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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꽃 장엄☆]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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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장엄]
나태주 시집 / 시작시인선 0199 / 천년의 시작(2016.04.05)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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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
나태주
꽃 장엄이란 말
가슴이 벅찹니다
꽃송이 하나한가
세상이요 우주라지요
아, 아, 아,
그만 가슴이 열려
나도 한 송이 꽃으로 꽝!
터지고 싶습니다,
아제아제
나태주
날마다 날마다
우리들 하루하루는
눈물과 한숨과 땀방울
절름발이의 언덕
언덕 너머 들판 너머
강물을 건너
겁시다 갑시다
어서 갑시다
저 너머 흰 구름
꽃으로 피어나는 곳
꽃보라 갑시다
미소 보러 갑시다
아닙니다 우리가
꽃이 되러 갑시다
미소 되러 갑시다
어서 같이 갑시다.
빈 자리
나태주
누군가 아름답게
비워둔 자리
누군가 깨끗하게
남겨둔 자리
그 자리에 앉을 때
나도 향기가 되고
고운 새소리 되고
꽃이 됩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아름답고 깨끗하게
비워둔 자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왔다
나태주
무심히 그냥 해질 무렵
모래 지평선을 바라보고 싶어서 왔다
서쪽으로 사라지는 황혼을 보며
울먹이고 싶어서 왔다
말없이 그냥 모래 바닥에
드러눕고 싶어서 왔다
해가 진 뒤에도 오래토록
따스한 모래 바닥의 온기
지구의 등허리가 이렇게
부드럽고도 따스할 줄이야!
하늘 가득한 하늘의 눈물
소름끼치도록 맑고도 깊고도 푸른 눈물
그렁그렁 쏟아질 듯 하늘의 눈망울이여
그 별들은 가슴에 품으러 왔다
비행기 타고 자동차 타고
낙타 등에 기대어 욌다.
사막 1
나태주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
여기 버린다
토막말 하나하나 부서져
모래가 된다
가슴 속 말들이 조금 더
줄었기를 바란다.
모래 지평선
나태주
만날 날이 없으니
다툴 일 없겠고
다툴 일 없으니
화해할 일 없겠다
화해할 일 없으니
좋을 일도 없겠지!
면도칼로 씀벅 자른 듯한
모래흙의 저 어여쁜 엉덩이
기억 한 자락을 잘라 나도
그 여름에 던질까 그런다.
사막 무덤
나태주
아버지, 살아서 목마르고 힘들고
땀에 찌든 아버지
모래밭에 묻어드려요.
그곳 세상에서는 부디
목마르지 아말고 힘들지도 말고
땀에 찌들지도 마세요
언젠가는 저희도 그 옆으로
돌아갈 거예요
어머니 옆에 묻어드려요.
목이 마르다
나태주
보고 싶다는 말은 그립다는 말
그리움은 삶의 양식이자 소망
얼마나 이 모래를 보고 싶었던가!
어쩌면 나도 한두 알
모래였는지 몰라
커다란 바위산이 부서져
작은 알갱이가 되기까지
그 길고도 지루한 순간들의 연속
어디쯤에 내가 있었을 거다
― 다시금 목이 마르다.
낙타가 운다 2
나태주
명사산 해거름녘 낙타가 운다
하루에도 몇 차례 모래 비탈길
사람을 들에 싣고 비틀거리며
가도 가도 제자리 고달픈 노역
새끼 낙타 두고 온 어미 낙탈까?
불은 젖에 새끼가 생각나설까?
해 어스름 구슬피 우는 그 소리
강물 되어 모래 산을 타고 넘는다.
이국 소녀
나태주
다만 눈으로 말하고
눈으로 웃고
눈으로 인사한다
안녕!
맑고도 푸른 두 눈
산속에 오직 깊은 호수
낯설지만 멀지 않고
새롭지만 두렵지 않다.
태산목
나태주
저건 고무나무?
아니야
저건 태산목
영어로는 매그놀리아
젊어서 한때 진주전주
풍남문 근처에서 처음 보고
신기해하기도 했던 나무
스페인 세비야 스페인 광장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만난 태산목은
수령이 이백 년
사람의 아름으로는
안을 수 없는 크기의 밑둥
가까이서 마카메리로는
담을 수도 없는 높이
벌어진 입이 쉽게 닫아지지 않네
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발길이 쉽게 멀어지지 않네.
터미널 1
나태주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나뉘어져 걸어간다
어머니와 딸
어머니와 아들
한 사람이 세 사람으로
나뉘어져 걸어온다
어머니와 두 딸
어머니와 두 아들
어머니와 아들과 딸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도 아름다운 이름
때로 우리는 우리가 한때
어머니의 일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잊고서 산다.
눈 1
나태주
왜 눈이 오는 날만
네 생각이 나는지 몰라
눈이 너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눈이 너의 마음이라고 여겨지는 것일까?
멀리서부터 오신 손님
와서는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나는 사람
가끔 안경알 위에 내려 녹아서
눈물이 되기도 하는 하늘의 마음
그렇잖아도 어젯밤에는
네 꿈을 꾸기도 했단다.
거울
나태주
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자꾸만 사라지고
아버지가 자꾸만 나타난다
그것도 키가 작고 덩치도 작은
또 다른 어떤 아버지.
고등어 산다
나태주
맨드라미 피어서 붉은
9월도 초순의 저녁 무렵
재민천 따라서 자전거 타고
하루해도 기울어 집에 가다가
간고등어 안동 간고등어
네 손에 만 원 오치는 소리
자전거 내려서 고등어 산다
집에 사가지고 가보았자
먹을 입도 없는데 무엇을
이런 거 사왔느냐 집사람
핀잔하고 외면할지 몰라도
어려서 외할머니 밥상에서
수저에 얹어주시던 고등어
생각이 나서 문득 고등어 산다
아내를 위하여
나태주
1.
그대를 꽃이라고 부르면
그대도 꽃이 되고
나도 따라서 꽃이 된다
이거 하나 알기에도
우리에게는 칠십 년 사린
강물이 있어야 했다.
2.
잠이 오려고 한다
평안한 마음
기다려주는 사람
누군가 있다
아내와 함께라면 어디나
그곳이 집이다.
물끄러미
나태주
흰 구름이 자꾸만
키를 높여가는
하늘 아래
염소 한 마리 고삐매여
풀을 뜯고 있는 풀밭 위에
살그머니 다가가
몸을 눕혀본다
마음도 누벼본다
나는 흰 구름을 바라보는데
염소는 풀을 뜯다말고
나를 바라본다
물끄러미
서로.
미안한 세상
나태주
방 안에 앉아서
제주도의 물을 마신다
재주도의 바람이 만든 물
돌들이 길어 올린 물
재주도의 아낙네들이
지악스레 지켜낸 물
그 귀한 물을 슈퍼마켓에서
돈 몇 푼 안 주고 사다가
방 안에서 편안히 마신다.
시인
나태주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숨 쉬도 있는 사람이 있다
살았지만 죽은 사람만도
못한 사람이 있다
죽었으나 살았으나
별로 구별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첫 번째 사람이 시인이다.
꽃씨
나태주
나의 시는 세상에 뿌리는
나의 꽃씨
뿌리고 뿌려도
바닥나지 않는 꽃씨
누가 꽃씨를 내 손아귀에
쥐어주는 것일까?
그것도 모르면서 나는
꽃씨를 뿌리는 아이
다만 죽는 날까지 그 꽃씨
바닥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시인을 위햐여
나태주
누가 그를 시인이라 부르나?
사람들이 시인이라 부를 때보다
나무들이 꽃들이 그를
시인이라 부를 때 더욱
그는 시인이고
더 멀리 오래는 바람이 흰 구름이
저 혼자 흘러가다가 방긋이 웃으면서
당신이 바로 시인이군요
그렇게 불러줄 때 정말로
그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선물
나태주
비밀이 하나씩 늘어간다
너의 귓볼에 대한 비밀
너의 손가락과
목에 대한 비밀
너의 팔목에 대한 비밀
결국은 조금씩 신뢰가
자라고 잇다는 말이다
내 마음이 네 입술에 가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 어리석음
끝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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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아직은 진행형
날마다 나의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는 잠을 청하기 전에 컴퓨터를 열고 시집 원고를 다시 살피는 일이다. 어쩌면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날이지 싶어서 그렇게 한다. 하나의 버릇이고 그것이 또 나의 시 쓰기 습관이다.
그렇게 또다시 한 권의 시집 원고가 모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천년의시작>에서 시집을 내주겠단다. 시 한 편 한 편이 횡재인데 이것은 더욱 큰 횡재다. 이 시편들이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과 어떻게 조우할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다.
늘 여기까지가 나의 소임이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섭섭해 하고 감사한 마음을 또한 잊지 않는다. 이런 마음들이 모이고 쌓여 나의 일생이 되었다. 그것이 아직은 진행형. 그래서 다시 고맙다.
2016년 1월
공주 금학동에서
나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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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詩集 [※꽃장엄※]
[ 해설 ] -
삼세三世의 세계관과 행복을 향한 삶의 기록
― 나태주 시집『꽃 장엄』에 관하여
권 온(문학평론가)
1.
시집『꽃 장엄』(2016)은 나태주 시인의 현황을 보여준다.『꽃 장엄』은 1971년에 등단한 시인의 서른일곱 번째 시집이다. 시력詩歷 45년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생산력이 아닐 수 없다. 나태주가 오랜 세월 동안 흔들림 없이 시의 길을 굳건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는 이에 대한 대답을 시집『꽃 장엄』의 도처에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독자들은 시인을 소개하는 글에 제시된 부사 ‘현재’와 ‘잠시’, 자서自序에 해당하는 ‘책머리에’의 제목인 ‘아직은 진행형’, 그리고 시「낙타가 운다」등에 주목하는 게 좋겠다. 나태주는 이번 시집에서 과현미過現未 또는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되는 삼세三世 곧 전세前世, 현세現世, 내세來世의 세계관을 피력한다. 그는 여기에서 노래한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를 살아가지만, ‘현재’는 ‘과거’와 ‘미래’라는 두 갈래 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책머리에’에 따르면 나태주는 날마다 시집 원고를 다시 살피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어쩌면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날이지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시인의 발언은 간절함과 경건함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이제부터 시적인 언어로 써내려간 한 겸손한 인간의 삶의 기록을 확인할 것이다.
2.
날마다 날마다
우리들 하루하루는
눈물과 한숨과 땀방울
절름발이의 언덕
언덕 너머 들판 넘어
강물을 건너
갑시다 갑시다
어서 갑시다
저 너머 흰 구름
꽃으로 피어나는 곳
꽃 보러 갑시다
미소 보러 갑시다
아닙니다 우리가
꽃이 되러 갑시다
미소 되러 갑시다
어서 같이 갑시다
-「아제아제」전문
전 4연 16행으로 구성된 이 시에서 동사 ‘가다’에 종결어미 ‘- ㅂ시다’가 붙어서 조성된 서술어 ‘갑시다’는 매우 긴요한 위치를 점유한다. 8회 출현하는 ‘갑시다’는 작품의 제목인 ‘아제아제’와 동일한 의미로 파악될 수 있다. ‘아제아제’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에서 나온 말인데 이는 불교경전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또는「반야심경般若心經」의 진언眞言이다.
이 시의 1연은 인간사人間事를 축약한 표현이다. 나태주는 여기에서 ‘눈물’과 ‘한숨’과 ‘땀방울’로 이루어진 ‘하루하루’가 모이고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 인간의 삶임을 밝힌다. 시인은 “한쪽 다리가 짧거나 다치거나 하여 걷거나 뛸 때에 몸이 한쪽으로 자꾸 거볍게 기우뚱거리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인 ‘절름발이’를 도입하여 인간사의 우여곡절을 적확하게 표현한다. ‘절름발이의 언덕’은 ‘현재’ 또는 ‘현세’의 힘겨운 삶이 펼쳐지는 공간이 된다.
2연부터 작품의 분위기가 전환되는데, 이는 ‘너머’와 ‘넘어’와 ‘건너’에 힘입은 바 크다. 시인은 유사하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는 표현들을 연속적으로 배치하면서 어딘가로 가자고 이야기한다. 3회 출현하는 ‘갑시다’가 지향하는 곳은, ‘언덕’,‘들판’,‘강물’이 가리키는 ‘현재’ 또는 ‘현세’의 삶이 아니다. 부사 ‘어서’에 담긴 곡진한 마음을 파악하려면 3연으로 이동해야 한다.
나태주는 3연에서 독자들에게 ‘흰 구름’, ‘꽃’, ‘미소’로 충만한 “꽃으로 피어나는 곳”으로 이동할 것을 권유하는데, 이 공간은 부처의 미소가 가득한 정토淨土를 연상시킨다. 나태주 시인의 시는 대개 간결한 형태를 이루고 쉽게 읽힌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단순하지 않고 다양한 생각을 유도하는 특성이 있다.
이 시의 4연은 나태주 시의 이러한 장점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시인은 3연에서 “꽃 보러 갑시다/미소 보러 갑시다”라고 이야기했으나, 4연에서는 “꽃이 되러 갑시다/미소 되러 갑시다”라는 발언으로 수정한다. 3연이 부처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추구했다면 4연은 ‘나’를 포함한 ‘우리’가 스스로 부처가 되는 단계를 염원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 행은 “어서 갑시다”인데 우리는 이를 가리켜 ‘같이’의 시학詩學으로 이름 붙일 수 있겠다. 또한 나태주의 ‘같이’의 시학은 삶과 시의 ‘가치’를 재발견한다는 점에서 ‘가치’의 시학이기도 하다.
꽃 장엄이란 말
가슴이 벅찹니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세상이요 우주라지요
아,아,아,
그만 가슴이 열려
나도 한 송이 꽃으로 팡!
터지고 싶습니다
-「화엄」전문
앞의 작품의 경우에도 그러하지만, 이번 시 역시 불교적 색채가 그득하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화엄華嚴’은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닦아 덕과德果를 장엄하게 함’이라는 심오한 뜻을 갖는다. 1연 1행의 ‘꽃 장엄’에서 ‘장엄莊嚴’은 “씩씩하고 웅장하며 위엄 있고 엄숙함”이라는 뜻과 더불어 “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 따위를 부처에게 올려 장식하는 일”을 가리킨다.
‘화엄’이나 ‘장엄’이라는 말에 담겨 있듯이 이 시는 수행修行의 의미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작품이다. 나태주의 작품이 우리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올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수행의 의미를 불교적인 범주 내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본질적인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연의 “꽃 장엄이란 말”이라는 어구에서 직접적으로 노출되듯이, 그가 ‘말’ 또는 ‘언어’에 집중하는 진정한 시인詩人이라는 사실이 더할 수 없이 눈부시다.
강 건너 저편 언덕
꽃이 새로 피어나는지
꽃나무 아래 누군가
이쪽을 생각하는지
또다시 구름이 술렁이네
바람에 향기가 묻어오네
그 실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당신
-「피안」전문
나태주의 시「피안」은 앞서 고찰한 두 편의 시 곧 「아제아제」나「화엄」과 동일한 계열을 형성하는 작품이다. ‘건너’나 ‘언덕’ 또는 ‘꽃’등의 어휘는 앞선 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출현한 것으로, 이 시가 불교적인 세계관 속에서 탄생했음을 알려준다.
전4연 8행으로 구성된 시「피안」에서는 두 개의 대명사가 긴요하다. 곧 1연의 ‘저편’과 2연의 ‘이쪽’은 각각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을 가리킨다. 나태주 시인은 이 작품에서 ‘저편’ 또는 ‘피안’에 집중하고 있으니, 이는 ‘꽃’이나 ‘꽃나무’ 또는 ‘향기’ 등의 어휘로 구체화된다. 무엇보다도 4연의 “한번도/만난 적 없는 당신”이라는 표현에 기대어 ‘피안’의 신비神秘를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다는 점이 탁월하다. 또한 나태주가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불교적인 탐색은 추후 만해 한용운과의 계보학적인 관련성 점검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심히 그냥 해질 무렵
모래 지평선을 바라보고 싶어서 왔다
서쪽으로 사라지는 황혼을 보며
울먹이고 싶어서 왔다
말없이 그냥 모래 바닥에
드러눕고 싶어서 왔다
해가 진 뒤에도 오래토록
따스한 모래 바닥의 온기
지구의 등허리가 이렇게
부드럽고도 따스할 줄이야!
하늘 가득한 하늘의 슬픔
소름끼치도록 맑고도 깊고도 푸른 눈물
그렁그렁 쏟아질 듯 하늘의 눈망울이여
그 별들을 가슴에 품으러 왔다
비행기 타고 자동차 타고
낙타 등에 기대어왔다
-「그래서 왔다」전문
시집『꽃 장엄』을 구성하는 시편 중에는 ‘낙타’와 관련된, ‘낙타’가 활동하는 ‘사막’과 관련된 것들이 적지 않다. 시「그래서 왔다」역시 그러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모래 지평선’이나 ‘모래 바닥’ 또는 ‘낙타’등의 어휘는 이 시의 배경에 ‘사막’이 위치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태주의 시는 소박하고 소탈하며 꾸밈없다. 작품의 제목에서 눈에 띄는 표현인 ‘그래서’는 “앞의 내용이 뒤의 내용의 원인이나 근거, 조건 따위가 될 때 쓰는 접속부사”이다. 시인이 내세우는 ‘그래서’는 대단한 내용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해질 무렵/모래 지평선을 바라보고 싶어서”나 “서쪽으로 사라지는 황혼을 보며/울먹이고 싶어서”, “모래 바닥에/드러눕고 싶어서”나 “그 별들을 가슴에 품으로”가 그래서의 실상이다. 그는 사막에 “무심히 그냥” “말없이 그냥” 왔을 따름이다.
나태주 시의 초연함은 ‘황혼’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기에서 ‘황혼’은 자연현상인 동시에 인생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삶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에 바라본 ‘황혼’이 슬픔의 감정과 연결되는 일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시인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가 “따스한 모래 바닥의 온기”와 “소름끼치도록 맑고도 깊고도 푸른 눈물”인 ‘그 별들’을 포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태주 시인은 인간이 지구가 되고 더 나아가 우주와 합일하게 된다는 충일감의 정서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낙타 한 마리
살고 있었네
어리고도 순한 낙타
세상물정 모르고
오직 세상한테
사랑받기만을 꿈꾸던 낙타
쉽사리 세상한테
사랑받을 수 없었네
타박타박 걸으며 걸으며
어른 낙타가 되었고
늙은 낙타가 되었네
가도 가도 목마른 날들
팍팍한 발걸음
세상은 또 하나의 사막
어디에도 쉴 만한 그늘은 없고
주저앉을 의자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았네
오늘도 늙은 낙타 사막을 가네
물 없는 길 사랑 없는 길
세상한테 사랑받고 싶은 마음 하나
세상 속으로 길 떠나네
사막의 길 걷고 또 걷네
-「어린 낙타․1」전문
이것은 ‘낙타’에 관한 시이지만 동시에 ‘낙타’에 관한 시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낙타’를 다룬 시이면서 ‘인간’을 이야기하는 시이다. ‘사막’에서의 체험은 나태주 시인이 이 작품에 ‘낙타’를 도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1연 1행인 “마음속에 낙타 한 마리”에 주목해야 하겠다. ‘낙타’가 위치한 공간이 ‘마음’이라는 사실이 긴요하다.
이 시는 ‘어린 낙타’가 ‘어른 낙타’가 되고 마침내 ‘늙은 낙타’가 되는 낙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아니다. 이 시는 ‘아이’가 ‘어른’이 되고 마침내 ‘노인’이 되는 인간의 생애를 다룬다. 낙타가 걸어가는 ‘사막’은 인간이 걸어가는 ‘세상’과 같다. 사막의 ‘길’은 세상의 ‘길’을 가리키는 적확한 비유가 된다. 세상물정 모르던 ‘어린 낙타’가 ‘늙은 낙타’가 되는 과정은, ‘아이’가 쉴 수 있는 그늘과 의자를 찾아 헤매다 ‘노인’으로 변하는 과정과 포개진다.
낙타가 물을 찾아서 사막의 길을 걸어가듯이, 인간은 사랑을 찾아서 세상의 길로 나아간다. 나태주 시인은 목마름과 팍팍함을 견디면서 전진하는 사막의 낙타에게서 필멸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숙명을 보았고, 이는 황혼기에 접어든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처음엔 들판을 뛰어다니던 것들
아침 이슬 속에 빛나는 웃음이었던 것들
더구나 인간의 안쓰러운 사랑이었던 것들
모두가 무너져 평등하게 누워 있다
그럼,
그럼,
그럼,
고개 끄덕이고 있다
-「사막․3」전문
주지하다시피 시의 사전적 의미는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시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선 작품이다. 시에서 표면에 드러난 언어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흔히 여백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 드러나지 않은 언어에 주목해야 한다. 더불어 시는 음악에 가까운 언어가 되어야 한다. 시의 언어가 함축적이고 운율적이라는 말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태주는 이 시에서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시인은 한정된 언어를 노출하되 반복의 기법을 활용하여 리듬감을 살리는데 주력한다. 1연을 구성하는 세 개의 행은 ‘~(하)던 것들’이라는 동일한 구조를 형성한다. “앞말이 관형어 구실을 하게 하고 어떤 일이 과거에 완료되지 않고 중단되었다는 미완未完의 의미를 나타내는 어미”인 ‘-던’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시인이 노리는 바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적인 안쓰러움이다. 나태주는 우리에게 인간이란 누구나 언젠가 과거형이 되어야 하고, 미완의 상태에서 생을 끝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음악의 형식으로 알려주고 있다.
2연 역시 “모두가 무너져 평등하게 누워 있다”와 “고개 끄덕이고 있다”라는 두 개의 시행을 앞뒤에 배치함으로써 곧 ‘~있다’를 반복함으로써 운율적인 언어를 내세운다. 중간에 삽입된 세 개의 행이 ‘그럼’이라는 동일한 형태를 띤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리하여 미당 서정주의 시「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에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괜찬타,……’ 또는 ‘괜,찬,타,……’를 연상시키는 나타주의 ‘그럼’은 ‘사막’이라는 공간에서 궁극의 상태인 죽음에 놓인 모든 인간의 얼굴을 애도하고 위무하는 사랑의 읊조림이 된다.
오늘도 나의 걸음은
아장걸음
큰 가방 들고
큰 모자 쓰고
중학생처럼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초등학생처럼
유치원생처럼
세상 속으로 떠나간다
아니 아니다
세상의 온갖 꽃들
눈물을 만나러 간다
-「문학 강연」전문
나태주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집중하는 시편 중에는 ‘문학’이나 ‘시’와 관련된 것들도 있다. 이 시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문학 강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45년 동안 37권의 시집을 간행한 시인이 시를 포함한 문학 강연을 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당연한 말이지만 강연을 하기 위해서는 대개 어딘가로 이동해야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명사 ‘걸음’과 동사 ‘들어가다(들어간다)’, ‘떠나가다(떠나간다)’, ‘만나러 가다(만나러 간다)’ 등은 ‘문학 강연’을 위한 이동移動과 관련된다. 이는 앞서 살핀 나태주의 또 다른 시편들 가령「아제아제」에서의 동사 ‘가다(갑시다)’,「그래서 왔다」의 동사 ‘오다(왔다)’,「어린 낙타․1」의 동사 ‘걷다(걸으며)’와 명사 ‘길’등과 긴밀한 결속 관계에 놓인다.
시인이 제시하는 ‘이동’ 관련 표현들은 단순히 ‘문학’의 범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나태주가 취한 ‘걸음’은 ‘아장걸음’이고, 그는 ‘중학생처럼’, ‘초등학생처럼’, ‘유치원생처럼’ 걷는다. 스스로를 차츰 낮추는 점강법에 기대어 그가 향하는 곳은 ‘세상’이다. 시인이 만나는 ‘꽃들’이나 ‘눈물들’은 ‘사람들’과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태주 시인이 진행하는 ‘문학 강연’은 ‘인생 강연’이 되고 ‘삶’ 강연이 된다.
물은 차갑고도 맑았다
그러나 내 가슴은 아직도 충분히 뜨겁고
나의 피는 혼탁할 뿐이다
나의 시 나의 사랑은 숭고함이나
희생과는 거리가 멀다
오직 이기적인 목숨과 사랑
그리고 나의 시
차라리 연어의 회향 의식을
확인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연어」부분
시의 화자 ‘나’또는 시인은 “비행기 타고/태평양 건너 캐나다의 개울가에서”, “살아 있는 연어를” 보았고 만났다. 인용한 대목은 ‘연어의 회향 의식’을 바라보면서 ‘나’의 가슴에 차오르는 솔직한 느낌을 다룬다.
연어의 결연한 죽음을 목도하면서 시인은 ‘나’의 가슴, 피, 목숨, 사랑, 시를 되돌아본다. 맑고 차가운 고향의 물에서 숭고함과 희생에 기대어 최후를 맞는 연어와는 달리 ‘나’는 뜨거운 가슴과 혼탁한 피와 이기적인 목숨을 고수한다, 형이상학적인 대상이라 생각했던 ‘나’의 사랑이나 시 역시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인식은 독자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 “나의 시가 맑고/향기로운 시라고 우기기는 어렵게 됐다”는 나태주의 성찰은 진정眞情으로 가득하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시인의 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나뉘어져 걸어간다
어머니와 딸
어머니와 아들
한 사람이 세 사람으로
나뉘어져 걸어온다
어머니와 두 딸
어머니와 두 아들
어머니와 아들과 딸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도 아름다운 이름
때로 우리는 우리가 한때
어머니의 일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잊고서 산다
-「터미널․ 1」전문
터미널terminal 또는 종점終點은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시인은 오가는 행인들 중에서 어머니와 딸, 어머니와 아들의 조합을 주목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녀간이나 모자간은 닮은꼴일 확률이 높다. 시인은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길어 올리는 자이기에 ‘어머니와 딸’이나 ‘어머니와 아들’의 조합을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나위어져 걸어간다”로 규정한다. 나태주의 놀라운 발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머니와 두 딸’이나 ‘어머니와 두 아들’ 또는 ‘어머니와 아들과 딸’의 조합을 “한 사람이 세 사람으로/나뉘어져 걸어온다”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녀간이나 모자간의 조합에서 도출된 시인의 탁월한 통찰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반성한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한때/어머니의 일부분이었다는 사실을/잊고서 산다”라는 나태주의 발화發話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아픈 깨달음을 마주하는가. 인간은 모두 한때 어머니와 동체同體였음을. 우리는 모두 한때 어머니와 한 몸이었음을 기억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나태주가 어머니께 선사하는 “세상에서/가장 크고도 아름다운 이름”은 결코 과장이 아니고, 허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 각자를 세상에 내보낸 이가 다름 아닌 어머니임을 각별히 기억해야만 한다.
손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점점 내 손을 사라지고
아버지의 손이 거기 와 있다
어머니의 손도 와 있다
거울을 보면 볼수록
나날이 내 얼굴은 떠나가고
아버지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머니의 얼굴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려서 가끔은
도망치고 싶었던 얼굴들!
이제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음을
안다
-「도망」전문
나태주는 앞의 시에서 ‘어머니’에게 주목했는데, 이번에는 ‘어머니’와 더불어 ‘아버지’를 아우른다. 시인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서 단계적으로 천착한다. 첫째, 관찰이다. 시의 화자 ‘나’는 자신의 ‘손’이나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바라본다. 둘째, 발견이다. ‘나’의 손이 아닌 ‘아버지’의 손과 ‘어머니’의 손이 있음을, ‘나’의 얼굴이 아닌 ‘아버지’의 얼굴과 ‘어머니’의 얼굴이 그곳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셋째, 통찰이다. ‘나’는 ‘부모’와 ‘자식’이 불가분리적不可分離的 관계에 놓여 있음을 수용한다.
시인이 ‘관찰’과 ‘발견’과 ‘통찰’의 단계를 거치면서 도달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독자의 마음을 고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때로 부모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끝내 도망칠 수 없다는 ‘나’의 자각은 ‘느낌표(!)’에 가득하다. 나태주 시인의 심오한 자각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에는 ‘아아’라는 감탄사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3.
지금껏 우리는 나태주 시인의 서른일곱 번째 시집『꽃 장엄』을 네 가지 관점에서 고찰했다. 첫째, 시「아제아제」와「화엄」과「피안」에 드러나는 ‘불교’ 또는 ‘부처’와의 관련성이다. 나태주의 시는 단순하지 않고 다양한 생각을 유도하는 특성이 있었다. 시인이 추구하는 ‘같이’의 시학 또는 ‘가치’의 시학은 삶과 시를 함께 아우른다. 나태주의 작품이 우리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올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수행의 의미를 불교적인 범주 내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본질적인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태주가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불교적인 탐색은 추후 만해 한용운과의 계보학적인 관련성 점검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시「그래서 왔다」,「어린 낙타․1」,「사막․3」에 제시되는 ‘사막’ 또는 ‘낙타’와의 관련성이다. 나태주는 인간이 지구가 되고 더 나아가 우주와 합일하게 된다는 충일감의 정서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낙타가 물을 찾아서 사막의 길을 걸어가듯이, 인간은 사랑을 찾아서 세상의 길로 나아간다. 시인은 목마름과 팍팍함을 견디면서 전진하는 사막의 낙타에게서 필멸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숙명을 보았고, 이는 황혼기에 접어든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미당 서정주의 시「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에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괜찬타……’ 또는 ‘괜, 찬,타,……’를 연상시키는 나태주의 ‘그럼’은 ‘사막’이라는 공간에서 궁극의 상태인 죽음에 놓인 모든 인간의 얼굴을 애도하고 위무하는 사랑의 읊조림이 된다.
셋째, 시「문학 강연」,「연어」에 드러나는 ‘문학’이나 ‘시’와의 연관성이다. 나태주가 취한 ‘걸음’은 ‘아장걸음’이고, 그는 ‘중학생처럼’, ‘초등학생처럼’, ‘유치원생처럼’ 걷는다. 스스로를 차츰 낮추는 점강법에 기대어 그가 향하는 곳은 ‘세상’이다. 시인이 만나는 ‘꽃들’이나 ‘눈물들’은 ‘사람들’과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태주 시인이 진행하는 ‘문학 강연’은 ‘인생 강연’이 되고 ‘삶’ 강연이 된다. 형이상학적인 대상이라 생각했던 ‘나’의 사랑이나 시 역시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인식은 독자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 “나의 시가 맑고/향기로운 시라고 우기기는 어렵게 됐다”는 나태주의 성찰은 진정眞情으로 가득하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시인의 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넷째, 시「터미널․1」과「도망」에 제시되는 ‘어머니’나 ‘아버지’와의 연관성이다. 인간은 모두 한때 어머니와 동체同體였음을, 우리는 모두 한때 어머니와 한 몸이었음을 기억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나태주가 어머니께 선사하는 “세상에서/가장 크고도 아름다운 이름”은 결코 과장이 아니고, 허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 각자를 세상에 내보낸 이가 다름 아닌 어머니임을 각별히 기억해야만 한다. 시인이 ‘관찰’과 ‘발견’과 ‘통찰’의 단계를 거치면서 도달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독자의 마음을 고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때로 부모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끝내 도망칠 수 없다는 ‘나’의 자각은 ‘느낌표(!)’에 가득하다. 나태주 시인의 심오한 자각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에는 ‘아아’라는 감탄사가 뒤따를 수밖에 없겠다.
나태주에 따르면 시인은 “죽었지만 여전히/살아서 숨 쉬고 있는 사람”(「시인」)이다. 그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천국의 세상/내 앞에서 웃고 있는 네가/천국의 사람이고/너의 목소리가 천국의 음성/천국의 음악”(「천국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시인에 의하면 지금 자신 “앞에 앉아 웃으며 밥을 먹어주는 한 사람”(「아침 식탁」)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나태주 시인은 우리에게 스스로에게 주어진 삶을 소중하게 여기되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리하여 그가 어머니에게서 얻은, ‘행복’을 향한 다음과 같은 금언金言을 되새기는 일이 전연 무용한 일만은 아닐 것으로 믿는다.
당신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애당초 그것은 당신 안에 있었고
당신의 집에 있었고 당신의 가족, 당신의 직장 속에 있었다
이제부터 당신은 그것을 찾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 「어머니 말씀의 본을 받아」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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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휘어진 아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댄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시,「기쁨」 중에서)
줄곧 허공을 바라보던 시의 눈을 낮춰 지상으로 향하고 있는 나태주 시인의 새 시집 『꽃 장엄』에는 ‘사막’과 ‘낙타’라는 시어가 자주 눈에 띈다. 시인이 사막 여행을 다녀온 뒤에 얻은 시상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여기서 ‘사막’은 삭막한 문명시대를, ‘낙타’는 불모의 현실을 살아내는 시적 자아의 표상이자, 현대인의 고독한 초상을 의미한다.
“고통의 시간 고행의 연속”인 인생살이를 선생은 ‘사막’을 걷다 한 줌 모래로 사라지는 ‘낙타’의 존재로써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서쪽으로 사라지는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른 시인이 인생을 압축적으로 조감하고 있는 시편들을 통해 독자들은 새삼 건조한 우리들 나날의 일상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시(꽃송이)를 통해 세상을 열고 우주의 비밀을 캐는 경지(장엄)에 이른 시인의 시안詩眼에 축복을 보낸다.
― 이재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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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 1945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시인이 되었으며
∙ 제1시집『대숲 아래서』에서부터『꽃 장엄』까지 37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 산문집과 동화집도 여러 권 냈으며 시화집, 선시집도 여러 권 낸 바 있다.
∙ 43년 동안의 교직에서 정년퇴임하여 현재는 공주문화원장의 일도 잠시 맡고 있다.
∙ 주소는 (32602) 충남 공주시 수원지길 17, 3-903 (금학동)이며
∙ 이메일은 tj4503@naver.com이다.
∙ 공주에는 또 그가 관여하는 공주풀꽃문학관(전화 041-881-2708)이 있어 그리로 연락하여 약속하면 그를 만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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