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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년 ~ 1859년
훔볼트 해류(Humboldt Current), 훔볼트 펭귄(Humboldt(Peruvian) penguin),
훔볼트 싱크(Humboldt Sink), 훔볼트 국립공원,
베를린훔볼트 대학교(Humboldt-Universität zu Berlin). 이 명칭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익숙한 것도 있고 생소한 것도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의 독일과 남미에서 이 이름을 듣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없을 것이며,
특히 19세기 유럽사회에서 훔볼트는 그야말로 슈퍼스타였다.
탐험을 꿈꾸었던 청년
베를린에서 출생한 훔볼트는 프로이센의 귀족인 아버지와 엄청난 자산가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인 빌헬름 폰 훔볼트는 훗날 훔볼트 대학을 창립한 위대한 언어학자였다.
훔볼트가 유년 시절에 읽은 최초의 책은 [젊은 로빈슨]과 [아메리카의 발견]이었다.
이러한 모험과 탐험류의 책에 감명을 받은 그는 더 강도가 높은 탐험기인
제임스 쿡(James Cook)의 항해기와
라 콩다민(La Condamine)의 남아메리카 내륙 여행기와 같은 책에 빠져들었다.
훔볼트의 어머니는 그가 고급관료가 되길 희망했지만,
훔볼트는 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베를린에서 식물학을 공부한 후
1780년 형이 다니고 있는 괴팅겐 대학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그는 쿡 선장의 2차 항해에 박물학자로 참가해
이미 유명해진 탐험가 조지 포스터(George Forster)와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1790년 그와 함께 영국과 프랑스를 여행한다.
1791년 훔볼트는 광산감독관이 되기 위해 세계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프라이베르크 광과(鑛科)대학에 들어간다.
자연과학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고급관료가 되길 원하는 어머니의 바람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한 것이다.
그 이듬해 프로이센 정부의 광산관리국에 자리를 얻어 일하던 그는
귀족 출신 관료로서 장관까지도 될 수 있는 신분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젠가 공직에서 물러나
과학 탐험 여행을 떠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1796년, 그의 어머니의 죽음은 탐험가로서의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그 해 11월 훔볼트는 공직에서 물러나고
자산가인 어머니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되는데,
그 유산으로 훔볼트는 탐험의 꿈을 이루게 된다.
실제로
그가 5년이 넘는 장기간의 남아메리카 탐험의 비용을
유산으로 충당하고도 많은 돈이 남았다고 하니
그 액수가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훔볼트는 식물학자 아이메 봉플랑(Aimé Bonpland)과 함께
본인의 탐사대를 직접 꾸리기로 결심한다.
훔볼트와 봉플랑의 만남은
이들이 어느 유럽인들도 도달하지 못했던 세계를 탐험하고 연구했다는 점에서
유럽 탐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귀족청년 훔볼트는
그 안락하고 성공이 보장된 자신의 생활을 벗어 던지고
장엄하지만 거친 대자연의 품으로 뛰어들게 된다.
남아메리카 탐험(1799-1804)
훔볼트와 봉플랑은 1798년 스페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연구를 통해
스페인 내부가 고원지대이며 기존의 지도 정보에 오류가 많다는 것을 밝혀냈고,
그 성과 덕분인지 스페인 왕에게 남미 탐험 지원을 약속 받게 된다.
왕은 그들에게 공식 허가를 내주고 남미로 가는 피자로 호에 승선하도록 했다.
이전부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남미로 가는 배편은 흔한 여행길 중 하나였다.
때문에 훔볼트와 봉플랑은 배 안의 높은 인구밀도로 인한 갑갑함뿐 아니라
전염병의 위험까지 감수하며 배여행을 해야 했다.
하지만 훔볼트의 열정에 전염병도 피해갔는지
그는 오히려 기상관측을 해가면서 무사히 베네수엘라의 쿠마나에 도착했다.
그들은 새로운 대륙에서
유럽과는 전혀 다른 자연환경을 탐험하고 조사할 수 있다는 데에 몹시 흥분했다.
“벌거벗은 인디언들, 전기뱀장어, 앵무새, 원숭이, 아르마딜로, 악어, 놀라운 식물들,
그리고 밤에 금성을 겨냥하고 있는 나의 육분의...”
남미여행을 통해 훔볼트는 온갖 신기한 동식물들을 보았으며,
그 과정에서 몇 번은 목숨을 잃을 뻔한 경우도 있었다.
그는 생전 처음 보는 새와 곤충종을 기록했으며, 동굴의 생태계를 탐사하고,
생전 처음 지진을 경험했다. 그리고 자연뿐 아니라
그 지역의 언어와 문화까지 세밀한 관찰기록을 남겼다.
훔볼트는 학창시절부터 유달리 실험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가 직접 행한 실험이 무려 4,00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 중 재미있는 일화는 ‘동물전기’라는 것에 관심을 가진 그가
이를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의 몸에 직접 전극을 연결하여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1800년 2월 그는 남미 내륙 쪽을 여행하면서
드디어 이 동물전기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기회를 갖게 된다.
바로 전기뱀장어를 직접 잡아 연구한 것이다.
훔볼트와 봉플랑은 전기뱀장어를 잡기 위해
말이나 노새를 미끼로 몰아넣어
뱀장어들이 650볼트의 전기를 다 방출해 버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에 들어가 네 시간 동안 직접 전기 충격을 받아가며 신나게 실험과 해부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까지 관절통과 전신 근육통을 경험했다고 한다.
훔볼트는 그가 모르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쿠마나에서 카라카스로, 그리고 내륙 고원지대 탐험을 마친 훔볼트 일행은
오리노코 강의 지도를 그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2,400킬로미터에 달하는 강 탐사에 나섰다.
그들은 거대한 오리노코 강과 아마존 강을 잇는 카시퀴어레 강을
직접 보고 정확한 지도를 작성했을 뿐 아니라
1만 2천종의 표본을 모았는데,
이 중에는 학계에 처음 보고되는 식물 종들이나 인간의 뼈도 있었다.
각종 특수 장비와 과학 기술이 뒷받침되는 현재의 오지 탐험도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진데,
19세기 초의 훔볼트에게 이 남미 오지 탐사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겨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보트를 타거나 이고 갔으며,
먹을 것이 없어 개미를 먹으며 버티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곤충에 물리고,
진흙을 먹고 마약을 하는 부족들과 어울리는 등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지금은 흥미와 재미, 경험의 일환으로
오지 탐험이란 것이 상품화 되어 있지만,
훔볼트에게 오지 탐험이란
일생과 목숨을 건, 본인의 학문적 탐구열을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1802년 훔볼트 일행은
키토에 도착하여 그 지역의 화산들을 조사하며 6개월을 보낸다.
피친차 산 등반을 시도한 훔볼트는
고산증으로(당시에는 고도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증상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심한 구역질과 실신 등을 경험하며
우여곡절을 끝에 결국 산 정상에 도달한다.
뒤이어 훔볼트와 봉플랑은 당시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알려져 있던
침보라소 산을 해발 5,878미터까지 등반하는데,
이는 당시의 최고 기록으로
이후 30년 동안 훔볼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오른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말년에 가서야 히말라야 산이 가장 높은 산으로 측량되면서
훔볼트의 세계기록은 안타깝게도 깨지게 된다.
훔볼트는 계속되는 탐험 동안, 마주치는 모든 것을 꼼꼼히 기록하고 관찰했다.
그가 태평양 해안의 트루히요로 가는 길에 기록한 자기장 측정치들은
그 후 50년 동안 모든 지자기학 연구의 자료로 활용되었다.
또한 페루 해안에서 시작하여 기록한 해수 온도 수치들은
그 지역 해류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조사된 해류에 그의 이름을 붙여 ‘훔볼트 해류(페루 해류라고 불리기도 함)’라고 명명했다.
하바나를 거쳐 필라델피아로 간 훔볼트는
미국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을 만나 탐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으며
1804년 프랑스 보르도로 향하면서 5년 간의 대장정을 마친다.
여행에서 돌아온 훔볼트는 나폴레옹에 의해 승인 받은 연금으로
그 후 파리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관찰기록과 분석결과들을
글로 정리하고 출판하는데 30년의 세월을 투자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탐험 열정은 계속되어 60세의 나이에도 러시아를 탐험하며
지리학적 연구를 계속했으며,
그 곳에서 자기장과 기상을 관측하는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에 영향을 주어 전 세계적 기상관측 네트워크를 조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주를 품으려던 꿈
훔볼트를 인류 마지막 위대한 “보편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를 쉽게 과학자, 지리학자, 탐험가로 부르지만
사실 그는 기술적 의미의 ‘과학자’를 넘어 성찰하고 고찰하는 ‘철학자’의 면모까지 갖춘
통합적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훔볼트는 현대 생태학의 창시자로 추앙받기도 한다.
아마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르네상스형 만능인’과 비슷하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훔볼트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세계를 분리된 것이 아닌 통합된 하나의 세계로 파악하려고 했다.
이러한 그의 원대한 포부가 담긴 저서가 바로 미처 완성하지 못한 필생의 역작 [코스모스]였다.
이 책은
과학과 자연에 대해 알려진 모든 것을 모으고 기록하려고 했던 방대한 작업이었다.
총 25년이 걸려서 훔볼트가 76세였던 1845년 첫 번째 권이 나왔고,
세 번째 책이 그가 81세 때 출간되었으며,
그가 90세로 생을 마감했을 때 5권과 마지막 권이 반 정도 완성되어 있었다.
과학자로서의 연구성과만이 아닌,
우주를 묘사하려는 철학적 욕구가 담긴 역작을 쓸 수 있었던 그의 원동력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18세기 유럽의 사상적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토대 위에 계몽주의 사상이 발달해 자연뿐 아니라
인간의 심성과 행동까지도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 독일에서는
칸트, 피히테, 셸링, 헤르더, 괴테로 이어지는 관념론적 자연철학이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후자는 특히 과학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연과 인간정신을 고유한 내적 법칙에 의해 변화하는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계론적인 자연관이 아닌 전체론적 자연관을 주장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훔볼트는
베이컨의 과학적 전통을 수용하는 자연과학자이면서,
동시에 괴테, 쉴러, 피히테 등과 교분을 나누고
헤르더의 관념론적 철학에 큰 영향을 받는 철학적 면모까지 갖추었다.
과학자로서 훔볼트가 가진 강점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는 경험주의적 실험과 정확한 과학적 탐구 및 관찰방법에
독일의 철학적 관심을 접목시켰다.
실증주의적 과학의 단점을 극복하고,
인간의 감성과 창조성의 의미를 투철하게 인식하여
양자를 결합한 보편과학을 구상했던 것이다.
따라서 훔볼트는 수많은 종들을 수집하고 연구했지만
동시대의 자연과학자들처럼 그것을 분류하고 전시하는 데는 큰 흥미가 없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연 세계에 내재한 통일적 관련성을 이해하고 집대성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코스모스]에서 그의 논지는
과학이란 마음 자체가 사물을 취하는 데서 출발하며,
경험적 인식을 합리적 이해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과학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지리학계에서는
훔볼트의 세계관이
‘우주를 살아있는 하나의 전체로 보고 자연의 구성요소들을 상호작용하는 관계로 파악하여,
어떠한 현상에 대한 인과관계를 도출하는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훔볼트의 통합적 자연의 기술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대지리학 체계로 회귀한 것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며,
이로 인해 최후의 위대한 박물학자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최근 많은 학문 분과들이 너무 세분화, 전문화 되어 있어
학문 간 소통이 부재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학계의 자기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 결과 통섭과 융합이라는 가치를 내세우고 있는 요즘,
훔볼트가 완성하려고 했던 마지막 역작 [코스모스]의 세계관은
학계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전문가와 보편적 지식인이라는 스펙트럼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아직 우리는 헤매고 있다.
훔볼트에게서 우리는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19세기의 탐험가
훔볼트의 학문적 여정을 따라가면
그는 이처럼 선구자적 과학자요, 순수한 학문적 열정을 가진 위대한 탐험가이다.
그리고 과학 분야에서 그의 영향력은 아직까지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역사는 후대가 평가하는 것,
그리고 그 평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훔볼트는 19세기 전반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독일인이었지만,
포스트식민주의적(post-colonialism) 시각에서
훔볼트의 여정과 그의 학문적 성과, 사상 등은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된다.
그 중 [제국의 눈(Imperial Eyes: Travel Writing and Transculturation]의 저자인
메리 루이즈 프랫(Mary Louise Pratt)은
훔볼트를 유럽 제국주의 팽창의 첨병이자 수혜자로 비판한다.
프랫에 따르면
훔볼트의 남미탐험은 당시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던 스페인 왕가에 봉사하기 위한
조사임무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는 그가 그의 책을 스페인왕 카를로스 4세에게 헌정한다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그가 제국주의적 목적에 복무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프랫은 훔볼트의 수많은 표본수집과 그것을 정리, 분석하는 과정이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린네의 자연 분류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지구상의 모든 것에 이름을 부여하고 분류하는 린네식의 작업은
유럽 제국 팽창의 과정에서 가능했던
‘자연의 유럽식 체계화 작업’이라는 오명을 피하기 힘들다.
이렇듯 유럽중심적 사고 체계를 만들어 내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린네의 자연과학적 방법론은
물리적이고 군사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덜 직접적인 방식’으로 유럽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기여한다.
프랫은 훔볼트의 작업을 바로 이러한 과정의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린네나 훔볼트와 같은 학자들의 프로젝트를
“반-정복(anti-conquest)”이라는 용어로 일컫는다.
지배나 정복의 목적을 가지고 과학이나 학문의 이름으로
“호기심 많은 순수함(curious innocence)”을 표방하며
제국의 지배를 지식의 체계에서 정당화하는, 정복의 또 다른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훔볼트 비판에 반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 중 하나인 코넬대 역사학과 교수 아론 삭스(Aaron Sachs)는
이러한 프랫의 비판이 기존의 유럽 중심적 시각에서 배제된
‘타자’를 복원시키려는 목표에 함몰된 나머지
소위 깨인 시각과 선구적인 발상을 가졌던 유럽인들을 또 다른 ‘타자’로 만드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훔볼트는 남미에 도착하자마자
그 곳에서 자행되는 흑인 노예무역 실태에 충격을 받고 공공연히 그것을 비난했으며,
스페인 정부가 남미에서 행하는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
삭스에 의하면
훔볼트는 오히려 더 나중에 나타나게 될 반제국적이고 포스트식민주의적인 관점을 지닌
선구적 유럽인이었다.
그리고 학문적 측면에 있어서도
유럽의 관점이니, 제국의 첨병이니 하는 이 모든 것을 떠나
정말 순수한 과학적 탐구심을 가지고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모습을
조화로운 전체로서 파악하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음 글을 보자.
“(열대 환경에 관해서)아직 많은 형태가 우리에게 이러한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부족함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것은
시인이나 화가들의 감수성과 상상력과 언어의 넉넉함이며 그 훌륭함이다 (…)
그가 만일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혼을 지니고,
자연학 일반의 위대한 개념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교양과 정신을 지니고 있다면 (…)
발견한 모든 것을 집에 있는 채로 자신의 모든 것을 향유할 수 있다.
지식이나 문명이 개개인의 행복에 가져다준 가장 큰 영향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점에서 발견된다.” -훔볼트, [식물지리학 시론 및 열대지역의 자연도] 중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훔볼트에게 세계는
‘문명을 가진 유럽과 문명이 없는 열대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 미지의 세계는 신비롭고 숭고한 학문의 대상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럽 우위의 시각에서 ‘타자’를 연구하고 체계화 할 수 있는 위치에서만
나오는 관대한 유럽인의 시선이다.
혹자는 학문의 세세하고 엄격한 구분으로 인해
통합적 학문 세계를 추구했던 훔볼트의 이름이
현재 우리의 학문 체계에서 그 명성이 퇴색했다고 보고,
또 누군가는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의 날선 태도가 그의 명성을 깎아내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여전히 위대한 학자로 그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내가 기여한 가장 중요하고도 특별한 성과는 세 가지뿐이다.
그것은 바로 식물 지형과
그에 관련한 열대 세계의 그림,
등온선에 관한 이론,
그리고 전 지구에 걸친 자기장 관측소를 설립하는데 역할을 한 지구자기학 관련 관찰들이다.”
이러한 그의 업적들만으로도
훔볼트를 설명하기에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가 제국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사실 지금의 국제문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과거의 인물과 역사적 맥락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하는 것은
프랫이 이야기 한 "반-정복(anti-conquest)"이라는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지배와 정복의 방식을 인지하기 위해,
그래서 굴종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 아닐까.
“19세기의 유럽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나폴레옹이고, 다음가는 사람은 훔볼트이다.”
-브리태니커 사전
“훔볼트의 공적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연지리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서 그는 관찰 방법을 확립했다.
해발고도의 측정에 기압계를 사용하는 방법을 보급한 것은 훔볼트다.
또 그는 지형의 특성을 포착하기 위하여 단면도와 평균고도를 사용하는 방법을 보급했다.
훔볼트에 의해서 최초의 등온선조가 그려지고,
대륙 서안과 동안의 대조가 드러났다.
더욱이 식물의 생리와 토양이나 기후의 관계에 기초해서 식물지리학 분야를 창시한 것도 훔볼트다.”
-마르톤(E. de Martonne), 프랑스 지리학자
“나는 열과 성을 다해 매달려야만 그 진가를 즐길 수 있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훔볼트
1794년 예나(Jena)에서 괴테나 실러와 같은 문인과 같이 담소를 나누는 훔볼트 형제의 모습. 훔볼트는 이러한 교류를 통해 자연과학적 사고만이 아닌 철학적인 사고까지 겸비한 통합적 지식인이자 과학자가 되었다.
- 김경민, '인물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