의 관방(關防)에 유의하는 자는 이런 사실을 몰라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려의 북쪽 경계는 끝내 마천령을 넘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우리 조선이 북방에서 일어나서는 야인(野人)을 정벌하여 육진(六鎭)을 설치하고서야 비로소 두만강을 경계로 삼았다. 그 당시에 명나라는 천하를 막 안정시킨 때라서 달단(韃靼)에 대해서만 걱정하였고, 동북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건주위(建州衛), 모련위(毛憐衛) 등을 설치하기는 하였으나, 한갓 견제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역시 일찍이 쌍성(雙城) 지역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 뒤에는 마침내 이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았다. 이러한 연고로 인하여 우리나라가 군사를 출동시켜 북쪽을 정벌하면서 날마다 조금씩 넓혀 성읍(城邑)을 세웠는바, 이 역시 천하의 큰 기회였던 것이다. 육진의 지역은 동북쪽으로 뚫고 들어가 있는바, 백두산이 서남방에 위치해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영고탑까지 600리에 불과하다. 그런즉 갈라전(曷懶甸)을 지나서 호리개(胡里改)까지 이르고, 옥저를 지나서 읍루의 지역까지 이른 것인바, 봉역(封域)의 크기가 전 시대보다 훨씬 넓어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름답고도 성대하도다.
서북계(西北界)의 연혁(沿革) 서북계는 지금의 평안도 지역이다.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였으며, 뒤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서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으며, 곧바로 발해의 대씨(大氏)에게 함락되어 압록부(鴨綠府)에 속해졌다. 대씨가 쇠약해져서는 궁예(弓裔)가 비로소 패서(浿西) 지역 13진(鎭)을 취하였다. 고려가 흥함에 미쳐서는 궁예의 옛 영토임을 인하여 안북부(安北府)로 경계를 삼았으며, 청천강(淸川江) 북쪽 지역은 여진이 차지하였다가 그 뒤에 고려에 편입되었다. ○ 고려 초기에 서북쪽은 지금의 안주(安州) 청천강을 경계로 삼았으며, 청천강 바깥쪽 지역은 여진의 땅이었다.
《문헌비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금의 평안도와 함경도는 고구려가 망한 뒤부터는 발해와 여진의 차지였고, 궁예가 차지한 것은 패서 지역의 12진뿐이었다. 서희(徐煕)가 말하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에서 우리나라 안북부(安北府)까지는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차지하였었는데, 광종(光宗)이 이곳을 취하여 가주(嘉州)의 송성(松城)을 쌓았다.” 하였다. 서희는 바로 성종(成宗) 때의 사람인바, 이는 그가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일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북부(安北府)는 지금의 안주(安州)이다. ○ 정종(定宗) 때부터 청천강 북쪽 지역을 조금씩 취하여 광종 때에는 서북쪽으로 운산(雲山), 태천(泰川) 등지까지 이르렀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병지(兵志)에 이르기를, “정종 2년(947)에 덕창진(德昌鎭) -지금의 박천(博川)이다.- 에 성을 쌓고, 덕성진(德成鎭) -지금의 영변(寧邊)이다.- 에 성을 쌓았다. 광종 1년(950)에 위화진(威化鎭) -지금의 운산(雲山)이다.- 에 성을 쌓고, 3년(952)에 안삭진(安朔鎭) -지금은 영변에 병합되었다.- 에 성을 쌓았고, 20년(969)에 태주(泰州) -지금의 태천(泰川)이다.- 에 성을 쌓고, 24년(973)에 가주(嘉州) -지금의 가산(嘉山)이다.- 에 성을 쌓았다.” 하였다. ○ 최승로열전(崔承老列傳)에 이르기를, “성종 1년(982)에 최승로가 상서(上書)하기를, ‘우리나라가 삼국을 통합한 이래 47년 동안 사졸들이 편안하게 쉬지 못하고 군량을 허비함을 면치 못하였던 것은 서북 지방이 오랑캐들과 인접해 있어 방수(防戍)할 곳이 많아서였습니다. 무릇 마헐탄(馬歇灘)으로 경계를 삼고자 한 것이 태조(太祖)의 뜻이었으며, 압록강 가의 석성(石城)으로 경계를 정한 것은 대조(大朝)에서 정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 두 곳 가운데에서 결단을 내리시어 요해처를 선택해 강역을 획정하고 토인(土人)들 가운데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는 자를 선발해 방수에 충당시키소서. 그럴 경우 경군(京軍)이 번갈아 가면서 수자리를 사는 고생을 면할 것이고, 군량을 실어 나르는 비용도 줄어들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옹희(雍煕) 3년(986) -고려 성종 5년- 에 북쪽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거란(契丹)을 정벌하였다. 고려가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이에 감찰어사(監察御史) 한국화(韓國華)를 보내어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거란이 여진을 칠 적에 고려의 경계를 거쳤기 때문에 여진은 고려가 거란의 군사를 유인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에 조정에 와서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왕치(王治) -살펴보건대, 고려 성종의 휘(諱)이다.- 가 그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한국화가 이르자, 그에게 말하기를, “지난해 늦겨울에 여진이 와서 고하기를, ‘거란이 군사를 내어 우리의 경계에 들어왔는데, 고려에서 알지 못하고 있을 듯하다. 그에 대해 미리 방비하라.’ 하였다. 그러고는 또 사람을 보내어 거란의 기병(騎兵)이 이미 매하(梅河)를 건너왔다고 알려 왔다. 그 뒤 얼마 지나서 거란의 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서 여진을 크게 공격하여 죽이고 빼앗은 것이 매우 많았다. 이에 여진의 남은 족속들도 패하여 도망가자, 거란의 군사들이 여진을 잡으려고 뒤쫓아 와서 우리의 서북쪽 지역인 덕창(德昌)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박천(博川)이다-, 덕성(德成)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영변(寧邊)이다-, 위화(威化)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운산(雲山)이다-, 광화(光化)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태천(泰川)이다.- 의 경내로 들어와서 사로잡아 갔다. 그때 거란의 한 기병이 덕래하(德來河)의 북쪽에 이르러서 관성(關城)을 지키는 군졸을 큰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여진이 우리의 변방 지역을 노략질하였다. 이제 원수 갚는 일을 끝냈으니,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가겠다.’ 하였다. 그러자 여진에서는 또 본국에게 매하진(梅河津)을 봉쇄하고 성루를 쌓아 거란을 방비하라고 권하였다. 이에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막 그곳을 둘러보고 공사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진은 군사를 몰래 출동시켜 본국의 관원과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여진이 해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기 때문에 감히 군사를 내어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란은 요해(遼海)의 바깥에 끼어 있고 또 대매하(大梅河)와 소매하(小梅河)의 두 강으로 막혀 있으니, 어떤 길을 통해 오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최승로(崔承老)가 이른바 마헐탄은 청천강 나루의 요해처(遼海處)로, 바로 고려 태조가 경계를 정한 곳이다. 그리고 “압록강 가로 경계를 정한 것은 대조(大朝) -경종(景宗)을 가리킨다. 경종은 광종의 아들이고 성종의 형이다.- 에서 정한 것입니다.” 한 것은, 경종(景宗)이 일찍이 그런 뜻을 품고 있었으나 미처 획정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대개 광종(光宗)이 개척한 지역은 북쪽으로 운산(雲山), 태천(泰川) 등지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성종 1년에 운산과 태천 사이를 고려의 서북쪽 경계라고 칭한 것이다. 덕래하(德來河)는 《송사》에 의거하면 마땅히 운산과 태천의 북쪽에 있어야 하는바, 지금의 대령강(大寧江) 상류 지역이 아마도 그곳인 듯하다. 매하(梅河)는 압록강을 가리키는 듯하다. ○ 성종 때 여진을 축출하고 구주(龜州)와 곽주(郭州) 등 여섯 주를 두어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의 운산 북쪽 지역은 오히려 여진이 차지하고 있었다.
《요사(遼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10년(992) -고려 성종 11년- 에 동경 유수(東京留守) 소항덕(蕭恒德)이 고려를 정벌하였다. 11년에 고려 왕 왕치(王治)가 박양유(朴良柔)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죄를 청하였다. 그러자 조서(詔書)를 내려서 여진에게서 빼앗았던 압록강 동쪽 수백 리의 땅을 고려에 내주었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거란이 고려를 습격하자, 고려에서는 흥주(興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흥화진(興化鎭)으로 지금의 의주(義州)에 병합되었다-, 철주(鐵州), 통주(通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선천(宣川)이다-, 용주(龍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등 여섯 성을 국경에 쌓았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희열전(徐煕烈傳)에 이르기를, “성종 12년(993)에 거란이 침입해 오자, 성종이 스스로 이를 막고자 서경(西京)으로 행차하였다. 거란의 동경 유수(東京留守) 소손녕(蕭遜寧)이 봉산군(蓬山郡)을 공격해 격파하고는 또다시 글을 보내어 속히 항복하라고 하였다. 성종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회의하였는데, 어떤 자가 서경 북쪽 지역을 떼어서 거란에게 주고 황주(黃州)에서부터 절령(岊嶺)에 이르기까지를 봉강(封疆)으로 삼자고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거란의 동경에서부터 우리의 안북부(安北府)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의 지역은 옛날에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차지하였던 곳인데, 광종(光宗)께서 이를 취하여 가주(嘉州)와 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입해 온 것은 그 뜻이 이 두 성을 취하고자 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취할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은 실은 우리를 두려워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병세(兵勢)를 보건대 몹시 성대한바, 갑자기 서경 북쪽 지역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삼각산(三角山) 북쪽 지역 역시 고구려의 옛 지역입니다. 저들이 끝없는 욕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달라고 요구할 경우,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것입니까? 하물며 땅을 떼어서 적에게 내주는 것은 만대토록 수치스러운 짓입니다.’ 하였다. 성종이 누가 거란의 군영으로 가서 담판을 벌여 적을 물리칠 것인가를 물으니, 서희가 자신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다. 서희가 소손녕의 군영으로 가자, 소손녕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고구려의 지역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들이 침입해 잠식하였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서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군사를 출동시킨 것이다. 만약 땅을 떼어서 바치고 조빙(朝聘)을 닦는다면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서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를 가지고 논할 것 같으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이 모두 우리의 영역이다. 그런데 어찌 침입해 잠식하였다고 말하는가. 그리고 압록강 내외의 지역 역시 우리의 경내(境內)이다. 지금 여진(女眞)이 그 사이를 차지하고 있어서 가는 길이 바다를 건너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고 힘들다. 조빙을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이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진을 몰아내고 길을 통할 수 있게 한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사기(辭氣)가 몹시 강개하였다. 그러자 소손녕이 억지로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강화를 맺고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갔다. 성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즉시 박양유(朴良柔)를 파견해 들어가 조근(朝覲)하게 하였다. 그러자 서희가 말하기를, ‘신이 소손녕과 더불어 여진을 탕평하기로 약속하였으니 옛 지역을 다 수복한 다음에 조근을 통하여야 합니다.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 지역을 수복하였으니 압록강 바깥 지역을 얻기를 기다려서 조빙을 닦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성종이 마침내 서희를 파견하였다. 13년(994)에 서희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여진을 축출하고는 장흥진(長興鎭), 귀화진(歸化鎭)과 곽주(郭州), 구주(龜州)의 성을 쌓았다. 그다음 해에 또다시 안의진(安義鎭)과 흥화진(興化鎭)의 성을 쌓았으며, 그다음 해에 선주(宣州)와 맹주(孟州)의 성을 쌓았다.” 하였다. ○ 세가에 이르기를, “성종 13년에 소손녕이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근자에 압록강 서리(西里)에 다섯 개의 성을 쌓으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미리 먼저 지휘하시어 안북부(安北府)에서 압록강 동쪽에 이르기까지 280리의 지역에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적당히 참작한 다음, 아울러 성을 쌓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거마(車馬)를 통하게 함으로써 조공하고 조근하는 길을 영원토록 열도록 하소서.’ 하였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에서 이른 바 흥주(興州), 철주(鐵州), 통주(通州), 용주(龍州), 구주(龜州), 곽주(郭州)는 바로 새로 쌓은 여섯 성이다. 그러므로 《요사》 및 《고려사》 현종세가(顯宗世家)에도 여섯 성이라고 칭하였다. 그런데 지금 서희가 쌓은 것은 여덟 성이며, 명호(名號)도 또 같지 않은바, 왜 그런지는 상세히 알 수가 없다. 대개 서희가 개척한 바는 바로 박천강(博川江) 서쪽에서 의주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런즉 운산(雲山) 북쪽 지역은 여전히 여진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현종(顯宗) 1년(1010)에 이르러서 요나라 사람들이 다시 6주의 지역을 다투었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송(王誦)이 졸하고 그의 동생인 왕순(王詢)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현종이다.- 이 국사를 임시로 맡아서 처리하였다.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어 여섯 성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나 왕순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1010) -고려 현종 1년- 에 거란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고려를 정벌하였다. 왕순이 여진과 더불어 기병(奇兵)을 매복하였다가 요격하여 거란 군사를 거의 모두 죽였다. 왕순이 또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아 내원성(來遠城)과 서로 마주 보게 하였다. 그러고는 강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은 다음 군사를 매복시켜 새로 쌓은 성을 튼튼하게 하였다. 《요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열전에 이르기를, “개태(開泰) 1년(1012) -고려 현종 3년- 에 조서를 내려 왕순이 직접 조회하라고 하였다. 8월에 고려 왕이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표문을 올리면서 병을 핑계 대어 직접 조회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조서를 내려서 다시 강동의 여섯 주의 지역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하였다. ○ 열전에 이르기를, “당초에 고려가 내속(內屬)하자 여진(女眞)에게서 빼앗은 6부(部)의 지역을 하사해 주었다. 개태 연간에 이르러서 공물을 제때에 바치지 않았다. 이에 야율자충(耶律資忠)에게 조서를 내려 고려에 가서 사유를 묻게 하였는데, 고려에서는 땅을 돌려줄 뜻이 없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현종 3년에 거란에서 조서를 내려 왕이 직접 와서 조회하라고 하였는데, 현종이 사신을 보내어 병을 핑계 대어 직접 조회할 수 없다고 하자, 거란의 임금이 노하여 조서를 내려서 흥화진(興化鎭), 철주(鐵州), 통주(通州), 용주(龍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등 여섯 성을 취하라고 하였으며, 4년(1013) 3월에 거란이 야율행평(耶律行平)으로 하여금 여섯 성을 돌려 달라고 따지게 하였으며, 7월에 다시 와서 여섯 성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5년(1014) 9월에 장군 이송무(李松茂)를 파견하여 또다시 여섯 성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6년(1015) 4월에 야율행평을 파견하여 또다시 여섯 성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9월에 이송무가 또 와서 여섯 성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외에도 여섯 성을 침입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었다. ○ 이 당시에 요나라에서는 압록강 동쪽에 보주(保州) 및 내원성(來遠城)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의주가 바로 그곳이다.
《요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태 3년(1014) -고려 현종 5년- 5월에 조서를 내려 국구(國舅)인 상온(詳穩) 소적렬(蕭敵烈)과 동경 유수(東京留守) 야율단석(耶律團石) 등으로 하여금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놓고 보주(保州), 선의주(宣義州), 정원주(定遠州) 등에 성을 쌓게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현종 6년(1015) 봄에 거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 양쪽의 동쪽과 서쪽에 성을 쌓자, 군사를 파견하여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해에 거란이 선화진(宣化鎭)과 정원진(定遠鎭)을 취하여 성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요사》에서 개태 3년의 일이라고 이른 것이다. 선화진은 아마도 선의진(宣義鎭)인 듯하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주(定州) 보령군(保寧軍)은 고려에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하나로, 정동현(定東縣)이다. 성종(聖宗) 통화(統和) 13년(995)에 군(軍)으로 승격시키고서 요서(遼西) 지역의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다. 동경 유수사(東京留守司)에 예속되었으며, 통할하는 현은 하나이다. 정동현은 고려에서 설치하였다. 요나라 때 요서 지역의 백성들을 옮겨서 살게 하였다. 호구 수는 800호이다. ○ 보주(保州) 선의군(宣義軍)은 절도(節度)를 둔다. 고려에서 주를 설치하였으며, 옛 현은 하나로, 내원현(來遠縣)이다. 성종이 고려 왕 왕순(王詢)이 멋대로 왕위에 올랐다는 이유로 문책하자, 왕순이 불복하였다. 통화(統和) 말기에 고려가 항복하였으며, 개태 3년에 보주와 정주를 빼앗고서는 이곳에 각장(榷場)을 설치하였다. 동경 통군사(東京統軍司)에 예속되었으며, 통할하는 주군(州軍)이 둘이고 현이 하나이다. 내원현은 처음에 요서 지역의 여러 현의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고, 또다시 해(奚)와 한족(漢族)의 군사 700명을 옮겨서 방수(防戍)하게 하였다. 호구 수는 1000호이다. 선주(宣州) 정원군(定遠軍)은 자사(刺史)를 둔다. 개태 3년에 한호(漢戶)를 옮겨서 설치하였으며, 보주에 예속되었다. 회화군(懷化軍)은 등급이 하(下)로 자사를 둔다. 개태 3년에 설치하였으며, 보주에 예속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보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다. 고려는 성종 때부터 이미 지금의 용천(龍川), 철산(鐵山) 등지를 차지하였고, 덕종(德宗) 때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부터 장성(長城)을 쌓았다. 정종(靖宗) 때에는 또 지금의 창성부(昌城府)를 설치하였다. 그런즉 요나라가 고려의 경계 상에 보주(保州)를 설치하였다는 것은 필시 압록강 동쪽 언덕의 한 현에 해당하는 지역일 뿐이다. 그렇다면 보주가 관할하였다는 두 개의 주군(州軍) 및 정주의 정동현은 압록강 동쪽에 아울러 있을 수가 없으며, 마땅히 압록강 서북쪽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 정주는 본디 고려에서 설치하였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내원현에 대해서는, 《고려사》 악지(樂志)에 이르기를, “내원성(來遠城)은 정주(靜州)의 물 안쪽 지역에 있다. 고구려 때 적인(狄人)들이 와서 투항하자 이곳에 둔 다음 그 성의 이름을 내원(來遠)이라고 하였으며, 노래를 불러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하였다. 정주(靜州)는 지금의 의주이다. 그런즉 압록강 가운데 있는 검동도(黔同島)나 위화도(威化島) 등이 생각건대 옛 내원현인 듯하다. 또 살펴보건대, 요나라 때에는 내원(來遠)이란 칭호가 둘이 있다.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내원성은 본디 숙여진(熟女眞) 지역이다. 통화 연간에 고려를 정벌하면서 연군(燕軍)이 날래고 용감하다는 이유로 두 지휘(指揮)를 두고서 성을 쌓아 방수하게 하였다. 병사(兵事)는 동경 통군사에 속한다.” 하였다. 이것은 압록강 서쪽에 있으면서 동경 통군사에 속한 것이지, 보주에 소속된 내원현이 아니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보주(保州)는 고려에서 설치하였다. 내원현을 관할한다. 요나라 때에는 보주(保州) 선의군(宣義軍)이 되었다. ○ 내원현은 본디 고려의 옛 현이다. 요나라 때에는 그대로 따랐다. ○ 옛 보주는 그 지역이 압록강 서북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보주성(保州城)은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개태 3년(1014)에 고려 왕 왕순(王詢)이 멋대로 왕위에 올랐다는 이유로 문책하자 왕순이 불복하였으므로, 보주와 정주를 빼앗고서는 이어 보주를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내원현이다. 선의군(宣義軍)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금나라 초기에는 고려가 신하로 복속하였다는 이유로 보주를 떼어서 고려에 주었는데, 바로 지금의 안주(安州)이다. 그 근처에 회화군(懷化軍)이 있는데, 이 역시 요나라가 개태 3년에 설치하였으며, 보주에 예속시켰다. 금나라 초기에는 역시 고려에 편입되었다. ○ 정주성(定州城)은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고려에서 설치하였으며, 치소는 정동현(定東縣)이다. 요나라가 취하여서는 그대로 정주라고 하였으며, 보령군(保寧軍)이라고도 한다. 그 뒤에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지금은 그대로 정주가 되었다. 서남쪽으로 의주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보주를 지금의 안주라고 하고, 정주를 지금의 정주라고 한 것은 모두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지금의 정주는 바로 우리 조선에서 설치한 것인데 요나라 때의 정주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대청일통지》에서는 지금의 선천(宣川)을 보주에서 관할하는 선의군(宣義軍)이라고 하였는데, -본조 강역조(本朝疆域條)에 나온다.- 이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 덕종(德宗) 2년(1033)에 이르러서 장성(長城)을 수축하였는데, 서쪽으로는 보주의 경계까지 쌓아 북쪽에 있는 여진을 방어하였다.
《고려사》 병지(兵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덕종 2년에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쪽 경계의 관방(關防)을 창설하게 하였다. 서쪽 바닷가의 옛 국내성(國內城) 경계인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덕(寧德), 영삭(寧朔), -이상의 여섯 성은 지금은 모두 의주(義州)에 편입되었다.-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淸塞), -이상은 지금의 희천군(煕川郡)이다.- 평로(平虜), 영원(寧遠), -이상의 두 진은 지금은 합해져 영원현(寧遠縣)이 되었다.- 정융(定戎), 맹주(孟州), 삭주(朔州) 등 13성을 지나서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 3성 -이 3성은 지금은 합해져 영흥부(永興府)가 되었다.- 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닷가에 닿았는데, 길이가 1000리이고, 돌로 성을 쌓았으며, 높이와 두께는 각각 25척(尺)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나라의 보주가 압록강 안쪽에 있었으며, 희천, 운산 북쪽 지역은 여진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장성을 쌓아 동쪽으로 삭주, 희천, 운산의 북쪽을 지나 영흥의 동쪽에 이른 것이다. ○ 문종(文宗) 때 요나라에게 보주의 지역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요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요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강(太康) 4년(1078) -고려 문종 32년- 에 고려 왕 왕휘(王徽)가 압록강 동쪽 지역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문종 9년(1055)에 거란이 포주(抱州) -바로 보주이다.- 의 성 동쪽에 궁구(弓口)와 문란(門闌)을 설치하자, 고려에서 첩문(牒文)을 보내어 압록강 동쪽 지역을 다스리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유홍(柳洪)을 파견하여 요나라 사신과 함께 지형을 살펴서 경계를 정하게 하였는데, 획정하지 못하고서 되돌아왔다. 얼마 뒤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주에 놓은 다리를 부수기를 청하자, 요나라에서 그 일을 중지하였다.” 하였다. 《요사》에서 이른 바 ‘고려에서 압록강 동쪽 지역을 되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것은, 생각건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그러나 연조(年條)가 서로 차이가 나는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 요나라가 멸망하고 금나라가 흥성하자 고려에서는 보주를 취하여 의주라고 개칭하였으며, 비로소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
《금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수국(收國) 1년(1115) -고려 예종 10년- 9월에 태조가 가고살갈(加古撒喝)에게 명하여 보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보주는 고려와 가까운 곳에 있는데, 요나라가 고려를 침입해서 보주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가고살갈에게 명하여 빼앗게 하였는데, 오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11월에 개주(開州)를 공격하여 빼앗자, 보주에 있는 여진의 여러 부(部)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2년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또 말하기를, “보주는 본디 우리 고려의 땅이니 반환해 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사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스스로 취하라.” 하였다. 가고살갈 등이 보주를 공격하게 되자 요나라의 수장(守將)이 도망쳤는데, 고려의 군사들이 이미 성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얼마 뒤에 고려의 국왕이 포마(蒲馬)를 시켜 보주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국왕에게 유시하기를, “포마가 단지 입으로만 보주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표문(表文)을 올려 요청해 온다면 그 즉시 별도로 의논하겠다.” 하였다. 천회(天會) 4년(1126) -고려 인종 4년- 에 상이 고백숙(高伯淑)과 오지충(烏至忠)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사신이 왕래함에 있어서는 모두 요나라와의 구례(舊例)를 준수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고백숙 등에게 칙령(勅令)을 내리기를, “만약 고려에서 우리 측의 요구를 모두 따라 주면 즉시 보주 땅을 그들에게 주라.” 하였다. 고백숙이 고려에 도착하자, 고려 왕 왕해(王楷)가 표문을 올려 사례하고, 모든 일을 예전에 요나라를 섬기던 규례대로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초에 거란이 압록강 동쪽 강안에 성을 설치하고는 보주라고 칭하였다. 문종조에 거란이 또 궁구(弓口)와 문(門)을 설치하고는 포주(抱州)라고 하였다. 예종 12년(1117)에 요나라의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 등이 금나라 군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서 도망친 다음, 우리나라의 영덕성(寧德城)에 공문(公文)을 보내 내원성과 포주를 우리나라에 돌려주었다. 이에 우리 군사들이 그 성에 들어가서 병장기와 전곡(錢穀)을 수습하였다. 그러자 왕이 기뻐하면서 의주라고 이름을 고쳤다. 이에 다시금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 인종 4년(1126)에 금나라에서도 주(州)를 돌려주었다.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동에서 동쪽 지방은 바로 예전에 거란에 소속되었었다. 지금 오랑캐들이 이미 망하고 난 뒤에는 대금(大金)에서 그 지역이 불모지라는 이유로 다시는 성을 쌓아 지키지 않은 채 한갓 왕래하는 길로만 삼고 있다. 압록강의 서쪽에는 또 백랑수(白浪水)와 황암수(黃嵓水) 두 강이 합류하여 요수(遼水)가 되는데, 그 물이 얕고 좁은바, 예전에 이 강을 믿어서 험고함으로 삼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점 때문에 고려가 압록강의 동쪽으로 물러나 지키고 있는 것이다. ○ 압록강의 서쪽은 바로 금나라의 갈소관(曷蘇館)인데, 혹 파속로(婆速路)라고도 하며, 금나라와 고려가 경계를 접한 지역이다.
《요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태 2년(1013)에 고려에 대해 잘 아는 여진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대군이 갈소관여진(曷蘇館女眞)의 북쪽을 경유하여 곧장 압록강을 건너서 대하(大河)를 따라 올라가면 곽주(郭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곽산군(郭山郡)이다.- 에 이르러서 큰길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고려를 취하여서 차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금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세기에 이르기를, “천회 2년(1124)에 남로 군수(南路軍帥) 도모(闍母)에게 명하여 갑사(甲士) 1000인을 합소관로(合蘇館路)의 발근(孛菫) 완안아실뢰(完顔阿實賚)에게 보태 주어 고려를 방비하게 하였다.” 하였다. ○ 고려열전(高麗列傳)에 이르기를, “천회 8년(1130)에 고려 사람 10인이 고기잡이하다가 풍랑을 만나 그 배가 해안에 닿았는데, 갈소관 사람들이 이들을 잡았다. 조서를 내려서 그 나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하였다. ○ 대정(大定) 11년(1171)에 고려 왕 왕호(王晧)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의종(毅宗)이다.- 가 나라를 양위(讓位)한 사실을 와서 고하자 파속로(婆速路)에 조서를 내려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갈소관은 《요사》와 《금사》를 가지고 상고해 보면,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서쪽에 있는바, 지금의 압록진(鴨淥津) 서쪽, 봉황성(鳳凰城) 동쪽 지역이 바로 그 지역이다. 합소관(合蘇館)은 바로 갈소관이다. 《금사》를 보면 갈라로(曷懶路) 역시 합라로(合懶路)라고 하였는바, 갈(曷)과 합(合)을 서로 바꿔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청일통지》를 근거로 해서 보면 한(漢)나라의 안평현(安平縣)이 고구려 때에는 박작성(泊灼城)으로 되고, 금나라 때에는 파속로(婆速路)라고 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파사부(婆娑府)라고 하였다. 그 지역은 봉황성의 동쪽에 있는바,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박작성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바로 갈소관의 지역과 딱 들어맞는다. 그런즉 파속은 분명히 갈소(曷蘇)의 음이 변한 것이며, 파사(婆娑) 역시 파속(婆速)의 음이 변한 것이다. ○ 고려 명종 때에는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켜 서흥(瑞興)의 자비령(慈悲嶺) 서쪽 지역을 들어 금나라에 붙고자 하였으나 금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 15년(1175) -고려 명종 5년- 9월에 고려의 서경 유수 조위총이 고려국왕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는 자비령 서쪽에서 압록강 동쪽 사이에 있는 40여 성을 바치고 내부(內附)하겠다고 청하였는데,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9월에 고려 왕이 조위총을 복주(伏誅)하였다고 상주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자비령은 절령(岊嶺)이라고도 하는데, 서흥부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 고종(高宗) 때에는 서북쪽의 여러 성이 원나라에 함락되었으며, 고려에서 얼마 뒤에 다시 공격해 빼앗았다.
《원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열전에 이르기를, “태종(太宗) 3년(1231) -고려 고종 18년- 에 살례탑(撒禮搭)에게 명하여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고려 사람 홍복원(洪福源)이 군사들을 맞이하면서 항복하여 왔다. 이에 홍복원이 거느리고 있던 편민(編民) 1500호를 얻으니, 부근에 있던 주군(州郡)에서도 항복해 오는 자가 있었다. 살례탑이 즉시 홍복원과 함께 귀부하지 않은 주군을 공격하고, 또 아아독(阿兒禿)으로 하여금 홍복원과 함께 왕경(王京)으로 가서 고려 왕 왕철(王㬚)을 불러오게 했다. 그러자 왕철이 강화를 요청하니, 허락하였다. 이에 경(京), 부(府), 현(縣)에 72명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어 감독하게 하고는 마침내 회군하였다. 5년에 왕철이 다시 군사를 파견하여 이미 내부하였던 서경 등처의 항복한 백성들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홍복원의 집을 빼앗았다. 6년에 홍복원이 항복한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경(東京)으로 옮겨 와 살게 해 달라고 청하여 허락하였다.” 하였다. ○ 지리지에 이르기를, “원나라 초기에 요동을 평정하였을 적에 고려국 인주(麟州)의 신기 도령(神騎都領) 홍복원이 서경(西京), 도호(都護), 구주(龜州) 인근의 40여 성을 거느리고 투항하자, 이곳에 각각 진수사(鎭守司)를 세우고 관원을 두어 그곳 백성들을 무마하였다. 그 뒤에 고려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홍복원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귀부하였으므로 고려군민만호(高麗軍民萬戶)를 제수하였고, 항복해 온 백성들을 요양(遼陽)과 심주(瀋州)에 나누어 흩어져 살게 하였는데, 교치(僑治)는 요양고성(遼陽故城)이다. 중통(中統) 2년(1261)에 이를 고쳐서 안무고려군민총관부(按撫高麗軍民摠管府)로 삼았다. 고려가 온 나라를 들어 내부하기에 이르러서는 4년에 또다시 질자(質子)인 왕준(王綧)을 안무고려군민총관으로 삼고 2000여 호를 나누어 거느리면서 심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원정(元貞) 2년(1296)에 두 사(司)를 병합시켰는데, 치소는 그대로 요양고성이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고종 20년(1233) 5월에 서경 사람 홍복원 등이 성을 들어서 반란을 일으키자, 북계 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가 토벌하였으며, 홍복원이 몽고로 도망쳐 들어가자 남아 있던 백성들을 해도(海島)로 옮겨 서경이 마침내 폐허가 되었다. 그 뒤에 서북 지방의 여러 성들이 해마다 몽고 군사에게 침입당하였다. 지금 《원사》에 기록된 것이 《고려사》와는 연조(年條)에서 조금 차이가 나는데, 왜 그런지 상고할 수가 없다. ○ 원종(元宗) 때에는 자비령(慈悲嶺) 서북쪽 지방이 원나라에 함락되었으며, 원나라에서는 평양(平壤)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였다.
《원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至元) 6년(1269) -고려 원종 10년- 에 고려의 도통령(都統領) 최탄(崔坦) 등이, 임연(林衍)이 난을 일으키자 서경(西京)의 50여 성을 이끌고 들어와 귀부하였다. 7년에 조서를 내려 서경을 내속시켜 동녕부로 고치고는 자비령으로 경계를 삼았으며, 망가도(忙哥都)를 안무사(按撫使)로 삼아 호부(虎符)를 차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종 10년에 서북면 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 최탄(崔坦), 삼화 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 및 여러 성을 들어 몽고에 귀부하였다. 그러자 몽고에서는 서경을 동녕부로 삼고는 관리를 두어 다스렸으며, 자비령을 경계로 하였다. ○ 그 뒤에 원나라에서는 동녕부를 동녕로총관부(東寧路摠管府)로 승격시켰으며, 이로 인하여 의주(義州) 등 4개의 성을 떼어 파사부(婆娑府)로 옮겨 예속시켰다. 파사부는 바로 금나라 때의 파속로(婆速路)이다.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녕로는 본디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한나라 때 조선을 멸하고서 낙랑군과 현도군을 두었는데, 이곳은 낙랑군 지역이었다. 진(晉)나라 의희(義煕) 연간 이후에 고구려 왕 고련(高璉)이 비로소 평양성에 거주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함락시키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겨 가 압록강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었는바, 평양의 옛 지역이 아니었다. 왕건(王建) 때에 이르러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다. 원나라 지원 6년(1269)에 이연령, 최탄, 현원열(玄元烈) 등이 부(府), 주(州), 현(縣), 진(鎭) 60성을 들어서 귀의하였다. 8년에 서경을 고쳐서 동녕부로 삼았다. 13년(1276)에 동녕로총관부로 승격시키고 녹사사(錄事司)를 설치하였으며, 정주(靜州), 의주(義州), 인주(麟州), 위원진(威遠鎭)을 떼어 파사부에 예속시켰다. 본로(本路)는 영사(領司)가 하나이며, 나머지 성들은 잔폐되어서 관사를 설치하지 않았다. 지금은 우선 옛 이름만을 기록해 둔다. ○ 녹사사는 토산현(土山縣), 중화현(中和縣), 철화진(鐵化鎭)을 관할한다. ○ 도호부(都護府)는 당나라 말기에 고려로 땅이 편입되었으며, 주, 부, 현, 진 60여 성을 설치하여서 이곳이 도호부가 되었다. 비록 당나라 때의 명칭을 그대로 쓰기는 하였으나, 도호부로서의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지원 6년에 이연령 등이 그 지역을 들어 귀의하였다. 그 뒤에는 성이 무너져서 겨우 그 명목만 남아 있었으며, 동녕로에 속하였다. ○ 정원부(定遠府), 곽주(郭州), 무주(撫州), 황주(黃州), -안악현(安岳縣), 삼화현(三和縣), 용강현(龍岡縣), 함종현(咸從縣), 강서현(江西縣) 등 다섯 현과 장명진(長命鎭) 한 진을 거느린다.- 자주(慈州), 가주(嘉州), 순주(順州), 은주(殷州), 숙주(宿州), 덕주(德州), -강동현(江東縣), 영청현(永淸縣), 통해현(通海縣), 순화현(順化縣) 네 현과 영원진(寧遠鎭), 유원진(柔遠鎭), 안융진(安戎鎭) 세 진을 거느린다.- 창주(昌州), 철주(鐵州), -정융진(定戎鎭) 한 진을 거느린다.- 태주(泰州), 개주(价州), 삭주(朔州), 선주(宣州), -영삭진(寧朔鎭), 석도진(蓆島鎭) 두 진을 거느린다.- 성주(成州) -수덕진(樹德鎭) 한 진을 거느린다-, 희주(煕州), 맹주(孟州), -삼등현(三登縣)과 초도진(椒島鎭), 가도진(椵島鎭), 영득진(寧得鎭) 세 진을 거느린다.- 연주(延州) -양암진(陽巖鎭) 한 진을 거느린다-, 운주(雲州)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녕로 및 파사부가 거느리는 주(州), 현(縣), 도(島), 진(鎭)은 모두 합하여 50성으로, 60성을 들어 귀의하였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고려사》를 근거로 하여 보면, 이 당시에 서해도(西海道)의 수안(遂安), 곡산(谷山), 은율(殷栗) 역시 원나라에 투항하여 동녕부에 속하였으며, 충렬왕 12년(1286)에 원나라에서 곡주 등 세 성을 되돌려 주었다. 이것은 《원사》에서 미처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동녕로 주현(州縣)의 연혁(沿革)에 대해서는 성읍조(城邑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또 살펴보건대,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동녕부조(東寧府條)를 보면, 가주(嘉州)는 요나라 때의 가평군(嘉平軍)이고, 순주(順州)는 본디 요대현(遼隊縣) 지역이고, 철주(鐵州)는 본디 안시현(安市縣)이고, 태주(泰州)는 본디 거란목(契丹牧) 지역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요동 지방에 있는 주현을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으로,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의 동녕로는 본디 고구려의 평양성이다. 지원 13년(1276)에 동녕로를 설치하였는데, 그 지역은 지금의 조선 경계 안에 있었다. ○ 고려 충렬왕 16년(1290)에 원나라가 동녕로를 혁파하고서 서북쪽 지방의 여러 성들을 모두 되돌려 주고는 다시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다. 서북쪽 지방의 성이 원나라에 함락된 기간은 21년 동안이었다.
《고려사》 세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충렬왕 16년 -원나라 지원 27년- 에 원나라 황제가 동녕로를 혁파하고서 서북쪽의 여러 성을 모두 되돌려 주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공민왕(恭愍王)이 장차 동녕부를 공격하여 북원(北元)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다. 19년(1370)에 우리 태조가 동북면(東北面)에서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 동녕부 동지(東寧芬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가 우라산성(亏羅山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이오로첩목아가 와서 항복하였으며, 여러 성들이 모두 잇따라 항복하였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 북쪽으로는 동녕부, 서쪽으로 바다,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여 보면,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여러 성을 되돌려 준 뒤에 동녕부를 압록강 북쪽으로 옮겨 설치하였다는 것을 징험해 알 수가 있다. ○ 공민왕 때 희천(煕川) 북쪽에 있던 여진을 축출하고 비로소 지금의 강계(江界), 벽동(碧潼) 등지를 수복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계부(江界府)는 공민왕 10년(1361)에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라고 하였다가 18년(1369)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 임토(林土)와 벽단(碧團)은 본디 모두 여진이 살던 곳이다. 공민왕 6년(1357)에 이성만호(泥城萬戶) 김진(金進) 등을 보내어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그러고는 임토를 고쳐서 음동(陰潼)이라 하고 벽단을 음동에 예속시켰으며, 남계(南界)의 인호(人戶)를 옮겨서 채웠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음동은 지금의 벽동군(碧潼郡)이다. 고려 말기에 비록 강계, 벽동을 설치하기는 하였으나, 압록강 안쪽의 지역을 다 개척하지는 못하였다. 본조(本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압록강을 경계로 삼고는 여연(閭延), 무창(茂昌), 우예(虞芮), 자성(慈城) 등 네 군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에 변경 지역에 껄끄러운 일이 자주 발생함으로 해서 마침내 그 지역을 비워 두었다.
[주D-001]갈라로(曷懶路) : 갈라전(曷懶甸)을 말한다. 갈라전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흥평야(咸興平野) 일대라는 설이 있으나, 대체로 길주(吉州) 북쪽에서 두만강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으며, 치소(治所)는 경성(鏡城)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D-002]체주(棣州) : 원문에는 ‘隸州’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곽원(郭元) : 송(宋)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1015, 현종6)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주D-004]4도호부, 8목을 설치하였다 : 원문에는 ‘置四都八護牧’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편하게 …… 없습니다 : 원문에는 ‘以爲便敵國未嘗知有國邑之制’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에 의거하여 ‘以爲便適 固未嘗知有國邑之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거사(車師)나 선선(鄯善) : 모두 서역(西域)에 있는 나라 이름이다. [주D-007]완안부(完顔部) : 12~13세기에 걸쳐 지금의 만주 아성현(阿城縣)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살다가 금나라를 세운 여진의 부족 이름이다. 오고내(烏古迺) 추장 때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였고, 아골타(阿骨打) 때에 이르러 금나라를 세웠다. [주D-008]옛날에 해총(海蔥)을 바쳤는데 : 원문에는 ‘舊有海蔥’으로 되어 있는데, 《금사》 권24에 의거하여 ‘舊貢海蔥’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토문강(土門江) : 두만강(豆滿江)을 가리킨다. 두만강, 도문강(徒門江), 통문강(統門江), 도문수(徒門水)로 표기하기도 한다. [주D-010]호이합하(虎爾哈河) :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을 말한다. 홀한하(忽汗河), 읍루하(挹婁河), 오루하(奧婁河)라고도 한다. [주D-011]도발근(都孛菫) : 여진족 추장의 칭호이다. [주D-012]해릉(海陵) : 금나라의 폐제(廢帝)인 해릉서인(海陵庶人) 완안량(完顔亮)을 가리킨다. 본래의 이름은 적고내(迪古乃)이며, 요왕(遼王) 종간(宗幹)의 둘째 아들이다. 평장사(平章事)로 있다가 희종(煕宗)을 시해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가 뒤에 폐위되었다.《金史 卷5 海陵本紀》 [주D-013]마침내 …… 하였다 : 원문에는 ‘遂命名親管猛安曰 押懶猛安’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금사》 권24에 의거하여 ‘遂命名石土門親管猛安曰 押懶猛安’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석토문(石土門)은 야라로 완안부(完顔部) 사람으로, 금나라 시조(始祖)의 동생인 보활리(保活里)의 후손이다. 맹안(猛安)은 금나라의 관직으로, 《금사》 국어해(國語解)에 “맹안은 1000부(夫)의 장(長)이다.” 하였다. [주D-014]성현수(星顯水) : 지금의 포이합도하(布爾哈圖河)를 가리킨다. [주D-015]모극(謀克) : 금나라의 관직으로, 《금사》 국어해(國語解)에 “모극은 100부(夫)의 장(長)이다.” 하였다. [주D-016]소조(昭祖) : 금나라 헌조(獻祖)의 아들로, 이름이 석로(石魯)이며, 뒤에 소조로 추존되었다. [주D-017]응로(鷹路) : 매[鷹]를 조공(朝貢)하는 길을 말한다. 요나라 사람들이 매를 좋아하였는데, 우리나라의 함경도 지방에서 나는 매를 특히 좋아하였다. [주D-018]알민수(斡泯水) : 원문에는 ‘幹泯水’로 되어 있는데, 《금사》 권1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9]삼잔수(三潺水)에 막부(幕府)를 설치하고 : 원문에는 ‘立募府于三潺水’로 되어 있는데, 《금사》 권135 고려열전에 의거하여 ‘立幕府于三潺水’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0]사람들을 …… 약탈하였다 : 원문에는 ‘登水無算’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殺掠無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정평 …… 지역은 : 원문에는 ‘定以北濱海處’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定平以北濱海處’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2]거란 …… 좋아하는데 : 원문에는 ‘契酷愛之之’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契丹酷愛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3]오국고성(五國故城)이 : 원문에는 ‘五國頭城’으로 되어 있는데, 《대청일통지》에 의거하여 ‘五國故城’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4]양련진하(楊璉眞瑕) : 원나라 때의 서역(西域) 승려로, 양련진가(楊璉眞加), 양련진가(楊璉眞伽)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세조(世祖) 때 강남석교총통(江南釋敎摠統)이 되어 송나라의 능묘를 발굴하기를 주청해서 송나라의 능침을 모두 발굴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元史 卷202》 [주D-025]9성(城) : 윤관(尹瓘)이 갈라전 지역에 있던 여진족을 정벌하고 쌓은 함주(咸州), 복주(福州), 영주(英州), 길주(吉州), 웅주(雄州), 통태진(通泰鎭), 진양진(眞陽鎭), 숭녕진(崇寧鎭), 공험진(公嶮鎭) 등인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하여 정설이 없다. [주D-026]9개의 성 : 김상기는 “고려의 9성에 대해 여진 측에서도 각각 9개의 성을 쌓아 대치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여진에서 장기전을 각오하고 임시로 작은 성과 책(柵)을 쌓아 그곳을 공격의 근거지로 한 데 불과한 것이다.” 하였다.《김상기, 高麗時代史,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 221쪽 주》 [주D-027]소하(蘇河) : 원문에는 ‘蘇下’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권58에 의거하여 ‘蘇河’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8]쌍성(雙城) :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이다. [주D-029]영가(盈哥) : 금나라 목종(穆宗)의 이름이다. 영가는 완안부(完顔部)의 기초를 확립하기 시작한 오고내(烏古迺)의 뒤를 이어 계승한 추장(酋長)으로서,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오늘날의 간도(間島) 지방을 복속하였으며, 다시 남하하여 광의(廣義)의 함흥평야(咸興平野)를 지칭하는 갈라전(曷懶甸)까지 그 세력을 미치게 하여 금나라의 기초를 닦았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1, 376쪽》 [주D-030]정평부의 북쪽이 : 원문에는 ‘定平之此’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定平之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1]포선만노(蒲鮮萬奴) : 금나라의 무장(武將)이다. 함평로 선무사(咸平路宣撫使)로 있다가 정우(貞祐) 3년(1215)에 금나라를 배반하여 요동에 웅거하고는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하고 연호를 천태(天泰)라 하여 대요국(大僚國)과 대립하였다. 원나라 성길사한(成吉思汗)에게 쫓겨 두만강 유역으로 이주한 다음, 국호를 동진국(東眞國)으로 고치고 두만강과 압록강 주위에 있는 여진족을 통합하였다. 1217년(고종4)에 몽고와 화맹(和盟)하고는 고려를 구한다는 구실로 고려의 동북쪽을 쳐들어왔으며, 1233년(고종20)에 몽고의 공격으로 멸망당했다. [주D-032]화주(和州) 북쪽 땅 : 화주는 지금의 영흥(永興)으로, 철령(鐵嶺) 북쪽 땅을 말한다. 이를 계기로 몽고에서 이곳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趙暉)를 총관으로, 탁청(卓靑)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주D-033]정주(定州) : 여기서는 함경남도 정평(定平)을 말한다. [주D-034]계수관(界首官) : 주위에 있는 주부(州府)와 군현(郡縣)을 관할하는 중심이 되는 고을을 말한다. [주D-035]구리승왕(漚里僧王) : 원문에는 ‘謳里僧王’으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8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6]철령(鐵嶺) : 고려 말기에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철령위(鐵嶺衛)의 귀속 문제가 있었다. 1387년 1월에 명나라에 다녀온 설장수(偰長壽)가 명나라에서 이 지역을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려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5도(道)에 명을 내려 성을 수축하게 하고 여러 장수들을 북방에 보내어 대비케 한 다음, 박선중(朴宣中)을 명나라에 보내어 철령 북쪽의 문천(文川), 고원(高原), 영흥(永興), 정평(定平), 함흥(咸興) 등과 공험진(公嶮鎭)까지가 모두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면서 철령위의 설치를 중지해 달라고 교섭하였으나, 결과가 여의치 않았다. 이에 최영(崔瑩)이 중신 회의를 열고 정료위(定遼衛) 정벌을 논의한 결과 모두 화의(和議)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최영은 왕과 비밀회의를 열어 요동을 정벌하기로 하고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출군하였으나,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786쪽 주》 [주D-037]개원로(開元路) : 요양성(遼陽城)에 소속된 지명으로, 원나라에서 처음 설치하였다. [주D-038]봉천부(奉天府) : 원문에는 ‘奪天府’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9]5년 : 원문에는 ‘二年’으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맞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0]대매하(大梅河)와 소매하(小梅河) : 대매하는 지금의 요하(遼河)이고, 소매하는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주D-041]소항덕(蕭恒德) : 소손녕(蕭遜寧)을 가리킨다. 소항덕은 본명이며, 손녕은 그의 자(字)이다. [주D-042]흥주(興州) …… 여섯 성 : 평안북도 서북쪽 해안 지대에 있는 여섯 성으로, 이것이 이른 바 강동 육주(江東六州)이다. 이 강동 육주는 당시에 군사상ㆍ교통상의 요지로, 이를 차지하기 위해 요나라와 고려가 치열한 분쟁을 치렀는데, 거란의 3차 침입 이후에는 고려의 영토로 완전히 귀속되었다. [주D-043]내원성(來遠城) : 요나라의 진지(陣地)로, 압록강 가의 검동도(黔同島)이다. [주D-044]상온(詳穩) : 요나라의 관직으로, 변방 백성을 진무하는 관직이다. 국어해(國語解)에, “여러 관부(官府)를 감독하고 다스리는 장관(長官)이다.” 하였다. [주D-045]선의주(宣義州) : 지금의 선천(宣川)이다. [주D-046]정원주(定遠州) : 지금의 정주(定州)이다. [주D-047]통화(統和) …… 설치하였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開泰三年 取其保定二州 統和末 高麗降 於此置權場’으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도치되었기에 《요사》 권38 지리지(地理志)의 주석에 의거하여 ‘統和末 高麗降 開泰三年 取其保定二州 於此置榷場’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각장(榷場)이 원문에는 ‘權場’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각장은 송(宋), 요(遼), 금(金), 원(元)나라 때 변경에 설치하고서 인근의 나라들과 호시(互市)를 열었던 시장을 말하는데, 이곳에서는 전매세(專賣稅)를 거두었으며, 관부에서 발행한 증명서가 있어야만 교역할 수 있었다. [주D-048]32년 : 원문에는 ‘十二年’으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맞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9]가고살갈(加古撒喝) : 원문에는 ‘加右撒喝’로 되어 있는데, 《금사》 권13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0]또 …… 설치하고는 : 원문에는 ‘又設弓口問’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又設弓口門’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1]한갓 …… 있다 : 원문에는 ‘徙爲往來之道而已’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에 의거하여 ‘徒爲往來之道而已’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2]갈소관여진(曷蘇館女眞) :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진을 정벌할 때 여진 사람 수천 호(戶)를 요양(遼陽)의 남쪽으로 이주시켰는데, 이를 갈소관여진이라 한다. 일설에는 숙여진(熟女眞)을 갈소관여진이라고도 한다. 합소관여진(合蘇官女眞)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高麗時代史 186쪽 주》 [주D-053]다루가치(達魯花赤) : 점령 지역 내의 민정(民政)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원나라의 관직으로, 진수자(鎭守者), 단사관(斷事官), 지방장관 등을 뜻한다. [주D-054]왕준(王綧) : 원문에는 ‘王淳’으로 되어 있는데, 《원사》 권59 지리지의 주석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왕준은 고려의 왕족으로 영녕공(永寧公)에 봉해진 뒤 고려 고종(高宗)의 명에 따라 왕자라고 칭하고 원나라에 볼모로 갔다. 그 뒤에 원나라의 신임을 받아 안무고려군민총관이 되어 심주(瀋州)를 다스렸다. [주D-055]심주 : 지금의 봉천(奉天)이다. 이 당시에 봉천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는 몽고에 포로로 잡혀갔거나 항복한 백성, 유민(流民) 등 고려 백성들이 많이 살아서 마치 고려의 영지(領地)와 같았다. 이에 몽고에서는 고종 28년(1241)에 영녕공 왕준을 안무고려군민총관으로 삼아 이들을 관할하였으며, 그 뒤에는 또 충선왕(忠宣王)을 봉하여 심양왕(瀋陽王)으로 삼아 이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5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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