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안동에서 총회를 마치고
첫째 날
지난 09. 6. 12일(금) 오전 11시
부산거주 고향 죽마고우들과 부산을 출발,
안동고등학교 9회(60년도 졸업)
전국 총 동기회 총회를 개최하는 안동을 향해
학창시절 한 땀 한 땀 엮었던 추억을 확인하려
설렘과 기대를 가슴에 품고 여정에 올랐다.
교정을 떠난 지 어언 49년, 풍진 세속에 묻혀
서울, 대구, 부산 등 전국 대처에서
각자 삶의 애환을 가꾸어온 벗님들과
이제 한자리에 모여 추억의 책장을 넘기려 한다.
오후 3. 30분경 총회 개최장소인
한국국학진흥원 국학문화회관에 도착
3년째 총회주최를 맡은 부산팀인지라,
고향을 지키는 안동팀에서 예약한
1실에 방 2, 거실을 갖춘
콘도형 24평 현대식 숙소 8곳을
일일이 점검하고 체크인한 후
손님맞이 행사장 정리 완료, 5시가 훌쩍 넘었다.
안동역에서 서울, 대구, 마산, 포항 등
대처의 벗들을 맞이한 안동팀이 도착
행사장은 벌집 쑤신 듯 박장대소로 가득하다.
6시 30분 총회의 막이 오르고
차기 FY 2009- 2011 2년간
9회 총 동기회 업무를 안동지역구에서 인수
회장에 최준걸 회원
총무에 권영건 회원을 만장일치로 선출하고
감사에 김영식 정용장 회원을 선출하고 나서
7시 30분에 09. 정기총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 3년간 열과 성을 다하여
안고 9회 총동기회 회장직을 맡아
활성화에 지대한 공덕을 쌓은 임봉규 회장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영원히 고향 안동을 지키며
전임 회장단보다 더 많은 공덕을 쌓을
신임 회장단의 열정과 당찬 마음을 읽으며
감사와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지하 뷔페식당에서 석식夕食을 마친 후,
전 마산 MBC방송국 아나운서 실장이었던
오창해 학우의 능숙한 진행으로
레크레이션 홀에서 여흥을 즐기면서
젊은이 못지않은 노래 실력을 과시하며
푸짐한 경품행사를 마름 하니 밤 10시 30분
각자 지역별 숙소에 입실
내일의 여정을 위해 취침,
친구 좋아하는 나, 첫날밤을
잠자는 시간이 아쉬워 안동팀 방에서
추억을 안주 삼아 맥주로 온밤을 새웠다.
오늘은 내일을 맞이하는 과정일 뿐,
오늘이 없는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ㅋㅋ
참고
국학문화회관 / 한국국학진흥원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동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20여㎞ 지점,
퇴계가 만년에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을 방문하는
방문자들의 숙소용 건물이다.
연구목적으로 국학진흥원 체류를
희망하는 외부 연구자들과
국학진흥원 교육연수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교육생 및 전통문화 체험객들에게
숙박의 편의를 제공할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안동호의 전경과
자연으로 둘러싸인 쾌적한 분위기,
내집같은 편안함, 세련된 분위기 등
고객의 취향에 따라 객실을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종류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
일반인들도 이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전예약은 필수,
성수기 휴가철에는
연수단체나 기업체교육과
중복되지 않도록 확인하는 것이 좋다.
총 수용규모는 300명이며
특 양실과 한실 1박 22만원,
더블룸 트윈룸 한실 9만원,
32평 콘도형 19만원,
24평 콘도형은 14만원 선이며,
2인실과 5인실, 10인실 등
다양한 규격의 객실이 구비돼 있다.
시설 또한 웬만한 호델급 이상 이다.
최준걸 회장의 알뜰한 섭외로
24평형 1실당 14만원인 콘도를
95,000원에 계약, 총회 살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식당은 자연의 깔끔한 재료와
정갈하고 깔끔한 음식은
조식 6,000, 중석식 7,000원 정도라
저렴한 가격으로 행사나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우리 일행이 선택한 부페 식사는
1인당 25,000원이며 기대에 조금 미치지 못했다.
또 커피숍, 최신음향시설을 갖춘
레크레이션홀이 준비돼 있으며
축구장, 배구장, 야외공연장, 삼림욕장, 산책로 등
부설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여기에 야외 캠프화이어장이 따로 설치돼 있어
주변에 둘러서서 함께 즐길수 있는 공간이 충분해
바베큐파티를 함께하기엔 더 없는 공간으로
운치가 극치를 이룬다.
비용은
화목(火木)+경유 포함하여 20만원이며
야간 레크레이션을 즐길 수 있도록
투광기시설을 갖추고 있다.
2분거리(도보10분)에는
안동호 수상레저 시설이 있어
숙박장소로는 최적격인 셈이다.
국제수준의 학술대회 등
대규모 행사가 가능한 회의장 및
행사의 성격과 규모에 맞게
다양한 크기가 준비돼 있다.
500석 규모의 대강당은 5개국 동시 변역시설,
350석 대규모시청각실과 150석 중규모시청각실,
80석 회의실, 60석 강의실,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장을 갖추고 있다.
교육연수 시설로는 450명 수용,
호텔급 숙박시설에 500, 300, 150석 1실과
120, 80석 2실, 60석 3실을 갖추고 있다.
국학문화회관은
기업체 임직원 및 공기업, 지자체 공무원의
직무능력 향상과 의식변화를 토대로
구성원의 역량개발을 통한 조직의 생산성 향상 및
시너지 창출을 가져가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또 40여종의 전통문화강의와
청소년 생활예절, 택견,
우리가락 우리노래배우기 등
30여가지의 전통문화체험 등
대학교수, 연구진, 향토문화연구가 등
전문 강사진을 초빙, 운영하고 있다. / 국학문화회관 자료에서 발췌
이육사 문학관
광야 - 이육사(李陸史)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광야>는
<청포도>와 더불어 미래의 새로운 세계,
조국의 광복을 희구하는 심정을 암시한 수작(秀作)이다.
저항시로서 그의 시는 무엇보다도
투철한 현실 인식과 강한 신념에서 비롯된다. 즉,
시간적으로는 아득한 천고와 미래의 사이,
공간적으로는 만물이 눈에 덮인 광야에 홀로 서 있는 극한 상황에서,
그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장엄한 미래에 대한 기대뿐이다.
이러한 극명한 현실인식과
조국 역사의 미래에 대한 신념이 있었기에
자기희생이 가능하였고,
저항적·지시적 결의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광야'에 드러난 강렬하고도 남성적인 시어들은
바로 이러한 주제 의식을
형상화하기 위한 시인의 의도를 담고 있다.
따라서 서정적 자아가 처해 있는 정황은
대체로 한발 디딜 곳조차 없는
절박한 한계상황으로 설정되어 있다.
시인은 이러한 극한적인 상황을
정신적으로 초극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획득한다. / 이육사 문학관 자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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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 09. 6. 13일(토) 오전 7시
友情을 맥주에 타서 새벽까지 마시고
약 2시간 토끼잠을 잔 다음 날,
김휘동 안동시장님(12회)이 숙소를 방문
한식 조반을 함께 들고 이육사 문학관으로 출발했다.
간 조직이 선친의 내력을 이어받아
술을 거부하는 체질이라 취기에 쩔고,
잠마저 태부족한 비몽사몽 중에도
민족시인, 저항시인인 이육사 시인의
문학 향기를 찾는 걸음이 즐겁고 행복해
피로도 잊은 채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신세훈 한국문인협회 직전 이사장과
이두용 시인 겸 극작가(별세)와 함께
1957년도 안동고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전국문단에서 문명을 떨쳤던
안동의 자랑 문인 3총사인 외우 김용진 시인은
음주단절, 숙면을 취했는가
물 만난 고기처럼 생기가 넘쳐났다.ㅎㅎ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번지
이육사 문학관에 도착
경관을 둘러보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안온한 산세와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원천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아담하고 수려하게 축조한 2층 건물은
문향文香을 찾는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1층에는 선생의 흉상과 육필 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 모습과
베이징 감옥 생활 모습 등도 재현해 놓았다.
이육사 선생의 흉상 옆에 서서
어설픈 자세로 사진 한 컷 찰칵,
2층은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기획전시실, 영상실과 세미나실,
탁본체험코너, 시상 전망대 등이 갖춰져 있다.
가뭄 탓인가 강바닥은 넘쳐나야 할 강물 대신
수초가 무성하게 자란 론-그라운드 같았다.
영상실에 입실하니
우리 일행의 도착을 기다리던
이위발 사무국장(문명 : 문설재) 님이
반갑게 맞아 주시며
간단명료한 문학관 소개가 끝나자,
"광야에서 부르리라"
"행동하는 민족시인 이육사"라는
이육사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와
詩 세계를 조명한 영상물을 보여 주신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라는
글귀를 마지막으로 영상물 상영이 끝나자
감격의 물결이 장내에 가득 밀려오고
청호가 발의 선창, 감동의 박수가 울려 퍼졌다.^^
독립운동가 이육사(李陸史)
본명 이원록(李源祿)
일제에 의해 17번의 수감생활,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인
"장진홍 의거"에 연류 되어
처음으로 수감되었을 때,
대구감옥의 수인번호 二六四를 필명으로 사용
본명보다 "육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1943년 국내의 항일 조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국내에 무기반입을 시도했다가 검거되어
1944년 1월 16일 북경 일본영사관 감옥에 투옥,
생의 마지막 길인 순국의 운명을 맞았다.
슬하에는 고명딸 이옥비를 홀로 남겨두셨다. / 이육사 문학관 자료에서 발췌
육우당(六友堂)
육사의 6형제가 살던 집으로 생가의 모형이다.
이 집은 이육사가 수필에서 집을 회상하며
“은촉대도 있고, 훌륭한 현액도 있기는 하나,
너무도 고가(古家)라 빈대가 많기로 유명하다”고 표현했던 바로 그 집을 재현한 것이다.
영상물에 의한 감동의 물결이 멈추자
문학관 뒤편 육우당(六友堂)에 기거하시는
이육사 시인의 고명딸 이옥비 여사가
단아하고 고운 자태로 우리 일행을 반겨 주시며
자신은 이육사 선생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자리에 섰다는 겸손한 말과 함께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였다.
이육사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따님은 겨우 세 살 때여서 기억이 거의 없지만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와
주위 친지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옥비(沃非)란 이름은
"기름질 옥(沃)"에
"아닐 비(非)"라는 한자를 쓴다고 한다.
37세에 딸을 낳으신 이육사 선생은
백일 되던 날 딸의 이름만은 아버지가
직접 지어주셔야겠다고
생각해서
"욕심이 없어라."라는 뜻으로 지었으며
아버지가 딸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선물이라고 한다.
"간디처럼 욕심 없이 살아라."라는 뜻인데
아직 그 이름을 따라가려면 멀었다고 하시면서
수줍게 웃으시는 단아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이옥비 여사의 인사말이 끝나자
청호가 우리 일행을 위해
"아버님의 詩 중에서 교과서에 실린 "청포도" 시를
따님께서 직접 시낭송을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니
지금껏 아버님의 시낭송을 처음 부탁받았다며
수줍은 모습으로 기꺼이 한 소절을 낭송해 주셨다.ㅎㅎ
기념촬영을 한 후, 아쉬움을 남겨두고
다음 목적지인 농암종택을 향해 출발,
참고
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음 4.4)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 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허형(許
)의 딸인 허길(許吉)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이 원삼(源三),
자는 태경(台卿)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264 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 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절정(絶頂)><광야(曠野)>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안동시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고,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이육사 문학관은
안동시가 육사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육사문학관 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4년 7월에 건립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과 관련,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 2,300평의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선생의 흉상과 육필 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 생활 모습 등도 재현해 놓았으며,
2층은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원천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기획전시실, 영상실과 세미나실,
탁본체험코너, 시상 전망대 등이 갖춰져 있다.
지금까지 안동시에서 관리를 해오다
2008년 12월 1일부터
사)이육사추모사업회로 위탁되어 운영을 하게 되었다.
사) 이육사추모사업회는
선생의 나라사랑과 사상을 기리는 지역 내 순수민간단체로
대표에 최유근 전 이육사연구회 회장,
초대 이육사관장으로 조영일 한국문협 이사가 내정되었다.
이육사문학관이 전문문학인들이
운영주체가 되어 이루어짐으로써
문학관 본연의 기능을 되찾아
많은 문학인들이 즐겨찾는 문학관으로 거듭나며,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청량산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하여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해본다.
또한 육사선생의 따님인
옥비 여사가 육우당(六友堂)에기거하면서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안동문화원 문예창작반 회원들이
이육사 문학관 해설사로 봉사를 하고 있다. / 이육사 문학관 자료에서 발췌
우리 일행은 다음 답사지인 농암 종택에 도착했다.
농암 종택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
자(字)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도산서원 근처
청량산자락에 있는 농암 종택에 도착,
농암 종택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우리 일행 중 초행인 친구들은 모두
와! 하는 탄성과 감탄사를 주저하지 않는다.
종택의 지형이 크기도 크기지만
경관이 너무나 빼어나고 아름다워
감히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진정, 배산임수가 수려한 명당자리다.
좌청룡 우백호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명택,
좌측으로 단애(斷崖)가 병풍을 두른 듯
협곡을 끼고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 따라
강변은 은빛 모래사장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농암 종택은 낙동강 상류 청량산 자락,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송리'는 그 이름처럼
"佳松"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로
산촌과 강촌의 정경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이다.
도산서원, 국학진흥원, 오천유적지,
퇴계종택, 도산온천, 이육사생가 등의 유적이 이웃에 있다.
신비의 명산 청량산과 더불어
가송리의 협곡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은
낙동강 1400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강과 단애, 그리고
은빛 모래사장의 강변이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있어,
이른바 "도산 9곡"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으며
안동문화의 절정의 한 장소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연유가 아니더라도 가송리는
"공민왕유적", "고산정", "월명담", "벽력암", "학소대" 등의
명소를 감싸안고 있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찾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낼 것이다.
이런 환경에 자리한
600여년 전통의 농암종택과 유적들은
농암선생의 '강호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공동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농암 선생의 주손이 유적들을 개방하였다.
"江湖之樂(강호지락)"과
"江湖之美(강호지미)"를 추구한
농암선생의 생애와 문학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사색의 강을 제공하고 있다. / 농암종택 자료에서 발췌
가족단위나
소규모 단체가 현장체험 때 반드시 예약하고
숙식제공(민박)은 물론
자체 음식조리 및 고기 등을 구워먹을 수 있단다.
요산요수(樂山樂水)의 무릉도원을 거닐며
자연을 사랑했던 선인들의 심미안에
감탄과 감동을 가슴에 안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마지막 답사를 위해 지난밤 행사장인
국학문화회관 초입지에 축조 건립한
한국국학진흥원을 향해 출발,
한국국학진흥원에 도착
계단을 오르는 걸음, 걸음이
한국 제일의 문과 예의 고장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며
유교문화의 산실인 안동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절감하는 소중한 답사였다.
수려한 경관과 산세,
거대한 단지, 초현대식 건축물에
고이 간직한 보고를 눈맞춤 하는 설렘으로
이번 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안동 특유의 억양으로
전시유물을 설명하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선인들의 영혼을 일깨우듯 힘차다.
순간! 청호가 심혈을 기울여
모 문인카페 漢詩 房에
선인들의 한시를 발췌, 편집하여
연작 시리즈로 올리고 있는데, 여기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의 소장품인
"경의검(敬義劒)" 이 동공을 파고든다.
지리산 자락 산청군 시천면 덕산
남명 기념관에 성성자와 함께 있어야 할 경의검이
이곳 전시관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니..
전후 사정이야 어떠하든 내 고향에서 자리 틀고
우리와 눈맞춤 할 수 있음이 너무나 반갑고 감사하다.
남명의 사상과 삶은
남명 박물관 성성자(惺惺子) 곁에 보존돼 있는
경의검(敬義劍)이 단적으로 드러낸다.
명 칭 : 경의검 敬義劍
관련인물 : 조식
재 질 : 금속/철제
용도/기능 : 종교신앙/유교
기탁자 : 복원
수 량 : 1
경의검(敬義劍)은 남명 조식이
성성자와 함께 차고 다니던 조그만 칼이다.
손잡이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內明者敬(내명자경)
外斷者義(외단자의)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義)다'
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게 곧
경의(경의)며 이게 남명의 사상이자 삶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뿐더러
사회모순은 대놓고 비판한다.
숨어서 뒤에서 쉬쉬하는 게 아니라
면전이나 공개 석상에서 따진다.
그리고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그가 올리는 상소는
임금이 가장 꺼리는 상소이면서
가장 오래 들여다보는 상소가 된다.
쇠로 만든
호두알 크기 방울 하나에 '뇌(雷)' 한 글자,
다른 하나에는 '천(天)' 한 글자를 각각 새겨 넣은
두 개의 쇠방울 이름이 성성자(惺惺子)
경의검과 성성자를
허리띠에차고 다니면서
유혹에 흔들리지 말라고,
이 정도면 됐다며 자만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인 조선의 쇳소리다.
남명학과 퇴계학!
자신의 호에 학(學)이 붙은 두 사람.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남명과 퇴계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종종 비교된다.
경상좌도에 퇴계가 있고
경상우도에 남명이 있다는
유림세계의 비유는
두 사람 모두 거두란 뜻도 담고 있지만
인생 역정이 전혀 다르다는 평가도 담고 있다.
같은 거두라도 사상과 삶은 전혀 다르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태어나 칠십 이쪽저쪽
엇비슷한 나이에 세상을 떠난 두 사람.
두 사람의 전혀 다른 사상과 삶이
수레의 이쪽저쪽 바퀴가 되어
한 시대를 이끌고 간 것.
그게 조선의 힘이고 조선의 깊이다.
여기서 남명 조식의 漢詩 한편을 올린니다.
浴川 (욕천) / 냇물에 목욕하며
南冥 曺植 (조식)
全身四十年前累 사십 년 동안 더럽혀져 온 허물은
(전 신 사 십 년 전 루)
千斛淸淵洗盡休 천 섬 되는 맑은 못에 모두 씻어 보낸다.
(천 곡 청 연 세 진 휴)
塵土倘能生五內 티끌이 만약 오장에서 생겨 있다면
(진 토 당 능 생 오 내)
直今刳腹付歸流 지금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저 물에 띄워 보내리.
(직 금 고 복 부 귀 류)
요점 정리
작자 : 南冥 曺植(남명 조식)
연대 : 조선 중기
형식 : 한시, 칠언절구
주제 : 인욕(人慾)을 끊어내고자 하는 남명의 결단을 읊은 詩
출처 : 南冥集
이해와 감상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정사(正士)로서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지킴은
함양공부(涵養工夫)의 첫째가는 과업이다.
인욕(人慾)을 끊어내고자 하는
남명의 결단이 도저하게 흐르는 이 시문은
남명사상을 구체적으로 표출한
신명사명(神明舍銘)과
신명사도(神明舍圖)에서 살필 수 있다.
내적 수양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철두철미한
한사(寒士)의 처절한 의표(儀表)가 하늘을 찌른다.
냇물의 흐름은
인욕의 일렁임으로 유추되어 나타나고
동시에 허물을 흘려보내는
통로로서의 의미로 중첩되어 있다.
줄기차게 본성을 지향하며
천리(天理)를 해치는 사특한
한 점의 티끌이라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남명의 삼엄한 결의가 드러나 있다.
변설(辯說)
이 칠언절구 한시는
1549년 8월 거창의 감악산을 오를 때 지은시다.
땀에 절은 몸을 씻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다.
이제부터 나는 어제의 나와 결별하겠다.
지난 세월동안의 이런 저런 허물과 잘못과
나태와 잡된 생각들을 이 맑은 물에 깨끗이 씻어내
다시 더러운 생각들이 생겨난다면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흔적없이 휑구겠다.
敬(경)과 義(의)를
삶의 지표로 삼으셨던 남명의
지조높은 선비의 丹心(단심)이다.
한자루 칼,
敬義劍(경의검)을 차고 다니시며
불의를 과감히 절단 내시었고,
心經(심경)의 구절을 劍銘(검명)에 새기시길
敬以直內(경이직내) : 경으로 안을 곧게 하며
義以方外(의이방외) : 의로서 삿됨을 꺽는다.
선생은 퇴계와 동년생이며
낙동강을 경계로하여
左道(좌도)와
右道(우도)로 나누는 바,
경상좌도 문화의 중심지는 安東(안동)이고
경상우도 문화의 중심지는 晋州(진주)였다.
선생은 경상우도 학문의 太古峰(태고봉)이 었다.
星湖 李瀷(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이르기를
경상좌도는 仁(인)을 주로하고
경상우도는 義(의)를 주로한다 하였는 바,
남명과 퇴계의 학문적 기질이
지역 사람들의 체질. 의식구조.
자연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의 문하생들 중엔
萊庵(래암) 정인홍.
忘憂堂(망우당) 곽제우 등등 열혈들이 많다.
심화 자료
조식(曺植)1501(연산군 7) ~ 1572(선조 5).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리학의 실천적 의미를 중시한 그는
엄격한 자기 절제와
현실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 등을 통해
현실에서도
경(敬)과 의(義)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은
제자들에게도 계승되어
임진왜란 당시 제자들의
적극적인 의병활동으로 나타났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 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 지역
오늘날의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다.
유명한 글로는
'단성소'라고 불리는 '을묘사직소'가 있다.
선조 때 대사간,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 청호 정용장(섬바우)의 漢詩 房에서
한국국학진흥원 관람을 끝으로
09. 정기총회 겸 역사유적지 답사 등,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시간
안동팀의 안내로 민물고기 전문식당에서
맛깔스런 자연산 메기탕과 피라미 조림으로
속풀이 해장 겸 점심을 먹으면서
짧은 일정,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서울서 천릿길 한달음에 달려온 친구들,
대구에서 기쁜 마음으로 참석한 친구들,
그리고 총회행사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열과 성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음은 물론,
이렇듯 훌륭하고 유서 깊은 장소를 물색하여
고향의 소중한 모습을 아름다운 추억의 책장 속에
고이 간직할 수 있게 세심한 배려를 하여 주신
안동지구 최준걸 회장님과 집행부 여러 벗님께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추로지향 鄒魯之鄕
동방의 아늑한 고을 "안어대동 安於大東"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서 태어나서
마뜰 교정에서 고운 인연으로 만나
50여 성상 진솔한 우정을 지켜온 우리..
이제 1박 2일의 고향길 여정 속에
건강의 소중함과 인연의 의미를 곰삭히며
대처의 둥지로 돌아가는 발길이 아쉬운 만큼
우정을 듬뿍 삼킨 나른한 포만감에 잠겨 든다. / 이상
청호 정용장 / 섬바우 拙書
追而
**한국국학진흥원 소개**
우수 한국전통문화 세계화 ‘앞장’
유교문화권 지적활동 최종 결집체
한국정신문화수도 안동을 확실히 알려면
‘한국국학진흥원’을 관람하라.
한국국학진흥원은 한국학 자료의 수집ㆍ
보존과 연구 및 보급을
통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이다.
특히 민간에 흩어져 있는 멸실 위기에 직면한
유교관련 기록문화재들을 기탁받아
안전하고 과학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설립한
국내 유일의 유교문화 박물관에는
각종 문화유산들이 가득 차 있어
민족문화의 산실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하회마을과 봉정사 등만 관람하고 떠나기에
안타깝기 그지없어 한국국학진흥원을 소개한다.
국학진흥원은
안동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20여㎞ 지점,
퇴계가 만년에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안동은
세계적으로 유교문화의 흔적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전국 전체 서원 수의 약 32%가 안동에 있다.
특히 종가 하나 끼고 돌아가지 않는 골이 없고
서원 하나 안고 흐르지 않는 내가 없을 정도로
종가나 재사 등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때문에 국학진흥원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
5년여만에 20만여 점에 이르는 한국학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시설안내 :
국학진흥원은 모두 6개의 건물로 구성돼 있으며,
홍익의 집, 유교문화 박물관, 장판각, 국학문화 회관 등
중심기능에 따라 크게 4개의 건물군으로 나뉜다.
▶홍익의 집 :
본관 건물로서 2개동으로 구성돼 있다.
앞동은 지하 1층에 지상3층 규모이고
뒷동은 지하 1층에 지상 4층의 규모이며,
연면적은 1만2,812㎡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살려
지붕을 한옥지붕으로 마감하고 동기와를 올렸으며,
주위를 회랑으로 휘둘려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룬다.
주로 연구실과 행정실로 쓰이며,
자료정리실과 도서관 그리고
500여명 수용 규모의 대회의실과
각종 세미나실 등 연구에 필요한 관련 공간들이 배치돼 있다.
▶유교문화 박물관 :
유교문화를 주제로 한 박물관으로
면적 4,414㎡의 4층 건물이다.
1층은 국학진흥원이 수집하는 각종 기록문화재를
정리·분류·보존할 수 있는 수장고를 갖추고 있다.
수장고는 기록문화재의 특성을 감안해
종이로 된 자료의 변질과 훼손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각종 보존 장비를 갖춘 최첨단의 시설로 설계돼 있다.
2층에서 4층은 전시실로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시로 크게 나뉜다.
한국국학진흥원의 부속기관인 유교문화박물관은
한국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국내외에 알리는 것은 물론
국학자료의 기탁을 활성화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된
국내 유일의 ‘유교’ 전문박물관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이 개별 문중이나 서원 등
민간으로부터 기탁받아 소장하고 있는 국학자료들 가운데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들을 엄선하여 전시하고 있다.
우리 전통문화의 중심인
유교문화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과 풍부한 볼거리를 발굴· 전시해
민족문화의 산실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관람료는 어른 1500원,
어린이 700원,
청소년과 군경은 1000원으로
아주 저렴하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이다.
꼭 한번 관람하기를 바라며
진짜 유악한 볼거리가 많은 공간이다.
▶장판각 :
국학진흥원이 역점을 두고 수집하고 있는
목판(책판)을 전문적으로 보관하는 시설이다.
연면적 1,402㎡로서,
지상 2층 건물 2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학진흥원은 ‘목판10만장 수집운동’으로
전국에서 수집된 목판을 보관하는
목판 전용 수장시설이며
총 10만장의 목판을 수장할 수 있는 규모이다.
국학진흥원은 목판위탁관리 제도로
기탁 의사를 밝힌 문중에 대해서는
인수전용 차량을 동원해
안전하게 국학자료를 인수하고,
기탁자에게는 국학자료보관증서 및
보관자료 목록을 교부해 준다.
여기에 소유권은
원소장자에세 그대로 인정해 주고
보관과 관리만 무료로 대행해 주는
가장 합리적인 자료관리 방식이다.
목판은 지식을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에서
지적활동의 최종적 결집체이면서 확산을 위한
매개체의 역할을 했던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민간에서 제작된 목판은
한국의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방치돼 오고 있어 이를 수집,
관리하기 위해 국내에서 유일하게
민간 소장 유교목판을 수집하고 있다.
기탁된 자료는 학술적 기준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정리하고 과학적으로 보존한다.
유·무인 방범시스템을 비롯해 온·습도에 따라
자동으로 개폐되는 전동식 장치는 물론
항온· 항습장치와 화재에 대비,
최신 방화장치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때문에 목판을 보관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자료의 원형을 유지하고
추가적인 훼손을 방지한다.
장판각은 보관 상태가 열악한 환경 속에
흩어져 있는 민간 소장자료를 수탁해
학술적 기준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
정리하고 정기적인 훈증 소독을 실시한다.
또 한국 목판인쇄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과 더불어,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유교박물관
한국국학진흥원이 개별 문중이나 서원으로부터 기탁받아 소장하고 있는 유교 관련 국학자료들 가운데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들을 엄선하여 전시함으로써 우리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널리 알리고, 또 이를 토대로 아직도 열악한 조건 아래 민간에 흩어져 있는 국학자료의 기탁을 유도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되었습니다.
상설전시실 안내
제1전시실: 유교와의 만남
유교문화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공간. 유교문화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동아시아 유교 연표와 한·중·일의 유교이야기 그리고 한국 유학의 흐름과 그 학맥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코너
제2전시실: 유교와 수양 ― 사람되기
유교적 실천론의 출발점인 공부론(工夫論)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공간. 맹자의 성선론을 영상으로 설명해주는 코너를 비롯하여 가상 마을 모형을 통해 오륜을 재미있게 소개해주는 ‘오륜마을’ 그리고 ‘활인심방(活人心方) 따라하기’ 등으로 구성
제3전시실: 유교와 가족 ― 사람노릇하기
유교적 공동체의 실질적인 토대가 되는 전통 가족문화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공간. 가족의 형성과 유지 및 분화와 관련된 유물들과 유교의 대표적인 통과의례인 관·혼·상·제와 안방과 사랑방 문화 등의 내용 전시
제4전시실: 유교와 사회 ― 사람대하기
유학자들의 사회활동을 소개하는 공간. 서당의 풍경을 한지공예 모형으로 맛깔스럽게 그려낸 서당 코너와 향약 그리고 서원과 과거 등 조선시대 지방에 거주하던 유학자들의 사회적 활동내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코너들로 구성.
제5전시실: 유교와 국가 ― 사람위하기
현실 정치에서 유교가 수행한 역할을 조명한 공간. 국가와 유교적 의례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는 코너와 조선시대 관료문화를 소개하는 코너 그리고 동궐도를 토대로 슬라이딩 비전을 통해 궁궐의 이모저모를 구경하는 궁궐 둘러보기 등의 코너
제6전시실: 유교와 미래사회 ― 더불어 살기
마무리 공간. 다양한 영상 및 사진 자료들을 보면서 유교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의 가능성을 성찰해 보는 코너
특별전시실(1): 재지사림과 유교문화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재지사림(在地士林: 지역에 생활의 근거를 둔 유학자들)의 활동무대를 가상 마을 모형을 통하여 한 눈에 보여주는 전시공간
특별전시실(2): 유교와 과학
유교의 실용적 측면을 소개하려는 목적에서 천문과 지리를 중심으로 유교과학의 정수를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진 공간
특별전시실(3): 유교기록문화관
고문서와 고서, 목판을 중심으로 국학원이 집중적으로 수집보존하고 있는 유교관련 민간 소장 전통기록문화재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공간 / 한국국학진흥원 자료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