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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판의 문법
A Grammar of the Destruction Field
살아남은 증언자를 매장하는 탈진실의 권력 기술
억울한 누명을 벗는 것은 저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습니다.
― 리원량, 코로나19 최초 경고자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혁명이다. ― 조지 오웰
증언을 중심으로 구축된 진실 공통장에 대한 반동으로
까판, 즉 반공통장이 형성되어 그것이 사회 전체의 지배 담론으로
발전하면서 공통장을 해체하는 과정과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방식의 담론 테크놀로지를 분석한다.
지은이 조정환 | 정가 23,000원 | 쪽수 496쪽
출판일 2020년 3월 7일 | 판형 사륙판 무선 (130*188) | 출판사 도서출판 갈무리
총서명 Virtus, 아우또노미아총서 68
ISBN 978-89-6195-229-3 03300 | CIP제어번호 CIP2020005293
도서분류 1. 정치학 2. 철학 3. 사회학 4. 경제학 5. 사회과학 6. 여성학
이 책은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 윤지오의 증언을 통해 형성된 진실 공통장에 대한 반발, 거부, 억압, 배제의 메커니즘이 증언자를 사기꾼으로 만드는 마녀사냥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한다. 이것은 일명 ‘까판’이라 불리는 반공통장 공간의 운동으로 나타나는데, 이 공간은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 까계정에서 출발하여, 변호사·기자·작가·교수와 같은 전문가 집단, 신문·방송과 같은 전통 매체, 국회의원·경찰·검찰·법원 같은 국가기관 등에 광범위하게 산포되면서 우리 사회의 지배적 논리이자 주류 담론 문법으로 자리 잡아 결국 전 사회적 까판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 책은 이 전 사회적 까판의 논리와 운동 메커니즘을 권력형 성폭력 가해권력이 사용하는 권력 테크놀로지로서 분석한다.
― 본문 중에서
『까판의 문법』 간략한 소개
2009년 3월 7일 신인배우 장자연은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는 구절이 포함된 문건(증언조서)과 리스트(증언리스트)를 남긴 지 일주일 만에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윤지오는 신인배우 장자연의 후배이자 동료 배우였다. 윤지오는 언니 장자연의 고통 및 죽음과 관련하여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2018년까지 13번에 걸쳐 증언했다. 2018년에 윤지오는 국민들의 진상규명 요구에 부응하여 목숨을 걸고 귀국하여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세 차례 더 증언하였다. 총 23만 5796명의 시민들이 “고 장자연의 한맺힌 죽음의 진실을 밝혀주세요.”라며 국민청원을 통해 장자연 사건의 진상규명을 국가에 요청했고 그 청원이 검찰 과거사위원회와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의 결성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책 『까판의 문법』과 이와 동시에 출간하는 『증언혐오』는 2019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지 5년이 되는 날에 시작된 증언선 윤지오호의 침몰이라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1년여에 걸친 집중적인 연구의 결실이다. 이 두 책은 하나의 사건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증언혐오』는 사람들을 위한 증언자의 증언증여와 증언자를 위한 후원자의 화폐증여에 의해 형성된 진실 공통장을 중심에 놓고 이에 대한 혐오의 경향이 변호사, 기자, 작가 등의 전문가 집단과 SNS 등에서 발생하는 모습을 그렸다. 『까판의 문법』은 공통장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이 반공통장, 즉 까판의 논리가 사회 전체의 주류 담론으로 발전하면서 공통장을 와해시키는 과정과 이 과정에서 사용된 여러 유형의 테크놀로지를 분석한다.
윤지오는 권력형 성폭력(‘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을 기록한 장자연 문건과 리스트가 있었고 보았고 그 일부는 지금까지 기억난다고 증언했다. 이 책의 1부에서 저자는 이러한 윤지오의 증언을 해체하려는 가짜증언, 즉 ‘대안증언 쿠데타’를 다룬다. 윤지오의 카톡 선배였던 김수민 작가가 윤지오의 말이 100% 진실은 아니라고 운을 떼고 장자연 사건 최초 보도자를 자임하는 김대오 기자가 나서서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변호사 박훈이 이 거짓말을 받아 윤지오가 있지도 않은 것을 지어내 사람들을 기망했다면서 사기죄로 고소 고발을 하는 일종의 집단적 쿠데타 작업을 통해 증언자의 증언 신빙성을 추락시키고 가짜증언이 진짜증언을 내몬 후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것이 증언 쿠데타로 나타난 증언 까판에 대한 분석이다. 2부에서 저자는 가짜증언을 통해 윤지오의 증언 신빙성을 실추시킨 후 뉴미디어 까계정들과 전통미디어 까계정들이 증언자의 사생활, 인성, 학력 등을 공격하여 증언자로부터 증언 자격을 박탈하는 증언자 죽이기의 과정을 그린다. 이 증언자 죽이기는 증언자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냉정하고 잔인한 언어행위(포스팅, 피드, 기사, 방송)와 증언자를 나포하여 격리하려는 법률적 절차들을 포함한다. 인격 말살에서 사법적 배제에 이르는 이 전 사회화된 까판의 논리가 결국 증언자를 사기꾼으로 낙인찍고 체포영장 발부, 여권 무효화 조치, 적색수배로 이어진 사법적 배제를 가져왔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까판의 문법』 상세한 소개
설리의 죽음과 까판
2019년 10월 14일 오후 3시 21분경 배우 설리가 자택 2층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는 자신이 MC로 활동했던 <악플의 밤>에서 “실제 인간 최진리의 속은 어두운데 연예인 설리로서 밖에서는 밝은 척해야 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가족과 친지에게는 우울증, 대인기피증, 공황장애를 호소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질병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악플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윤지오가 설리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을 올린 후 그는 인스타그램 DM 메시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너 같은 미친X이 죽었어야 하는데 설리처럼 이쁜 애를 왜 데려갔을까”라고 쓰여 있었다. 이 DM 캡처를 공개하면서 윤지오는 몇 개의 인스타 계정과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를 동시에 공개했다. “이것들이 대표적인 까판들이며 더 아시는 까판들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시고 게시물과 계정을 신고해 주시길 부탁드린다”는 당부와 함께.
‘까판’이란 무엇인가?
좁은 의미로 까판이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까는 판을 지칭한다. 악플이 포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까판은 주로 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까판은 악플이 분화되고 집중된 형태를 띤다. 주요한 까이슈를 제기하는 메인 포스팅 아래에 수많은 까댓글이 달리는 방식으로 가동되기 때문이다. 까판의 목적은 오직 표적이 된 인물을 타격하고 해체시키는 것 하나에 집중되어 있다. 타격과 해체의 대상은 넓은 의미에서의 명성과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주로 뜨는 인물, 갑자기 유명해진 인물을 표적으로 삼으며 큰 명성을 가진 사람, 큰 권력을 가진 사람, 예컨대 정치가나 재벌을 타격하는 것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 까주체가 자신이 경쟁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인물, 다시 말해 ‘나도 저 정도의 명성과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여기는 사람이 표적으로 된다. 이 때문에 상대방을 자신의 발아래로 끌어내리는 정서인 혐오가 까판의 기본 정동으로 작동한다.
상대방이 까기의 효과로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추락하거나 질병으로 쓰러지거나 죽음으로 파멸하는 것은 까판의 성공을 의미한다. 혐오를 통한 이 해체 공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는 계정일수록 까판에서의 평판이 높아지고 까두목으로 등극한다. 이와 더불어 부하 계정들이 그 계정 주변에 모여 더 강력한 까판이 형성된다. 물론 까판의 해체주의적 특성상 까두목의 계정이 표적이 되면서 까까판, 까까까판 … 이 형성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까두목으로의 등극도 갑작스러운 명예의 획득이며 일종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윤지오와 까판 현상
윤지오를 타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까판은 2019년 4월 2일 justicewithus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필두로 무수히 생겨났고 유튜브로까지 확산하였다. 당시 윤지오에게 쏟아지던 관심으로 인해, 윤까가 나름대로 계정의 조회 수와 구독자 수를 늘릴 수 있는 호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증언자 윤지오를 혐오스러운 인간으로 끌어내린 것은 이 까판의 지속적 작업의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까판의 계정들은 서로 소통하면서 아프리카 방송 동영상에서 지탄할 만한 클립들을 편집해 올리고, 학적부를 뒤져 학력을 조롱하고, 전시 관련자들에게 윤지오를 까는 메일을 보내 전시 참가를 가로막고, 윤지오를 음란죄로 고발하고, 윤지오 경호원을 탈세로 고발하고, 윤지오의 캐나다 자택을 찾아와 협박하며, 경찰과 검찰에게 윤지오를 강제소환하라, 체포영장을 발부하라, 적색수배하라, 구속하라고 압박하고, 윤지오의 인스타그램과 연대자들의 계정에 악플을 달아 지지 연대자들을 윤지오로부터 분리시켰다. 설리에게서 그랬듯이 이것이 윤지오의 공황장애와 우울증의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일 것임은 분명하다.
까판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러한 까판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윤지오의 증언에 대한 공감이 지지와 격려로 발전한 후 증언자 경호를 위한 연대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후원금이었다. 이것은 아래로부터 다중의 자생적 행동으로서 증언과 증여의 공통장을 구성하는 자율적 힘이었다. 그런데 까판도 공통장 공간과 마찬가지로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공간이다. 그러면 이것도 다중의 자율적 힘일까?
그렇게 볼 수 없다. 증언과 증여의 공통장을 구성하는 힘들은 이름 부를 수 없는 각인들의 특이함에 기초한 공감과 연대의 힘임에 반해 까판을 구성하는 힘들은 하나의 집중점에 결집하는 동일성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X’까판의 형식으로 이름이 붙고 두목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까판의 운동도 연결망 구조를 취하지만 공통장의 운동과 달리 수평적 그물망 형태의 직조를 낳는 것이 아니라 두목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화된 집권체를 낳는다. 공통장의 운동은 다중의 힘을 증대하는 기쁨의 공간을 구성하지만, 까판의 운동은 다중의 힘을 빼고 표적이 된 인물을 고통, 질병, 죽음으로 몰아넣는 슬픔의 공간을 구성한다. 질 들뢰즈는 특이성의 탈영토화 운동이 너무 이르거나 너무 갑작스럽게 이루어져 종내, 종간, 우주로 향하는 경로들을 열지 못하고 블랙홀로 떨어져 맴돌 위험에 대해 경계한 바 있다. 이 빈곤해지고 고착된 블랙홀들이 공명통 안에서 공명할 때는 다중적 공재로의 열림이 일어나지 않고 봉쇄된 통계학적 더미, 즉 군중이 된다. 이 때문에 윤까판에서 유통되는 생각들은 ‘제대로 된 학력을 가져야 한다’는 엘리트주의, ‘여자는 몸가짐이 조심스럽고 얌전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성차별주의, ‘예술작품에는 원본이 있다’는 플라톤주의적 원본주의 등 주로 권력자들이 활용하는 낡고 고루한 관념들의 유사변종들이었다.
까판은 가짜뉴스의 진원지이자 전파지
그리고 까판이 가짜뉴스들의 진원지이자 전파지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예를 들면 “윤지오는 고등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윤지오는 매춘 이력이 있다”, “윤지오의 『13번째 증언』은 김수민이 대필했다”, “윤지오는 호랑이 그림의 작가(피터 피니)에게 연락한 적이 없다”, “윤지오의 증언 목적은 돈이다”, “윤지오 계좌로 10억 이상의 돈이 입금되었다” 등 군중을 놀라게 하고 그들의 관심을 끌 만한 가짜뉴스들이 버젓이 유통되었다. 탈진실에 대한 비판이론가들이 전통적 미디어의 쇠퇴,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상과 더불어 소셜미디어(SNS)가 가짜뉴스 = 탈진실의 온상이라고 비판할 때 그 비판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 바로 까판의 SNS 계정들이라고 할 수 있다.
까판 문법의 확산과 사회적 까판의 형성
그런데 이 책은 지금까지 말한 좁은 의미의 까판의 동역학과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오늘날 까판의 논리와 운동 메커니즘은 변호사·기자·작가·교수와 같은 전문가 집단, 신문·방송과 같은 전통 매체, 국회의원·경찰·검찰·법원 같은 국가기관 등에 광범위하게 산포되어 우리 사회의 지배적 논리로, 우리 사회의 주류 담론 문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윤지오에 대한 인스타그램 까계정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2019년 4월 2일에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그 계정의 논리는 불과 2주 뒤인 4월 16일에 역시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는 작가 김수민의 담론 논리로 전용되었다. 「윤지오 씨의 말은 100% 진실일까요?」는 사실의 단편들을 상상과 뒤섞고 거기에 거짓말을 섞어 넣은 혼종물이었다. 그가 이후 매우 열렬하게 인스타그램 및 유튜브의 까계정들과 연계되어 함께 호흡하는 한 몸체로 섞여 들어간 현상은 까판의 문법이 더는 하위담론 영역이 아니라 주류 담론의 문법으로 전이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경향신문』의 칼럼니스트이자 교수이기도 한 서민이, 윤까판에서 유명해진 한 까계정주(everlasting_eva)가 “너무하네 아진짜 ㅋ 나 두목 아니라고 쫌!!!!!!!!!!!”이라는 타이틀로 올린 포스팅 아래에 “내게는 에바님이 두목이십니다 믿고 따르겠습니다”(pandaabba)라고 호응하는 댓글을 다는 대목에서, 그리고 그가 윤지오를 비난하는 자신의 책에서 까계정주를 자칭하는 이름들에게 출간의 공을 돌리는 대목에서 우리는 전통 매체와 소셜미디어 사이에 경계가 사라지고 까판의 문법이 언론계·학계에까지 파급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박훈이 이미 까판의 일부로 편입된 김수민의 소송 변호사를 자임하며 나선 것도 모자라, 그 자신이 기자 김대오의 거짓말을 근거로 윤지오를 형사 고발하기에 이른 것 역시 까판의 문법이 SNS를 넘어 법조계의 논리로까지 침투하는 양상을 보여 준다.
이 책에 따르면, 까판의 문법은 『조선일보』와 같은 신문, SBS와 같은 방송의 담론 문법으로 전이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홍준표의 유튜브가 보여주듯 정치담론의 문법으로까지 기능하고 있다. 까판은 아래로부터 형성된 것이지만 그 논리가 전 사회적으로 확산한 결과 이제 위로부터 까판 논리의 대공장적 확대재생산을 가져오면서 우리 사회 전체를 까판 문법의 소용돌이 공간으로, 거대한 사회적 까판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윤지오에게 사기 혐의가 덧씌워지고 경찰과 검찰이 체포영장 발부, 여권 무효화 조치, 적색수배 등의 극단적 사법 조치들을 차례차례 내려가면서 증언자를 범죄화한 일련의 과정은 까판의 문법의 정치사법적 지속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 결과 탈진실의 조건들이 공통진실로 진화할 경로는 봉쇄되고 그것들이 가짜뉴스, 반진실의 폐쇄적 공명판으로 기능하게 되는 블랙홀적 상황이 창출되고 있는 것이다.
책의 구성
윤지오를 둘러싼 사회적 까판은 윤지오의 증언에 대한 까판과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까판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 책의 1부와 2부에서 다루어진다.
증언에 대한 까판이 증언의 일관성을 흐트러뜨리고 증언의 신빙성을 깎아내린 후에 이른바 대안진실 즉 거짓진실을 제시하는 구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 1부의 주장이다.
1부 1장의 첫 절 「재심 변호사 박준영의 절차주의적 ‘정의’관은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는 윤지오에 대한 검증론을 처음 제기한 박준영 변호사의 논리의 자가당착과 모순, 그리고 편파성을 비판한다. 박준영의 글은 윤지오의 초기 진술과 최근 진술 사이의 단절성을 강조하면서 최근 진술이 자기목적성(이해관계)에 의해 오염되어 있으므로 윤지오의 증언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데에서 시작하여, 증언자에 대해 우리 모두가 무차별적으로 검증하여 검증 결과를 공개하자는 일종의 대중 선동으로 매듭된다. 이 절로 나타나는 것은 박준영의 글이 윤지오의 증언 일관성에 대한 의심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을 가해권력의 성폭력에 대한 검증에서 증언자의 인격에 대한 검증으로 돌리는 가해자중심적이고 보수적인 글쓰기 정치임을 드러낸다. 그것의 실제적 효과는 증언의 표적이 된 가해권력이 은폐되는 것이다.
둘째 절과 셋째 절은 박훈 변호사와 ‘윤지오 이모부’가 주장하는바, 즉 “윤지오의 증언이 장자연 유가족들의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결정적 패소 원인이었다”는 생각은 윤지오의 진술조서에 대한 단편적 독해와 편파적 인용, 그리고 무엇보다 오독을 통해 그것의 큰 흐름에서의 일관성을 인위적으로 해체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윤지오는 기획사 대표 김종승이 위계 구조에 따라 자신과 장자연에게 부과한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큰 흐름에서 일관되게 진술해 왔다. 다만 (장자연이 아니라) 자신에게 술을 따르거나 춤을 추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다고 말했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인 이 진술을 장자연 유가족의 패소 원인이라 말하는 이들의 주장은 윤지오를 부당하게 비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유가족들을 승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윤지오가 위증을 했어야 한다는 불법에 대한 선동으로까지 귀결된다.
넷째와 다섯째 절은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흐릿해진다는 박준영 변호사의 기억론이 기계론적인 것으로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 또렷해지는 기억을 이해할 수 없는 피상적이고 일면적인 기억론임을 비판한다. 이 절의 글들은, 베르그송의 기억론에 입각하여, 윤지오가 10년 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을 10년이 지난 지금 왜 그때보다 더 또렷이 기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거를 제공한다.
1부 2장은 증언을 거짓말로 몰아서 증언의 신빙성을 깎아내리는 까판 문법을 분석한다.
「김용호의 거짓말 : 홍가혜에서 윤지오로」에서는 김수민이 윤지오를 까는 글을 포스팅하기 하루 전에 보수 유튜버 김용호가 그 글과 대동소이한 방송을 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5년 전에 거짓말로 홍가혜를 명예훼손한 것에 대해 홍가혜가 제기한 민사소송 1심에서 1,0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은 바 있는 그 김용호가 이번에는 표적을 바꿔 윤지오의 증언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거짓말을 다시 하고 있는 현실, 즉 역사의 반복에 대해 분석한다. 거기에는 윤지오가 왕진진의 리스트를 짜 맞췄다거나, 신변위협이 없었다거나, 증언목적이 돈벌이에 있다는 등 김수민의 다음 날 포스팅에서 대동소이하게 되풀이되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공익신고자를 사기꾼으로 만드는 집단공작」에서는 윤지오에 대한 마녀사냥을 시간을 되돌리고 공간을 바꾸어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과 겹쳐 본다. 125년 전 독일에 패한 바 있는 프랑스 군부가 대중 속에 들끓고 있던 프랑스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이용하여 독일계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를 독일을 위해 일하는 간첩으로 조작하여 악마도에 유배시켰던 사건을 상기하면서 이 글은 한국 사회 특권층을 구성하고 있는 장자연에 대한 가해권력이 증언자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조작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다.
이어지는 두 편의 글에서는 김수민의 까포스팅이, 스스로 기사를 삭제한 『뉴시스』 최지윤의 기사, 그리고 김용호의 방송주장과 공조하면서 윤지오의 증언 신빙성을 깎아내리는 데 집중하고 있으며 그것의 효과는 권력자들의 성폭력을 사람들의 시야에서 감추는 것이었음을 밝힌다.
「기생충 학자 서민의 종합거짓말세트」에서는 서민이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가해자 편향적 심의 결론, 김대오의 거짓말, 김수민의 까포스팅 등을 아무런 사실조사 없이 받아들이고 거기에 윤지오가 현 정권의 노리개로 이용되고 있다는 식의 음모론적 편견을 섞어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 “윤지오는 아무것도 모른다”, “신변위협도 없었다” 등의 까판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하면서, 심지어 장자연 사건 재수사 포기의 책임까지 윤지오에게 덮어씌우는 적반하장과 후안무치의 까판 문법을 선보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1부 3장은 증언의 탈진실화를 위한 가짜 주장들을 대안진실, 거짓진실로 보완하는 테크놀로지를 다룬다. 첫 네 편의 글은 김대오가 자신이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장자연 리스트를 본 적이 있는 윤지오(와 유장호, 그리고 유가족들)의 말을 거짓말로 몰아세우는 궤변의 쿠데타를 다룬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김대오는 이 궤변의 쿠데타를 절반은 성공시킨 셈이다. 이로써 그는 장자연 리스트와 관련해 진실의 자리를 찬탈하고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가 절대진실이라고 참칭하고 있는 대안진실 = 가짜진실의 주창자이다. 이 절반은 성공한 쿠데타를 통해 그는 무엇보다 『조선일보』를 장자연과 상관없는 언론으로 면죄하고 기획사 사장인 김종승에게 가해 책임을 떠넘긴 후 진실을 이야기하는 윤지오를 사기 증언을 통해 출세하려 한 인물로 격하시키는 역할, 즉 가해권력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한다.
「박훈이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놀라운 방법」은 거짓진실과 궤변의 쿠데타에서 박훈과 김대오의 공모관계를 다룬다. 김대오의 대안진실 쿠데타는 박훈이 호위무사의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결코 그 반절의 성공을 거둘 수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거짓진실의 승리를 위한 이 공모관계 때문에 박훈은 김대오의 거짓말을 그대로 이어받아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는 문장을 새기고 윤지오를 향해 “이 사기꾼!”이라 소리치며 칼을 휘두르는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 위에서 「박훈이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놀라운 방법」은 윤지오의 증언 의혹을 잘라 풀겠다며 휘두르는 그의 칼이 왜 가짜 칼인지, 아울러 알렉산드로스를 흉내 내는 그가 실제로는 왜 돈키호테인지를 분석한다.
진실에 대항하는 대안진실 쿠데타가 반절은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상식은 그 쿠데타의 성공을 믿지 않는다. 즉 절반은 실패한 것이다. 지난 10년 장자연 사건 수사가 가해권력을 은폐하는 진실 은폐의 과정이 되도록 한 데 한몫을 한 검찰이 촛불과 미투 봉기의 압력으로 자기검열의 시간을 강요당했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처럼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검찰의 과오와 비리를 밝혀내리라는 기대 자체가 난망한 것이었다. 과거사위원회는 생리적으로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으리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무능을 토로하는 듯한 눌변의 어조로 “리스트의 존재를 규명할 수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은 왜일까? 리스트가 있었다는, 윤지오를 비롯한 복수의 사람들의 명확한 증언이 있고 “수사기록에 편철된 문건 외에 피해사실과 관련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명단’이 기재된 문건, 즉 ‘리스트’가 있었을 것”이라는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대오와 박훈이 공모한 궤변의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장자연 리스트는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과거사위원회와 조사위원들 일부는 리스트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리스트에 적혀 있었던 문구 중 중요한 구절을 삭제하려는 시도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것이 실패한 후 나타난 가해권력의 새로운 시도」에서는 이에 대해 다룬다. 여기서 삭제 대상으로 되는 두 가지 핵심 문구는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와 “구준표와 이름이 같은 국회의원”의 이름이다.
‘메신저가 아니라 메시지를 보자’가 공통장의 윤리라면 ‘메시지를 깔 수 없을 때는 메신저를 까라’가 까판의 문법이다. 2부에서는 이 후자의 문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한다.
2부 4장에서는 까판이 증언자 윤지오를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성으로 규정하고 돌팔매질을 하는 양상을 그린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 클립 속의 어떤 ‘호모 사케르’와 법 위의 가해권력들에 대한 단상」은 동영상 클립 속의 어떤 인물의 몸짓을 보여 주고 그것을 누구나 죽여도 좋을 호모 사케르의 몸짓이라고 폭력적으로 규정한 후 바로 그 인물이 윤지오이므로 윤지오는 증언자의 자격은 물론이고 인간으로서의 자격조차 없다고 까내리는 까판 문법의 속살을 보여 준다. 이 문법 속에서 까판은 부당하게도 자신을 누가 증언자일 수 있는지, 또 누가 인간일 수 있는지를 심판하는 권능으로 내세운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까판은, 「벗방과 검은 옷에 대한 성찰」에서 서술하듯이, 아무런 죄의식이나 윤리의식이 없이 타자를 짓밟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이 범죄적 행동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 여성은 얌전해야 한다는 식의 낡은 성적 보수주의의 도덕관념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이 세 편의 글은 까판과 가부장제가 어떻게 동맹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파생을 표절로 둔갑시키기」는 윤지오의 작품 <진실의 눈>을 둘러싼 논란을 다룬다. 까판의 여러 계정과 신문, 방송이 윤지오의 이 작품을 표절이라고 주장하면서 윤지오의 예정된 전시를 방해하여 출품을 못 하게 하는 행동까지 자행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호랑이 그림의 원작자 피터 피니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은 파생예술과 표절을 구분하지 못하는 관점에서 나오는 오판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점에 주목하면서 이 글은 윤지오를 표절자로 몰고자 했던 까판의 집단 욕망의 과잉과 맹목성을 비판한다.
2부 5장은 증언을 가능케 했고 또 증언자가 속해 있던 공통장 연결망으로부터 증언자를 격리하고 고립시키는 까판의 권력 테크놀로지를 살핀다.
「마녀사냥의 암구호들」에서는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는 구호로 윤지오를 동료배우 장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가족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구호로 윤지오를 장자연의 유가족이나 자신의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낡은 가부장주의적 가족주의 관념이 가해자를 보호하는 까판의 무기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이어지는 글 「장자연을 매장하는 정치적 ‘불도저’ 소리」는 까판과 보수 정치세력과의 공명 관계를 드러낸다. 그 뒤의 두 편의 글은 까판의 가짜진실이 먹혀들 수 있는 포스트모던 환경을 다룬다. 이 환경에서 언론은 더는 사실이나 진실을 다루는 기관이 아니다. 포스트모던 환경하의 언론은 사실이나 진실을 다룬다는 오래된 환상을 이용하여 기사 내용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들, 즉 진실 시장(truth market)의 고객들에게 진실이라는 상표를 붙여 기사를 파는 기사 출고 거래의 기관으로 나타난다. 이 거래는 진실이라는 상표를 이용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기사의 내용이 진실한가 그렇지 않은가는 거래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진실 없는 기사, 방송, 포스팅이 팥 없는 팥빵처럼 유통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슛맨, 가해권력, 그리고 포스트모던 사칭술」과 그 보론인 「포스트모던 사칭술에 대해」는 까판의 언론과 계정들이 이 포스트모던 반진실의 환경을 이용하여 윤지오가 사기꾼일 필요가 있는 고객들, 즉 가해권력 무리들에게 윤지오가 사기꾼이라는 조작된 사칭의 기사·방송·포스팅을 열심히 판매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반진실의 담론 소음이 요란하면 할수록 그것이 오히려 윤지오가 사기꾼이 아님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근거일 수 있다는 역설을 이끌어낸다.
2부 6장에 실린 세 편의 글은 『증언혐오』에서 공통장의 동력으로 파악한 증여와 그 증여의 공통장을 까판이 어떻게 깨뜨리고 해체하는가를 분석한다. 「윤지오에게 정부가 경비 ‘특혜’를 제공했다는 오래된 유행가」는 증인을 불러와 증언하도록 한 국가가 증인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네티즌·인권변호사 등이 나서서 의무를 다하도록 촉구하고 등을 떠밀어 국가가 마지못해 수행한 최소한의 보호조치를 경비 특혜라고 비판하는 까판의 음울한 노래에 대해 다루면서, 이 노래가 광주 민주 유공자나 세월호 피해자 가족을 특혜받은 괴물집단으로 몰았던 도착적 일베형 가요의 반복이자 변주임을 밝힌다. 「증여혐오」는, 경호비로 쓰라며 시민들이 윤지오에게 준 후원금을 기망에 의한 사기라고 주장한 김수민이 이수역 사건에서도 변호사비를 구하기 위한 여성들의 후원금 모금을 사기로 몰았음을 회상하면서 김수민에게 내재한 증여에 대한 저 깊은 혐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살핀다. 이 증여혐오가 어떻게 고리대금업의 기조 감정으로 자리 잡는가를 보여주는 글이 「최나리 변호사의 ‘증여의 의사표시 취소로 인한 부당이득 반환청구소송’에 대한 비판」이다.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상을 받은 법률사무소 로앤어스 소속의 최나리 변호사는 윤지오에게 후원한 바 있는 사람들 439명을 모아 소송으로 후원 의사를 철회하고 후원원금과 손해배상금, 그리고 연리 12%의 고율 지연이자, 그리고 승소 시 변호비를 윤지오에게 청구하는 고리대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을 비판하는 이 글은, 이 소송이 증여·후원·선물은 결국 고리대를 뜯어내기 위해 증여자들이 수증자를 기망하는 미끼이며 수증자는 덫에 걸린 채무자와 다르지 않음을 소송 사례를 통해 대중에게 각인시킴으로써 증여 문화와 증여 공통장을 철저하게 깨뜨리는 까판스러운 변론 실천임을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 편의 글은 배신을 윤리이자 정의로 내세우는 까판의 도착증에 대한 분석이기도 하다.
2부 7장은 증언자 윤지오를 권력의 꼭두각시로 간주하는 음모론적 인형 조종론을 다룬다. 실제로 이 시각은 『조선일보』, 자유한국당 등이 내밀하게 공유하고 있는 시각으로 이들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윤지오를 까는 것을 통해 문재인 정권을 깐다’는 성동격서의 전술을 구사했다. 이들이 같은 경험을 공유한 서지현·노승일·윤지오 등이 안민석과 함께 만났던 모임을 ‘공익제보자 모임’이라 불러 어떤 정치적 실체가 있는 것처럼 과장한 후, 이것이 바로 문재인 정권이 윤지오와 같은 공익제보자들을 정치적으로 조종하는 매개기관이었던 것처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시각 속에서 윤지오는 고 장지연의 죽음과 문건/리스트에 대해 증언하는 자율적 증언자가 아니라 권력의 꼭두각시로 그려진다. 다중을 권력의 인형으로 보는 이 음모론적 인형 조종론은 앞서 말한 서민 교수의 기본 관점일 뿐만 아니라 박준영 변호사도 공유하고 있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이 바로 다중의 자율성을 약화하고 말소시키는 시각폭력이라고 보는 문제의식 위에서, 증언자(메신저)에 대한 검증 필요를 제기한 박준영의 글 「공범」을 거꾸로 검증해 본 것이 「박준영 변호사의 글 「공범」을 검증한다」이다. 「『조선일보』가 고삐를 쥐다」 는 『조선일보』로부터 ‘공익제보자 모임’의 주모자로 적시된 후 까판의 주요 표적으로 떠올랐던 국회의원 안민석이 그 공격에 맞서기보다 윤지오로부터 비스듬히 등을 돌려 버리는 배반의 과정에 대한 소회를 다룬다.
2부 8장은 미디어와 법조계 까판의 풍경에 대한 묘사와 논리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SBS와 TV조선은 마치 시리즈물을 제작하듯이 연합하여 분업적으로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비판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이들 미디어를 다룬 이 장의 세 편의 글은 SBS의 <궁금한 이야기 Y>와 TV조선의 <탐사보도 세븐 ‘누가 윤지오에 놀아났나’>의 연출전략과 전술에 대해 살펴본다. 이 글들은 <궁금한 이야기 Y>가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 주장들과 미시적 편견들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증언자를 무너뜨리는 데에서 시청자가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는 까판적 구성으로 시청률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음에 반해, TV조선의 <탐사보도 세븐 ‘누가 윤지오에 놀아났나’>도 방법과 기술은 비슷하지만, 윤지오 비판을 매개로 문재인 정권을 까내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미디어가 진실에 대한 무관심을 바탕으로, 시청자들을 흥미에 끌리는 감각적 존재로 만들거나 방송사의 정치적 이해관심을 시청자들의 뇌리에 심어 넣는 밈(meme) 기계로서 자신의 스펙터클 편집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해권력에 대한 무관심 혹은 동조는 이러한 작업의 효과이다. 이렇게 미디어는 시청자에게 가해자 중심의 감각과 환상을 보여 주는 총체극을 연일 상연하는데 법원조차도 이제 그러한 포스트모던 극장의 일환으로 편입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가해권력과 가해자중심주의의 논리 : 조○천 강제추행 사건에 대한 오덕식 판사의 판결에 대해」이다.
지은이 소개
지은이
조정환 (Joe Jeong Hwan, 1956~)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한국근대문학을 연구했고, 1980년대 초부터 <민중미학연구회>와 그 후신인 <문학예술연구소>에서 민중미학을 공부했다. 1986년부터 호서대, 중앙대, 성공회대, 연세대 등에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와 탈근대사회이론을 강의했다. 『실천문학』 편집위원, 월간 『노동해방문학』 주간을 거쳐 현재 다중지성의 정원[http://waam.net(연구정원), http://daziwon.net(강좌정원)] 대표 겸 상임강사, 도서출판 갈무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 『민주주의 민족문학론과 자기비판』(연구사, 1989), 『노동해방문학의 논리』(노동문학사, 1990), 『지구 제국』(갈무리, 2002), 『21세기 스파르타쿠스』(갈무리, 2002), 『제국의 석양, 촛불의 시간』(갈무리, 2003),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 『탈영자들의 기념비』(공저, 생각의나무, 2003), 『제국기계 비판』(갈무리, 2005), 『비물질노동과 다중』(공저, 갈무리, 2005), 『카이로스의 문학』(갈무리, 2006),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공저, 갈무리, 2007), 『들뢰즈와 그 적들』(공저, 우물이있는집, 2007), 『현대철학의 모험』(공저, 길, 2007),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저, 그린비, 2008), 『미네르바의 촛불』(갈무리, 2009), 『공통도시』(갈무리, 2010), 『플럭서스 예술혁명』(공저, 갈무리, 2011), 『인지자본주의』(갈무리, 2011), 『인지와 자본』(공저, 갈무리, 2011),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공저, 갈무리, 2012), 『옥상의 정치』(공저, 갈무리, 2014), 『예술인간의 탄생』(갈무리, 2015) , 『절대민주주의』(갈무리, 2017)
편역서 『오늘의 세계경제 : 위기와 전망』(C. 하먼, 갈무리, 1994), 『현대 프랑스 철학의 성격 논쟁』(A. 캘리니코스 외, 갈무리, 1995),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C. 하먼 외, 갈무리, 1995),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 1』(S. 볼로냐 외, 갈무리, 1997), 『자유의 새로운 공간』(A. 네그리 외, 갈무리, 2000)
번역서 『변혁기 러시아의 리얼리즘 문학』(G. 루카치, 동녘, 1986), 『오늘날의 세계경제 : 위기와 전망』(A. 캘리니코스 외, 갈무리, 1994), 『오늘날의 노동자계급』(A. 캘리니코스, 갈무리, 1994), 『디오니소스의 노동 1』(A. 네그리 외, 갈무리, 1996), 『디오니소스의 노동 2』(A. 네그리 외, 갈무리, 1997), 『사빠띠스따』(H. 클리버, 공역, 갈무리, 1998), 『신자유주의와 화폐의 정치』(W. 본펠드 외, 갈무리, 1999),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J. 홀러웨이, 갈무리, 2002), 『무엇을 할 것인가』(W. 본펠드, 갈무리, 2004), 『들뢰즈 맑스주의』(N. 쏘번, 갈무리, 2005), 『다중』(A. 네그리 외, 공역, 세종서적, 2008), 『선언』(A. 네그리 외, 갈무리, 2012), 『크랙 캐피털리즘』(J. 홀러웨이, 갈무리, 2013),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H. 클리버, 갈무리, 2018)
책 속에서 : 살아남은 증언자를 매장하는 탈진실의 권력 기술
고 장자연 씨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국민들의 청원을 받고 증언에 나섰던 윤지오가, 10년 전에 장자연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힘들에 의해 10년 후인 지금 겪고 있는 정치적 배제와 시민사회적 고립이라는 사건은 주목을 요한다.
― 공익신고자를 사기꾼으로 만드는 집단공작, 105쪽
사법의 법정, 인민의 법정, 평판의 법정은 모두 타자들이 나를 향해 내리는 심판임에 반해 양심은 나 자신이 나에게 내리는 심판이다. 양심의 법정도 공소시효를 갖지 않는다. 아득한 옛날의 내 행동과 말이 양심의 심판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나의 행동에 대한 내 양심의 법정의 처벌방식이 자책, 후회, 악몽 같은 것들이다. 이 법정이 선순환적으로 가동되지 않을 때 누적된 문제들이 정신적 질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 네 가지 법정과 ‘김대오는 어디로?’, 172쪽
장자연의 죽음의 진상은 윤지오에 대한 음해공작으로 인해 10년이 지난 지금도 규명되지 못했다. 이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려면 그것을 켜켜이 뒤덮고 있으며 지금도 진행 중인 윤지오 음해공작의 쌓이는 잔해들을 먼저 걷어 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회로도 샛길도 없다.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가해권력이 지금 윤지오를 음해하는 바로 그 권력인 한 지금 작동하고 있는 현재의 그 가해권력에 대한 투쟁과 음해 폭력에 대한 진상규명 없이 어떻게 과거의 그 가해권력의 폭력에 대한 진상규명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 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 클립 속의 어떤 ‘호모사케르’와 법 위의 가해권력들에 대한 단상, 273~274쪽
『한겨레21』의 기자 변지민, 조윤영은 위의 보도기사에서 언론사들이 인터넷 기사 한 편을 올려 주는 데 10만 원(최저가 『브릿지경제』)~28만 원(최고가 『조선일보』, 『중앙일보』)을 받는 현실을 폭로했다. 이 기사에서 두 기자는 “서준혁”이라는 인물이 한 해에만 50건 이상의 기사를 실어 자신을 투자자문위원 등으로 신분위조를 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돈을 받고 기사를 파는 이런 현실이 언론의 공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 슛맨, 가해권력, 그리고 포스트모던 사칭술, 323쪽
사람들을 교환사회 질서에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해 증여사회의 인지 양식, 문화, 관습에 대한 대대적 공격이 필요했다. 증여에 대한 혐오가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부등가의 교통형식인 증여는 등가교환의 질서를 안착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증여혐오는 증여질서의 구성원으로서 그것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사회질서 바깥으로 추방하거나 강제로 수용하여 감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술사, 예언자, 점술가, 음유시인, 떠돌이, 예술가, 혁명가 등이 이 증여혐오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 증여혐오, 340쪽
이에 비춰보면 윤지오가 신변위협을 과장하여 기망행위를 했다는 고소장의 주장은 거짓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후에 명백히 확인되는 것은 가해권력이 벌인 거대하고 집중적이며 스펙타클적인 기망 작전이었다. 이 작전이 국민들을 밑도 끝도 없는 거짓의 수렁 속에서 방황하도록 만들면서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를 무참할 정도로 짓밟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 최나리 변호사의 ‘증여의 의사표시 취소로 인한 부당이득 반환청구소송’에 대한 비판, 394쪽
지금까지 장자연 사건에 대한 가해자로 지목되어 지탄받아온 『조선일보』는, 윤지오에 대한 성폭력적이고 인권 말살적인 융단폭격을 퍼부은 지 약 2개월여에 만에, 이제 자신을 (장자연에 대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로 묘사하면서) 사기꾼 윤지오를 단죄하고 사기꾼을 방조한 정치인들을 꾸짖는 정의의 언론으로 내세우기 시작한다.
― TV조선과 증언자 윤지오, 456쪽
윤지오는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임을 밝혔다. 이 증언이 진실이라면 장자연의 죽음은 원점에서 재수사되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재수사는커녕 오히려 이것을 증언한 윤지오에 대한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장자연의 글을 유서라고 보게 만들어 국민을 속이고 이로부터 이익을 편취해온 가해권력자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 집단적 마녀사냥의 주체일 것인가?
― 에필로그, 493쪽
프리뷰어 추천사
책을 열기 전에는 ‘까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마녀사냥을 구체적인 논거들을 들어 치밀하게 논파하고 담론, 스펙터클, 이데올로기가 교차하면서 어떻게 권력을 비호하고 다중의 요구를 짓누르며 민주주의의 힘을 파괴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권력의 여론 조작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치밀하게 분석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낸 책이다. 촛불혁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 한국사회 내부의 갖가지 권력들의 현주소를 밝혀주며 사회체 자체의 민주화를 위해서 더 많은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일깨운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알려주는 비상경보와 같은 책이어서 많은 이들에게 시급하게 읽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이성혁, 문학평론가
이 책은 장자연 사건과, 사건의 증언자인 윤지오에 대한 마녀사냥 과정을 집요하게 쫓아가면서, 이를 둘러싸고 불거졌던 쟁점과 논쟁들의 거의 모든 매듭들을 다룬다. 그 매듭의 이음새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증언자 윤지오가 어떻게 오해받고 지탄받았으며, 결국에는 추방당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윤지오를 둘러싼 가짜진실들이 변형·재생산되면서 수렴되는 지점이 어디인지, 이를 통해 이득을 보는 이들이 누구였는지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저자의 가족주의와 가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특히 날카롭고 성찰적이다. 고인의 이후 시간에 대해 그 가족이 신적 권력과도 같은 자격을 갖는 것은 과연 옳은가. 가족 중심의 이 철벽같은 사회적 믿음체계가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한 결정적인 장해 요인이었다는 주장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이러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체제 재생산에 얼마나 절대적인 기여를 하는지, 그로 인해 누가 무엇을 얻는지, 그 믿음에 어떻게 균열을 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이 책은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는지도 모를, 증언자에 대한 오랜 연대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걸어오는 말을 듣고 이어 말하고 다시 말하기. 기록하고 사유하고 철학하기. 철학이라는 학문이 철학-하기의 행위가 될 때, 철학은 비로소 자신의 좌표를 찾는 것이 아닐까.
― 희음, 시인
조정환의 책들
『절대민주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7)
군주제적 대의민주주의에서 대의 정치가들이 전유하고 향유해온 정치지대는 다중의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재전유되고 사회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절대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를 민주화하고, 직접민주주의를 민주화하며, 집회민주주의와 일상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힘으로 기능할 것이다. 모든 사람의 절대적 구성역량과 헌법의지에 의한 모든 민주주의의 민주화, 이것이 촛불다중혁명이 가리키는 이정표다.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예술성이 협의의 예술사회는 물론이고 생산사회와 소비사회 모두를 횡단하면서, 예술의 일반화, ‘누구나’의 예술가화, 모든 것의 예술 작품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센세이셔널한 예술종말론들이 유행하고 있다. 어째서인가? 종말로 파악할 만큼 급격한 예술의 위치와 양태변화는 항상 새로운 주체성의 대두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단토, 가라타니 고진, 벤야민 등의 예술종말론들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나타난 예술적 변화를 예술종말로 파악한 과거의 관점들(헤겔, 맑스)을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다른 맥락에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인지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1)
'인지자본주의'는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삼는 자본주의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통해서 현대자본주의를 다시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문제설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다. 이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금융자본이 아니라 인지노동이 현대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을 가져오는 힘이라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 노동의 역사적 진화와 혁신의 과정을 중심적 문제로 부각시킬 수 있다.
『공통도시』(조정환 지음, 갈무리, 2009)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후 30년 역사를 신자유주의 30년 역사이자 그에 대한 대항운동 30년의 역사로 읽고자 한다. 또한 오늘날 80년 광주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미래사회를 상상하고 구축하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으고 있는 전지구적 다중의 세계사적 과제라고 힘주어 말한다. 광주의 민중들은 군부독재와 싸운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세계사적 투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1987년, 해방도시의 잠재력이 전국화되어 더 이상 지역적 봉쇄가 불가능하게 되자 자본은 전국적 해방운동들을 신자유주의적 혁신도시 건설, 다시 말해 메트로폴리스의 지역클러스터 구축의 동력으로 전용하였다.
『미네르바의 촛불』(조정환 지음, 갈무리, 2008)
2008년 촛불 현장에 참가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의 기록이자 그것에 대한 성찰의 결과물을 담은 책으로, 2008년 5월 2일부터 지난 1년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이 참여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촛불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한다. 이 책은 촛불봉기의 새로움이 무엇이었던가를 맑스의 노동이론, 푸코의 삶권력론, 들뢰즈의 잠재력론, 네그리의 다중론을 통해 조명한다. 또한 전 세계적 금융위기를 촛불의 관점에서 조명하면서 촛불을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주체성으로 정의한다.
『아우또노미아』(조정환 지음, 갈무리, 2005)
지난 10여 년간에 걸쳐 네그리에 대해 연구해 온 정치철학자 조정환이 펴낸 세계 최초의 네그리 사상에 관한 연구서이자 네그리 사상을 체계적이고 쉽게 소개하는 입문서이다.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9)
정동과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의 정동 효과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이자, 온 힘을 다해 무언가 '다른 삶'을 만들어보기 위해 부대낀 날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어펙트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실천적 개입은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부대껴 만들어내는 힘.마찰.갈등에서부터, 개별 존재의 몸과 사회, 정치의 몸들이 만나 부대끼는 여러 지점들까지, 그리고 이런 현존하는 갈등 너머를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에서도 발생하는 '꼬뮌의 질병'을 관통하면서 진행된다.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 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마리아 미즈 지음, 갈무리, 2014)
『에코페미니즘』,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의 저자로 알려진 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의 고전적 저작. 가사노동, 비공식 영역의 노동, 식민지에서의 노동과 자연이 만들어 내는 생산(물)이 경제의 수면 아래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4, 5백년 동안 여성, 자연, 식민지는 문명사회 외부로 축출되고, 가려져 왔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이 ‘빙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왜 가려졌는지, 이 부분의 가치와 비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정동 이론』(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J. 시그워스 엮음,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아프꼼 총서 2권. 정동 연구라는 이제 막 발아하는 분야를 정의하는 시도이자, 이 분야를 집대성하고 그 힘을 다지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정동 이론의 주요 이론가들을 망라하고 있다. 정동이란 의식적인 앎의 아래와 곁에 있거나 그것과는 전반적으로 다른 내장[몸]의 힘으로서, 우리를 운동과 사유, 그리고 언제나 변하는 관계의 형태들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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