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보거라!
나는 배우지 못했지만 호미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더 좋았다.
서툴게 썼더라도 알고 새겨 주기 바란다.
네가 유품을 뒤져 이 편지를 수습할 때,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 없는 일이니,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사람의 몫인데 무엇 때문에 슬퍼한단 말이냐?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 편안해진다.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다.
산다는 것은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으면 해가 나고, 맑겠구나 싶으면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진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운수소관 변덕을 어찌하진 못해도,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하여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빌었다.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런 탈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를 가두지 마라!
눈비도 다녀가겠지만, 맑게 갠 날에는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이 들어 좋구나.
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 무 감자알이 통통하게 나올 때는 어린애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냐? 도라지 씨는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꽃들이 무리를 지어 넘실거리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봄에는 여린 쑥을 뜯어 된장국을 끓이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 맑은국을 끓이고.
가을에는 무쇠솥에 미꾸라지를 삶아 추어탕을 끓이고, 겨울에는 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였다.
네가 한이 맺힌 듯 어렸을 적 이야기를, 서러워서 물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대갓집 추석 울력에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이는데, 엄마는 왜 못 본 척 외면했냐고?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는 너무 늦게 알았다.
부끄럽기 그지없구나! 용서했더라도 한 번 더 용서하기 바란다.
여태까지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이니, 어미는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모른다.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안다.
남의 방식이지만 그에 맞는 예절을 보이려고 했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의지가 되어 좋구나.
너희들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나는 소임은 다했다.
사랑으로 낳고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 주어서 고맙다.
그러니 어미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그런대로 괜찮다.
마음 가는 대로 순리대로 살기를 바란다.
너는 책 줄이나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잠이 온다.
임태주 시인의 어머니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들아, 보거라!
좋은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인님의 시상에서 울려나오는 그 사랑...그 그리움..가슴 깊이 느껴집니다.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