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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창작 연구 스크랩 정윤천 시모음
은하수 추천 0 조회 180 16.04.04 10: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60년 전남 화순 출생
   90년 무등일보 신춘 문예 당선
   91년 계간 실천문학 신인으로 작품 활동
   시집으로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등이 있다
   민족문학 작가회의 회원. 계간 『시와 사람』 편집위원

 

 

시집, 흰길이 떠올랐다(1999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흰길이 떠올랐다                                   1                                      

 

  어떤 나이든 여자는 자신의 책을 내면서, 표지에, 젊은날의 사진을 골라 버젓이 실어놓았다. 그리하여 기인 생머리칼 자락이, 그녀의 한가로운 閑談集 안에서 물비린내를 훔씬 풍기며 출렁이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터질듯이 부풀어오른 그 나이든 여자의, 과거의 상반신에 대하여(탱탱한 유방 근처와......) 그리고 그녀의 현재의 저의(?)에 대하여, 상당한 의혹과 유감을 가져보기도 하였다.

 

                                                2

 

  어머니는 한땀 한땀 힘들게 바늘귀를 놀렸다. 당신의 그런 집착과 망아의 시간 곁에서, 나는 곧잘 실패라거나 골무 등속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움에도 빛깔이 있다면...... 내게 있어 그 시간들은(귀머거리와도 같았던!), 어쩌면 온통 회색의 색감이었다.

  어머니는 손바닥만씩한 헝겊을 덧대어, 상보라거나 책보 같은 걸 기워놓곤 하였다. 언젠가 당신은 내게 힘들게 들려준 적이 있었다.(얘야, 나는 내 안팎의 상처를 깊곤 했구나.)

 

                                               3

 

  마음의 실꾸리에 감긴 좌절을 재료삼아 그렇게 자신을 기웠노라던 한 여자(어머니). 내게도 문득 흰 길이 하나 떠올랐다(흐릿한 길......), 혹시 그 여자들은(늙은 여류 한담가와 어머니), 제각기 혼신의 힘으로, 자신의 옛날 사진 한닢과 손바닥만씩한 헝겊조각들 속에서, 어느 여름날의(사무치게 은성했던 날의) 숲길 앞에 이르는, 푸르름의 길모서리 하나씩을 글썽한 눈매로 떠올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며, 내게도 오랜 전의 먼길이 하나 떠올랐다. 거기 가뭇한 유년의 강둑(- 강변)을 지나, 그 미루나무 숲길 위를 아무렇게나 배회했던, 빛나는 이마를 가진 소년이 하나. 이제 막 맨발의 푸른 길 너머로 길게 이어진 희미한 배경 속에서, 마치도 생시처럼 아프게 어려주었다.

 

 

 상사, 그 광휘로움에 대하여

 

 <언제부턴가 마을에 흘러들어와 야메로 치과를 열었던...... 시나브로 그는 절반 넘게 죽어서, 궁리 끝에 어른들은 그를 위하여 가짜 상여를 메기로 했다. 상여는 그렇게 마을을 나서, 진짜 장례식의 거릿제쯤에 이르자, 마을의 수당골이 한차례 떠들썩한 치성을 올려주었고, 홑이불에 싸여 죽은 듯이 누워 있던 그는, 산죽음의 멀고도 가까운 길을 한차례 돌아 나온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뒤에 그는 곧바로 거짓말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한동안 사람들의 병든 이빨을 돌보다가 마을에서 이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비밀스런 말투로 어른들은 그 일을 일러 想思라고 그랬다.>

 

  내게도, 꽃술 실한 수국 한 송이. 기도처럼 간곡하게 그에게로 드리웠던...... 긴한 마음의 옛 자취. 그러나 그 깊은 자리. 끝내는 혼자만의 화농으로 벌겋게 익었다가 가뭇없이 져야 했던, 만개한 마음 꽃 한 송이.

 

  그래도 기억은, 가끔, 세월의 생살로 까마득히 차올랐을 종창의 흔적 가까이 데불고 가 마음 쓰이게 하면, 상사, 어금니에 마른침이 고이도록 아름다웠던, 비밀한 그 한 말씀.

 

 

  詩는 쓰러지거라

 

  희미한 옛 사랑처럼...... 막다른 골목의 저녁 노을처럼...... 한 시절은 그렇게 스러져갔노라고...... 시대의 사랑법도 바뀌었노라고...... 고상한 뒤폼들을 마음껏 구가하며...... 누군가는 새로운 공법의 비급을 좇아...... 오리무중의 장난질을 닮은...... 안개의 서정 너머로...... 홀연히 잠적하였거나, 등돌아 나섰더라도...... 그래도 너의 시는...... 깍두기 한 사발과 콩나물 한 접시...... 뽀얗게 김이 서린 옹배기를 내려놓고 가던...... 국밥집...... 늙은 주인의 손길 아래...... 죽은 살코기와 허연 뼛국물이 이루어놓은...... 혼곤한 국물 속으로......

 

 

   시방. 여기. 이곳과 더불어  

   힘없는, 버림받은, 죽어가는, 온갖 것들과

   더더욱 더불어

 

 

  덜 삭은 김치가닥이 엉겨붙은...... 토사물 질펀한 공중변소 앞에서...... 그 변소 오물을 치우는 물바랜 새마을 모자...... 김씨 박씨 곁에서...... 그들의 왜소하고 쓰라린 등덜미 뒤에서...... 시는 쓰러지거라...... 그곳에서 다시 일어서거라...... 아니, 아니...... 코를 쳐박고 엎어져 뒹굴기도 하거라......

 

 

  ( 시방, 여기, ... 코머 대신 가운데 방점 )

 

그리움

 

원수보다도 용서보다도

깊은 것

흉몽의 긴 밤을 허우적거리다가

뒤척이며 깨어난 새벽녘에

이마 위에 푸릇푸릇 돋친

소름과 같이

온몸으로 으스스 들던

한기와 같이

그렇게 차고 맑은 것!

독약보다 더 어둡고

쓰라린 것.

 

  光州行

 

  그예 한사코 가난한 지붕들을 너나들이 머리에 이고, 낯익은 누런 얼굴들이 디귿 리을 살고 지는 거기. 그 피붙이의 마을에 가까워지면, 어쩜 집집이 저녁 밭솥을 데우던 그리운 시간 곁으로, 먼지 자욱한 그 길 따라가는 길엔 '워따, 환장허겄다.' 등꽃 같은 사투리 넌출도 살가운 가슴녘 온통, 푸져오거라.

 

 

  저녁 강의 時

 

  世事야

  오만사 시름 깊을 적에

  허한 마음의 끝자리인 양

  강에 이르면

 

  비인[空]강

  물소리 곁으론

  일모의 설핏한 햇살

  젖은 몸을 뒤척일 적에

 

  밤벌레

  소리소리 들릴 적

 

 

새벽밥

 

거기, 남보다 먼저 나서 바삐 닿아야 할

고난의 세월 있으니

찬이슬 속에 깜박이는 잔별빛 어깨에 받고

밥 한 그릇 간다

 

후루룩 둘러마신 물통 같은 밥통 되게 흔들며

밥 한 그릇 서둘러 차운 길 간다.

 

        그 꽃밭 속

                           

        이른 저녁 푸른 바람 속 그 자리였던가요

        우물 앞 평상 위에 동그랗게 피었던가요

        단내음 물씬했던 속살 한입씩 베어물면

        입술들은 다투어서 꽃술로 붉었던가요

        때맞추어 지붕 위로 달꽃 덩달아 환해오면

        싸리울 담장 가득 별꽃들도 뒤질세라 두세거렸던가요

 

        그 꽃밭 속, 오물고물 이빨 없는 할미꽃 한 송이

        희끗해진 울 아부지 주름꽃 또 한 송이

        귀밑머리가 서늘해진 울엄니 그늘꽃의

        꽃그늘 아래

        누이들 사춘의 분홍물 가슴 위로

        연한 수박향의 목덜미 근처 눈길 가닿고 나면

 

        그 꽃밭 속

        내 이름도 한 송이 꽃이름이고 싶었던가요

        먼 길 휘돌아 날고픈 큼직한 날개의 꽃잎 한 장

        가슴엔 듯 품었던가요

 

        그 꽃밭 속, 우물가 평상 위로

        한 저녁의 식구들 동그랗게 둘러 앉아

        영락없는 제 모습만큼씩 오종종 맺혀 있던 거......

        꽃잎들은, 바람결에 제 향기로 일렁였던가요

        꽃잎들은, 서로에게 동그랗게 벙글어도 주었던가요.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1993년 실천문학사)에서

 

春陽行

 

키 높은 미루나무 들길 꾸불텅 지나

석정리 큰고모네 처음 갔을 때

고모는 살가운 마음 주름진 눈매에도 어려

그날따라 닷새장, 해어름 파장터에서

당신의 속마음 닮은 두툼한 털실 스웨타 한 벌

말없이 내게 사 입혀 주시더니

처녀적의 보름달 둥근 얼굴로

왠지 그렇게 환해지시고 말았던가

식구들 해저녁의 저문 기다림 속으로

납석광 겨운 일 늦은 덥수룩한 고숙은

오종종 키 작은 걸음 기우뚱 비틀려 오셔

어따! 요놈 누구냐 많이 컸구나......

매큼한 막술내음 끼친 횡설거림 길고

어언 나는 서른녘, 그날의 고숙을 닮은

고단한 월급쟁이 행색

심심찮게 읍면 구석에 출장 나댕겨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오늘은 春陽面 간다

 

옛집 마당에

 

바람도 한바탕 씽씽 불어라

세차도록 칼칼히 시원스레 불어

우리들 뛰놀았던 대숲 언저리

죽순 같은 희망으로 뾰족한 그리움으로

흔들어 들깨울 것들 죄다 깨워라

 

할머니의 텃밭 가득 토란은 살쪄 알이 굵고

마늘은 여물고 상추꽃은 쇠어서

허옇게 허옇게 머리 풀고 날려라

 

굴뚝엔 연기 오르고 사랑엔 등불 밝혀서

그날 밤 뒤란 가득 탐스런 감꽃들도 수북이 쌓이거든

쓰러진 토담벽 울타리를 넘어

수심 서린 잔별들도 총총히 밝고

주름 많은 빨래를 펴던 어머니의 방망이질 소리

당신의 깊은 한숨 소리에 마당도 한쪽 폭삭 꺼져라

 

부엌에는 도둑고양이 마루 밑에 새앙쥐

뒤주 아래 두꺼비 확독 곁에 씨암탉

싸움도 한판 설크러지고

풀기 없는 오랜 고요를 깨워 앞산도 쩡쩡 이마를 쳐라

 

어수선한 대청마루 신발 흐트러진 토방 끝까지

성가신 애기들의 울음소리가

사립짝 울바자 위에 소란스레 울리고

옛집의 너른 마당귀 해마다 화들짝 피던

허연 살구꽃 그늘, 그 아래 여린 풀잎 한 잎도

다시금 남김없이 푸르름 들어라

 

 

한평생

- 어머니 하나

 

울 엄니는 열아홉 봄날 아침에 먼 길을 오셨답니다

그날 아버지네 마을의 햇볕들은 참으로 따뜻이 눈에 부셨고

마당가 꽃잎 틔운 살구꽃 그늘

그 아래 소년처럼 웃고 서 계셨던

아버지의 처음 모습을

울 엄니는 지금도 총총 기억하고 계신답니다

달뜬 울 엄니의 귀언저리에

홍시빛 부끄러움의 찐한 물이 들고

물든 그 가슴을 열어 난생 처음인 아버지를 맞던

첫날밤, 뒤채이며 새운 이른 새벽참엔

암도 모를 눈물도 한줄금 떨궜더랍니다

그렇게 하여 울 엄니는

그 집의 감나무 가지 하나 이쪽에서부터

저쪽의 살구나무 가지 하나 그 거리만큼

넉넉한 빨랫줄을 한 줄 내걸었더랍니다

빈 빨랫줄 위로 울 엄니의 평생의 날들이

물기 많은 빨래가 되어 지나갔는데

저 먹을 것 없었던 날들도 가고

저 깜깜밤중이었던 날들도 가고

아! 그랬답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구속의 마음으로

당신이 매단 사랑에의 끈, 한생애의 매듭이었더랍니다

어쩌다 우리들 귀향 때면 울 엄니는 아직도

삭은 빨랫대 위에

지금은 당신 자신이 물기 빠진 빨래가 되어

허옇게 나부끼고 계신답니다

 

         (1990년 광주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어머니 연작시 중.)

 

아픈 날

- 어머니 셋

 

당신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래된 어머니의 바늘침 하나

손톱 밑에 꼬옥 간절히 찔러주시면서

괜찮다고......

괜찮다고......

당신이 곁에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첫날밤

 

누구도 중신 선 일 없다는데

지들끼리 눈 맞춰 입도 맞췄다는데

때깔 곱던 윗말 김가 딸내미

여울물 닮은 삼삼한 눈빛

볼우물 깊던 그 값 했다는데

아랫골 알부자 조생원댁 외아들이고 보면

연애도 한번 알토란으로 저질렀다는

동네 아낙들 농지거리가 빈말만은 아니었는데

처지 나는 집에, 그것도 손 귀한 집으로

무망간에 딸년 들인 윗말 김가 처는

첫날밤

늦저녁 토방가에 별빛 불러 축원했는데

떡두꺼비 고추도 서넛 구시렁구시렁 빌고

시어른 남편 사랑도 고시랑고시랑 빌었는데

모두 다 잠든 그 밤의 뒤끝을

한 사람은 오래 남아 뜬눈 밝혀서

두세두세 지새웠는데

 

아는지 몰라라

팔베개로 진한 잠 든 신랑각시야

저 방문 밖의 바람 소리 닮은

그 누구의 마음

 

인례

 

그랬어야

너를 문득 기억하다가 잠에 들었던 밤이면

쑥국새 울음소리 닮은 쓰라린 기억

여직 꿈속에서도 상기 선연했어야

그냥 떠올리는 일 하나만으로도 눈물 금새 비쳐오던

내 열여섯의 저쪽, 봉긋한 첫사랑의 부끄럼일랑

결국은 네게 바치지 못하고 말았지만

거기 옛날 같은 우리들의 푸른 하늘이야

철없던 가시내의 노을 뜬 가슴같이

모진 한순간에 쉬 변하지 않겠지야

나는 이제 우리들이 자주 갔던 오디밭 지나

애장터 돌각담 위에 파릇이 맺혀 있던

그날의 새침한 들쑥이 아니고 인례가 아니고......

언젠가 내게 손목잡혀 나섰다가 너는 먼산

알뫼봉 뽁데기 보고 있거라

살짝꿍 몰래 돌아않아서 조심스레 찔끔찔끔

오줌 누었던 자리에는

새초롬한 부끄럼으로 귀밑볼도 환히 붉혔을

인례의 흔적 하나 아직 있을까

 

요강이 양변기에게

 

너희들이 보다 편리한 방식이라면

손가락 하나로 잽싸게 물을 내리고

냄새도 불결함도 순식간에 담장 밖으로

폐기해버리는

우격다짐과도 같은 밀어내기 방식이

너희들식이라면

우리는, 요강 혹은 재래식으로

미련스럽게 거기에다 구린내 똥물 오래 가두어

앞두렁 뒷두렁 우리 삶의 이랑이랑에

골고루 거름으로 나누어주고

마침내 봄이면 푸른 머굿잎들도 길러내더니

가을이면 배추속도 탐지게 힘 타게 하는

하다 못해 똥물 한 사발에도

우리네 방식은 요강 혹은 재래식이어서

 

봉식이의 밥

 

봉식이의 밥 한 그릇 보았습니다

엽차 놓고 가는 뻣센 말투에 서린 멀고 가난한 그의 고향

필시 한때는 그가 목욕탕의 때밀이였다는 걸

여인숙의 조바였다가 시장통의 배달꾼이기도 했다는 걸

생채기 많은 그의 손등어리가 들켜주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은 어쩌다 밥집의 똘마니로 나와 만나져서

손님 끝나고 때늦어 제 앞에 돌아온 그의 밥 보았습니다

등쳐먹고 빼앗아 먹는 밥

헌 밥 주고 새 밥 바꿔 먹는 밥

놀면서 헤헤거리면서 얼렁뚱땅 삭이는 밥

너무 많이 우겨넣어 결국엔 게워내야 하는 밥

이런 밥들 처처에 자꾸만 겪고 살다가

그날 외지 갔다 오는 늦은 밥집에서 그의 밥 만났습니다

보란듯이 그 밥에서 김이 오르고 깍두기 우적우적 입맛나서

봉식이 고픈 뱃구레 빵빵히 가득 채워두는 듯싶었습니다

내 밥 뒤에서, 그의 밥 틀림없이 트림도 우렁차고

나는 다만 그의 밥 속에 따뜻한 희망이 오래 식지 않길

말없이 다만 빌어주고 나왔습니다

 

폐역

 

기차는 이제 오지 않았지

하역장 앞의 밥집들은 문을 닫았고

삐비꽃이 허연 그날의 언덕 위에 서서

나직하게 멀리 저쪽을 불러도

공산처럼 컴컴한 목청으로

늙은 똥개 한 마리 온 밤을 울어주었을 뿐

보름달 봉긋한 가슴의 옛 누이 하나

댓잎 술렁이는 삽짝 앞에

그때처럼 하얀하니 웃어주지 않았지

먼지 부는 정미소 골목 바람 찬 공터 위에는

깨진 소주병만 하나

취한 인부의 악다구니도 들리지 않고

불 내린 역사의 적막 곁으로 기차는 오지 않았지

누군가 일구다 떠난 빈집의 텃밭가에는

절로 자란 마늘꽃만 몇 잎 허옇게 머리를 풀고

새로 난 신작로를 따라 하행의 밤차 한 대가

머언 하행 속으로 사라져 이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차는 이제 다시 오지 않았지.

 

억새야 억새야

 

억새야

두만강가 고운 강마을 동구 앞 언저리에도 살고

영산강 후미진 남녘길 어귀 거기에도 살아

생사도 희미해진 두고 온 옛사람 하나

상기도 몸살 일렁여 미치도록 그리워진 날이거든

억새야 억새야

 

징용길 황토마루 봇또랑 뚝길 위에도

부역 몰렸던 자식놈 얼굴

핏물 내린 가마니짝 비린내 거적때기 곁에도

한도 많고 원도 많은 우리네 三代 속에도

끈질긴, 뿌렁구 끈질긴 억새야

 

우리가 여직 쩔름발이 반쪽의 체수

되는 타령 안되는 타령 노망든 수심가로나

쩔어 있을 때

한결같은 시시비비로 등돌아 옆어져 있었을 때

억새야 그래 억새야

어기차게 일어서서 흔들어주던 억새야

잔 이파리도 하나 남김없이 온몸 일어서서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범람의 물결로 출렁이던 억새야

삼천리 강산의 억새야

 

 

 

시집,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2003년 '새로운 눈')에서

 

엄연함에 대하여

 

봄 빛깔 사무쳐 여름 들 무렵입니다.

손 없는 좋은 날로 택했을른지요.

한라산 중턱의 한 골짜기, 오래 전 거기 깃들인

진박사 내외

내외는, 알토란같은 새끼 몇 마리

아직은 살점만 같은 비린 목숨 몇인가를

한사코 세상 속에 들켜내 놓았습니다.

 

암새는 둥지 안에서

새끼들 더불어 나오지 않고

숫새만 가지 위에 나와 사주 경계로 보초 서는데

그 모습일랑 사뭇 엄연하여

불현듯 생의 퍼어런 서슬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그때쯤 숫새 한 마리.

깜냥을 다하여 몸서리치게 외쳐 대는데......

상황은 별반 달라질 일 없어

미끄러지듯 가지를 타고 다가온 배암 한 마리!

징그러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그만 삐약거림만 남은 저 어린 살점 몇인가를

포식으로 지우고 사라져 갔습니다.

 

다시금 그때쯤 빈집을 버리고 날아간

진박새 내외, 아프게 머물다 간 잔가지 위로

생의 퍼어런 파문 일렁입니다.

 

나는 아직 사랑의 시를 쓰지 못하였네 


     마땅히 사랑이라면
     한사코 뒷날의 아침을 예감해야 하는 일이었네
     거기 그렇게 굳세게 푸르러 오는 수만 평의 대지 위에
     아프게 뿌리 내리고, 쓰라리게 잎자리 튀워야 할
     세월의 무늬 또한 아로새겨볼 일이었네
     하여 사랑이라면
     애써 지워보려고 눈을 감아도
     어찌할 수 없는 想思의 시간은 저 먼저 와서
     가슴으로는 그 사이
     만산의 홍엽같은 속수무책의 물들어 버림이기도 할 일이었네
     때로는, 넘어지고 일어나 그래도 가야만 될
     막막한 밤길의 행로
     소슬한 바람의 발자국 소리 곁에서도
     마침내 뚝뚝 듣던 차디찬 빗소리 곁으로도
     그러나 짐지기로 한 무거운 기약일 수 있겠네
     사랑이라고 이름 지워준 이 火印의 노래는
     지는 꽃잎의 서리 내린 계절에서도
     폭염의 너울 깊은 지친 햇살 아래서도
     반드시 그 하늘은 푸르르겠네

   나는 아직 사랑의 시를 쓰지 못하였네

그러나 사랑이라면, 함께 견뎌 이룰 수 있는 마지막의 절정까지
그 길 위에 내몰린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행복한 형극의 먼 길 위에
나선 기꺼움이고야 말 일이었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毒가시들 사이로 피어난 꽃

만약에 누군가 내게 그리움에 대하여
묻는다면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그것, 그 작지만 완강한 꽃잎에 비기어

대답하리

 

그나마 그렇게 나마

내 마음의 토로가 되었다면
딴은 우리 생의 어느 한 꼭지점이
까마득한 창천의 푸른 상공쯤
比翼鳥, 퍼덕이는 깃 치는 소리를 내어
한번은 먼 곳을 향해 날아올라 버려도 좋으리.

 

순간의 和音


山二라는 면소의 풀길 위에서
아무래도 잘못 든 것만 같은 길을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입부처 한참이나 에돌아 왔노라고
이제 갓 중학교에 들어갔음직한 맨 종아리가 붉은 소녀는
아슬한 손사래짓 추켜세워 왔던 길 돌려세우려는데
손 끝 따라 바라본 고개 너머 하늘이
어쩌면 저렿게도 흘러내릴 것만 같은
황토 빛이다.

 

일순보다도 더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다만 그 하늘빛만으로, 잡스런 세상일이 무망해지고 만
두 사람의 눈길이......
사위가 온통 먹먹한 정지에 휩싸이고 말았을 때
가야 할 길의 행방 같은 것이야
아예 심중에서 사라져 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호된 옛노래

 

눈을 뜨면

거기

너, 있었던

 

 

고개를 돌리면

문득

너, 거기 있을 것 같았던

 

한번은 서늘한 일몰의 시간이었는데

시내버스를 따라 한 정거장이나

따라 갔었던

 

차창으로는, 스쳐 지나갔던 차창 너머로는

너, 있었던

그러나 사실은

너, 아니었던

 

쓰라린 발병 같았던

깊은 환시와도 같았던

그 어느 오래된 머언,

마음의 일이었던.

 

 

꽃게들을 위하여

 

 

꽃게들은 기어서 제 바다로 갔다

사방이 다 막혀서 옆 걸음으로 갔다

어여쁜 그 꽃게들은 제 바다로 갔다

짓뭉개고 밟아도 한사코 갔다

찢어진 살점 뱉으며, 흘리며 갔다

어여쁜 꽃게들은 자꾸만 갔다

그리운 꽃게들 기어이 갔다

상기도 그 꽃게들 제 바다로 갔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장난꾸러기를 읽고 갔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종종 장난꾸러기를 읽고 간다

어쩌다 해 지고 난 뒤의 노래방에 함께 가면

드물게는 콧구멍이 헤벌쭉한 송창식을

읽고 가는 놈들도 더러 있긴 한데

얼마 전에 먼데서 내게로 온 손님 한 사람은

왠걸, 내 안의 걸레

내 안의 원형 탈모증과도 닮은 것들

가난한 눈물 주머니며 짭조롬히 간이 잘든 홍어 속 한 사발 까지

잘 읽고 가신 모양이다

아서라 나는 그래도 변함없이 까불어댈 모양이다

누군들 제 안에 묵은 김치 한 항아리 곰삭다 못해

초국물로 괴어 오르는 일 없지 않으랴

뒷동산에라도 혼자서 올라 불러 보는

내일은 해가 뜨리라는 풍의 단심가 한 소절

세월의 그늘 저쪽엔듯 기대어 보지 않은 이 있으랴

 

 

사람들은 내게 와서 장난꾸러기만 읽고 가라 

 

 

木浦라는 말

 

 

木浦라는 말

木浦라는 말

 

그 나무나루라는 말과 순정이라는 말과

그 나무나루라는 말과 눈물이라는 말과

그 나무나루라는 말과 어스름이라는 말과

 

木浦라는 말

나무나루라는 그 이름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런 그립고, 서럽고, 누추한 것들의 명명들과

그것들을 지칭하는 호명들을 살짝 한번 바꾸어

불러 보고 싶어지는

 

그 나무나루라는 단어 곁에 가을날이라고

그 나무나루라는 단어 곁에 조막손이라고

그 나무나루라는 단어 곁에 민들레라고

 

木浦라는 말

왠지 그렇게 나무나루라는 모국어의 글썽임 곁에

그것들의 내면, 그것들의 깊은 혼백의 옹이까지

살며시 불러내어  함께 놓아두고

바라보고 싶어지는 

 

木浦라는 말

木浦라는 말

木浦는 나무나루라는, 그런 말

 

 

모기를 잡다가 얼음집을 생각한다

 

새벽은 깊은데 잠에서 깨어 할 수 없이 모기를 잡는데

내 손 끝에서 으깨져 순식간에 형체를 잃어 버린 방금 전까지

모기였던 모기를 내려다 보다가 생각한다

극점의 어딘가 쯤에 현실로 존재 한다는

사람들의 집을 떠올려 보게 된다

모기가 모기였던 그 시간에 모기에게는

그리운 것들은 송두리째  눈 앞에서만 급급했을 것 같은

모기

죽음이 등 뒤로 부터 다가왔을 모기

모기로하여 얼음집은 더더욱 선연해 진다

누군가의 시구에서처럼 얼음 집에 갇혀 설한을, 아니 설해를

견딘다는 무섭도록 고독한 집

누구도 서로에게 말붙히지 못할 얼어 붙은 집 

모기를 잡다가 그들의 집을 생각한다

마침내 때가 되면 연장자 순으로 밖으로 나가 극점의

황홀한 은빛 속으로 凍死 한다는

얼음집 자신의 시신으로만 주린 짐승들을 꾀어내고 나면

순간처럼 죽음은 앞으로 부터 다가오기도 했을법한데

그리운 것들은 모조리 등 뒤에 서있었을 얼음집

또 그렇게는 시신을 탐하는 짐승들의 머리 위로

산 것들이 남아 행하는 비린 죽임의 제의는 비롯되어서

윤회하고 윤회하는 바큇살을 닮아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집

모기를 잡다가 얼음집을 떠올려 보면

모기의 상한 주검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게 하는 얼음집

생이 순식간에 이다지도 엄연해지고 마는, 둥근집 

 

 

이순신 생각

 

철 덜든 시절에야 철없이 바라보았던 이순신

아침 저녁으로 철갑만 주름 깊게 다려 입었지

바다는 정작 지키지 않고, 일없는 교문 앞이나

째려 보고 서있던 이순신

가끔은 축구공에 뒤통수를 얻어 터지던 이순신

옆구리에 찬 칼이 삼천리 강산으로 하도나 크고 길어서

칼집 하나만 몰래 풀어 내어도

엿 한 판은 족히 바꿔먹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철 들어서는, 참담한 풍문 속으로 나타나셨던 이순신

난리법석의 꽃가마 행렬에 올라 높다랗게 출현한  이순신

그러나 거기 우리들의 영원한 대장이었던 이순신

제 혼자서만 나라를 구하신 이 어쩌고 말고

흘림체의 편액 두둥실한 사당의 영정같은 건 더더욱 말고

그따위 호사한 것들 깡그리 말고

 

지우산을 쓰고 바다 갈대밭을 걷는 이순신

물새들의 호곡소리를 멀리서부터 알아 차리던 이순신

자신보다 생이 더 짦게 태어난 아들에게

건조체의 문장으로 편지를 쓰던

 

갯비린내에 젖은 주먹밥을 마른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고 있던

당신에게 닿는 그 길이

실은 우리에겐, 십 팔년도 넘는 세월 모자라서  재탕, 삼탕으로

화살비 두들겨 맞고 온 '임진란' 이기도 했던 것인데

그러고 보니 이순신 생각하면 화급함 실린 그 목소리가

아직도 천지사방에 호된 삿대질로 노질로 파랑을

넘고 있는 것이었는데  

 

 

멀다라는 말 뇌어 보면

 

(오후의), 한 사람의, (빈 들을 가로 지르며), 전 생을 싣고, (기차가), 꽃 상여가, (가는 모습은), 산굽이 도는 순간은, (슬프다), 아프다.

 

 

멀리서 오고 있는 것들도 그렇겠지만

먼 곳을 향해 떠나가는 것들의

뒷모습들은

한결같이 그렇다

 

입술 사이로, 가만히 되뇌어 보는

멀다

멀다

머얼다 라는 그 말. 

 

 

젖을 향하여

 

빨갛게 드러난 젖들이 걸음 옮길 적마다

산처럼, 바다처럼 출렁거린다

차라리 젖으로 길 걷고 있는 어미여....

열 두 목숨 건사하는 꼿꼿함이

느린 발자욱마다 서려 있다

 

열 두개쯤 되어 보이는

마음껏 불어난 탱탱한 젖통을

땅바닥 가깝게 늘어 뜨리고

집을 향해 걸어 가는

어미개 한 마리를 본다

 

이때쯤이면 한낮의 햇빛들도

젖을 향하여, 일제히 제 빛을 모은다

 

 

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

 

이웃집의 일로 공음에 다녀 오는 길에 면소의 약국에 들렀다

筋肉痛은 한 사흘째 목울대 아랫쪽으로 똬리를 틀었고

파리똥이 낀 선반 위에서 먼지 둘러쓴 물 파스 상자를 더듬고 있는

약사의 손길은 또 한참이나 더디다

초점이 머언 눈빛 속으로 불현듯 내게도 들켜오던 초로의 날들이

느리게 느리게 거스름 돈을 헤아리고 있을 즈음에 이르면

어느 후미진 마을의 지명과, 그 곳의 사람들과 함께

느린 몸짓으로 세월의 더께를 둘러 쓴 잔잔한 그의 등 뒤에서, 나는

늙은 약사를 만나고 왔다 

 

무엇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스스럼 없이 저물어 가는 일이 때로는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웃 집의 심부름같은 것으로

공음에 다녀 와야 하는 행위같은 것일지라도

혹여 억울한 마음으로 쓸쓸해 하지는  말라는듯이

길 가엔 말없이 가을꽃들이 피었다. 그것들은 바람 속으로  

마른 어깨를 흔들어 주기도 하는 양이어서,,,,,,

내 수중엔듯 작은 카메라 같은 것이라도 하나 있다면

잠시 길을 멈추고 흑백 사진이라도 한 장 찍고 싶었다

 

늙은 약사처럼이나 나도

어느 먼지 낀,  옛날 다방같은 구석진 자리에 걸터 앉아

이제는 사진 속에 인화되지 않은 꽃빚깔 같은 것들, 말하자면 연분홍 닮은 

추억의 일들이며, 초록의 지난 시간들을

느리고도 가만한 손길로 어루만져 보고 싶기도 했다

이후로도 혹시 공음에 오는 길이라면

늙은 약사는 여전히 느린 몸짓으로 돌아서서 

천천히 거스름 돈을 건네 줄것도 같았다.

 

- 땅끝문학에 발표

 

마음 속의 둠벙 하나

 -그해 겨울의 아침에서 이듬해 여름의 저녁까지

                                                            

 

 식전 댓바람의 里長집에서 끌칼 같은 곡소리 한바탕이 마을 방송이 되어 튀어 올랐다.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노라며 이웃 어른들 몇몇이서 그집 고샅 쪽으로 뛰쳐 나갔다. 쇠심줄 같은 새앙답 두 마지기를 끝내 쇠전머리 투전판 어귀에 밀어 넣고 온 이장 최가가, 병나발 댓병을 장광 모서리에 박살낸 뒤에 빤히 식솔들이 지켜보는 토방 밑에서, 녹슨 연장통에서 찾아낸 끌칼 끝으로 엄지 하나를 결단낸 뒤에 성한 정신을 놓아 버렸다고들 했다.

 

그해 겨울은 눈이 많았고

오후면은 마을 앞 들판 가까이 까마귀떼가 자주 내렸다.

 

 洋공주가 되어 돌아온 명이네 큰언니는 깜둥이 자식놈을 그것도 쌍으로 낳았다더라. 삭풍 끝에서, 안간힘으로 가지를 물고 있던 명이네 감나무 서너 이파리가, 소리없이 퍼져 나갔던 아슬한 소문 속으로 지기도 했다.

 

그래도 어디선가 들쑥내 끼친 봄이 오고

종이장수 나가는 박씨네 양주 실한 등짐 너머로

노오란 산수유 꽃잎이 얼비쳤다 지기도 했다. 

 

 마을 앞 둠벙에서는 흔히 개구리 울음소리가 버럭버럭 들려왔다. 기다림과 마려움, 바램과 희망 같은 것들 따위가 엉머구리로 뒤엉키기라도 한 듯이, 그 소리의 시원마저가 너무도 깊고 넓어서 누구도 쉽사리 말릴 수 없었던... 마음 속의 둠벙 하나. 지금도 가끔은 그 오래된 둠벙가에 저 혼자 당도한 바람 한 줄기가, 늪처럼 끈적한 담배 한 입을 붙혀 물고, 미간을 살풋 찡그린 표정으로 사위를 둘러 보다가 떠나기도 했다. 

 

치욕에 대하여

 

내 안에는 지금도 스승이 하나 살아 있다

언젠가 그에게 참으로 힘없이 무릎을 내어준 적이 있다

고개를 조아리고, 시덥잖게 눈물을 내준 적도 있다

그때마다 푸른 안광으로, 대나무처럼 꼿꼿하던 스승

입술을 비틀던 스승

회초리를 들어 등짝을 후려치기도 하던 스승

 

道界를 넘던 날

뒤에선 듯 날 불러 세우던 날카로운 목소리가 몇몇 있었다

애비였고

지아비였고

아, 그때까지도 자식이었던 내 안으로

하필이면, 악아 악아, 체수 마른 갈라진 목청 하나가

유난히도 칼끝처럼 파고 들기도 하여서는

산마루 쯤에서 하마터면 뒤를 돌아볼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차피 두고 올 것들을 두고 오는 길이라면

오고 있는 것들 쪽을 향하여 숨을 들이켜야 할 일이었다

 

스승은 요즘도 가끔 꿈속 같은 데서 나타나

발을 걸기도 했다, 말을 붙이기도 했다

우라지게도 변함없는 그 모습 앞에서

나는 별 수 없이 식은땀에 젖어서 그를 치켜다 보기도 했다

스승은 그렇게 아직까지도 나를 보내지 아니하였고

차라리, 어느 날엔가 내 안에서 그를

댓바람에 마중나가고 싶어져서는, 저만치서 다가오는

스승의 가슴패기를 냅다 한번 걷어차버리고도 싶어졌다

더는 배우고 싶지 않은 스승을 향하여

당신의 개나리 봇짐을 내어 주고, 서둘러 그를

下山시켜 버리고도 싶어졌다

 

 

그래도 그 스승 밑에서

여태까지 한 수 잘 배웠다 (고마우신 스승님).

 

 

가을바다에 오지마라 



가슴에 재가 남은 사람은
초가을 바다에 오지마라

 

가을바다에서는 흙피리 소리가 난다

 

댓이파리 쓸리는 걸음 무늬를
낮아져 가는 물 위에 새겨 두고
여름의 끝바람 몇 떨기가
사람들의 마을에서 멀어져 갈 때

 

쓰라린 목메임을 아직 다스리지 못한 사람은
초가을 바다엘랑 오지마라

 

어디선가 저렇게 소리 구멍을 빠져 나와
제멋대로 끼룩이는
가을바다의 피리소리 가까이 귀를 적시면

 

낮아질수록 푸르러지며
주저앉을 듯 한사코 일어서던......
깊은 음절의 階名들

 

버릴 것들을 미처 다 비우지 못한 사람은
초가을의 바다 근처에 와서 얼씬거리지 마라

 

보낼 것들을 다 떠나 보낸 자리에서
가을바다는 혼자서 문을 연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먼 곳에 두고 왔어도 사랑이다. 눈 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제 혼자서 부르며 왔던 그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를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외로운 열망같은 기원이 또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쪽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이 세상을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만 같은 한 순간이여.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휩쓸려, 손가락 빗질인양 쓸어 올려 보다가, 목을 꺽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긴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엔듯 실려오는 향취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제 몸이 꿰어 있어서, 갈 수 없어도 사랑이다. 魂인들 그 쪽으로 향하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등 너머에 있어도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저녁의 시

 

 

저녁이 오면

 

사람들의 마을에 아름다움의 빛깔이 든다

 

저녁이 온다고 마을이 저 혼자서 아름다워지랴

 

한낮의 온갖 수고와 비린 獸性들도 잠시 내려 두고

 

욕망의 시침질로 단단히 기웠던 가죽지갑도 주머니 속에 찔러 두고

 

서둘지 않아도 되는 걸음들로 사람들이 돌아 오기도 하는 때

 

돌아 와서 저마다의 창에 하나 둘의 등불을 내걸기도 하는 때

 

그러면 거기, 일순처럼 사람들의 마을로는 아름다움의 물감이 번지기도 한다

 

더러는 제 아이들의 재잘거림 속으로 방심과도 같은 마음의 등을 기대기도 하면

 

머리 위의 하늘에선  이 地上의 계급장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어린 별들의 수런거림이 일렁이기도 하는 때

 

저녁이 오면

 

저녁이 오면

 

어디선가, 낮은 처마의 이마께를 어루만지며 

 

스스럼없는 바람의 숨결 같은 것이 시간의 긴한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가기도 한다. 

 

내 가난한 수요일 아침

 

 

일터 앞 목백일홍 한 그루

수천의 꽃이파리 매단

그 경계가 환하다

 

이쁘다며

곱다며

뭇 눈길들이 머물다간 뒤에

하마 나는 그 꽃잎들이

마음으로 성가시다

 

성가시다

비틀린 몸통으로 지탱하는

흐드러진  붉은 꽃잎들 아래

 

그 옛날

학생 부군 아무개, 아버지의 모습이

땡볕 바래고 서 계신다

 

일찍부터 하초가 비틀려

상량목으로는 거리가 멀었던

몸피 애잔한 나무 한 그루

(이쁘다며, 곱다며 지나간 꽃나무 한 그루)

 

가난한 내 수요일 아침처럼

화안하도록  오래 서 계신다.

 

( 2004년 실천문학 겨울호 발표시)

 

그녀는 종교가 멀다

 

 

 재바른 몸짓으로 새벽머리 이미 술국일랑 한 솥단지 김서려 놓은 그녀는 피붙이 먼 누이뻘이다. 

 

 젊은 날의 남정네를 일찌감치 홀로 앞세운 헐거운 팔자치레며 사주쟁이 손금 운운해대는 薄福(박복)의 이력으로만 따져도, 벌써 이야기 책에서나 읽어버린 주모풍의 용모파기가 확실한 셈이다.

 

 방금 푼 배달 보따리를 내려 놓자 마자, 태양각 1003호에서 된장 찌개 2인 분이 화살촉 같은 다급함으로 독촉벨을 울려 댄다.

 

  머리칼 성긴 친정 어머니를 찬모겸 참모 삼아, 일인 다역으로 굽은 길 여관촌을 누비는 이 여자의 진중일기에는, 생의 시퍼런 물감이 흠씬하다.

 

 어쩌다 먼저 간 남정일사 속깊히 그리버, 그리버져 오는 날이거든, 소문에 하늘 일을 관장 한다는 가까운 교회라도 한번 나가보고 싶은 마음이사 굴뚝 같아도, 주일이면 늘 무르팍 종아리가 퉁퉁 부풀어 올라 그녀는 아직 종교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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