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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이 문 열
새로 맞춰 입은 양복 때문에 그날은 아침부터가 유별났다. 윤 사장 점포에 앉아 있는데 무슨 합섬인가 하는 회사의 뒷감이라며 들고 다니는 게 하도 값싸 샀던 양복감으로 재단사인 종구 녀석에게 부탁해 삼만 원에 양복을 뽑아 놓고 보니 제법 때깔이 괜찮았다. 남의 회사 뒤로 나온 감에 남의 양복점 뒷문으로 맞춰 입어 돈은 오만 원이 채 안 들었는데도 앞으로 한 몇 해는 외출복으로 잘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북채 같은 배를 안고 설거지라고 한답시고 숨을 학학거리던 아내도 출근하는 그를 보고 한마디 했다.
“어머, 당신 정말 새신랑 같애.”
별 악의 없는 듯한 농담이었지만 그는 갑자기 아내에게 미안해 섰다. 큰소리 탕탕 쳐 가며, 잘 지내는 사람 꼬드겨 서둘러 결혼한 지도 벌써 7년째, 그동안 옷 한 벌 변변한 거 사 주지 못한 게 새삼 마음에 걸렸다.
“미안해. 내 곧 당신도 한 벌 해 줄게. 백화점에 데려가, 거 뭐야 한 벌에 이십 만 원짜리루다가.”
별 자신도 없는 약속이었지만 그래도 듣기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허리를 펴던 아내가 살풋 웃으며 빈말이라도 그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해산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르는데 옷은 무슨……. 그리고 백화점에 이십만 원짜리 뭐 대단한 건 줄 아세요? 유명 상품부에 가면 그건 제일 하짜라구요, 하짜. 당신 새 옷 입은 거 샘 안 할 테니 어서 출근이나 하세요.”
그 웃음 속에서 퍼뜩 아내의 처녀적 모습이 피어났다 사라졌다. 이젠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뛰어야지. ― 골목길을 걸어 나오면서 그는 새삼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얼마 안 있으면 아버지가 된다는 게 순하고 착한 아내의 얼굴과 더불어 그런 전에 없는 다짐까지 끌어낸 것이었다.
생각하면 아내에게 미안한 것은 옷 한 벌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지난 7년의 삶 전체가 그녀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그가 아내를 만난 것은 한남동에서 자가용을 몰 때였다. 처음 그 집에 들어가니 아이들도 어른들도 고모, 고모 해 대고, 입성도 깔끔해 그는 그녀가 어김없이 사장님의 누이동생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 있으며 보니 친동생 같지는 않았고, 열흘 보름 지나서는 사촌은커녕 팔촌도 못 됨을 알 수 있었다. 요컨대 그녀는 사장님 고향 쪽 사람으로 그 집에 와 식모, 아니, 가정부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는 그도 집 떠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외로움을 많이 탔다. 거기다가 제대까지 한 건장한 남자라 여자 생각에도 꽤나 시달릴 때였다. 그녀가 그리 밉게 생기지 않은 데다 아직 도회지의 때가 묻지 않은 데 끌려 두어 달 공들인 끝에 애들 말마따나 ‘깃대를 꽂을’수 있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그 집에 그대로는 있을 수 없었다. 사장님 내외야 그들이 그냥 결혼해서 차고(車庫) 뒷방에 눌러살며 안팎으로 전같이 일해 주기를 바랐으나 사내자식이 오기가 있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두 사람이 대책 없이 밖으로 나가는 걸 겁내는 그녀를 달래 씩씩하게 그 집을 나왔다.
그 뒤 7년, 택시도 몰아 보고 운전 학원 시간 강사 노릇도 해 봤지만 모든 게 신통하지가 못했다. 언제나 단칸방에 두 식구 입치레가 빠듯할 뿐이었다. 전셋집이라도 마련한 뒤에 낳기로 한 아이는 언제쯤 안게 될지 기약 없고 아내의 나이는 벌써 서른 문턱을 넘어서고 말았다. 전셋집 같은 결혼 무렵의 조건 쑥 빼고 공사를 시작한 결과가 지금 턱밑까지 차오른 아내의 배였다.
하기야 우리도 이것저것 끌어모으면 사글세 보증금 이백 빼고도 한 오백은 되지 아마. 안 되면 성남쯤 가서 두 칸 전세방이라도 얻지 뭐……. 그는 애써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때마침 정류소에 닿은 버스에 올랐다. 언제나 그 시각이면 터질 듯한 버스여서 새 옷 단추라도 떨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그날은 어찌 된 셈인지 제법 통로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만큼 차 안이 넓었다. 뿐만 아니었다. 겨우 두 정류장인가 세 정류장 만에 코앞에서 자리가 나고, 할머니나 할아버지같이 자리를 다투기 어려운 경쟁자도 없어, 그는 거기서부터 장한평까지 삼사십 분을 편안히 앉아 갈 수 있었다.
중고차 시장 거리는 벌써부터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물건이 들어오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저희끼리 북적대는 셈이었다. 중고 자동차 중개상들과 그 사무실에서 일하는 이런저런 직원들, 자동차 부속품상과 그 점원들, 시트커버점 주인과 그 점원들, 자동차와 관계된 점포들 못지않게 줄지어 들어선 식당과 다방의 종업원들, 수상쩍은 사채꾼들, 그리고 그 자신과 같은 나까마(거간꾼)들이었다.
한 1년 그곳에서 밥 빌어먹다 보니 그새 아는 얼굴들이 제법 생겨 여기저기서 인사 삼아 한마디씩 해 댔다. 모두 새 양복을 겨냥한 농담이었다. 나까마 권 씨도 그중의 하나였다.
“야, 박 씨 오늘 새장가 드나? 이거 웬일고? 시장이 다 훤하네.”
같은 나까마라도 권 씨는 그처럼 영업 허가 있는 점포에 손님을 끌어 주고 건당 이삼만 원씩 구전이나 얻어먹는 패들과는 유가 달랐다. 항상 주머니에 두둑히 넣고 다니며, 좋은 물건이 나오면 제 돈으로 거둬 놨다가 감찰 있는 중개상들에게 이문 붙여 넘기기도 하고 급전 돈놀이로 재미를 보기도 했다. 그러니 만치 평소에는 거리를 두고 지내는 편인데 그런 농담까지 던지는 걸로 봐서 새 양복이 어지간히 눈에 띄는 것 같았다.
그는 먼저 칠성보험 사무실 쪽으로 갔다. 대개의 점포들처럼 보험과 자동차 중개상을 겸하고 있는 곳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이 그의 일터인 셈이었다. 주인인 윤 사장은 군대 생활을 함께한 고향 선배였다. 늦게 군대에 와서 여러 가지로 애를 먹고 있는 걸 자주 도와준 적이 있어 제대 뒤에도 연락을 하고 지내다가 어떻게 그 밑에서 밥 빌어먹는 처지가 돼 버렸다.
사실 1년 전 처음 그가 윤 사장의 사무실을 찾을 때만 해도 나까마 같은 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한 3년 택시를 하고 나니 넌덜머리가 나던 차에 재수 없이 사고를 내 회사에서 쫓겨난 며칠 뒤였다. 이제는 사람 좋은 주인이나 만나 자가용이나 몰아 볼 셈으로 그 방면에서 발이 넓은 윤 사장을 찾아갔던 것인데, 입에 맞는 떡이 없다고 마음에 드는 일자리가 얼른 나서지 않아 스페어 운전수로 몇 달 일하게 되었다.
나까마는 그렇게 스페어 운전수로 있을 때 어떻게 손대게 된 일이었다 처음에는 윤 사장에게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 주려고 호객꾼 비슷하게 나섰는데, 한 건(件) 한 건 일이 될 때마다 윤 사장이 어김없이 이삼만 원 쥐어 주는 돈에 맛을 들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곧 쉬운 건 아니지만, 이틀에 한 건씩만 올려도 남의 자가용 기사로 들어가 굽신대며 받아 내는 월급보다는 낫다는 계산이 들었다. 거기다가 윤 사장의 권유도 있고 해서 결국은 나까마로 주질러앉게 된 게 그새 예닐곱 달은 되었다.
“박 군, 웬일이야? 오늘 사장은 자네가 해야겠어.”
윤사장도 인사 대신 양복에 먼저 입을 댔다 보혐 경리 김 양도중개 경리 손 양도 별로 듣기 싫지 않은 농담으로 그를 맞았다. 허드렛 일에 스페어 운전을 겸하는 이 씨도 거기 있었으면 반드시 한마디 거들었을 것이다. 이 씨는 무슨 일로 이틀째 나오지 않고 있었다.
새 양복 덕분인지 그날은 건수도 쉽게 올랐다. 열 시쯤이었다. 전날 한 건을 성사시켜 그날은 좀 느긋한 마음으로 사무실 앞 ‘향수’ 다방에서 노닥거리다가 나오는데 저만치 로얄살롱 한 대가 느릿느릿 오는 게 보였다. 얼핏 보아도 차주는 아닌 것 같은 운전기사라 그냥 지나치려다 문득 마음이 끌려 차를 세웠다.
“사장님, 혹시 차 바꾸러 오신 거 아닙니까?”
그는 그 운전기사가 차주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말을 건네 보았다. 그 운전기사는 난처해하면서도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다는 표정으로 어물어물 대답했다.
“아니, 그냥 한번 알아보려고…….”
그렇다면 차주를 대신해 중고차를 팔려고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한 84년형쯤 되는, 돈 있는 주인 같으면 한창 싫증 낼 무렵의 물건이었다.
그는 드는 솜씨로 그 운전기사에게 달라붙었다. 곧 기분 상하지 않게 차주를 대신해 차를 팔러 온 기사라는 걸 실토받고, 그는 흥정에 들어갔다. 그새 몇 군데 들러 보고 가는 길인 듯 그 운전기사는 대강의 값을 알고 있었다. 값으로는 어떻게 후려쳐 볼 수 없다는 결 간파한 그는 곧 그런 경우에 쓰는 딴 수법으로 들어갔다.
“사실 사장님들이야 오만 원 십만 원 돈으로 여깁니까? 기사님이 돌아가서 이백만 원이라면 이백만 원인 줄 알고 백구십만 원이라면 또 그런 줄 알지요. 더구나 차라는 게 끝다리 몇 만 원까지 딱 떨어지게 값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보는 눈에 따라 조금씩은 층이 나기 마련이지요. 이렇게 합시다. 아직 물건을 자세히 보아야겠지만 오만 원 기사님께 딱 떼어 드리기로 하고 사장님과 흥정을 할 테니 우리 사무실로 오십시오. 위임을 받았으면 그렇게 서류를 해 드리지요.”
그러자 그 운전기사는 이제야 찾던 사람을 만났다는 듯 공중전화통으로 달려가 당장 차주의 위임을 받아 냈다. 워낙 잘 간수하여 쓴 차라 제값 다 치른 셈인데도 윤 사장 또한 그 거래를 흐뭇해했고, 그는 오전 중에 한 건을 성사시켰다.
그런데 좋은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느긋해져서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하는데 윤 사장이 그를 불렀다.
“박 군, 오늘 춘천 한번 갔다 오지 않을래? 내 하루 품 넉넉히 쳐주지.”
“무슨 일 인데요?”
이 씨가 나오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차를 바꿔 오는 일이야. 프린스 2000 있지? 83년형. 대림(大林)에서 다 손봐 놨다고 하니까 그걸 몰고 가 넘겨주고 엑셀을 받아 오면 돼. 거래는 우리끼리 전화로 대강 맞춰 놨으니까 박 군은 차 바꿔 가며 드라이브하는 셈치고 한번 갔다 와.”
그 프린스라면 기억에 있었다. 한번 먹어도(정면충돌해도) 크게 먹은 걸 귀 안 달린 백만 원으로 후려 둔 것인데, 이제 어떻게 넘기게 되는 듯했다. 엑셀과 바꿔 오라는 것으로 보아 실속 없이 큰 차 좋아하는 작자에게 앵길 작정 같았다. 남의 장사 속내야 어떻든, 하루 품이라면 만 오천 원이니 오후 벌이로는 괜찮았다. 그가 잠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가기 싫어하는 머뭇거림으로 잘못 안 윤사장이 덧붙였다.
“그쪽에서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야. 정히 입 씻고 모르는 척하거든 돈 만 원 정도 떼를 써도 괜찮아. 어서 갔다 와.”
그렇다면 더욱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이제 앞으로 사흘을 공쳐도 다급할 게 없다는 계산이 오히려 그를 흐뭇하게 했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좋은 일은 한 번 더 있었다. 춘천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점심을 먹는데 불쑥 떠오른 발상이 멋지게 맞아떨어져 준 결과였다.
그 발상이란 바로 춘천까지 갈 합승객을 구해 부수입을 올린다는 계획이었다.
택시를 몰던 때의 습관이 남은 탓인지 빈 차를 끌고 그 먼 곳까지 간다는 걸 아깝게 여기다 그걸 생각해 낸 그는 먼저 상봉동으로 차를 몰았다. 거기서 한두 시간 지체한다 해도 해 지기 전에는 넉넉히 춘천을 들렀다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봉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한 시간은커녕 십 분도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그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대합실로 들어가 춘천행 매표구 어름으로 갔을 때였다. 두 쌍의 젊은 남녀가 발착 시간표를 쳐다보며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버스는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되잖아?”
“그건 그렇고 걔들이 과연 거기서 다음 버스 올 때를 기다려 줄까? 여기서도 안 기다려 주고 떠난 애들이…….”
“그 택시 기사 새끼, 지가 뭘 안다고 마장동으로 차를 몰아 대긴 몰아 대?”
“바로 여기만 왔어도 차는 놓치지 않았을 거 아냐?”
짐작건대는 택시 기사가 터미널을 잘못 알고 마장동에 데려다주는 바람에 춘천 가는 버스를 놓쳐 다른 일행과 길이 엇갈란 것 같았다. 바로 그가 찾던 손님 중에서도 가장 알맞은 손님들이었다.
그가 말을 꺼내기 바쁘게 그들은 반갑게 따라붙었다. 요금도 그
가 마음속으로 기대했던 최고의 금액 ― 일 인당 오천 원 쳐서 이만 원으로 어렵잖게 결정을 보았다.
엔진이야 먹었건 말건, 윤 사장이 그들 세계에서 그런 일로 거금(巨金)인 이십만 원이나 들여 때 빼고 광낸 차는 안팎이 다 번지르르했다. 겨우 오천 원짜리 시트커버지만 안목 있게 고른 색상에다 새것이라 그런지 내부는 거의 호화스럽게까지 느껴졌다. 그걸 보자 요금 문제로 입을 한 자나 빼물었던 여자들도 얼른 입을 도로 끌어들였다.
춘천까지의 길도 좋았다. 휴일이면 미어터지곤 하던 교문리 사거리도 막히는 법 없이 지났고, 도로 확장 공사로 단선(單線) 구간이 자주 나오는 팔당까지도 차는 거침없이 빠졌다. 그리고 가평을 지나면서는 그야말로 드라이브하는 기분으로 이제 막 녹음이 짙어가고 있는 경춘 가도의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춘천에 도착해서 예상과는 좀 어긋나는 일이 생겼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그 젊은이들을 내려 주고 초행길인데도 이렇다 할 헤맴 없이 목적지를 찾아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목표로 하는 사람과 물건이 모두 없었다.
“사장님은 급한 일이 있어 오전에 양구로 가셨습니다. 오후 다섯 시까지는 돌아오겠다고 하셨으니까 한 두어 시간 춘천 구경이나 하시지요.”
찾아간 사람이 경영하는 작은 공장의 종업원인 듯한 젊은이가 그렇게 말할 때만 해도 그는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되면 사장이라는(제기랄, 사장도 많았다.) 그 사람을 만나자마자 돌아선다해도 서울 도착은 저물기 십상이었다. 밤길이라고 특별히 어려울 것은 없고, 품값도 이미 넉넉히 챙긴 셈이긴 해도, 낯선 도시에서 공연히 아까운 시간을 죽이며 기다려야 하는 게 싫었다.
그러나 차를 몰고 시원한 춘천호를 끼고 돌게 되면서 그의 기분은 금방 풀렸다. 그래, 오늘은 벌이도 좋았으니 마음 느긋하게 춘천관광이나 하자. 이런 때가 아니고 언제 팔자 좋게 물 구경 산 구경하고 다닐 수 있겠는가. ― 그렇게 마음을 돌려 먹자 그런 기회가 만들어진 것도 오히려 그날 재수의 연장인 듯 싶었다.
벌써 확보된 일당이 칠만 원, 거기다가 앞으로 또 얼마간은 더 불어날 것이어서, 잘하면 그날의 수입은 이 한 해 최고가 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지난가을 한창 경기가 좋을 때 하루 세 건이나 성사시켜 십만 원 가까이 챙긴 게 그가 가진 최고 수입 기록이었다. 오후 대여섯 시면 오히려 서울로 돌아가는 ‘나라시’ 손님을 얻기가 더 쉬울지 모른다. 그때도 엑셀이 있으니까 한 이만 원 챙길 수만 있으면, 사장인가 뭔가 하는 작자에게 돈 만 원 졸라 내 오늘 일당을 십만 원 넘길 수 있을 톈데.
껍질 번지르르한 승용차에 새 양복이 어울려 한몫을 하는지 유원지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여기저기서 간드러지게 사장님을 불러 댔다. 행락객이 좀 뜸해진 계절의 평일이라 파리를 날리던 업소들이 노는 입에 염불이라고 질러 대는 소리지만 사장님 소리가 미상불 듣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
회 한 접시 시키고 소주나 한잔 걸쳐? ― 그는 문득 그런 유혹을 느끼다가 서울까지 끌고 갈 차가 있다는 걸 상기하고 스스로를 억제했다. 몸에 밴 운전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낮선 곳 낯선 길이었다. 그 바람에 그는 콜라나 한잔 마시기로 하고 휴게소 한구석의 비어 있는 파라솔 밑으로 들어갔다.
기껏 시킨 게 콜라 한 병에 담배 한 갑이었지만, 가게 주인은 사장님 어서읍쇼, 였다. 그는 가져온 콜라를 빨대로 빨며 눈앞에 펼쳐진 호수를 바라보았다. 물은 회색빛이 돌 만큼 흐려도 시원한 전망에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문득 북채 같은 배를 안고 지하실 단칸방에서 숨만 가쁘게 몰아쉬며 앉아 있을 아내 생각이 났다. 몸을 풀면 언제 하루쯤 여기 와서 같이 보내야지.
그런데 콜라 한 병을 다 비운 그가 담배 한 대를 붙여 물 때였다. 저만치 택시 한 대가 서더니 젊은 여자 하나가 내렸다. 얼른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낯익은 데가 있었다. 상대가 낯익어 보이기는 그 여자 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할금할금 보며 그가 앉은 파라솔 쪽으로 다가오다가 갑자기 반색을 했다.
“어머, 박 사장님 아니세요?”
그 목소리를 듣자 그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사무실 부근 ‘동원’ 다방에 있던 미스 양이었다. 그녀를 알아보자 그도 반가웠다. 그녀 또한 그 부근의 흔한 다방 아가씨들 중에 하나였지만, 그에게는 퍽 인상적이던 여자였다. 다른 아가씨들처럼 되바라지지 않고, 한두 달 지나면 들리게 마련인 이런저런 지저분한 소문 없이 한 다방에서 다섯 달이나 있다가 조용히 떠나갔다는 것 외에도 그에게는 특별한 추억이 하나 있었다.
“아니, 미스 양이 여기 웬일이야?”
“박 사장님이야말로 웬일이세요? 신수도 훤하시고……. 혹시 저 차 박 사장님이 끌고 오신 거 아니세요?”
중고차 거리의 업소에서는 나까마도 도매금으로 사장이라고 불러 주었다. 미스 양은 옛날 습관대로 그렇게 부르는지 몰라도 그가 듣기에는 자신을 갑자기 성공한 사람으로 착각해 그러는 것처럼만 들렸다. 그는 굳이 자신의 궁색함을 드러낼 것도 없다 싶어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83년형이야. 때 빼고 광내 그렇지 몇 푼 안 가…….”
“그런데 혼자 오셨어요?”
미스 양이 다시 그렇게 묻자 비로소 그는 그녀도 자신이 스페어 운전까지 겸한다는 걸 안다는 게 떠올랐다. 동시에 조금 전의 물음이 착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누구 차를 몰고 왔느냐를 물은 것이란 걸 깨닫고 볼이 화끈해 왔다. 그 남모를 부끄러움이 갑자기 허세가 되어 생각지도 않은 거짓말을 하게 했다.
“그럼 떼로 몰려와야 돼?”
“아니, 그저…….”
“골치 아픈 일도 있고…… 마음도 어수선해서 바람이나 쐴까 하고 왔어.”
하지만 그렇게 거짓말할 때만 해도 무슨 특별한 속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 멋있어. 그런데 왜 하필 춘천이에요?”
“시원한 물 구경이나 하려고. 오히려 미스 양이야말로 여기 웬일이야?”
“모르셨어요? 여긴 제 고향이에요. 이젠 아무도 안 살지만…….”
미스 양이 거기까지 말해 놓고 느닷없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 한숨이 갑자기 그에게 이상한 기대를 걸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그걸 감추고 짐짓 농담 섞어 말했다.
“그렇다고 여기 이 휴게소 파라솔 밑이 바로 고향은 아니잖아?”
“아뇨.”
그녀가 고개를 살래살래 젓다가 다시 처량한 어조로 말했다.
“저두 시원한 물 구경이나 하려고…….”
“나처럼 골치 아프고 마음도 어수선해서 말이지.”
그러면서 그는 대여섯 달 전에 있었던 일을 언뜻 떠올렸다. 그날은 찬 날씨로 거래가 끊겨 아침부터 다방에 죽치고 있는데, 갑자기 미스 양이 시키지도 않은 엽차를 가져다 놓으며 재빨리 소곤거렸다.
“차 한잔 시키고 절 불러 주세요. 그리고 절 곁에 앉혀 몹시 저와 친한 척 해 주세요.”
그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그날 미스 양은 참으로 이상했다. 그토록 새침을 떨던 여자가 수다스레 재잘거리는가 하면 곁에 붙어 앉아 팔을 끼며 머리를 기대 오기도 했다. 그게 별로 기분 나쁠 것도 없어 그녀가 하는 대로 받아 주고 있던 그가 어렴풋하게나마 그 까닭을 눈치챈 것은 한 청년이 험악한 눈길로 그녀와 그를 쏘아보다가 거칠게 일어나 그 다방을 나가 버린 뒤였다. 아침부터 다방 한 구석에 죽치고 앉아 있던 음침한 얼굴의 청년이었다.
“벌써 다섯 달째 따라다니는 사람이에요. 다방을 옮겨도 용케 알고 찾아와요. 귀찮고 으스스해요. 오늘 일이 효과 있을는지 몰라.”
저녁에 그녀는 그렇게 까닭을 밝혔지만 청년은 다음 날도 다음 날도 그 다방에 나왔다. 그가 두어 번 더 그런 식의 대역(對役)을 해 줬어도 끝내 효과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미스 양이 동원다방을 떠난 것도 어쩌면 그 청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청년 아직도 따라다녀?”
짧은 시간에 그런 일들을 모두 떠올린 그가 문득 궁금해 물었다.
“이젠 끝났어요.”
그녀가 까닭 없이 독기를 품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겨우 대여섯 달 만인데도 그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좋게 말하면 도회적으로 세련된 것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탁해지고 찌들었다 할 수 있는 그런 변화였다.
하지만 결국은 미스 양과의 만남도 .그날의 유별난 재수에 또 다른 행운을 보태 줄 것 같은 예감을 주는 일이 곧 일어났다.
“뭐 마실 거라도 가져올까?”
그 청년 때문에 분위기가 굳어진 듯해 그가 그렇게 묻자 그녀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이왕 시키려면 맥주를 주세요.”
그리고 맥주가 오자 먼저 그에게 한 잔 가득 부어 주며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시시하게 콜라가 뭐예요? 자, 한 잔 마셔요.”
그런 그녀는 벌써 옛날에 알고 있던 그 햇내기 다방 아가씨가 아니었다. 술잔을 내미는 목소리에 금세 느낄 만큼 칙칙한 고혹이 배어 있었다.
아마도 평소 때 그런 일을 당했으면 그는 먼저 몸부터 사리며 그녀를 살폈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부터 거듭된 행운에 마음이 풀어져 있던 그에게는 오히려 그런 그녀의 변화가 은근히 반가울 뿐이었다.
사실 그녀가 동원다방에 있을 때, 망상 속에서나마 수없이 싱싱한 그녀의 나체를 품었었다. 아내와의 방사(房事)가 차츰 누림보다는 의무로 변해 가면서 꿈꾸기 시작한 아름답고 달콤한 사랑의 대상으로도 그는 여러 번 그녀를 꿈꾸었다. 거기다가 그 청년의 일로 그녀와 맺게 된 그 대단찮은 관계도 그에게 엉뚱한 기대를 품게 했다. 그래서 한 번쯤 대담하게 다가가 볼까 하다가 나 같은 것이, 하는 생각에서 풀썩 주저앉고 하는 사이에 그녀는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이 여자는 내 그때의 갈망을 채워 주기 위해 다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운수 좋은 날에. ― 그는 문득 그런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 미스 양도 그런 그의 짐작이 옳음을 확인시키려는 듯이나 점점 대담하게 다가왔다. 무엇에 쫓기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래서 절박하게 그에게 매달리고 있는 듯한 기색이 까닭 없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는 그게 바로 그냥은 기대하기 어려운 그녀를 그의 품에 안겨 주려는 그날의 유별난 운수 덕분으로만 여겨졌다.
거기다가 그를 더욱 자신 있게 만든 것은 그럭저럭 다섯 시가 가까워 걸어 본 전화의 응답이었다.
“사장님이 아무래도 오늘 돌아오시기 어려울 거라는 전화를 주셨숩니다. 돌아와도 밤이 늦을 것 같으니 어디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쉬시랍니다. 오늘 밤 숙식은 사장님이 물어 드리겠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도록 하십시오.”
그는 그 말이 마치 미스 양과 이왕 만났으니 끝을 보고 헤어지라는 말처럼 들렸다.
“바람 쐬러 오셨다더니, 결국은 일 땜에 오셨군요? 이제 어디로 가세요?”
겨우 맥주 세 병으로 취한 듯 수다를 떨던 그녀가 전화를 걸고 돌아오는 그에게 약간 실망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그가 대수롭잖은 일이라는 듯 빙긋 웃어 주며 말했다.
“응, 여기서 가내 공업 조그맣게 하는 사람인데 거래가 좀 있어서. 하지만 내일 아침 일찍 만나기로 했어.”
마침 그녀를 위해 일부러 거래를 다음 날로 미뤘다는 투였다. 그녀가 드러날 만큼 반가움을 과장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잘됐어요. 그럼 그때까지 박 사장님 시간은 제가 몰수예요. 괜찮죠? 우리 어디 가서 진짜로 한잔하며 얘기나 해요. 오늘 울적한 데 잘 만났어요. 어쩌면 내일 아침에 저도 박 사장님 따라 서울로 갈지 모르겠어요.”
“그럼 아예 거기서 잘 수 있는 곳으로 가. 술이 취해 차를 몰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이제는 완연히 천박한 교태로 바뀐 그녀의 응석에 어떤 경계나 의심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까닭 모를 확신 같은 것에 차서 그가 그렇게 말했디. 그 말에 숨겨진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발딱 몸을 일으키며 신을 냈다.
“그런 곳이라면 딴 데 갈 것도 없어요. 제가 묵고 있는 방갈로로 가요.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정갈해요. 싱싱한 향어도 있고…….”
“미스 양이 묵고 있는 방갈로? 아니 젊은 여자가 그런 델 왜?”
“오늘이 사흘째예요. 제가 거기 묵고 있는 까닭은 이따가 얘기해 드릴게요. ‘동원’을 나온 뒤로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혹시 뭐 자살이라도 하려고 마지막으로 고향을 둘러보러 온 거 아냐?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혼자 택시를 타고 온 것도 그래. 이 호수 어디에 잊지 못할 추억이라도 있어 엉뚱한 생각으로 온 거 아냐?”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렇게 슬쩍 건드려 보았다. 아무리 운수 좋은 날 절로 굴러 들어온 염복이거니 여기려 해도, 그녀에게서 어딘가 광기 같기도 하고 살기 같기도 한 어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녀가 그 웃음으로 그의 불안을 한꺼번에 씻어버리려는 듯이나 깔깔거리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박 사장님. 아무렴 함께 죽자고 조르지는 않을게요.”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또 그곳의 계산을 굳이 고집해 자신이 했다. 만 원 남짓한 돈이지만, 그에게는 또 한 번 그날의 유별난 재수를 상기시켜 주는 일이었다.
“여기는 제 나와바리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게 방갈로에서 숙식도 그녀가 맡겠다는 것 같았다. 이미 그날의 수입을 따지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나오자 그는 다시 한 번 그걸 따져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장이란 작자가 아무리 노랭이라도 사람을 붙들어 재워 놓고 그 숙식비로 이만 원도 안 내놓지는 못하겠지. 그렇게 되면 내일 서울 나가서 손님을 못 받아도 오늘 수입이 십만 원은 넘어서는구나…….
미스 양이 운전석 옆자리에 붙어 앉아 길을 안내하여 간 곳은 거기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산장(山莊)이었다. 강물을 발치에 두고, 멀리 춘천호를 굽어보는 산 중턱에 몇 채 자리 잡은 것들 가운데 하나로, 미스 양의 말대로 분위기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차를 마당에 대자 주인인 듯한 중년 사내가 나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그를 맞았다. 그러다가 뒤이어 미스 양이 내리는 걸 보고 알은체를 했다.
“아이구 아가씨도 같이 왔구먼. 나는 어디 갔나 했지.”
그런데 그때였다. 그 집 뒤 수풀 쪽에서 무언가 번쩍 쏘아 오는 듯한 빛이 있었다. 그가 놀라 그쪽을 보니 어떤 남자 하나가 막 돌아서서 숲길로 접어드는 중이었다. 그 남자의 뒷모습 어디에도 빛을 뿜을 만한 게 없는 것으로. 미루어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지만, 그는 왠지 그 남자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주인에게 그 남자에 대해 물어보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주인은 미스 양의 주문을 받느라 그쪽으로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아저씨, 내 방 그대로 있죠? 그리고 술 좀 보내 줘요. 향어 회하고. 술은 소주면 돼요. 그리고 저녁도 좀 준비해 주세요. 담배도 한 갑 주시구요.”
그러다가 그녀의 주문이 끝나고 겨우 주인의 주의를 끌 만했을 때는 이미 숲길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는 그때껏 남자가 거기 남아 있었다 해도 그는 구태여 그 남자에 관해 주인 남자에게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는 동안 죽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의심 ―혹시 그 산장은 어떤 고급스러운 비밀 요정이고 미스 양은 거기서 술을 따르는 색시는 아닐까, 그래서 손님을 끌기 위해 호숫가의 유원지로 나왔다가 내 허세에 속아 나를 유인해 온 것이나 아닐까, 하는 ― 이 막 풀어진 뒤의 안도감 때문이었다.
미스 양이 묵었다는 방은 서울의 어떤 장(莊) 급 여관 못지않은 설비였다. 미스 양이 간단히 씻으러 들어간 뒤, 보료처럼 두터운 요에 이불을 끼고 비스듬히 기대앉아 그는 다시 한 번 그날의 행운을 되새겨 보았다. 그 대여섯 달 동안 미스 양이 어떻게 타락해 어떤 여자가 되어 있다 해도 그 뜻밖의 염복은 감격이었다. 어쩌면 그 하루의 엄청난 벌이보다 더한.
그 감격은, 함께 밤을 지낼 사람들끼리가 아니면 보이기 어려운 흐트러진 차림새의 미스 양이 화장기 지워진 예전의 그 신선한 얼굴로 머리에 물기를 닦으며 방 안으로 들어서고 뒤이어 보기에도 먹음직한 향어 회와 함께 그런저런 정갈한 밑반찬이 곁들여진 술상이 날라져 음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아직 해가 서쪽 산자락에 걸려 있었건만 그는 술상이고 뭐고 다 밀어 지우고 미스 양과 질펀한 정사부터 한바탕 먼저 벌이고 싶었다.
그런데 술상을 내려놓고 방을 나가던 아주머니가 문득 미스 양에게 지나가는 듯한 소리로 불쑥 한마디 했다.
“아가씨, 밖에서 어떤 손님이 찾는데요.”
“손님?”
이상하게 긴장하며 미스 양이 물었다.
“나와 보면 아실 거라는데요. 지금 문밖에 있어요.”
아주머니가 여전히 무표정 한 얼굴로 그렇게 대꾸했다.
“누굴까?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 줄 모를 덴데…….”
미스 양이 그렇게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고개를 까닥하며 말했다
“알겠어요. 크림이라도 바르고 나갈 테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세요.”
그래 놓고 급하게 크림을 찍어 바른 다음 흐트러진 차림 그대로 방을 나갔다. 별거 아닐 거라는 걸 과장하는 듯 그에게는 한마디 양해조차 구하지 않았다.
갑자기 부풀어 오르는 욕정으로 들떠 가던 그도 별생각 없이 그녀를 내보냈다. 기다리는 사람은 방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지 그녀는 방문을 열어 둔 채 복도 쪽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뒤로 당연히 들려야 할 그녀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혹, 하고 짧고 숨 막히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가 싶더니 바깥은 그대로 잠잠했다.
그녀가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그가 바깥을 내다보고 싶어진 것은 바로 그 이상한 고요 때문이었다. 그녀가 좀 멀리 갔다 해도 슬리퍼 끄는 소리는 들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일으킨 그는 천천히 문께로 가서 그녀가 사라진 복도 쪽을 내다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문에서 겨우 서너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어떤 남자의 품에 얌전히 안겨. 그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느낌으로 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다가 움찔했다. 바로 그 청년이었다. 동원다방에서 보았던 그 음침한 얼굴의 청년.
그렇다면 안겨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 이번에는 갑작스러운 공포로 얼어붙으며 그는 펴뜩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안긴 자세가 어딘가 어색한 그녀를 다시 한 번 살피려는데 그 청년이 갑자기 그녀를 밀어젖히고 그를 향했다. 그때껏 그 청년의 앞을 가리고 있던 그녀가 흘러내리듯 풀썩 마릇바닥에 쓰러지자, 피 묻은 칼을 든 그 청년의 손이 드러났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그는 어떻게든 몸을 빼 그 청년을 피해보려고 했다. 그리고 되도록 틈을 얻어 몇 마디라도 미스 양과의 관계를 해명해 보려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시도도 쓸모없었다. 그 청년이 퍼뜩 다가오는가 싶더니, 무언가 둔중한 것으로 거세게 얻어맞은 것 같기도 하고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것 같기도 한 묘한 통증이 그의 옆구리에 일며 몸이 휘청 기울었다.
“이 더러운 새끼. 돈이란 그렇게 쓰는 법이 아니야. 네놈이야 아무리 쉽게 벌었더라도…… 쉽게 써서는 안 되는 게 돈이란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기껏 한다는 짓이 반짝거리는 자가용에 계집이나 싣고 유람질이야? 너 같은 놈은…… 세상에 살 자격이 없어. 세상을 구석구석까지 썩게 하는 모진 독물 같은 존재야…….”
그런 외침과 함께 앞서의 그 묘한 통증이 어깨에도 등허리에도 가슴에도 일었다. 그는 아픔보다는 이상한 막막함에 빠져 드러눕고 싶었다. 콰당, 소리를 내며 복도 바닥에 드러눕는 그의 귀에 이제 울부짖음으로 변한 그 청년의 외침이 무슨 아련한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네놈들은 무슨 장난처럼 흩뿌리고 다니는 독물이지만…… 한번 거기 중독되면 저 아이들은 일생이 썩어. 한번 맛들이면…… 제가 떠나온 곳도 돌아갈 곳도 깨끗이 잊어버리고…… 몸과 마음이 함께 썩어 문드러져…… 도회의 시궁창을 흘러야 겨우 끝장을 보게 되는…… 그런 독극물이란 말이야. 너는 그런 독극물을 함부로 뿌리고 다니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그러나 아물아물한 가운데도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 운수 좋은 날에…….”
(1987년)
2016년 12월 1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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