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한과 수교 못할 이유 없다”
▶ ‘한반도 비핵화·북미 수교, 협상테이블 동시에 올려야”
▶ 한국 핵무장에 대해선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 일축
2023/02/23
21일 조지워싱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이낙연 총리(왼쪽)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
“미국은 미국이 원하는 북한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상대해야 한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1999년의 페리 보고서를 인용하며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1일 조지워싱턴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이 전 총리는 “1993년 제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된 이래 미국과 한국은 북한과 간헐적으로 비핵화 협상을 벌였으나 빌 클린턴·조지 부시·버락 오바마·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의 여러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6월 조지워싱턴대 방문연구원으로 온 이 전 총리는 연수 프로그램을 마치며 이날 조지워싱턴대 한국학연구소가 주최하는 정책포럼 강연자로 나섰다. 이 전 총리는 이달 말 펜실베이니아대(U-Penn)에서도 강연하고 3월 뉴욕 한인단체, 휴스턴대, 4월 UCLA, 콜로라도 주립대, 덴버 로타리클럽 등에서 강연이 예정돼 있으며 6월 귀국할 예정이다.
이날 강연회는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온라인으로 중계됐으며 국제 정치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열띤 질문이 이어졌다.
-북핵 협상 실패의 이유에 대해
▲북한 생존욕구 무시, 북한 붕괴론 오판, 압박 효과 과신, 정책 일관성 결여, 완벽주의적 접근의 함정 등을 꼽을 수 있다.
1990년대 초 냉전종식과 함께 고립에 몰린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에 적극적이었으며 남북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북미 대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협상에 미온적이었다. 결국 1993년 1차 북핵위기를 막을 수 있었던 기회는 그렇게 사라졌다.
미국은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했고 북한은 미국에 평화협정과 관계정상화를 통한 체제 보장을 요구했다. 신뢰가 부족한 상태에서 양측은 서로 상대가 먼저 행동할 것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자신이 비핵화를 먼저하고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의 자위 수단만 잃게 된다고 믿었다. 생존욕구는 다른 어떤 욕구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며 그것은 인간에게나, 국가에게 마찬가지다. 이를 무시한 협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시험을 할 때마다 외부의 제재는 강해졌다. 북한이 제재에 못 이겨 붕괴하거나 굴복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북한은 핵능력을 급속하게 키웠고 중국에 대한 의존을 확대했다. 미국은 경제제재의 효과를 과대평가한 것이다.
또한 북한의 입장에서 한국과 미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이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협상 상대를 의심하며 핵개발을 계속할 구실을 찾게 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북한정책도 거칠게 뒤집혔다.
-협상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
▲북한 비핵화 문제를 상호위협 감소 및 북미관계 개선과 나란히 올려놓고 해결해야 한다. 협상에는 채찍과 함께 당근도 필요하며 국내 정치의 단기적 변화에 방해받지 않는 장기 로드맵을 준비해 시행해야 한다.
2005년 6자 회담에서 참가국들은 ‘약속 대 약속,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입각해 단계적으로 합의를 이행하기로 했다. 상호불신을 극복하고 협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북미가 동시에 점진적, 동시적, 상호적 방식으로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를 향해 가는 것이 현실적이고 효율적이다.
-북한과의 관계개선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시각에 대해
▲그런 생각이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능력 강화와 중국의존 심화를 초래했다. 이는 미국이 바라는 세계질서,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일부에서 북한 비핵화와 종전선언 등으로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한반도 평화가 증진되면 주한미군 감축, 한미동맹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런 인식은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냉전의 종결이 독일 또는 일본 주둔 미군의 존재나 미국과 그 두 나라의 동맹을 위태롭게 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통일 이후에도 지역의 평화를 위해 주한미군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나도 동의한다.
-북미 수교 가능성에 대해
▲미국이나 일본이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한다면 북한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키우고 북한의 바람직한 변화를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계가 없으면 영향력도 없다. 미국은 그간 여러 차례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에 합의했으나 이행되지 못했다. 나는 미국이 북한과 수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비핵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북한은 더 이상 고립과 대결의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 북한은 남북 화해협력과 북미관계 정상화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1970년대 중국이, 1990년대 베트남이 했던 것처럼, 북한도 미국과의 관계개선, 개혁 개방의 길을 선택해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 내 핵무장 요구 여론에 대해
▲한국이 비핵화의 목표를 포기하고 핵무장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한미관계를 악화시키고 동아시아의 핵무기 경쟁을 촉발할 것이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가능한 유일한 선택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을 통한 북한과의 외교협상이다.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위한 제안
▲북한과 미국의 협상이 실패하고 긴장이 높아지면서,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가 후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반도와 동북아시아가 더는 대립이나 전쟁 위기와 핵 위협에 시달려서는 안 된다. 나는 모든 관련국들이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의 길에 동행하기를 바란다.
특히 미국이 즉각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다. 바이든 정부는 한국에서 점증하는 핵무장 요구에 대해 지난달 미일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약속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행동 없는 약속만으로는 충분한 신뢰를 얻기 어렵다.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행동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미주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