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은 자신을 아는 데 관심이 있으며, 인간이 존재한 이래 인간의 본질에 대해 왜 많은 화두가 대두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인간이 동물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동물은 먹이와 보온과 본능에 의해 종족 번식 외에는 본능이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족 번식의 짝짓기의 경우도 우세한 수컷이 다른 수컷들을 물리치고 발정 난 암컷을 차지하고, 그 암컷과 가족 관계를 이루기보다 수컷은 다른 발정 난 암컷에게 본능적 관심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자신이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직장에 다닐 것인지, 결혼할 대상을 선택하는 등 미래를 계획하고 선택해 나가는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 존재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언제나 알 필요를 느끼게 된다.
예로써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자 그의 “예술적 힘의 마지막 표현”이라고 묘사되어 온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의 제목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라고 한 것처럼 인간은 누구에게나 인간 자신에 아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연약한 갈대이기 때문에 광대한 우주보다도 위대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주는 광대하지만 우주로서 있는 이유를 생각할 수 없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다는 자체는 인간 삶의 화두는 폴 고갱이 자기 작품의 제목으로 붙인 것처럼 나의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은 이 땅에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인간의 근원이 있다는 것이다. 시초의 첫 사람의 근원은 어디인가? 고대의 한 문헌의 기록은 인간의 근원을 대단히 높은 차원으로 알려 준다. 그 기록은 이집트의 공주의 아들로 성장하였지만, 이집트 왕족의 신분을 버리고 이집트인의 노예 이었던 히브리인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 동족의 지도자가 된 모세가 기록한 것이다. 그 기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를 닮은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기어 다니는 동물을 다스리게 하자.’ 이렇게 하느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기 시작하셨으니,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세기 1 : 26, 27. 이 모세의 기록은 인간의 차원을 조물주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존재로 부각한다. 인간이 조물주의 형상, 특성을 닮은 존엄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모세의 계속되는 기록은 인간을 만든 재료가 이 땅의 재료, 이 땅에서 취할 수 있는 원소임을 기록하였다. 그 기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자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 : 7.
이 기록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적인 재료가 흙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흙으로 만들어진 그 존재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신 분은 조물주인 여호와 하느님이라는 것은 인간 생명의 근원이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첫 사람은 그렇게 하여 생명체가 되었다. 이 생명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네페쉬’인데, ‘네페쉬’는 일반적으로 영어나 한국어 그 외 언어도 영혼으로 번역되지만, 정확한 의미 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며 바다와 물에 사는 모든 어류와 포유류, 공중 나는 새와 모든 육지 동물을 ‘네페쉬’ 영혼이라고 모세의 기록은 일관되게 명하고 있다.
본래 ‘네페쉬’의 의미가 ‘호흡하는 자’로 모세가 호흡하는 모든 생물에게 그 단어를 사용 하였다는 것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숨 쉬는 생물의 재료가 이 땅의 원소이기 때문에, 사람이나 숨 쉬는 모든 생물이 재료는 같지만,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사람은 모든 숨 쉬는 생물보다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숨 쉬는 지상의 모든 생물과 재료는 같지만, 지상의 숨 쉬는 생물을 다스리라는 조물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받은 면에서 이 땅의 특별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사람은 조물주가 목적한 대로 살고 있지는 않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은 조물주로부터 이 땅의 숨 쉬는 모든 생물을 다스릴 임무를 받았지만, 조물주는 사람이 사람을 다스릴 권한을 주지 않았다.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든 분은 조물주고, 그 사람은 조물주의 권위 아래,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의 창조 질서가 흐트러지자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여 해를 입히게 되”었다고 (전도서 8:9) 성경의 한 필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정부형태는 조물주가 목적한 것이 아니며, 이로 인해 사람은 불행하게 되었고, 이 땅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성경 필자 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오래전에 자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 하신 대로 모든 것이 회복될 때”(사도행전 3:21)에 말하였으며, 그 회복이 무엇을 말 하는지는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라고 하였으므로 성경에 예언된 것을 조사해 본다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알게 되는 인간 자신의 정체성은 조물주에 의해 이 땅의 재료로 모든 숨 쉬는 생물처럼 창조되었지만, 조물주의 형상대로, 조물주가 가진 고귀한 특성의 얼마를 인간도 가지도록 창조되었고, 이성 없는 숨 쉬는 생물들을 다스릴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 과 그와 함께 땅을 정복해 나가는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서, 이 땅 전체를 본래 그가 삶을 시작한 에덴동산을 확장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바로 인간 자신을 아는 것에는 사람에 대한 조물주의 목적을 알지 않고는 고갱이 자기의 역작인 그림의 주제로 붙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를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인간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이 땅과 인간에 대한 조물주의 목적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조물주의 목적을 알게 될 때, 인간의 삶의 방식은 자기 정체성을 찾는 길이 될 것이며, 그것이 인간 삶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이 필자는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