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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았던 페르메이르의 발견
20세기 가장 극적인 미술품 사기 사건은 한 판 메헤렌(Han van Meegeren) 케이스였다. 1937년 아브라함 브레디우스(Abraham Bredius : 당시 가장 권위있는 미술사학자며 일생의 대부분을 페르메이르(Vermeer) 연구에 바쳤다.)는 한 변호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 변호사는 네델란드 왕실의 재산을 관리를 맡으려는 자로서, 브레디우스에게 '엠마우스의 그리스도와 사도들(Christ with his Disciples at Emmaus)'란 대작의 감정을 맡겼다. 작품을 감정한 80살의 이 늙은 미술사학자는 곧 부를링턴(Burlington : 당시 미술계의 성서)지에 작품에 대한 극찬과 함께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페르메이르의 작품이라는 감정평을 기고했다.
미술계의 '교황' 브레디우스 박사와 그가 진품이라고 감정한 '엠마우스의 그리스도와 사도들'
세상은 흥분했다. 고국인 네델란드에서도 보기 드문 페르메이르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 새로이 발견된 것이었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미술계에서도 어떤 의심도 할 수 없었다. '교황'이란 별명을 지니고 있던 이 늙은 미술 사학자의 의견은 바로 성가와도 같았으며, 그 누구도 이의제기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 이 작품을 그린 한 판 메헤렌(Han van Meegeren)만은 바보같은 세상을 비웃고 있었다.
조롱당한 괴링, 그리고 재판
독일군에게 짓밟힌 네델란드에서 판 메헤렌은 1942년 페르메이르의 위작을 은행가이자 미술품 거래상인 알로이스 미에들(Alois Miedl)에게 넘기고, 미에들은 이 작품을 또 다시 나찌의 2인자이자, 독일 공군의 총수인 헤르만 괴링에게 165만 길더에 넘겨버렸다. (2005년 기준, 미화로 625,000$내지는 7백만 $에 해당) 희귀한 페르메이르, 그것도 지금까지 발견되적이 없는 페르메이를 입수한 괴링은 자랑스럽게 그의 거처인 카린홀(Carinhall)에 이 작품을 전시했다. 하지만 1943년 8월 25일 괴링은 그의 약탈 예술품 컬렉션(메헤렌의 위작을 포함)을 6,750점의 나찌 약탈 미술품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소금 광산(salt mine)에 은닉시키게 된다.
귀족 출신으로 허영심이 강했던 괴링(가운데)과 그가 사기당해서 구입한 '그리스도와 간통한 여인'
1945년 5월 17일 연합군이 이 소금 광산에 진입하였으며, 해리 앤더슨(Harry Anderson)대위는 전에 알려진 적이 없던 페르메이르를 발견하고 상부에 보고하였다. 상세한 기록 남기기를 좋아했던 나찌에게, 이 작품의 구매경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연합군은 드디어 알로이스 미에들을 추궁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는 결국 판 메헤렌의 정체를 실토하게 되었다.
메헤렌과 그의 또 다른 위조작 후그의 '실내에서의 카드놀이(Interior with Card play)
증 명
사형언도도 가능한 공판에서 메헤렌은 괴링과 거래한 작품 그리스도와 간통한 여인(Christ and the Woman Taken in Adultery)은 진품이 아니라 자신의 위조작이라고 항변했다. 게다가 자신은 괴링이 약탈하려는 200여작의 네델란드 회화대신 페르메르를 팔았을 뿐이며, 사실 자신은 적과 협조한 자가 아니라 국민적인 영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다른 5작품의 페르메르와 두 작품의 피레테르 드 후그(Pieter de Hoogh)를 위조했으며, 모두 1937년 시장에 내보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화가가 페르메이르를 위조했다는 것은 결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재판부가 원하는 증인들. 즉 전문가들은 증인으로 출석하기를 꺼려했다. 행여나 실수라도 해서 자신들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었다.
증인들 앞에서 직접 페르메이를 그려보이는 메헤렌
결국 그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6명의 증인앞에서(페르메이르 전문가, 사진사, 4명의 경찰관) 메헤렌은 그 생의 마지막 위작 ‘박사들 가운데 예수(Jesus among the Doctor).를 그려보여야 했다.
1946년 6월에는 벨기에 왕립 예술 박물관(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의 중앙 연구소장 폴 코어만스 박사(Paul Coremans)를 위원장으로 하는 코어만스 위원회-영국, 벨기에, 네델란드인으로 구성된-가 메레헨의 스튜디오에서 발견된 작업도구들과 작품들에 대한 철저한 물리적, 화학적 조사에 착수했다. 메헤렌은 이 위원회에 협조하였으며, 그의 수 많은 도구들과 기술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또 다른 페프메이르 위작 '악보를 읽는 여인(Woman reading Music)'과 이를 감정했던 코어만스 박사
범행동기와 범행, 그리고 그 수법
공판에서 메헤렌은 20년대 후반부터 활발해졌던 모더니즘 사조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에 초기 얻었던 부와 명예, 그리고 평가는 모더니즘때문에 망가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단과 작가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실망했다....나는 17세기 작가들의 작품을 완벽히 위조함으로써 내 가치를 증명하기로 결심했다.”라고 메헤렌은 진술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메헤렌의 혐의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이자 최고의 위조작인 '엠마우스의 예수와 사도들'은 미술계에서 아무런 의심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새로운 위조작들을 그릴 것을 충돌질 해버렸다. 그리스도의 두상을 그린 작품을 중개인을 통해 팔았을때, 메헤렌은 최후의 만찬을 공부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왜냐하면 허위의식으로 가득찬 구매자가 완전한 작품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두상(Head of Christ)과 이를 기반으로 그린 최후의 만찬의 2차 버젼 (The Last Supper)
메헤렌에게 닥친 가장 중대한 문제는 작업장의 기밀유지였기 때문에. 그 어떤 모델도 고용되지 않았다.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메헤렌은 오직 상상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어떤 모델도 쓰지않고 다양한 포즈의 13명을 그려낸 것은 경이로운 성취였다. 이 때부터, 메헤렌은 직접적으로 페르메르를 훔치기 시작했으며 귀걸이를 한 소녀의 두상을 성 요한(St. John)에 그대로 응용했다.
여러분도 비교해 보시길, 그리고 최후의 만찬 완성판
판 메헤렌은 오래된 작품처럼 보이는 기교를 완성하기 위해 4년의 시간을 썼다. 가장 큰 문제는 유채 물감을 완전히 굳히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50년이 소요됨- 것이었다. 이 문제는 자신의 안료를 합성수지와 섞고 캔버스를 그을리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이제 페르메르를 그리기 위한 준비는 완료되었다. 메헤렌은 실제 17세기 회화를 경석과 물을 이용해 지워나갔다. 물감위의 균열선이 지워지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또 다른 위조작, 테보르그(Teborgh)의 '한 남자의 초상'과 프란스 할스(Frans Hals)의 '술마시는 여인'
메헤렌은 박물관에 걸려있는 작품들과 비교를 피할 수 있는 페르메르의 초기작을 위조하기도 마음먹었다. 페르메르는 초기작품에서 카라바죠(Caravaggio)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얻은 종교적인 테마를 자신의 작품에 투영했으며, 이 특성은 메헤렌 자신의 기교를 감추고 부적절한 표현을 감추는데 도움을 주었다.
결 론
1947년 9월 위원회는 마침내, 이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보고서는 이미 팔려나간 8작품을 (페르미르 6, 드 훅스 2) 포함하여,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메헤렌에 의해 제작된 위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0월 말, 재판부는 판결에서 적과 협조한 혐의를 기각하고 대신 위조혐의로 메헤렌에게 1년의 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법정 밖에선 그는 괴링을 엿먹인 네델란드의 국가적인 영웅이 되어 있었다.
법정에서의 메헤렌과 페르메이르의 진품 '기타 연주자(Guitar player)'
하지만, 메헤렌은 형기를 1개월도 못 채우고 사망해 버렸다. 약물과 알콜 남용이 그의 삶을 좀 먹고 있었던 것이다.
에필로그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국제 미술계에 대한 깊은 의혹은 끊이지 않았으며, 더 엄격한 자기 반성이 촉구되었다. 이 사건엔 미술 사학자, 감정가, 박물관, 파렴치한 중개인들이 모두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괴링이 사기당한 작품은 페르메이르 사후에 발명된 코발트 블루로 채색되어 있어 전문가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대가의 작품을 감정하는데 있어 더욱 신중하고 치밀한 접근을 할 것이 요구되었다. 판 메헤렌 사건은 미술계 여러 분야에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예는 아리에 보브 드 브리에스(Arie Bob de VrIes)의 페르메이르 모노그래프에서 발견된다. 1939년 이 책의 초판이 발행되었을때 43점의 스케치를 소개하고 있었으나, 1948년 재판이 나왔을 땐 작품수는 35개로 줄어버렸다. 이에 대해 드 브리에스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위조작품 거래가 왕성해졌다. 이 사실에 난 아연실색했고, 내 눈을 뜨게 만들었다. 난 내 책에서 의심가는 작품들을 모두 삭제하기로 마음먹었다.’
로렌스 고윙경과 그의 페르메이르 책자
판 메헤렌의 시대가 지나고 피에터 T. A. 스윌렌스(Pieter T. A. Swillens), 로렌스 고윙경(Sir Lawrence Gowing), 비탈레 블락(Vitale Block) 그리고 루드비히 골드샤이더(Ludwig Goldscheider)등에 의해 페르메이르의 모노그래프가 발간되었지만, 그 중의 정점은 1975년에 간행된 알버트 블랜커트(Albert Blankert)의 냉정한 연구서였으며 하나의 정화제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챕터인 ‘페르메이르와 그의 사람들’에선 처음으로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의 페르메이르 수집가들과 감정가들의 의견들이 실려있다. 그들은 페르메이르가 수수께기의 인물은 아니지만, 일류화가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알버트 블렌커트와 페르메이르가 언급된 그의 모노그래프
20세기 후반의 반세기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은 좀 더 객관적인 수단으로 재검증되었다. 코어만스 위원회가 수행했던 과학적인 검증도 혹독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페르메이르와 같이 복잡한 작품의 감정은 직관적인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맡겨지지 않는다.
그의 전 작품(oeuvre)은 이제 당시 네델란드 회화계에서 기초적인 역할을 했던 두상학(iconography)을 통해 당대 사회와 예술 환경과 관련되어 엄격히 연구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연구소의 분석자들도 그를 이해하는데 빼놓을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 반 전 : 괴링이 지불한 댓가는 위조지폐였습니다. 이 양반 마냥 순둥이는 아니었던 거죠.
* 여기에 메헤렌의 작품이라고 소개된 작품들은 정말 그의 작품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메헤렌의 아들은 아버지의 위작이 밝혀진것 보다 더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박물관이나 갤러리에서 품위있게 관람하는 명작들이 메헤렌이나 그 외의 위조작가들의 솜씨일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여러분이나, 저나 언제든지 괴링같은 머저리가 될 위험성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여러분의 돈 지갑을 여는 것이 악취나는 허위의식이 아니길 바라면서 글을 마칩니다. 아! 그렇다면 메헤렌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이루게 된 것일까요?
첫댓글 오.. 제가 화가로서 상당히 흥미롭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