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하지 않는 봉사를 하라
한기일 스테파노 중서울 Re. 명예기자
중구 구세주의 어머니 꼬미씨움 염태일 마르코 단장을 취재하기 위해 신당동성당(주임신부 조원필 바오로)을 찾았다.
염태일 마르코 단장은 상주 부원동 옹기골 교우촌에서 태어나 안동 임하면 신덕리 옹기골에서 자랐다. 8대 조상 때부터 대대로 신앙생활을 해온 한국 천주교 초기 신자 집안의 후손이다. 조부도 고모님도 연령회장으로 봉사하셨는데, 특히 외가는 모친과 6촌간인 성서신학의 권위자인 정양모 신부(서강대 교수) 3형제 등 10여명의 사제들을 배출한 독실한 천주교 집안으로 모든 집안 행사를 신부님들을 모시고 치른다고 한다. 그는 냉담 중에 비신자인 부인과 일반 예식장에서 1989년 10월8일 결혼하였다. 이날은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두 번째 방한으로 여의도에서 성체대회가 있었는데 친척들이 모두 여의도 성체대회에 참석한 후 뒤늦게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하는 신실한 집안이다.
유아세례를 받은 후 13세에 견진성사를 받기위해 교육을 받고 신부님과의 면담할 때에 신부가 되라는 말에 어린 마음에 부담을 느껴 냉담하게 되었다. 21년간 방황하다가 결혼하고 9년 만에 조당을 풀고 혼배성사를 하기 위해 아내가 세례를 받게 되었다. 아내가 세례받기 전날 (1998년 8월14일) 고해성사를 하였는데 이때 존경하는 김평만 유스티노 신부(현 가톨릭의대 교수)가 보속으로 주신 “남들이 하지 않는 봉사를 하라”는 말을 평생 마음에 담고 봉사해왔다.
성모님께 순명한 군사
염 단장은 평화시장에서 의류 도매업을 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원인 모를 심한 두통으로 고생하며 건강이 악화되었다. 2009년 5월2일 심정지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간호대 학생인 딸의 응급조치와 순천향대학병원에서 수술 후 신자 분들의 많은 기도 덕분에 이틀 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아산병원에서 심장박동기를 다는 등 심장, 맹장, 부신 절제수술 등 8차례의 수술을 신앙으로 이겨내고 신당동성당에서 구역장, 사목위원, 사목회 총무, 성체 분배단, 연령회장, 연령회 1지구장 등 많은 봉사를 겹치기로 해왔다.
각급 레지오 평의회의 임원도 두루 거친 성모님의 성실한 군사인 염태일 마르코 단장은 1998년 8월17일에 기도회에 참석하라는 견진 대부 이도석 요셉 형제에
이끌려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하였다. 이후 22년 간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며 만민의 어머니 Pr. 서기와 단장, 순교자들의 모후 Cu. 회계와 단장(2003년~2006년), 황금 궁전 Pr. 단장, 정의의 거울 Pr. 서기와 부단장, 중구 구세주의 어머니 Co. 단장(20018년~현재)으로 봉사하였는데 이 모든 일이 공석이 생길 때마다 신당동성당 주임 신부님의 천거에 순명하여 한 일이라고 한다.
사목회 총무와 연령회장, 중구 구세주의 어머니 Co. 단장 임무를 맡아 1인3역의 활동을 열성적으로 하다가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사목회 총무직을 내놓고 지금은 두 가지 일만 맡아 봉사하고 있다.
염태일 마르코 단장은 모든 일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봉사하였다. 1998년 구역회 활동을 하기 위해 1구역장에게 찾아갔더니 구역장과 부구역장만 있는 활력을 잃은 구역이었고 바로 두 사람마저 이사 가는 바람에 바로 구역장에 임명되었다. 난감한 상황에서 1구역 성도들의 명단을 교적부에서 확인하고 연락하고 나오지 않으면 찾아가서 구역미사 참여를 권면하여 구역활동을 활성화 시켰는데 Cu. 단장이 될 때까지 7년(1998~2005)간 구역장을 하면서 구역미사에 15명까지 나오게 하였다.
또 예비자 할머니 한분을 3년 간 차량으로 성당까지 모시고 다니며 자손 6명을 입교시켰고, 또 다른 8형제 가족 중에 5째 아들이 간경화로 위독하자 유일한 천주교 신자인 둘째 며느리의 요청으로 수녀님과 함께 방문하여 대세를 받게 하고 성당 묘지에 모시어 감동을 줌으로써 8형제 모든 가족이 1년 후 세례를 받게 하였다.
철저히 준비된 봉사자
성당에서 철저히 봉사하기 위해 소 공동체 교육과 레지오 활동을 위해 1, 2, 3단계 기사 교육 등 모든 레지오 교육을 받았다. 20여 년 간 연령회 활동을 하며 체계적으로 잘하기 위해 유제국 바실리오 본당 신부의 권유로 연도 강사 교육(14기)을 받았고, 교우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꾸르실료 교육(386기)을 받는 등 모든 교육을 빠짐없이 받았다.
심한 두통으로 의류업을 접고 연령회 활동에서 배운 지식으로 장례식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는데 메르스 사태로 어려움이 있어 사업을 모두 접고 성당에서 봉사활동만 하고 있다. 많
은 봉사를 하는 중에 “남들이 하지 않는 봉사를 하라”는 냉담을 풀 때 주신 신부님의 보속과 고모님께서 말씀하신 봉사하며 돈을 버는 “쟁이는 되지 말라”는 말을 늘 생각하며 교우들의 장례식을 돕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5700여명의 신자가 등록된 신당동성당에서 한 달에 서너 번의 장례식을 치르는데 모든 장례 절차를 실비로 치러드려 교인들의 의뢰로 끊임없이 장례 봉사를 하고 있다. 연도 강사 교육을 통해 배운 연도와 장례에 관한 지식으로 연도, 입관, 발인, 장지 미사를 드려 유가족에게 큰 위로를 주고 있다. 수많은 봉사 활동을 하는 중에 두통도 없어졌다고 한다. “이미 이루어진 것을 받는 것이다”. “감사하라. 착하게 살아라. 기도하라”라는 말씀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산다고 한다.
<사진 설명(위로부터)>
_ 염태일 마르코 단장
_ 김평만 유스티노 신부와 이도석 요셉 대부
_ 정의의 거울 Pr 단원들
_ 구요비 욥 주교님 사목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