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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제국의 력사는 매우 일천하다 조선에 비해서
http://cafe.daum.net/chosunsa/OTOR/461
“우리는 서세동점의 시기에 아직도 살고 있지만 이젠 다시 동아시아가 융성하는 기운을 느끼는 경우를 적지 않게 느끼고 있다.
세세동점 즉 서구가 동구 동양을 앞지르기 시작한 때를 많은 학자들은 1776년 미국 독립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미국이라는 유럽국가의 확장된 포맷이 있었기에 유럽이 동양을 앞지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럽이라고 하는 지역은 지금도 그렇지만 매우 춥고 습하고 기독교 하면 밝은 모습보다는 어두운 성당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지역이다.
그런데 영국을 비롯해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 력사는 지금으로 부터 본격적인 진행은 겨우 1000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전 로마와 그리스가 있지 않느냐 하겠지만 로마는 신성로마 제국 동로마제국 로마노프왕조 등으로 이어졌다고 하지만 사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기원후 1000년간의 유럽력사는 암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야만인이라 불리던 바이킹의 침략이 오히려 유럽을 력사에 등장하게 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하면 참 아이러니컬하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사실인게 바이킹이 득세한 기원후 1000년경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지역 러시아 북아프리카 등이 진출하여 그전에 지방분권화된 권력이 중앙집권을 요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바이킹의 내습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통일된 정부와 국방과 경찰 행정 등이 요구되자 그전에는 왕의 등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유럽인들이 왕이라고 하는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최소한 제후들간의 세력을 조정할 중재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유럽은 당시 교황이라고 하는 세속적 종교지도자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사실 교황은 전혀 바이킹의 침략과는 상관이 없는 뜬구름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왕이 등장하게 되고 왕이 등장하게 된다 라는 것은 결국 국가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전에도 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 권력이 후의 왕과는 비교가 안되는 미미한 존재들이었다.
제후들 중에 좀 쎄다는 것외에는.
그런데 약속이라도 한듯이 기원후 1000년경에 지금의 유럽지도의 국경이 이때 대부분 그어질 만큼 그 세력이 생기고 유럽국가가 생겼던 것이 바이킹의 침략으로 인한 사회적 요구에 의해 기인한 것이고 이후 바이킹이 유럽 력사에서 사라지자 이젠 그때부터는 십자군 전쟁 이슬람과의 전쟁 타타르의 침략으로 더욱 유럽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로마가 있었지 않느냐 하겠지만 로마의 유럽문명과 그 후 유럽문명과의 연관성은 기독교라는 공통분모 외에는 거의 없는 단절된 력사이다.
후에 유럽왕들은 자신들이 로마를 잇는 적통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동로마정도만 로마의 련관성이 약간 있었을 뿐 시실 유럽문명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것은 아시아였다.
이슬람문명 동양 조선 문명 등이 지구의 주된 문명이었지 결코 유럽문명은 17세기까지도 주류가 아니었다.
4대 문명 중에 유일하게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문명이 황화문명이라는 것은 결국 중국 조선 문명이 지구상 최古의 문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문명의 중심에 조선이 있었는데 이 서구세력들은 자신들의 유럽 문명의 패권을 계속 유지시킬 필요가 있어서 결국 조선을 한반도로 옮기는데 입을 맞춘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에 수많은 주의 사람이 다 전부 한사람을 죽이기 위해 입을 맞춘 공범이었다 라는 소설이 있다.
마찬가지이다.
조선을 한반도로 옮기고 입을 딱 씻으면 그만이다.
거기에 대륙조선인들도 중국이라는 옷을 입고 그 범죄에 동참을 한 것이 지금 배우고 있는 왜곡 력사이다.
이번에 신흥무관학교 군가에 우리는 헌원의 자손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신흥무관학교가 활동한 곳이 대륙이다. 지금의 만주가 아닌 옛날 만주인 내몽골일대에서 독립군전쟁을 일으켰다.
헌원의 자손이라는 것은 자신들은 중국인이라는 얘기이다.
이걸 왜곡사학자들은 그들이 사대주의에 빠져서 그렇다고 한다.
아무리 한국 사람들이 미국의 링컨대통령과 케네디대통령을 존경한다고 하다라도 자신을 링컨과 케네디의 자손이라고 하는 정신장애인은 없다.
미국이라면 사대주의를 넘어선 나이 많은 보수주의자들도 그런 소리는 안한다.“
신흥무관학교 교가
http://cafe.daum.net/greatchosunsa/75XT/5021
“1절
서북으로 흑룡 태원 남의 영절(영하 절강)에
여러만만 헌원자손(중국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 업어 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 것들(일본) 품에다 품어
젖 먹어 기른 이가 뉘뇨
2절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낙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 집 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종 설움 받는 이가 뉘뇨
3절
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민족
이끌어 내어 새나라 세울리 뉘뇨
후렴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끊던 피가 우리 가슴에 좔-좔-좔-
물결치며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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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선은 논한다.
한반도로 보면 흑륭강은 동북인데, 서북이라니,, 아,그렇다면, 흑수가 바로 흑륭강이었지.. 중국의 서북이 흑수, 흑륭강이 맞네..남으로 영절, 영하자치구에서 절강성.. 그렇다면 중국전체가 우리 배달나라네..
그리고 여러소수민족을 키우고, 젖을 먹여 키운 한민족..아아..
장백산.. 긴 백산, 긴 백두산맥.. 아래,남쪽으로 반만년의 만리의 땅, 낙원
대조선이 만리의 영토네.. 이것을 남의 자식에게 빼앗긴체..“
한국우정본부사에서 한국사를 축소 왜곡 홍보했다
http://cafe.daum.net/greatchosunsa/FUFy/14
“한국우정사업본부에서 신흥무관학교를 홍보하는 기념우표에 신흥무관학교교가를 적어놓았는데, 아뿔사, 1,2절은 빼놓고 3,4절만 적어놓았다. 보통 길면 1절이나 2절까지 적는 것이 보통인데, 1,2절를 빼놓은 것이 무슨 이유인가 ?
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1절에 한국, (대륙)대한민국의 서북엔 흑룡이, 태원시의 남쪽은 영하와 절강성이라는 문구가 나와 조선, 대한민국이 서북은 황하상류지점, 동남은 절강성까지 의 대륙땅을 보여주므로 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헌원, 황제라는 고대인물의 자손들, 중국의 소수민족을 보살펴 키우고, 같은 공생하고, 동해 일본섬 인들을 먹이 주어 키우고, 또한 공생하고.. 라는 글로서 사해의 자손들을 돌봐주었던 것들..
또한 2절은 더 가관이다. 장백산 밑, 즉 백두산 이남은 만리낙원으로 피로 지킨 옛집, 옛 우리나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한 만리 낙원 , 만리의 땅이다. 그 당시 만리의 땅은 아시아대륙 일 수 밖에 없다. 한대륙, 대한민국이다.
이 땅을 타국의 놀이터로 빼앗겼다는 말이다.. 이런 대륙조선사를 알려서는 않되었기에 대한민국우표에서 지워지고, 아무의미도 없는 3, 4절만 빼곡히 채워넣은 것이었다. 대륙의 대국인 한국의 역사를 송두리체 축소왜곡한 정황이다. 대한민국 우정본부사에서..
러브 선의 한탄하며 하는 한국사 이야기... 2011.9. 19.월.
신흥무관학교 교가
1절
서북으로 흑룡 태원 남의 영절(영하 절강)에
여러만만 헌원자손(중국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 업어 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 것들(일본) 품에다 품어
젖 먹어 기른 이가 뉘뇨
2절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낙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 집 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종 설움 받는 이가 뉘뇨
3절
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민족
이끌어 내어 새나라 세울리 뉘뇨
후렴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끊던 피가 우리 가슴에 좔-좔-좔-
물결치며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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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이야기]신흥무관학교 100년 우표
2011 06/28ㅣ주간경향 931호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11년 6월 중국 지린성 유하현 삼원보에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이 모였다. 안동 유림의 명문가 출신으로 의병활동을 하다 망명 온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과 전 재산을 처분해 군자금(현 화폐가치로 400억원가량)을 들고 온 우당(友堂) 이회영(1876~1932) 등이다. 가족과 함께 집단 이주한 이들은 인근 토지를 매입해 한 쪽에선 경작을 하고, 다른 한 쪽에선 민족의식 교육을 하는 자치단체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그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우표
신흥이란 신민회의 신(新)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興)자에서 따온 단어다.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강습소란 이름을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나중에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꾼 군사학교,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과 이청천, 이범석 장군이 생도 혹은 교관으로 거쳐간 그 전설의 학교다.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의 실제 주인공인 김산은 15살의 나이에 이 학교에 최연소 생도로 입학하기도 했다.“학교는 산속에 있었으며 18개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는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우리는 군대 전술을 공부했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도 받았다. 가장 엄격하게 요구했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아리랑 중에서)이 학교를 세운 석주 이상룡과 우당 이회영은 민족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버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인물이다. 석주는 14세 때 사서와 경서를 섭렵할 만큼 유서 깊은 유림가의 자손이면서도 고루한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교육과 산업, 군사중심주의를 부르짖은 실용적 실천적 운동가였다. 노비문서를 불태워 자신의 노비를 해방시킨 그는 경술국치가 나자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신주를 땅에 묻고 만주로 떠났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생기면서 초대 국무령에 추대된 석주는 지린성에서 74세로 생을 마감하면서 “조선 땅이 해방되기 전에는 내 시신이라도 데려갈 생각을 말라. 조선이 독립되면 내 유골을 유지에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제는 고성(固城) 이씨 종택으로 석주를 비롯해 9명의 독립운동가가 태어난 99칸짜리 안동 임청각 대문 앞에 기차 철길을 놓아 집안의 기를 끊으려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우당은 한성부 최고의 명문가 출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7형제 중 넷째아들이다. 위로 세 형인 건영, 석영, 철영이 다 유명한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었던 시영이 동생이다. 이 형제들에게 국내에선 더 이상 독립운동을 하기 어려우니 해외로 나가자고 망명을 주도한 게 우당이다. 1918년 고국에서 가지고 온 군자금이 바닥나자 신흥무관학교 운영을 형제들에게 맡기고 국내에 잠입, 비밀리에 고종 망명작전을 세웠으나 고종이 갑작스레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우당은 상하이에서 지하공작망 조직활동을 하던 중 밀정의 제보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65세의 나이로 여순감옥에서 옥사했다.석주와 우당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일제 탄압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3000명 이상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이 졸업생들이 서로군정서,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참여하면서 무장독립운동의 맥을 이어 왔다. 석주와 우당 같은 독립운동가, 이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가 없었다면 우리 역사는 후손들 앞에 얼마나 부끄러울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우리우리 청년들이라/두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자유의 깃발이 떴다’100년 전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이 만주 산속에서 우렁차게 불렀던 교가 중 일부다. 하늘이라도 찌를 듯한 기상이 느껴진다. 우정사업본부가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를 발행하면서 이 교가 가사를 도안에 새겨넣은 것은 그래서 의미있다.“<이종탁 출판국장 jtlee@kyunghyang.com>
신흥무관학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D%9D%A5%EB%AC%B4%EA%B4%80%ED%95%99%EA%B5%90
“신흥대학(新興大學)터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1911년 서간도(길림성 류하현)에서 개교한 독립군 양성 기관으로 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의 전신이다.[1]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 의용대,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참여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며 민족 해방에 크게 기여했다.
배경[편집]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의 침략 야욕에 맞서 항일 의병 전쟁과 같은 저항이 있었다. 특히 을사조약 체결 전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에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다.[2] 그러나 일제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남한 대토벌 작전과 같은 잔혹한 진압작전을 도입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의병 활동이 점차 어려워지게 되었고[3] 1910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었다.[4]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는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역인 흥개호 부근 봉밀산, 북간도 왕천현의 라자구 등 여러 곳에 세워졌다. 당시 독립운동 단체로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된 권업회, 북간도의 간민회 등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1]
설립[편집]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이상룡을 주축으로 윤기섭,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김형선, 이장녕, 이장직, 이동녕 등 군인 출신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신흥강습소란 이름을 내걸었으나 초기부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학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이다. [5]
합니하에서는 중학교 과정과 군사과를 두어 군인을 양성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합니하 학교를 ‘신흥 중학교’ 또는 ‘신흥 무관 학교’로 부르거나 인식하기도 했다. 공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신흥 강습소’였다. [6]
신흥강습소는 1919년 삼일운동이후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에서 동쪽으로 40 km 정도 떨어진 대두자(大肚子)에 위치해 있다. 학교터는 현재 마을 뒷산의 밭으로 변해 있다.[7]
1911년 4월(음력)에 유하현 추가가 대고산에서 노천대회를 열어 경학사를 결성하였고, 한 달 후, 대고산 아래, 토착민들의 옥수수 창고를 빌어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이후 1912년 통화현 합니하로 학교를 옮겼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의 젊은이들이 몰려와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자 다시 유하현 대두자로 학교를 옮겼다. 그래서 대두자가 본교, 기존의 합니하는 분교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대두자 학교터에서는 2~3,000여명(추산)의 학생이 교육을 받았다.
이상룡[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이상룡 (1858년)입니다.
이상룡은 안동 유림의 명문가 출신으로 양기탁, 이시영 등의 신민회 운동가의 권유에 따라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는 노비문서를 불태워 자신의 노비들을 해방시킨 뒤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경학사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서간도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역임하였다. 이상룡은 후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하기도 하였다.[8] 외부의 눈을 피하며 독립군을 길러내기 위해 학교의 이름을 대외적으로는 '신흥강습소' 또는 '신흥중학'으로 불렀으나, 학생들과 이주민 특히 군사과에 다니는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불렀다. 이때부터 '신흥'의 이름은 곧 독립군 무관을 양성하는 기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9]>
6대 정신[편집]
1. 임무에 희생 한다.
1. 체련에 필승 한다.
1. 간고에 인내 한다.
1. 사물에 염결 한다.
1. 건설에 창의 한다.
1. 불의에 항거 한다.
[10]
교가[편집]
1절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 영절에 여러 만만 헌원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섬중 어린것들 품에다 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가슴 끓는 피가 우리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
2절
장백산밑 비단 같은 만리낙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거늘 남의자식 놀이터로 내어맡기고 종설움 받는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가슴치고 눈물 뿌려 통곡하여라 지옥의 쇳문이 온다
3절
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론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민족 이끌어내어 새나라 새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두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떳다.
[10]
서로군정서[편집]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서로군정서 창립의 모태가 되었다. 서로군정서는 경학사의 후신인 한족회의 독자적인 정치 군사 조직이었다. 다음은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에 나오는 김산의 서로군정서에 대한 발언이다.[8]
조선인들은 자기들의 인민 정부와 재판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진정한 자치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김산, 《아리랑》, 내일을 여는 역사 제25호에서 재인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로군정서는 독립운동의 대의를 위해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하고 윤기섭을 상해로 파견하였다.[8] 서로군정서는 후일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7]
졸업생[편집]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였던 의열단의 많은 단원들과 김좌진 장군 등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8] 김좌진 장군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된 이후 졸업생들이 김좌진, 홍범도 부대를 찾아가 합류하였고, 청산리 전투를 함께 치렀다.
광복 후[편집]
광복 후에는 1947년 서울 종로에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이 설립되었고, 1949년 신흥초급대학(新興初級大學)으로 인가 받았다. 이후 1952년에 4년제인 신흥대학(新興大學)으로 전환되었고, 1955년에는 종합대학인 신흥대학교(新興大學校)로 승격이 되며 교사를 서울 회기동(현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으로 이전한 후, 1960년대에 '신흥대학교'였던 교명을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바꾸었다. 경희대학교는 무관학교의 전통을 계승해 국내에서 최초로 체육대학을 만들었으며, 정통 민족대학으로서 민족의학인 한의학과 민족무예인 태권도를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육성시키며 신흥무관학교의 명맥과 전통을 잇고 있다. 참고로 민족무예인 택견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시키고 본인도 제1호 택견 무형문화재가 된 신한승(辛漢承)도 신흥대학(新興大學) 체육학과 1기생이다.“

첫댓글 총결산 잘 보았습니다.
오늘도 새롭게 알아 갑니다.
현재의 대륙 중국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영토수복을 하긴 해야 되는데..
지금도 미국처럼 다민족이 섞여 살면
여러가지 병폐가 많은데
예전 조선은 어떻게 긴 세월을 다스려
왔는지...
큰 나라였으면서 크게 다스린 모습은 정말 놀랍습니다.
돌고도는 우리들 삶이랍니다!
과거생에도 거기서 우린 살았고요! 우리가 조상이라는 사람들 중 내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나라와 성씨는 대개 다르지만요!
미래생 인연되면 저 중국, 미국, 유럽, ...아프리카에도 태어나게 됩니다. 나의 나라라는 것은 없지요! 우리가 지금 집중하는 내 조상은 단지 지금 내나라라는 내성씨라는 것에 매달려 나의것 우리것 우리 영토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주욱 올라가면 우리는 유전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어 하나이고, 서로 인연따라 얽히고 섥혀서도 다 하나랍니다.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이런 난잡한 역사를 만든 이들이 미래에는 다시 함부로 못하게 하는데에 있다고 봅니다.
이제 100년 지났습니다..스타크래프트게임에서 울나라의 선수들이 막강전력을 과시했습니다...가까운 미래..드론전쟁에서 우리나라의 전력이 강하게 살아나는 날...분서갱유를 단행해 조선민족의 위대함을 구현시키고자 했던 진시황제의 혼령은 다시 이땅위에 살아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모두 고단하지만 반드시 가야할 길인바 힘을 내서 가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