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남 화순 출생
시집, 흰길이 떠올랐다(1999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흰길이 떠올랐다 1
어떤 나이든 여자는 자신의 책을 내면서, 표지에, 젊은날의 사진을 골라 버젓이 실어놓았다. 그리하여 기인 생머리칼 자락이, 그녀의 한가로운 閑談集 안에서 물비린내를 훔씬 풍기며 출렁이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터질듯이 부풀어오른 그 나이든 여자의, 과거의 상반신에 대하여(탱탱한 유방 근처와......) 그리고 그녀의 현재의 저의(?)에 대하여, 상당한 의혹과 유감을 가져보기도 하였다.
2
어머니는 한땀 한땀 힘들게 바늘귀를 놀렸다. 당신의 그런 집착과 망아의 시간 곁에서, 나는 곧잘 실패라거나 골무 등속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움에도 빛깔이 있다면...... 내게 있어 그 시간들은(귀머거리와도 같았던!), 어쩌면 온통 회색의 색감이었다. 어머니는 손바닥만씩한 헝겊을 덧대어, 상보라거나 책보 같은 걸 기워놓곤 하였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힘들게 들려준 적이 있었다.(얘야, 나는 내 안팎의 상처를 깊곤 했구나.)
3
마음의 실꾸리에 감긴 좌절을 재료삼아 그렇게 자신을 기웠노라던 한 여자(어머니). 내게도 문득 흰 길이 하나 떠올랐다(흐릿한 길......), 혹시 그 여자들은(늙은 여류 한담가와 어머니), 제각기 혼신의 힘으로, 자신의 옛날 사진 한닢과 손바닥만씩한 헝겊조각들 속에서, 어느 여름날의(사무치게 은성했던 날의) 숲길 앞에 이르는, 푸르름의 길모서리 하나씩을 글썽한 눈매로 떠올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며, 내게도 오랜 전의 먼길이 하나 떠올랐다. 거기 가뭇한 유년의 강둑(- 강변)을 지나, 그 미루나무 숲길 위를 아무렇게나 배회했던, 빛나는 이마를 가진 소년이 하나. 이제 막 맨발의 푸른 길 너머로 길게 이어진 희미한 배경 속에서, 마치도 생시처럼 아프게 어려주었다.
상사, 그 광휘로움에 대하여
<언제부턴가 마을에 흘러들어와 야메로 치과를 열었던...... 시나브로 그는 절반 넘게 죽어서, 궁리 끝에 어른들은 그를 위하여 가짜 상여를 메기로 했다. 상여는 그렇게 마을을 나서, 진짜 장례식의 거릿제쯤에 이르자, 마을의 수당골이 한차례 떠들썩한 치성을 올려주었고, 홑이불에 싸여 죽은 듯이 누워 있던 그는, 산죽음의 멀고도 가까운 길을 한차례 돌아 나온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뒤에 그는 곧바로 거짓말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한동안 사람들의 병든 이빨을 돌보다가 마을에서 이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비밀스런 말투로 어른들은 그 일을 일러 想思라고 그랬다.>
내게도, 꽃술 실한 수국 한 송이. 기도처럼 간곡하게 그에게로 드리웠던...... 긴한 마음의 옛 자취. 그러나 그 깊은 자리. 끝내는 혼자만의 화농으로 벌겋게 익었다가 가뭇없이 져야 했던, 만개한 마음 꽃 한 송이.
그래도 기억은, 가끔, 세월의 생살로 까마득히 차올랐을 종창의 흔적 가까이 데불고 가 마음 쓰이게 하면, 상사, 어금니에 마른침이 고이도록 아름다웠던, 비밀한 그 한 말씀.
詩는 쓰러지거라
희미한 옛 사랑처럼...... 막다른 골목의 저녁 노을처럼...... 한 시절은 그렇게 스러져갔노라고...... 시대의 사랑법도 바뀌었노라고...... 고상한 뒤폼들을 마음껏 구가하며...... 누군가는 새로운 공법의 비급을 좇아...... 오리무중의 장난질을 닮은...... 안개의 서정 너머로...... 홀연히 잠적하였거나, 등돌아 나섰더라도...... 그래도 너의 시는...... 깍두기 한 사발과 콩나물 한 접시...... 뽀얗게 김이 서린 옹배기를 내려놓고 가던...... 국밥집...... 늙은 주인의 손길 아래...... 죽은 살코기와 허연 뼛국물이 이루어놓은...... 혼곤한 국물 속으로......
시방. 여기. 이곳과 더불어 힘없는, 버림받은, 죽어가는, 온갖 것들과 더더욱 더불어
덜 삭은 김치가닥이 엉겨붙은...... 토사물 질펀한 공중변소 앞에서...... 그 변소 오물을 치우는 물바랜 새마을 모자...... 김씨 박씨 곁에서...... 그들의 왜소하고 쓰라린 등덜미 뒤에서...... 시는 쓰러지거라...... 그곳에서 다시 일어서거라...... 아니, 아니...... 코를 쳐박고 엎어져 뒹굴기도 하거라......
( 시방, 여기, ... 코머 대신 가운데 방점 )
그리움
원수보다도 용서보다도 깊은 것 흉몽의 긴 밤을 허우적거리다가 뒤척이며 깨어난 새벽녘에 이마 위에 푸릇푸릇 돋친 소름과 같이 온몸으로 으스스 들던 한기와 같이 그렇게 차고 맑은 것! 독약보다 더 어둡고 쓰라린 것.
光州行
그예 한사코 가난한 지붕들을 너나들이 머리에 이고, 낯익은 누런 얼굴들이 디귿 리을 살고 지는 거기. 그 피붙이의 마을에 가까워지면, 어쩜 집집이 저녁 밭솥을 데우던 그리운 시간 곁으로, 먼지 자욱한 그 길 따라가는 길엔 '워따, 환장허겄다.' 등꽃 같은 사투리 넌출도 살가운 가슴녘 온통, 푸져오거라.
저녁 강의 時
世事야 오만사 시름 깊을 적에 허한 마음의 끝자리인 양 강에 이르면
비인[空]강 물소리 곁으론 일모의 설핏한 햇살 젖은 몸을 뒤척일 적에
밤벌레 소리소리 들릴 적
새벽밥
거기, 남보다 먼저 나서 바삐 닿아야 할 고난의 세월 있으니 찬이슬 속에 깜박이는 잔별빛 어깨에 받고 밥 한 그릇 간다
후루룩 둘러마신 물통 같은 밥통 되게 흔들며 밥 한 그릇 서둘러 차운 길 간다.
그 꽃밭 속
이른 저녁 푸른 바람 속 그 자리였던가요 우물 앞 평상 위에 동그랗게 피었던가요 단내음 물씬했던 속살 한입씩 베어물면 입술들은 다투어서 꽃술로 붉었던가요 때맞추어 지붕 위로 달꽃 덩달아 환해오면 싸리울 담장 가득 별꽃들도 뒤질세라 두세거렸던가요
그 꽃밭 속, 오물고물 이빨 없는 할미꽃 한 송이 희끗해진 울 아부지 주름꽃 또 한 송이 귀밑머리가 서늘해진 울엄니 그늘꽃의 꽃그늘 아래 누이들 사춘의 분홍물 가슴 위로 연한 수박향의 목덜미 근처 눈길 가닿고 나면
그 꽃밭 속 내 이름도 한 송이 꽃이름이고 싶었던가요 먼 길 휘돌아 날고픈 큼직한 날개의 꽃잎 한 장 가슴엔 듯 품었던가요
그 꽃밭 속, 우물가 평상 위로 한 저녁의 식구들 동그랗게 둘러 앉아 영락없는 제 모습만큼씩 오종종 맺혀 있던 거...... 꽃잎들은, 바람결에 제 향기로 일렁였던가요 꽃잎들은, 서로에게 동그랗게 벙글어도 주었던가요.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1993년 실천문학사)에서
春陽行
키 높은 미루나무 들길 꾸불텅 지나 석정리 큰고모네 처음 갔을 때 고모는 살가운 마음 주름진 눈매에도 어려 그날따라 닷새장, 해어름 파장터에서 당신의 속마음 닮은 두툼한 털실 스웨타 한 벌 말없이 내게 사 입혀 주시더니 처녀적의 보름달 둥근 얼굴로 왠지 그렇게 환해지시고 말았던가 식구들 해저녁의 저문 기다림 속으로 납석광 겨운 일 늦은 덥수룩한 고숙은 오종종 키 작은 걸음 기우뚱 비틀려 오셔 어따! 요놈 누구냐 많이 컸구나...... 매큼한 막술내음 끼친 횡설거림 길고 어언 나는 서른녘, 그날의 고숙을 닮은 고단한 월급쟁이 행색 심심찮게 읍면 구석에 출장 나댕겨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오늘은 春陽面 간다
옛집 마당에
바람도 한바탕 씽씽 불어라 세차도록 칼칼히 시원스레 불어 우리들 뛰놀았던 대숲 언저리 죽순 같은 희망으로 뾰족한 그리움으로 흔들어 들깨울 것들 죄다 깨워라
할머니의 텃밭 가득 토란은 살쪄 알이 굵고 마늘은 여물고 상추꽃은 쇠어서 허옇게 허옇게 머리 풀고 날려라
굴뚝엔 연기 오르고 사랑엔 등불 밝혀서 그날 밤 뒤란 가득 탐스런 감꽃들도 수북이 쌓이거든 쓰러진 토담벽 울타리를 넘어 수심 서린 잔별들도 총총히 밝고 주름 많은 빨래를 펴던 어머니의 방망이질 소리 당신의 깊은 한숨 소리에 마당도 한쪽 폭삭 꺼져라
부엌에는 도둑고양이 마루 밑에 새앙쥐 뒤주 아래 두꺼비 확독 곁에 씨암탉 싸움도 한판 설크러지고 풀기 없는 오랜 고요를 깨워 앞산도 쩡쩡 이마를 쳐라
어수선한 대청마루 신발 흐트러진 토방 끝까지 성가신 애기들의 울음소리가 사립짝 울바자 위에 소란스레 울리고 옛집의 너른 마당귀 해마다 화들짝 피던 허연 살구꽃 그늘, 그 아래 여린 풀잎 한 잎도 다시금 남김없이 푸르름 들어라
한평생 - 어머니 하나
울 엄니는 열아홉 봄날 아침에 먼 길을 오셨답니다 그날 아버지네 마을의 햇볕들은 참으로 따뜻이 눈에 부셨고 마당가 꽃잎 틔운 살구꽃 그늘 그 아래 소년처럼 웃고 서 계셨던 아버지의 처음 모습을 울 엄니는 지금도 총총 기억하고 계신답니다 달뜬 울 엄니의 귀언저리에 홍시빛 부끄러움의 찐한 물이 들고 물든 그 가슴을 열어 난생 처음인 아버지를 맞던 첫날밤, 뒤채이며 새운 이른 새벽참엔 암도 모를 눈물도 한줄금 떨궜더랍니다 그렇게 하여 울 엄니는 그 집의 감나무 가지 하나 이쪽에서부터 저쪽의 살구나무 가지 하나 그 거리만큼 넉넉한 빨랫줄을 한 줄 내걸었더랍니다 빈 빨랫줄 위로 울 엄니의 평생의 날들이 물기 많은 빨래가 되어 지나갔는데 저 먹을 것 없었던 날들도 가고 저 깜깜밤중이었던 날들도 가고 아! 그랬답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구속의 마음으로 당신이 매단 사랑에의 끈, 한생애의 매듭이었더랍니다 어쩌다 우리들 귀향 때면 울 엄니는 아직도 삭은 빨랫대 위에 지금은 당신 자신이 물기 빠진 빨래가 되어 허옇게 나부끼고 계신답니다
(1990년 광주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어머니 연작시 중.)
아픈 날 - 어머니 셋
당신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래된 어머니의 바늘침 하나 손톱 밑에 꼬옥 간절히 찔러주시면서 괜찮다고...... 괜찮다고...... 당신이 곁에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첫날밤
누구도 중신 선 일 없다는데 지들끼리 눈 맞춰 입도 맞췄다는데 때깔 곱던 윗말 김가 딸내미 여울물 닮은 삼삼한 눈빛 볼우물 깊던 그 값 했다는데 아랫골 알부자 조생원댁 외아들이고 보면 연애도 한번 알토란으로 저질렀다는 동네 아낙들 농지거리가 빈말만은 아니었는데 처지 나는 집에, 그것도 손 귀한 집으로 무망간에 딸년 들인 윗말 김가 처는 첫날밤 늦저녁 토방가에 별빛 불러 축원했는데 떡두꺼비 고추도 서넛 구시렁구시렁 빌고 시어른 남편 사랑도 고시랑고시랑 빌었는데 모두 다 잠든 그 밤의 뒤끝을 한 사람은 오래 남아 뜬눈 밝혀서 두세두세 지새웠는데
아는지 몰라라 팔베개로 진한 잠 든 신랑각시야 저 방문 밖의 바람 소리 닮은 그 누구의 마음
인례
그랬어야 너를 문득 기억하다가 잠에 들었던 밤이면 쑥국새 울음소리 닮은 쓰라린 기억 여직 꿈속에서도 상기 선연했어야 그냥 떠올리는 일 하나만으로도 눈물 금새 비쳐오던 내 열여섯의 저쪽, 봉긋한 첫사랑의 부끄럼일랑 결국은 네게 바치지 못하고 말았지만 거기 옛날 같은 우리들의 푸른 하늘이야 철없던 가시내의 노을 뜬 가슴같이 모진 한순간에 쉬 변하지 않겠지야 나는 이제 우리들이 자주 갔던 오디밭 지나 애장터 돌각담 위에 파릇이 맺혀 있던 그날의 새침한 들쑥이 아니고 인례가 아니고...... 언젠가 내게 손목잡혀 나섰다가 너는 먼산 알뫼봉 뽁데기 보고 있거라 살짝꿍 몰래 돌아않아서 조심스레 찔끔찔끔 오줌 누었던 자리에는 새초롬한 부끄럼으로 귀밑볼도 환히 붉혔을 인례의 흔적 하나 아직 있을까
요강이 양변기에게
너희들이 보다 편리한 방식이라면 손가락 하나로 잽싸게 물을 내리고 냄새도 불결함도 순식간에 담장 밖으로 폐기해버리는 우격다짐과도 같은 밀어내기 방식이 너희들식이라면 우리는, 요강 혹은 재래식으로 미련스럽게 거기에다 구린내 똥물 오래 가두어 앞두렁 뒷두렁 우리 삶의 이랑이랑에 골고루 거름으로 나누어주고 마침내 봄이면 푸른 머굿잎들도 길러내더니 가을이면 배추속도 탐지게 힘 타게 하는 하다 못해 똥물 한 사발에도 우리네 방식은 요강 혹은 재래식이어서
봉식이의 밥
봉식이의 밥 한 그릇 보았습니다 엽차 놓고 가는 뻣센 말투에 서린 멀고 가난한 그의 고향 필시 한때는 그가 목욕탕의 때밀이였다는 걸 여인숙의 조바였다가 시장통의 배달꾼이기도 했다는 걸 생채기 많은 그의 손등어리가 들켜주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은 어쩌다 밥집의 똘마니로 나와 만나져서 손님 끝나고 때늦어 제 앞에 돌아온 그의 밥 보았습니다 등쳐먹고 빼앗아 먹는 밥 헌 밥 주고 새 밥 바꿔 먹는 밥 놀면서 헤헤거리면서 얼렁뚱땅 삭이는 밥 너무 많이 우겨넣어 결국엔 게워내야 하는 밥 이런 밥들 처처에 자꾸만 겪고 살다가 그날 외지 갔다 오는 늦은 밥집에서 그의 밥 만났습니다 보란듯이 그 밥에서 김이 오르고 깍두기 우적우적 입맛나서 봉식이 고픈 뱃구레 빵빵히 가득 채워두는 듯싶었습니다 내 밥 뒤에서, 그의 밥 틀림없이 트림도 우렁차고 나는 다만 그의 밥 속에 따뜻한 희망이 오래 식지 않길 말없이 다만 빌어주고 나왔습니다
폐역
기차는 이제 오지 않았지 하역장 앞의 밥집들은 문을 닫았고 삐비꽃이 허연 그날의 언덕 위에 서서 나직하게 멀리 저쪽을 불러도 공산처럼 컴컴한 목청으로 늙은 똥개 한 마리 온 밤을 울어주었을 뿐 보름달 봉긋한 가슴의 옛 누이 하나 댓잎 술렁이는 삽짝 앞에 그때처럼 하얀하니 웃어주지 않았지 먼지 부는 정미소 골목 바람 찬 공터 위에는 깨진 소주병만 하나 취한 인부의 악다구니도 들리지 않고 불 내린 역사의 적막 곁으로 기차는 오지 않았지 누군가 일구다 떠난 빈집의 텃밭가에는 절로 자란 마늘꽃만 몇 잎 허옇게 머리를 풀고 새로 난 신작로를 따라 하행의 밤차 한 대가 머언 하행 속으로 사라져 이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차는 이제 다시 오지 않았지.
억새야 억새야
억새야 두만강가 고운 강마을 동구 앞 언저리에도 살고 영산강 후미진 남녘길 어귀 거기에도 살아 생사도 희미해진 두고 온 옛사람 하나 상기도 몸살 일렁여 미치도록 그리워진 날이거든 억새야 억새야
징용길 황토마루 봇또랑 뚝길 위에도 부역 몰렸던 자식놈 얼굴 핏물 내린 가마니짝 비린내 거적때기 곁에도 한도 많고 원도 많은 우리네 三代 속에도 끈질긴, 뿌렁구 끈질긴 억새야
우리가 여직 쩔름발이 반쪽의 체수 되는 타령 안되는 타령 노망든 수심가로나 쩔어 있을 때 한결같은 시시비비로 등돌아 옆어져 있었을 때 억새야 그래 억새야 어기차게 일어서서 흔들어주던 억새야 잔 이파리도 하나 남김없이 온몸 일어서서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범람의 물결로 출렁이던 억새야 삼천리 강산의 억새야
시집,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2003년 '새로운 눈')에서
엄연함에 대하여
봄 빛깔 사무쳐 여름 들 무렵입니다. 손 없는 좋은 날로 택했을른지요. 한라산 중턱의 한 골짜기, 오래 전 거기 깃들인 진박사 내외 내외는, 알토란같은 새끼 몇 마리 아직은 살점만 같은 비린 목숨 몇인가를 한사코 세상 속에 들켜내 놓았습니다.
암새는 둥지 안에서 새끼들 더불어 나오지 않고 숫새만 가지 위에 나와 사주 경계로 보초 서는데 그 모습일랑 사뭇 엄연하여 불현듯 생의 퍼어런 서슬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그때쯤 숫새 한 마리. 깜냥을 다하여 몸서리치게 외쳐 대는데...... 상황은 별반 달라질 일 없어 미끄러지듯 가지를 타고 다가온 배암 한 마리! 징그러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그만 삐약거림만 남은 저 어린 살점 몇인가를 포식으로 지우고 사라져 갔습니다.
다시금 그때쯤 빈집을 버리고 날아간 진박새 내외, 아프게 머물다 간 잔가지 위로 생의 퍼어런 파문 일렁입니다.
나는 아직 사랑의 시를 쓰지
못하였네 나는 아직 사랑의 시를 쓰지 못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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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휘수(徽隋)의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