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에겐 비상구가 없었네/김해자
파묻혔네 말들이 제멋대로 떠도는 숲에
살가죽도 없이
하늘 아래 모든 잎들이 소리를 지르고
죽어라 일하다 죽어버렸어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하고 납처럼
다시 숲에 들었네 어디에도 없었고
어디에도 없는 우리를 있게 하려고
뒤섞인 백묵 가루 너와 나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듣게 하려고
바로 옆에 비상구를 두고 우리는 불에 타죽었어
비상구가 있는지도 몰랐어
숲은 두루마리 휴지 같아서
다 쓰기 전에는 끝을 만질 수 없었고 들어가려 할수록
빽빽해지는 단발마의 음절들이 떠돌았네
벌서는 아이처럼 갇혀서
팔다리처럼 먼 데서부터 사라져가는 구원-
3개의 출입문을 지나야 비상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네
그 문은 출입카드를 받은 정규직만 열 수 있었다네
어떤 문은 살길과 반대 방향으로 열리도록 설계…
다른 색으로 같은 말을 하는 잎과 잎 사이로
환하게 들어오는 빛 알갱이
같은 모양으로 다른 말을 하는-
이 가벼운 말이라니
아무도 비상구로 나가자고 하지 않았다네
아무도 내 손을 잡고 문 쪽으로 가지 않았다네
칠판에 쓴 글씨
지워져 날아가 버린 분필 가루들이 숲을 날아다니네
붙박힌 말처럼
뜨거운 가루들은 어디에 떨어져 움트는지
내 이름이 못박히네 살을 뚫고 나오는 잎처럼
속을 내던지는 꽃처럼
아아 말이 생각나지 않아 빨강 다음은 하양
빨강 하양 까망…
여기- 말을 잃은 숲에서
저기-푸른 말들이 태어나네 살려고
우리와 함께 죽어간 모든 것들을 살려내려고
한 번쯤은 천천히 죽어가보려고
ㅡ월간 《웹진 Nim》(2024, 9월호)
카페 게시글
차 한잔과 시
비정규직에겐 비상구가 없었네/김해자
김수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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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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