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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130편 1-8절
찬송 / 344장 ·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성서 / 이사야 48장 17-22절, 요한복음 5장 1-9절
말씀 / 스스로 일어나서 걸어가라
너희는 바빌론에서 나오너라.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서 도망하여라.(사 48:2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요 5:8)
어느새 초여름 한낮의 열기가 뜨거워졌습니다. 이맘때쯤이면 새들이 한창 새끼를 치지요. 원주 집에도 지붕 끝 빗물받이 구멍 속에다 박새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작년에는 전봇대에 달린 배전함에 둥지를 틀었었지요. 박새는 원체 작기도 하지만, 큰 새나 고양이 뱀 같은 천적을 피해서 참 좁고 아슬아슬한 틈에 둥지를 틉니다. 그런데 이 작은 새가 새끼를 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을 품을 때는 거의 단식 투쟁 수준으로 알을 품어 지킵니다. 작년에는 새가 든 걸 모르고 배전함을 열다가 둥지가 떨어질 뻔했는데, 그런 데도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알에서 새끼가 깨어나면, 어미는 더 바빠집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먹이를 물어오고, 배설물도 깔끔하게 치우고, 그야말로 육아 전쟁이 시작되지요. 육아는 새들에게도 정말 극한의 직업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새미로 새끼에게 집중하던 어미 새가 어느 날부터는 둥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새끼들이 찢어질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를 지르고, 날개를 파닥거리며 발버둥을 쳐도 그냥 멀찍이 떨어져서 본체만체합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무더운 여름 육아에 너무 지쳐서 ‘번아웃’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이제 더는 못 하겠다고 파업이라도 하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어미 새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기 새들이 스스로 일어서기를, 일어서서 둥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고물고물한 작은 새끼들이 밖으로 나오다가 떨어져서 다칠지도 모릅니다. 둥지 바깥에는 고양이도 있고 뱀도 있고 솔개도 있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그렇지만 아기 새는 스스로 일어서서 둥지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날개를 활짝 펴고 푸른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병자를 고쳐주신 장소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좀 이상하지요. 복음서를 좀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은 여기서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에도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오지요. 어디서 고쳐주셨을까요? 갈릴리의 가버나움입니다. 더구나 공관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는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중풍 병자를 고쳐주신 장소를 굳이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이라고 특정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한복음은 중풍 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 그 자체’보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말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숙청하신 이야기도 맨 앞에 두었지요. 그것도 성전을 숙청한 그 사건이 요한에게는 아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읽을 때는 요한이 사실의 복음서라기보다는 의미의 복음서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언제 올라가셨지요? 유대 명절입니다. 유대 사람의 중요한 절기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드자다’라는 주랑이 다섯 개가 있었습니다. 이런 설명이 그냥 단순한 풍광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이게 뭘 말하려는 걸까요? 유대 명절, 양의 문, 베드자다, 다섯 주랑, 이것들은 무엇인가 연상되는 것이 있지요? 우선 유대 명절은 유대의 종교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은 제사, 예배와 관련이 있지요. 히브리말 ‘베드자다’는 뭘까요? ‘벧’이 집이라면 ‘자다’는 ‘의’(체다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본에는 ‘베데스다’라고 나오기도 하는데, 사랑의 집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섯 주랑은 모세오경이 연상되지요. 이렇게 보면, 예루살렘 베드자다 못 가에 있는 주랑은 ‘유대 종교’를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 그 종교에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병자들입니다. 눈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과 중풍 병자입니다. 그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거기에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왜 종교에 들어갑니까? 구원받기 위해서지요. 병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이 종교에서는 어떻게 구원받을까요? 어떻게 해야 병이 낫게 될까요? 베드자다 못에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휘저을 때,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가장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가장 큰 공적을 쌓아야 합니다. 가장 많은 헌금을 해야 하지요. 가장 많은 전도를 해야 구원받고 병도 낫고 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착순입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낯익은 종교지요?
이런 종교에 서른여덟 해나 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아마 태어나서부터 한 번도 일어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겠지요. 이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못에 1등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빨라야 하겠지요. 돈이 가장 많아야 하겠지요. 아니면 가장 힘이 세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중풍 병자에다가 돈도 없으니, 그저 거기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무력한 종교인에게 희망이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보시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낫고 싶으냐?” 뭐 이렇게 물어보셨을까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가 가장 바라는 것은 그 병에서 낫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낫고 싶으냐고 물으신 예수님께 이 병자는 낫고 싶다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병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 이 병자가 바라는 것,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종교에서 신도가 가장 목을 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병이 낫는 것이 아닙니다. 못에 먼저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무력하니까, 누군가라도 나를 들어서 저기 넣어주는 것입니다. 본래 병자의 목적은 낫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종교에서는 목적이 전도되었습니다. 이 병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스라이팅 되어서, 낫는 게 아니라 못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얼마 전에 이재록의 쌍둥이 딸을 다룬 TV 보도를 보았습니다. 이재록은 지금 성범죄로 교도소에 들어가 있지요. 그가 이미 이단이라고 판명되었고, 끔찍한 범죄로 감옥에 갇혔는데, 그 신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 속았다며 땅을 치고 이를 갈고 울화통을 터뜨리며 분개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 신도들은 지금도 이재록의 브로마이드에 큰절을 올리며 열광하고 있습니다. 이재록의 쌍둥이 딸이 그 신도들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정말 참담한 것은 그 딸들이 아비에게 어린 여신도들을 대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짐승만도 못한 짓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신도들은, 허우대는 멀쩡해 보이는데, 어떻게 그렇게 좀비처럼 통제되는 걸까요? 그 교회 권사라는 사람들이 애지중지 보물처럼 간직하고, 머리에 옷에 달고 다는 게 있습니다. 정말 허접하기 짝이 없는 머리띠와 핀 같은 것들입니다. 그걸 길가에서 판다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들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것을 신줏단지처럼 모십니다. 그게 하나님 버금가는 이재록과 딸이 하사한 성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징표라는 것이지요. 그걸 많이 모으는 것이 엄청난 자랑이 되고, 그걸 가장 많이 가지는 것이 그들의 신앙생활의 목표가 된 것입니다. 그 조잡한 것들이 그들의 우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거짓 종교가 저지르는 가장 사악한 죄입니다. 낫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데, 낫는 게 아니라 못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목표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죽자고 경쟁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못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번쩍 들어서 베드자다 못에 가장 먼저 넣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손을 힘껏 잡아당겨서 일으켜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 일어서서, 스스로 자기 자리를 걷어들고, 스스로 당당하게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곧 나았습니다. 스스로 일어서서 자기 자리를 걷어들고 스스로 걸어갔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온전한 구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스스로 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자유요, 이것이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바빌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이집트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이제 바빌론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속량하시고 구원하신다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바빌론에서 나오너라.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서 도망하여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는 하나님만의 모노드라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일어나서 바빌론으로부터 도망쳐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일어서서 바빌론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성서는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도 그랬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가 사는 땅과 태어난 곳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떠나지 않고서는 새로운 약속도 새로운 미래도 열릴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마다 거듭 떠나야 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사건이라면, 단연 출애굽이지요. 그런데 이 출애굽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집트 파라오의 노예로 억압받고 학대당하는 히브리 사람들을 구원하신 사건이지요. 그런데 출애굽은 동시에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떠난 사건입니다. 구원의 사건이며 또한 탈출의 사건입니다. 이사야는, 바로 그런 점에서, 바빌론 포로 귀환을 제2의 출애굽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빌론으로부터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통째로 옮겨 주신다고 해도,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바빌론으로부터 떠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베드자다 못 가에 서른여덟 해 동안 누워 있던 병자에게 스스로 일어나서 자리를 걷어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공관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도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통당하는 병자를 고쳐주시고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지요. 진정한 구원은 스스로 일어서서 스스로 걸어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스스로 일어서서 스스로 걸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개인뿐 아니라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일어나 떠나야 했습니다. 바빌론에서 뭉그적거리지 말고 스스로 일어나 떠나야 했습니다. 스스로 일어나지 않는 사람에게, 스스로 떠나지 않는 백성에게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한국 교회를 보면서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다고 걱정하고 비난합니다. 우리 스스로 둘러보아도 너무 아프고 절망스럽습니다.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일까요? 어디서부터 병든 것일까요? 어쩌면 베드자다 못 가에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던 병자의 모습은 바로 한국 교회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스스로 걸어가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요 좀비의 맹신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는 약하고 또 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없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눈 밖에서는 한순간도 견딜 수 없고 한 발짝도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에 우리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잡아 주시기에 우리는 스스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바위를 쪼개 물이 솟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길에 동행하시기에, 우리는 이집트를 떠나 척박한 광야로 나갈 수 있고, 바빌론을 떠나 시온의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말씀의 빛을 따라 생명의 길로 걸어가도록, 언제나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