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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현관에 행단유풍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호텔의 좌벽에 붙은 행단도를 자세히 보면 붉은 살구꽃이 피어난 것을 볼 수 있고,
제자들 중에는 거문고를 들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광(匡) 지역 사람들이 공자를 향하여 더욱 급박하게 포위망을 좁혀오자
제자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문왕은 이미 돌아가셧으나 문은 여기에 있지 않은가(斯文在玆)?
하늘이 이 문(文: 각주-문은 주대의 예악제도로서 문화의 도통을 의미한다. 공자 자신이 그 문화의 도통을 계승하였다는 말이다.)을 없애려고 하셨다면 우리들로 하여금 이 문을 전승할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하늘이 이 문을 없애려고 하지 않으시는데 광 지역 사람들이 나를 어찌 하겠는가!"
......
공자는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갔다.
공자는 제자들과 큰 나무 아래에서 예의에 대해서 강습하였다.
송나라 사마 환퇴가 공자를 죽이려 하였고, 그 나무도 뽑아 버렸다.
이에 공자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이 말했다.
"빨리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이을 사명을 주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
공자가 정 나라에 갔는데 제자들과 서로 길이 어긋나서 홀로 성곽의 동문에 서 있었다.
정나라 사람 누군가가 자공에게 말했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임금과 닮았고,
그 목덜미는 요(陶-고요皐陶)와 닮았고,
그 어깨는 자산과 닮았어요.
그러나 허리 이하는 우임금보다 3촌이 짧으며,
풀 죽은 모습은 마치 상가(喪家)의 개와 같았습니다."
자공이 이 말을 그대로 공자에게 고하였다.
공자는 흔쾌히 웃으며 말하였다.
"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상가의 개'와 같다고 하였다는데, 그것은 정말 그랬었지! 그랬었구말구!"
......
진 나라는 항상 침공을 당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고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지만 단지 일을 함에는 소홀함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진취성이 있고, 그들은 초지를 잊지 않고 있다."
이에 공자는 진나라를 떠났다.
......
공자가 사양자에게 거문고 타기를 배웠는데 열흘 동안 진전이 없었다.
사양자가 말하였다.
"이제는 다른 곡을 배워도 되겠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이미 그 곡조는 익혔으나 아직 그 연주하는 기법은 터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사양자 말했다.
"이제는 그 연주하는 기법을 익혔으니 다른 곡을 배워도 되겠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아직 그 곡조의 뜻을 터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사양자가 말하였다.
"이제는 곡조의 뜻을 익혔으니 다른 곡조를 배워도 되겠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아직 이 곡중 사람의 사람됨을 터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공자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깊이 생각하였고,
또 유쾌하게 원대한 뜻을 바라보게 되었다.
공자가 말했다.
"이제야 나는 그 곡중 사람의 인품을 알겠습니다.
피부는 검고, 키는 크며, 눈은 빛나고, 멀리 바라보는데
마치 사방의 제후국을 다스리는 것 같으니,
이는 문왕이 아니면 그 누구겠습니까!"
사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절을 하며 말하였다.
"원래 나의 은사님께서도 이것은 '문왕조(文王操)'라고 이르셨습니다."
......
공자의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여 예악은 폐지되었고, 시詩와 서書가 흩어졌다.
이에 공자는 3대의 예를 추적하여 서전의 편차를 정하되, ......
공자가 노나라의 태사太師에게 말했다.
"음악을 연주하는 과정은 이해할 수 있다.
연주를 시작할 때에는 5음이 조화를 이루고,
그 다음으로는 청순하고 잘 어울려 끊이지 않고,
잘 이어져 여운을 남김으로써 비로소 한 곡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이후에
비로소 음악이 바르게 되고, 아와 송이 각기 제자리를 찾았다."
......
이렇게 정리한 305편의 시에 공자는 모두 곡조를 붙여 노래로 부름으로써
소韶, 무武, 아雅, 송頌의 음악에 맞추려고 하였다.
예와 악이 이로부터 회복되어 서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왕도가 갖추어지고 육예六藝가 완성되었다.
공자는 시, 서, 예, 악을 교재로 삼아 가르쳤는데, 제자가 3,000명에 이르렀고,
그중 육예에 통달한 자도 72명이나 되었다.
-<<사기>> <공자세가>(정범진 외 옮김, 까치)
공자님 사당, 대성전
대성전의 웅장한 석주들
대성전 안의 공자상
닫집 위에 사문재자, 만세사표라는 액자가 보인다.
행단, 공자님이 제자들을 살구나무 아래서 지도하였다.
행단 좌우에 잎이 진 나무들이 살구나무로 보인다.
은행나무는 아니다.
The terrace was built in Song Dynasty, and apricot trees were planted here,
(단은 송 나라 시대에 지었는데 여기에 살구나무들을 심었으며,)
the pavilion was built on the site of the terrace in the Jin Dynasty and rebuilt in the Ming Dynasty.
(정자는 금 나라 시대에 단 터에 지었는데 명 나라 시대에 다시 지었다.)
금의 당회영이 쓴 글씨(행단 안에 세워져 있다)
건륭제의 행단찬 비
杏壇贊 행단찬
憶惜緇帷詩書授受與有榮焉
기억하자니, 그 옛적 공자께서 임유의 숲, 행단에서
제자들에게 시(악), 서(예)를 가르치신 그 교육활동이 활발하였다.
軼桃轢柳博厚高明亦曰悠久
복사꽃 지고 버들이 푸르러며 세월은 변하지만 넓고 두터운 땅의 덕과
높고 밝은 하늘의 덕과 같은 공자님의 가르침은 유구하다.
萬世受治杏林何有
만세토록 세상을 다스리는 법도의 가르침을 받을
살구나무 숲은 어디에 있는가?
御筆
청 건륭황제 어필.
황제가 살구나무라고 인식하기에
그와 짝하여 복숭아꽃, 버드나무를 언급한 것입니다.
행림은 그러니 당연히 살구나무 숲으로 번역해야겠지요
孔子游乎緇帷之林, 休坐乎杏壇之上, 弟子讀書, 孔子絃歌鼓琴.
공자는 우거진 숲 속을 지나다가 살구나무가 있는 높고 평탄한 곳에 앉아서 쉬었다.
제자들은 책을 읽고 공자는 노래를 하며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안동림 역주, <<장자>> <어부>)
공자가 제자들과 강학(講學)했던 행단(杏壇)에 나무만 울창하게 우거진 것에 대한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행(杏)을 은행나무로 간주하고 이 나무를 많이 심었던 데에 반해 중국에서는 측백나무를 많이 심었다. 행단(杏壇)의 고사는 “공자가 치유(緇帷)의 숲 속에서 노닐며, 행단(杏壇) 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나니, 제자들은 글을 읽고 공자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는 《장자》 어부(漁父)의 말에서 유래한다.
(한국고전번역원 간이집 신사행록의 시, (베이징)국학(성균관)을 관광하다의 역주).
시에서 행단에 측백나무가 우거져 있다고 했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중앙에 행단(杏壇, 싱탄)이 있다. 행단은 2층 헐산식 지붕이고 황색 기와를 얹었다. 단 앞에 금나라 때 만든 석재 향로가 있으며 단 내에는 청나라 건륭황제 고종이 쓰고 세운 행단찬(杏壇贊) 비가 있다. 공자는 일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대문헌의 정리와 후세교육에 마지막 남은 열정을 바쳤는데 바로 이 행단이 중심활동구역이었다. 송나라 진종 천희 2년(1018)에 대성전을 북쪽으로 옮겨 확장하면서 원래 공자고택의 교수당이었던 이 터에 단을 만들고 살구나무를 심어 행단이라 했는데 금나라 시대에 비로소 단 위에 건축물을 세우고 승안(承安)무오년(1198)에 공자의 후손들이 당대의 문필가 당회영(黨懷英)의 글씨로 비를 세웠다고 한다. 공자가 여기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진리를 강론하며 고전을 정리했다고 하여‘행단예악(杏壇禮樂)’이라는 말이 생겨났지만 고사를 떠올릴 늙은 나무는 없고 어린 살구나무 두 그루가 마당에 서있다. (이재수, 삼공견문기).
은행(銀杏)나무가 아니라 글자대로 살구나무라고 하였다.
공자세가에는 공자님이 송나라에서 큰 나무 아래서 교육을 하였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무슨 나무인지는 나와 있지 않다.
문묘, 서원, 사찰, 마을 등에 은행나무가 많고, 성균관대와 일본 도쿄대의 뱃지에 은행나무잎이 나온다.
영국의 식물학자 피터 크레인에 따르면 은행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이고
공룡이 멸종한 뒤에 멸종위기종이었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인위적으로 은행나무를 보호하여 번식된 나무라고 한다.
행단의 행은 은행나무인가? 살구나무인가?
인터넷을 검색하니 은행나무설과 살구나무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박상진 경북대 교수는 나무의 성질로 보건대,
행단의 나무는 살구나무보다 은행나무이었을 것으로 여겼다.
역사학자로 나무에 얽힌 문화사 전문가인 강판권 계명대 교수는 살구나무라고 한다.
나카무라 고이치(中村公一), <<한시와 일화로 보는 꽃의 중국문화사>>에 행단의 유래를 이렇게 말한다.
"한 나라 명제가 공자 구택을 방문하여 교수당敎授堂 터에 대전大殿을 세웠고,
송 나라 건흥 연간(1022)에 대전을 뒤로 옮기고, 그 자리에 살구나무를 심고 흙단을 쌓았다.
금 나라 학자 당회영黨懷英이 방문하여 행단이라는 두 글자의 비를 세운 것이 행단이란 명칭의 유래이다.
중국에서는 살구나무를 급제화라고 하는데, 이는 당나라의 과거제도와 연관 있다.
살구꽃이 핀 정원에서 급제자 연회가 열렸는데 이를 행연이라고 하였다.
-경북환경연수원 숲 해설가협의회 이정웅 강사의 글, <행단의 나무는 은행일까, 살구나무일까>
행단의 나무는 살구나무라고 보아야 한다.
송 나라 건흥 연간에 공자 후손 공도보孔道輔가 사당 앞에 단을 만들고
둘레에 살구나무를 심고서 행단이라 이름을 붙였다.
금나라 학사 당회영黨懷英이 행단 두 글자의 비를 세웠다.
....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행단변증설, 정선의 그림, 행단고슬에는 은행나무라고 한다.
중국의 문헌인 사문유취, 연감유함, 시학전서 등과
우리나라 민요 꽃노래, 심청전 화초가 사설(칠십제자 강론하니 행단춘풍에 살구꽃),
변강쇠가에 '살구나무 베자하니 공부자의 강단',
공자성적도 행단예악 그림에는 살구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로보면 살구나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희, <<꽃으로보는 한국문화(3)>>
행단(杏壇)의 살구나무와 은행나무
행단은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곳을 이른다. 글자 그대로 나지막한 단을 쌓고 ‘행(杏)나무’ 몇 그루를 심어서 만든 전용 야외 강단이다.
행을 옥편에서 찾아보면 살구나무와 은행나무를 동시에 나타내는 글자로 풀이하고 있다. 그래서 행단에 심겨진 영광의 나무가 이 두 나무 중 어느 것인지를 두고, 옛 사람들은 물론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만들어진 행단에는 은행나무를 심어왔다.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중종 14년(1519) 윤탁(尹倬)이 강당 아래에 나무 두 그루를 심었는데, 명륜당 뜰의 은행나무(文杏)가 바로 이것이다’고 하였다. 이처럼 오늘날 서울 명륜당에 있는 이 은행나무가 대표적인 행단의 나무이며,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공자 사당이 있는 곳에는 대부분 은행나무가 심겨져 있다.
행단의 은행나무 심기를 두고 조선중기의 문신 이수광이 그의 저서 <지붕유설>에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공자가 행단에 앉아 있다’고 하였는데, 사문류취(事文類聚)란 책을 보니, ‘행(杏)은 홍행(紅杏)이다’라는 구절이 있고, 강희맹의 시에도 ‘단 위의 붉은 행화는 반이나 떨어졌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이 행을 은행나무로 의심하는데 그것은 살구나무의 잘못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또 정약용의 <아언각비>에 ’우리나라 사람이 잘못 알아 공자의 사당 뒤에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을 상징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공자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중국의 행단 유적지에는 살구나무도 은행나무도 심겨져있지 않다고 하니 시시비비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 두 나무의 자람 특성을 가지고 행단에 어느 나무가 심어졌을 것인지를 알아보자.
살구나무는 이른 봄 다른 나무보다 먼저, 그것도 잎도 피기 전에 꽃부터 피우고 바로 열매를 맺어 6월이면 벌써 노랗게 익어 땅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한 해 동안 살구나무가 해야 할 임무는 이렇게 일찌감치 끝내버린다. 이후는 잎이 활력을 잃고 병들어 지저분해 지며 벌레가 먹기도 한다. 또 널찍한 그늘을 만들 만큼의 아름드리로 자라지도 않으며 수명도 그리 길지 않다. 이런 특성으로 보아 살구나무는 행단의 나무로서 적합한 나무가 아니다. 공자가 행단에다 제자를 모아놓고 글을 가르칠 때는 더위를 피할 그늘이 필요한 계절이었을 것이다. 대체로 늦봄에서 초가을에 해당하며 이때의 살구나무는 그늘나무로서 역할이 어렵고, 크게 자라지 않은 것도 역시 행단의 나무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반면에 은행나무는 행단의 나무로서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 봄에 잎사귀가 새로 돋아 어울리기 시작하여 그늘이 꼭 필요한 여름이면 무성한 잎을 충분히 펼쳐준다. 더욱이 은행나무에는 벌레가 덤벼들지 않아 나무를 그늘 삼아 담론을 펴기에 적당하며 오래살고 크게 자라 넓은 공간을 마련해준다. 은행열매는 가을에 들어 행단에서의 강의가 필요 없을 때쯤에나 익으니, 고약한 냄새 피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아예 열매가 달리지 않은 수나무만 골라 심어도 된다. 명륜당 4그루의 은행나무가 모두 수나무인 것은 좋은 예다.
행단에 무슨 나무를 심었을 것인지는 공자님의 일생과 업적을 알아보는데 별로 주요하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헌기록으로 밝히지 못하는 사실을 이렇게 과학적인 접근으로 실마리를 풀어가는 일은 고전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월간 에세이 2003년 02월호>
황사와 살구나무 글쓴이: 강판권 계명대 교수 황사의 계절이다. 황사는 중국 북부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황하 상류지대의 흙먼지가 강한 상승기류를 타고 3000∼5000m 상공으로 올라가 초속 30m 정도의 편서풍을 타고 우리나라까지 날아오는 현상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황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사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황사를 '흙이 비처럼 떨어진다'는 뜻의 ‘우토(雨土)’, 혹은 ‘토우(土雨)’라 적고 '흙비'라 불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토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태종(太宗) 6년(1406) 동북면 단주에 14일 동안 흙비가 내렸다는 기사이다. 이처럼 황사는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봄철에 겪어야 하는 현상 중 하나이다. 중국에서 발생하는 황사는 역사적으로 이해해야만 해결방법도 찾을 수 있다. 황사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숲의 제거이다. 중국 황토고원의 경우 은나라 시대에는 80%이상이 숲이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 농지 개발 등으로 울창한 숲은 사라졌다. 중국의 황사 현상은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이 숲을 제거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황사의 원인이 숲의 제거였다면 황사 문제의 해결 방법도 숲일 수밖에 없다. 현재 중국에서 황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토고원을 비롯한 곳곳에 숲을 조성하고 있지만, 숲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듯이, 숲도 결코 하루아침에 조성할 수 없다. 그런데 숲을 제거하는 것보다 숲을 조성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무는 순식간에 밸 수 있지만, 나무가 자라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황토고원에 심고 있는 나무 중 하나는 살구나무이다. 장미과의 살구나무는 중국 명대 이시진의「본초강목」에도 ‘행’을 살구나무로 번역한 경우도 있지만 은행나무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중국에서 ‘행’은 분명히 살구나무지만, 우리나라에 따르면 ‘개를 죽인다(殺狗)’는 뜻이다. 살구나무는 「논어」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행단(杏壇)’으로 유명한 나무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살구나무를 의미하는 ‘행’을 살구나무 외에 은행나무로 이해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에도 ‘행’을 살구나무로 번역한 경우도 있지만 은행나무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중국에서 ‘행’은 분명히 살구나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격의과정에서 은행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황토고원에 살구나무를 심은 것은 건조한 곳에서도 잘 살기 때문이다. 살구나무의 꽃은 고향과 낭만의 상징이다. 홍난파 작곡, 이원수 작사의 「고향의 봄」에도 ‘행’을 살구나무로 번역한 경우도 있지만 은행나무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중국에서 ‘행’은 분명히 살구나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살구꽃이 고향을, 중국 당나라 두목의 「청명」 시에서는 ‘술집’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특히 살구꽃이 피는 마을, 즉 행화촌을 ‘술집’이라 부르는 이유도 두목의 시 덕분이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살구나무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나무이다. 살구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호랑이도 물리칠 수 있었다. 살구나무는 매화와 비슷한 시기에 꽃이 피고, 열매도 닮아서 구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간혹 살구열매를 매실로 착각한다. 살구의 열매를 ‘행인(杏仁)’이라 부른다. 공자의 사상을 대표하는 인이 바로 씨앗을 의미한다. 씨앗은 생명을 만드는 종자이다. 인은 사람의 몸에 있는 착한 성품과 같다. 착한 성품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삶의 목적이다. 착한 성품을 밖으로 드러내기만 하면 이 세상은 살구꽃처럼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