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환상
여명이 밝아오면 도시는 밤새 품었던 마지막 불빛을 지우며 깨어난다.
도시는 본래의 회색빛을 드러내며 밤새 일어난 일들을 가슴에 묻으며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햇살을 받으며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술 취한 자의 절규도, 청춘 남녀의 사랑도 간혹 낡아빠진 늙은이의 처진 어깨도 감싸면서 밤 동안 불을 밝히고 머물다가 여명이 밝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불빛을 지우는 것이 운명처럼 보인다.
우린 늘 이곳에 살면서도 이곳이 주는 느낌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여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버릇처럼 된 지 오래다.
아침 일찍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냥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면서도 온갖 사연을 밤마다 품어내는 도시에 관한 관심은 없었지만, 어느 하루 여명이 밝아오는 순간 하나둘 불빛을 지우며 깨어나는 도시의 민낯을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내가 머무는 이곳이 여러 가지 얘깃거리가 피어나는 곳임을 발견하고 관심이 가져본다.
매일 습관처럼 걷는 온천천만 해도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있으니 걸었을 뿐인데 발걸음을 멈추고 유유히 흐르는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도 수많은 생명체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터전임을 알 수 있다.
무심코 바라보면 그냥 물이 흘러가는 모습만 보인다.
그러나 발길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물고기가 한가롭게 노닐고 있고 그 종류도 다양함에 놀란다.
언제부터 그 물고기들은 이곳을 아지트 삼아 살고 있었기에 거대한 몸집으로 자라나 각기 다른 크기를 가지고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든가.
같은 종의 물고기는 뭉쳐서 산다.
천적으로부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인지 그 고유종이 가지는 특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미는 어미대로 새끼는 새끼대로 한곳에 뭉치고 잉어는 잉어대로 피라미는 피라미끼리 뭉쳐 사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만이 뭉쳐 사는 것이 아닌 모든 동물의 삶의 방식이 엇비슷함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거들떠보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이 물고기들은 좋았을지도 모른다.
괜히 관심이 생기면 그물로, 낚시로 그들의 생명을 위협했을 테지만 인간의 관심이 사라짐으로써 그들은 평온하고 한가롭게 헤엄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 종류도 다양하다.
잉어, 붕어, 미꾸라지, 피라미, 민물장어, 가물치, 붉은귀거북, 자라 그리고 이런 것을 위협하는 왜가리, 오리, 원앙새, 수달도 터를 잡았다.
원앙과 오리는 철새다.
그 철새가 겨울철이면 어김없이 작년에 찾았던 이 장소를 무리 지어 찾아든다는 사실도 흥미롭고 오리처럼 주저 앉아 텃새처럼 사는 종도 있어 즐겁다.
늘 바쁘게만 걷다가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온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와 새와 동물을 발견함으로써 걸음걸이도 느려지고 관심이 있어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는 여유도 생겨난다.
삶이라는 이런 건가 보다.
바쁘다는 핑계로 주위에 눈길을 돌리지 않으면 그곳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모르고 바보처럼 혼자만의 세상 속에 동떨어져 버린다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하니 말이다.
늘 같은 곳을 걷고 있지만 만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지 않다.
누군가는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두리번거리지만 보이지 않고 때론 누군가는 만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데도 반드시 만나지는 얄궂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네의 인생이다.
간혹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상상은 돈이 들지도 않지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특권 같은 느낌이 들어 항상 즐겁다.
바윗돌 위에 덜렁 앉아 따뜻한 햇볕을 쐬고 있는 자라를 발견하고 저들은 과연 어디다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를까 하는 궁금증처럼 눈앞에 보이는 동물에 관한 관심도 가끔은 혼자 웃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음을 안다.
왜가리의 밥상은 물고기가 사는 강이다.
그래서 왜가리는 물속에 똥을 싸지 않고 강변에 나와 볼일을 본다.
이 작은 현상을 보면서 새가 가진 지혜는 어디에서 왔을까 하고 궁금증을 가져보면 그냥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은 인간의 얘기 속에 우물물 안 먹을 거라고 침 뱉고 간다는 속담이 어우러져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드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다.
다시는 이 우물물을 먹지 않을 거라며 침 뱉고 간 인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서 돌아와 그 우물물을 먹지만 왜가리는 자신의 식탁에서 실례하는 짓을 즉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춰보면 인간이 더 낫다고 과연 주장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땜에 부끄럽게 된다.
이렇듯 무감각한 게 현대인인가보다.
하천을 지키는 것은 비단 물고기와 동물만은 아니다.
늙고 기력이 쇠잔해진 노인네도 한몫한다.
물고기 먹이를 뿌려대며 노인은 고기와 대화하며 시간을 보낸다.
아무 말이라도 상관이 없는 듯 하다.
그냥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커다란 잉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연신 준비해온 먹이를 뿌려대지만, 왠지 모르게 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고독이다.
누군가는 노인 곁에서 떠나가고 혼자 남았을 것이다.
얘기하고 싶은데 그 노인의 주위에는 말벗이 없다.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도 저 노인처럼 될 것임에도 지금은 아니니 그냥 무관심하고 내버려 두지만 무서운 세월의 속도 앞에서 곧 닥치고 느끼게 되리라는 분명한 해답을 이해하려 하지 않을 뿐이다.
이 노인네의 삶에는 특이한 느낌이 존재한다.
같은 노인네지만 남자와 여자는 함께 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모여 수다를 떨고 있지만, 남성들은 거의 혼자 멍하니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본다.
왜일까?
이 작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나 또한 혼자였음에 간혹 깜짝 놀라곤 한다.
늙은 남자는 찾는 사람이 없다.
그것이 동물세계의 기본 구조인지 모를 일이다.
사파리를 떠돌아다니는 늙은 사자의 모습이 떠올라 어쩌면 수컷의 말로는 언제나 인간과 동물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해보게 된다.
신이 창조할 때 숙명을 부여한 것이라면 쉽게 받아들이고 적응하면 될 것이다.
만약 용감하다면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고 하고 달려들면 될 테지만 쉽게 만들어진 환경이 바뀌기는 쉽지 않으니 그냥 수긍하면서 살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도시는 늘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억을 간직하고 사람들은 그 속에 일어나는 얘기를 자신의 구미에 맞게 재단하고 칼질하여 그것만이 진실인 것 인양 나불대며 산다.
인간은 진실을 말할 자격이 없다.
그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기주의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서울 하늘 아래 이태원이라는 곳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여 또 세상은 누구 탓을 하면서 난리다.
이럴 때마다 나는 세상 민심과 다른 엉뚱한 생각 땜에 머릿속이 늘 복잡해짐을 느낀다.
누구의 책임인가에 대한 의문인데 바보스럽게도 나는 항상 그 모든 사건·사고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는 생각이다.
살면서 늘 기억하는 것은 위험한 곳에는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죽을 만큼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고 있는데 그곳에 머문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피하는 것인데 결국은 무사할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이 사고와 직결되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우리나라 명절도 아니고 축제도 아닌 서양의 귀신 놀이에 신나서 서양과 다른 엉뚱한 축제에 자신의 몸을 희생시킨 것은 누가 뭐라고 말하든 난 그들 자신의 귀책 사유가 제일 크다는 얘기다.
죽은 자가 불쌍하다 안하다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지키지 못한 것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이다.
그다음 생각에 국가가 존재할 뿐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의 행동에 규제를 가했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할 수 있지만, 만약 경찰이 나서서 일일이 간섭하면 그곳에 모인 인간들이 잘하고 있다고 쌍수 들고 환영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상상일지 모른다.
이처럼 모든 사연을 오직 침묵하고 있는 도시만이 알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인간은 늘 그랬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늘 누구탓이라고 난리를 친다.
누구 탓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지키지 못한 어리석음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해가 저물면 도시는 또 화려한 불빛을 드러내며 허영과 망상 속을 헤매는 인간을 불나방처럼 만들어 모여들게 할 것이다.
그곳에서 수많은 얘기가 피어나고 또 난데없는 사건과 사고들이 만들어져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것이다.
이건 인간이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드라마와 같아서 사람들은 그 드라마 속 주인공으로 참여함을 기꺼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화려한 불빛을 찾아 날아간 불나방은 결국 불에 타서 죽듯이 화려한 유혹에 빠지면 그 속에 늘 위험이 남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비틀거리는 도심 속 밤은 아름답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그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얘기는 늘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난 오늘도 회색의 도시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화려한 불빛 속을 그리워하지만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불나방처럼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보호해야만 온전히 존재함을 알기에.
내려다보는 도시는 늘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불빛과 황홀한 느낌은 언제나 여명과 함께 사라지고 석양과 함께 되살아 나는 귀신같은 느낌으로 늘 와닿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