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끼니와 상물리기 송 기 호 (Ki-Ho Song) | 약 력 | 옛날에는 몇 끼니를 먹었을까 궁금하다. 하루 식사를 흔히 조석(朝夕)이라고 하듯이, 보통 아침과 저녁 두 끼를 먹었다. 다음은 조선 세종 때의 기록들이다. "집안사람이 궁핍하다고 하면 (신유정이) 정색하여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모두 하루에 두 끼 먹는다고 속담에 말하지 않았는가? 걸인이 죽어도 남는 옷은 있다고 하니, 굶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고 하였다(세종실록 8년<1426> 6월 11일)." "즉시 경상도 감사와 경차관(민정 시찰을 위해 임시로 지방에 보내는 벼슬)에게 지시하기를 “대개 사람은 하루에 두 번 먹지 않으면 굶주리는 것이다. 이치가 꼭 그럴진대 하물며 3, 4일 동안 식량이 떨어진 사람은 목숨이 얕은 물과 같으니, 만약 제 때에 진휼하지 않는다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게 된다. … ” 고 하였다(세종실록 18년<1436> 12월 28일)." 두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초기에는 두 끼 식사가 일반적이었다. 명종 3년(1548)에도 하루 두 끼를 먹지 않으면 주리는 것이라 했는데, 기본적인 상황은 근대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던 듯하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단지 하루 두 끼의 식사로 만족해야 했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세 끼나 네 끼를 들었다(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살림, 184쪽)." 그러나 지금처럼 식사 때가 일정하지는 않았고, 신분과 경제 형편에 따라 다양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임진왜란 때 선조의 식사에 관한 언급이다. "유희춘이 아뢰기를“엎드려 듣건대, 아침 식사를 드시지 않고 정오에 이르렀다고 하니, 놀랍고 근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사람이 저녁식사는 거를 수 있으나 아침과 점심은 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새벽에 흰죽을 들면 위장의 기운을 편하게 해서 진액을 내게 하는데, 이것이 양생하는 경험방(經驗方)이니, 엎드려 빌건대 이를 시행하소서.” 하였다(선조실록 6년<1573> 1월 21일)." 임진왜란 때의 일기인『쇄미록』에서도 조석을 먹은 기록이 나오는가 하면 점심(晝飯)을 든 사례도 종종 보이고, 노인이었던 어머니에게는 세 끼 식사를 올렸다. 또 조선후기 박지원도 만년에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 끼를 들었다고 하였다. "나는 세끼 밥, 세끼 잠 모두 잘 먹고 잘 잔다(박지원,『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돌베개, 48쪽)." 세끼 잠은 낮잠을 포함한 말일게다. 그러나 기근이 들면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던 반면에, 부역에 나가거나 일을 할 때에는 세 끼 이상을 들기도 하였다. 참고로 고대 로마에서는 하루 세 끼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로마인들 가운데 하루에 네 끼는 거나하게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러 글들을 보면 보통 하루에 세 끼를 먹었다. 그런데 더 옛날 공화국 시절에서 제국 시절로 오는 동안 끼니 이름에도 다소 변화가 있었다. 한밤중에 먹는 야참이 있었을 때는 보통 점심(jentaculum), 저녁(cena),야참(vespema)을 먹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 우리들처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바뀐다(제롬 카르코피노,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우물이 있는 집,444~5쪽)." 점심이란 말은 이미 당나라 때에 등장하는데, 이때는 지금의 간식과 같은 말로서 주로 새벽참을 가리켰다. 중국 신장성의 건조지대에서 발견된 당나라 무덤에서는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를 보여주는 실물이 확인된 적이 있다(그림 1 참조). 그러던 것이 우리나라에 와서 오찬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성호사설』인사문 소식점심(小食點心)). 아마 낮에간단히 먹기 때문에 그렇게 붙여진 것 같다.
우유를 짜는 데에는 갓을 쓴 선비 네 사람이 동원되었다. 한 사람은 송아지를 잡고, 다른 한사람은 쇠머리와 다리를 붙들고, 한 사람은 젖을 짜고 있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생활의 모습이 이처럼 동일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림 1. 당나라 때의 점심 그림 2. 우유 짜기(고대 이집트 부조) 그림 3. 우유 짜기(조영석) 우유를 먹는 풍습은 고려시대에 원나라 영향을 받으면서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아주 특별한 보양식품으로 왕실에서 주로 이용하였다. 이를 위해서 젖짜는 소를 특별히 길렀다. "충청도 감사에게 지시하기를 “청주의 국고에 있는 묵은 쌀·콩으로 젖소를 사서 날마다 우유를 받아 양녕대군에게 먹이도록 하라.”고 하였다(세종실록 권19, 5년<1423> 4월 4일)." "내의원(內醫院)에서 전례에 따라 우유를 올렸다. 낙죽은 우유와 쌀을 넣고 끓여서 소금으로 간을 맞춘 죽이다. 영조가 송아지를 바라보는 마음은 위의 두 그림에서도 그대로 읽혀진다. 이런 마음은 다음 글에서도 찾을 수 있다. "8도의 관찰사와 절도사에 유시하기를, “ … 또 세조께서는 시냇물에 독을 풀어 고기 잡는 것은 어진 정치에 어긋난다고 하시어 엄금하도록 유시하였다. 이처럼 물고기 잡이에도 어진 것과 어질지 않은 것을 구별하였다. 물고기 얘기가 나왔으니 지금 우리처럼 회로 먹었는지도 궁금하다. 원래 회(膾)는 육달월(月) 즉 육(肉)이 붙어 있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생선이 아닌 쇠고기였다. “인구에 회자(膾炙)된다”는 말은 중국 고대에 일상적으로 먹던 ‘회(육회)’ 와 ‘자(고기 꼬치구이)’처럼 사람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뜻을 가졌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즐기는 생선회는 근대에 일본 영향을 받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조선 시대에는 육회와 구별하기 위해서 생선회는 회(鱠)라는 글자를 쓰기도 했다고 하지만 보통은 지금처럼 회(膾)로 썼다. 강·바다에서 생산된 모래는 사(沙)이고 풍화되어 생긴 모래는 사(砂)인데, 지금은 크게 구별하지 않고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회를 쳐서 먹으려 했으나, 겨자가 없고 술도 없어서 그러지 못하니 한탄스럽다(『쇄미록』1597년 4월 "여러 사람이 낚은 물고기를 세어보니 300여 마리나 되었다. 회를 치고 탕을 끓이기도 하여 상하가 함께 나누어 먹었다(1598년 4월 2일)." 이 당시에도 생선회는 겨자와 함께 먹었고 술도 곁들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지만, 당시에는 고추가 없었으니 매운탕은 아니었을 것이다.
불가에서는“개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여 개고기를 먹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시대에 경주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었던 것이다. 그림 4. 창녕 비봉리 패총 출토 개 두개골 조선시대에 오면 개고기 요리는 개장국, 보신탕이라 하여 여름철 보양식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심지어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잔치에서도 개고기찜(狗蒸)이 올랐다. 그리고 다음은 개장국 집에서 반란을 모의한 일을 전하는 것이다. "7월 28일에 대궐 밖 개잡는 집(屠狗家)에 가서 강용휘와 신이 개장국(狗醬)을 사 먹고 함께 대궐에 들어갔는데, 별감 강계창과 나인 강월혜를 불러 귀에 대고 한참 얘기를 했습니다. … 이튿날 개잡는 집에서 서로 만났는데 보니 그의 한쪽 발은 물에 넘어져 아직도 젖어 있었습니다(정조실록 원년<1777> 8월 11일)." 정조가 직접 심문하였을 때에 주모자 전흥문이 답변한 내용이다. 궁궐 가까이에 개장국 집이 있었던 모양이다. 육개장이라고 하는 것도 쇠고기를 찢어서 마치 개장국처럼 끓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지금은 보신탕 대신에 사철탕이란 말을 주로 쓰는데, 그 역사는 오래 되지 않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구에서 개고기 먹는 것을 자꾸 거론하자 보신탕을 금지시켰고 그에 따라 궁여지책으로 사철탕이란 애매한 이름을 붙여서 음성적으로 판매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한 철 먹던 보양식이 사철 먹는 음식처럼 된 것이다. 음식에 따라붙는 것이 향신료이다. 여기서 후추에 대한 말을 하나 얘기해보겠다. 후추는 열대성 식물로서 중국에서는 호(胡)에서 전래된 초(椒)라고 하여 붙인것으로서, 고추(苦椒)나 산초(山椒), 천초(川椒, 초피나물)처럼 향신료로 쓰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향신료보다는 약재로 사용되었다. 위를 튼튼하게 해주고, 더위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의영고(義盈庫, 궁중 물품 담당 관청)를 시켜 후추 10말을 내려 보내 상하 군인들에게 두루 지급해서 더위에 쓰도록 하라(명종실록 11년<1556> 6월 15일)." 후추는 고려시대에 전래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신안 앞 바다에서 1970년대에 발견된 14세기 초의 중국 선박에도 후추가 들어 있어 당시에 중요 교역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일본을 통해서 후추를 들여왔고, 다시 중국으로 되팔기도 하였다. " 정언 남곤이 질정관으로 명나라 수도에서 돌아와서 아뢰기를 “후추는 무역에 이익이 많아서 명나라 수도에 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많이 가져갑니다. 또 살짝 끼워가기에 편리하여 서장관도 미처 찾아내지 못합니다. 후추는 우리나라 산물이 아니므로 엄금하여 가져가지 못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 ”고 하였다(연산군일기 2년<1496> 11월 30일)." 조선에서도 이를 재배해보려고 했는지 성종 13년 (1482) 일본에 후추 씨를 요구한 적이 있다. 외국 산물로 귀한 것이었기에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가 전해진다. "서울에 도착하자 잔치를 베풀어 접대하였는데 예조판서가 잔치를 주관하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강광(康光)이 후추를 잔칫상 위에 흩어놓으니 기생과 악공들이 서로 빼앗으려고 뒤죽박죽이었다. 강광이 자기가 묶는 숙소로 돌아가 탄식하면서 통역관들에게 “너희 나라는 망한다. 기강이 이미 무너졌으니 망하지 않는 것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권1)." 강광은 일본의 사신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조선을 염탐하러 왔던 인물이다. 지방을 거쳐 올라오면서도 허술한 모습을 보아온 터에 이처럼 궁궐에서의 기강마저 흐트러진 것을 보고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음식에도 이처럼 역사가 배어 있다.
아마 우리 음식과 일본 음식은 고대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내려온 반면에 수많은 이민족이 뒤섞이며 변화해온 중국은 크게 변해온 것 같다.
"왕이 이르기를 “사신으로 가면서 양식과 반찬을 풍성하게 갖추기를 집에 있을 때와 다름없이 하고, 심지어 소금이나 장 따위까지도 모두 실어간다고 한다. 다른 물건을 가지고 가는 것도 이럴 것으로 생각되니 이것도 폐단의 하나이다.”고 하니, 김이소가 아뢰기를 “소금과 장 따위는 저 나라에 있는 것이 입에 맞지 않아 먹을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나라의 음식이 비록 식성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어찌 먹지 못할 정도이겠는가. 부귀한 집안의 자제여서 먹을 수 없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뽑아 보낼 필요가 없다. 이는 사치한 습관이 점점 심해진 결과이니, 옛사람이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이처럼 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부터 사신 갈 때에 잡물을 싣고 가는 것을 일체 금지하도록 하라.”고 하였다(정조실록 18년<1794> 10월 15일)." 밥해 먹을 쌀과 반찬, 소금, 장 따위까지도 싸가는 것을 보다 못해 정조가 엄명을 내렸다. 다른 글에 보면, 부유한 자제들이 이 때문에 가기가 어렵다고 하면 차라리 역관으로 하여금 사신 임무를 수행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상이“장수와 병졸들의 시상은 조용히 조사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호궤는 빨리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르니, 김류가 “장수와 병졸은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고 호궤도 빨리 해야 하겠지만, 술과 음식을 마련하기가 어려우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간략히 장만하여 시행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다(인조실록 1년<1623> 3월 15일)." 옛날에 아버지나 할아버지 밥상에는 뭔가 하나 둘 반찬이 더 올라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윗사람이 식사를 하다가 남기기를 고대하였던 적도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식탁 생활을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온돌이 퍼지면서 앉아서 식사하는 소반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근대에 서양 영향을 받아서 여러 사람이 둘러앉는 식탁 문화가 다시 들어왔다. 이런 변화는 그림에서도 확인된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모든 관리가 대궐 안에서 밥을 먹고는 남은 밥을 종에게 주는데, 이 때문에 그릇을 잃게 되고 주인과 종이 같은 그릇에 먹는 것도 적절하지 못합니다. 지금부터 종들은 각각 자기 그릇을 가져와서 남은 밥을 받도록 할 것입니다.”고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4년<1422> 1월 18일)." 잔치가 끝나면 음식을 싸가는 것은 궁궐이나 민가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 … 비옵건대 옛 제도와 중국의 예절에 따라 크고 작은 잔치가 끝나면 종실과 문신·무신들이 북향하여 앉아서 남은 반찬을 각자 푸른 보로 싸가도록 하소서. 또 모든 공식 잔치에서 남은 음식도 종에게 주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25년<1443> 1월 27일)." 중종 22년(1527)에 동궁의 생일날 쥐를 태워 저주했던 ‘작서(灼鼠)의 변’ 이 일어났을 때 심문한 내용 가운데에 퇴선(退膳)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경빈 박씨의 심문 내용이다. "경빈의 진술에는“소첩이 지난 3월 초하룻날 오후 거처하는 방에서 귀인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퇴선은 물린 수라상을 의미한다. 이를 받아서 궁궐의 시녀들이 나누어 먹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조금 특별한 사례이다. " 임금이 수라상을 밀어 이광좌에게 주니 그는 동료 신하들과 나누어 먹기를 청했다. 임금이 이르기 “경이 먼저 먹고 난 다음에 우의정에게 주고, 또 나머지를 싸서 좌의정에게 전해주라. 경들이 이 밥을 먹으면 어찌 차마 잊겠는가? 그릇을 자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여 오늘 음식을 하사하고 그릇을 나눈 일을 알게 하여 대대로 내 자손을 보필하게 하라.”고 하였다(영조실록 13년<1737> 8월 14일)." 영조가 수라상의 음식과 그릇을 신하에게 나누어 주어 일종의 맹약을 하였다. 음식의 공유가 유대감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밥상을 아랫사람에게 물려주는 것은 공동체 성격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독특한 음식문화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획 : 남경필 편집간사 대한토목학회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
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