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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공관복음 강론16
주제 13. 산상수훈(6) : 주기도문 강해(2) (마 6:9-13)
5. 임하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나라가 실제로 임하는 것은 성령 강림 이후이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나 종말 이후에 도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보는 것이 전통적인 내세 구원 신앙이다. 이 땅에 세워지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기에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이 시기 질투가 많고 교회 안에서 당짓기와 서로 미워하고 헐 뜯고 하니,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를 수는 없고 이론상으로는 하나님이 세우셨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이론은 그렇게 만들어 놨는데 실체는 도무지 뭐 이론을 적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만들어낸 논리가 가시교회, 불가시 교회론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도저히 부를 수 없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겠다고 감옥으로 추방한 자들에게 오셔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이제부터 내가 추방된 너희들 중에서 내 후손들로 구성된 내 백성 공동체를 세우겠다라고 약속하신 것이 아브라함 언약이다. 이 땅에서 아브라함이 죽은 다음에 네 후손들을 가지고 내 백성 공동체를 세우겠다라고 말씀을 하셨고 옛 언약을 주셨다. 그 옛 언약은 우물 속을 비추는 엑스레이와 같아서 인간은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율법은 모두를 죄 아래 가둔다고 표현한 것이다. 모세 율법이 오고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레미야 언약을 주셨다. 너희 마음 안에 내 법을 아예 심어버리겠다고 새로운 창조에 대한 예언을 선지자를 통해서 하게 하시고, 그 예언을 실제로 성취시키려고 메시아가 오셨고, 메시아께서 그 하나님의 모든 경륜과 섭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이제 내가 승천한 후에 성령이 오시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신 후에 사도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사도 공동체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 세대 만에 끝나버렸고 유대교와 다를 바 없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생겨서 2000년이 흘러왔고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오실 성령의 역사에 실제 실현을 맡기시면서 예수님은 예언하고 선포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이어서 오시는 성령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이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이런 기도를 드려라” 하고 가르쳐 주실 때 그 기도하는 포지션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간구하라는 것이다.
<호크마 주석>
임하옵시며 - 사람들이 하나님께 머리 숙여 복종하고 또 구원의 종말론적 축복을 미리 누림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계속 확장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며, 그 나라가 완성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계 11:17;22:20). 한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를 기다렸으며, 메시야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었다. 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 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다(Jeremias, Prayers, p.98).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에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나라가 시작되어 그 나라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호크마 주석에서 제시하는 성서 요절
(계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클레로스 추가 요절 (행 1: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에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도 포함해서 모든 유대인들은 다윗 왕국의 재건이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은 지금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들의 시대가 끝나고 영광스러운 다윗 왕국이 다시 세워진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신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사도 공동체의 증언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 클레로스 추가 요절 (빌 3:20) 그러나 우리의 공동체는 하늘(우물 밖)에 있으며 우리는 거기서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니,
그러나 우리의 공동체는 하늘에 있으며, 즉 우물 밖에 있으며 우물 밖에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약속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즉 지금 우리는 우물 밖에 나왔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우물 속에 세워지는 게 아니라 우물 밖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우물 안의 스토이케이온에 의해서 돌아가는 게 아니고 우물 밖의 스토이케이온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 됨이다.
* 클레로스 추가 요절 (골 1: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고
사도 공동체는 "나라가 임하시오며" 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그 기도가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도들의 증언이 현실에 대한 증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땅에서 시작된 과도기의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 이후에 완전해지는 것이다. 하나 됨이 시작되었고, 얼마나 성숙해졌는가는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그것을 사도들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을 가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싸르크스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이 땅에서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발 한 발 함께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는 하나 됨이 시작되기 전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간구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6.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섯 번째 주제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천체 운행의 완벽한 질서를 의미한다. 계절의 변화까지 다 포함해서 이 우주의 질서는 완벽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조화롭지가 않다. 각자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으니까, 그리고 근원적으로는 각자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자들이 현재 오늘날에는 80억 개가 모여 있으니까 난장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주의 주인공인데 발등에서 불이 타고 있는 비참한 존재인 것이다. 이 사람과는 죽이 잘 맞았는데 내일은 그 사람과 원수가 돼 있고, 시기 질투 대상이 지금 다섯 명이었는데 그 다음 날은 6명으로 늘어나고, 철천지 원수가 3명이었는데 내일은 5명이 되고 이러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가 조화와 질서 속에 있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조화와 질서가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도 이것을 간구했다. 왜냐하면 사도 공동체 시대에도 이 부분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시키려고 하신다고 선포한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선포를 할 뿐이지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종말 때 예수님 재림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호크마 주석>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 '델레마'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26:42)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같은 대속적(代贖的) 죽음이 실현되어야 하고, 동시에 절대적 순종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한편 본문의 '하늘에서'란 하나님과 천사들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두 번째의 간구('나라이 임하시옵시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의(義)가 지금 현재 온전히 성취된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이와 상용되는 '땅에서'란 말은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대상(타락한 이 지상과 역사와 인격들 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뜻은 현재 '하늘'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거기에는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구현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메시야 왕국의 왕성을 뜻하는 기도라 할 수 있다.
<호크마 주석에 대한 우리의 견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교단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 언약이다. 아브라함 언약인 여호와의 길을 따라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는 하나 됨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처럼 우리가 하나가 된 것처럼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것이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종말이 올 때까지는 과도기가 시작된 것이다. 사도 공동체가 탄생하면서 과도기가 시작된 것이다. 완성은 종말 때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도 공동체도 이 부분은 계속 간구의 영역이다. 시작이 되었지만 과도기이기 때문에 간구의 영역인 것이다.
호크마 주석에서 제시하는 성서 요절
(롬 12:2) 그대들은 이 시대(아이온, 또는 이 세상)와 일치되지 마십시오 오직 그대들의 사고의 갱신에 의해 변화되어져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즉 선하고 받으실 만하고 완전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대들의 올바른 검증을 위해서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천국은 이 땅의 현세에서 세워지기 시작하는 과도기적인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종말에 임하게 되는 완전해진 하나님의 나라 둘 다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은 종말 이후에 천국을 가리킬 때도 있고, 이 땅에 세워지는 과도기의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할 때도 있다.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 이니라 하시더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는 완전히 메시아 시대에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전에는 이스라엘의 아브라함의 혈육적인 후손들이었는데 아브라함의 혈육적인 후손들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이었다. 그리고 메시아 강림 이후에 성령 강림과 이어지면서 새로운 백성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 공동체이다. 그래서 사도 공동체는 유대인 출신과 이방인 출신들이 다 섞여 있는 것이다. 유대인 출신이냐 이방인 출신이냐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시대는 끝났기 때문이다.
(마 18: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성서 66권에 굳건하게 박혀 있는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백성 공동체의 형성이다. 그것이 아브라함 언약이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밝히신 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이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처럼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게 하옵소서. 그것이 아브라함 언약이며 핵심은 하나 됨이다. 그런데 이 호크마 주석의 인용문에는 하나 됨이 없다. 왜 그럴까? 2000년 기독교의 다양한 교단의 이런저런 신학과 교리들은 하나 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물 안과 우물 밖이라는 개념,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제자 공동체, 우리의 공동체는 하늘에 있다는 사도 바울의 증언과 연결돼서 완전히 통합된 설명은 클레로스 신학 외에는 없다. 공통적으로 개인 영성과 개인 구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공통적인 한계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된 클래로스가 형성되고 성장되고 확산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언약의 실체이다.
사도 공동체 한 세대에 반짝하고 보였던 그 빛이 이제 거대하게 온 세상에 작은 빛들이 무수히 모여서 온 세상을 비추는 그 시기가 도래했다고 우리가 느끼고 있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7. 오늘
<호크마 주석>
오늘날(세메론) -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기도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실제 필요한 내용들이 기도되고 있다. 그중 첫째가 '양식'(bread)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이란 '오늘' 또는 '지금'이란 뜻으로서, '매일 매일' 또는 '날마다'라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로 보건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구하는 것은 '그날' 하루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요구이지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은 겸손한 기도는 하루에 한 번씩 급료를 지급받아 생활했기 때문에 만일 며칠을 앓아눕기라도 하면 그만 굶을 수밖에 없는 1세기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여유있는 자들에게는 이 기도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지도 모톤다. 하지만 그날 벌어 그날 먹어야 하는(from hand to mouth) 자에게는 이 기도야말로 귀중하고 절박한 간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이를 '날마다(카타 헤메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본문의 오늘날이란 개념 속에는 '지금'이라는 뜻 외에 '바로 뒤따르는'(immediately following)라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종합적으로 이해하면 '앞으로 올 날을 위하여 우리의 양식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란 뜻이 된다.
* 클레로스 추가 요절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사람들이 받은 형벌 중의 하나가 궁핍의 형벌이다.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노동을 해야 간신히 먹고 사는 그런 형벌이다 보니까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과 공포는 항상 내일에 대한 공포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욕심도다 내일을 위한 욕심이다. 그것이 내일에 대한 공포와 딱 결합이 돼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공포의 비병을 지르는 것이다.
그런데 신인류가 탄생한다. 내일에 대한 공포가 없고 아예 내일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다. 내일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루가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일 일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8. 우리에게
(주석 없음)-
호크마 주석에는 '우리에게'에 대한 주석이 없다. 우리에게 라는 말의 중요성이 눈에 안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에게'를 전부 '나에게'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라는 이 중요한 그 기표가 주석이 없는 것이다.
* 클레로스 주석 : 나의 양식이 아닌 우리의 양식이므로 가장 중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임
* 클레로스 추가 요절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시작부터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를 하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님이지 특정인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에 안 들어오니까 내가 먹을 양식 이야기를 하시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만드시려고 죽으신 것인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이것을 빨리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9. 일용할
<호크마 주석>
일용할(에피우시온) - 이 단어 역시 그 의미가 좀 애매하며 또한 어원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이 단어는 흔히 '내일을 위한', '생존을 위한', '오늘 필요한', '매일 필요한' 등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제롬(Jerome)은 이를 라틴어 'Superstantialem'(물질을 초월하는', above material substance)으로 번역하여 그 양식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언어학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뒤이어지는 '앙식'은 실제의 음식물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인간이 물질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Luther). 한편 이 말은 전치사 '에피'(~에 대하여)와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동사 '에이미'의 변형으로 합성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또는 '매일의 생존에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호크마 주석에 대한 우리의 견해>
생존을 위한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한 양식이다.(고전 10:31)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복한 삶은 안에서는 하나가 되어 가는 행복이고, 밖에서는 평화를 전하는 행복이다. 안에서는 하나가 되어 가니까 행복하고 밖에서는 평화를 전하면서 사람들이 고통에서 조금씩 빠져나오는 걸 보니까 행복한 것이다. 따라서 사명 감당은 십자가를 지고 맨발로 그냥 자갈밭을 걸어 다니는 게 사명 감당이 아니고, 사명 감당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극한의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삶이고 그것이 구원된 삶이다. 안에서도 행복하고 밖에서도 행복한 그 삶을 위해서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싸르크스가 제일 심각하게 외치는 것이, 너는 죽으면 안 돼, 너는 살아야 돼, 이다. 그래서 이 말씀도 생존에 필요한 양식을 달라는 기도로 보이는 것이다.
10. 양식을 주시옵고
<호크마 주석>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 '양식'이란 모든 음식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용어이다(잠 30:8; 약 2:15). 그런데 초대 교부들은 이를 물질적인 의미의 음식이 아니라 성찬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를 이같이 비물질적 의미로 해석하는데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그 근거가 확보되지 못했으므로 적절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록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인간 생존(生存)에 가장 필요한 것들인 육(flesh)의 '양식'을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그 생존의 기본 원리와 생존의 근본 동인(動因)의 문제를 밝히 드러내셨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앙식을 '주신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일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6:34)을 전제할 뿐 아니라, 노동으로 우리의 양식을 벌 수 있는 능력은 물른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온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신 8:18; 고
전 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부(富)가 증가하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에 만족하게 될 때에는 쉽게 망각한다.(그러나 이 세상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은 항상 긴장한다. 내일 먹을 게 없을까 봐 죽는 날까지 그 긴장에서 못 빠져나가는 것이 현실이다.)
호크마 주석에서 제시하는 성서 요절
(잠 30: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공포 때문에 돌아버리지 않게 만들어 주시옵시고 더 큰 탐욕을 쫓아가느라고 눈이 돌아가게 하지 마옵소서 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이 기도가 정상적인 인간들에겐 아무 소용없다. 솔로몬 왕도 이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아마 이렇게 썼을 것이다.
(약 2:15-16) 만약 형제나 자매가 입을 옷이 없고 그 날 먹을 양식이 부족한데 그대들 중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물러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만 하고 정작 그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것을 의인 야고보가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우리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양식이라는 것이 마음 속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신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출애굽 할 때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모세가 가서 애굽인들한테 그 재물들 내놔라 하면 다 내놓을 거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광야로 떠나기 전에 그 주변의 평소에 교류가 있는 애굽인들한테 가서 패물이나 이런 것 좀 주세요 그랬더니 막 내놨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것을 걷어가지고 광야로 출발을 한다. 그 장면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신약에서는 것이 어떻게 표현이 되냐 하면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열매가 계속 있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머슴들에게 밭을 갈러 가라고 하면서 새참을 챙겨주시고 농기구들을 챙겨주시는 것과 마찬가지다. 농부들이 밭에 일하러 갈 때 먹을 것과 농기구들을 주신다는 것이다.
(고전 4:7) 누가 그대를 판결합니까(디아크리노) 그대가 가진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받은 것을 어찌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 클레로스 주석 : 가나안 복지는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리는 광야와는 달리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는 좋은 환경 속에서 열심히 농사를 짓는 땅이며 따라서 이 기도는 궁핍한 상황에 몰리지 않고 노동하며 함께 사명을 감당하는 행복한 삶을 위해 순탄한 상황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은 감나무 밑에 누워서 입 벌리고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감나무를 올라가는 것이다. 감을 따러 올라갈 때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저 감이 썩은 감이 아니게 건강한 맛있는 감 맛있는 감 이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다.
* 클레로스 추가 요절 (살후 3:10) 그리고 우리가 그대들과 함께 있을 때 그대들에게 "만약 누가 일하기를 원치 않으면 그 사람은 먹지도 말라(명령문)"고 전했기(파랑겔로) 때문입니다
자기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노동력이 있는데도 자기 먹을 것을 구하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지도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먹을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상황과 조건을 의미한다. 그것이 이른 비와 늦은 비다. 그러나 농사는 우리가 짓는 것이다.
* 클레로스 주석 : 우리의 생존 또는 만족에 필요한 양식보다 우리의 사명 감당에 필요한 양식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
* 클레로스 추가 요절 (고전 10:31) 그러나 그대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모두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사명 감당하는 삶이 극한의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게 사명의 핵심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다. 우리가 사명을 받으면 우리가 행복해진다. 이것은 세뇌가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명은 안에서는 하나가 되어 가는 게 사명인데,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은 인간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극한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밖에서는 평화를 퍼뜨리는 것이다. 평화를 퍼뜨리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사람들을 평화롭게 만드는 가장 행복한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우리의 극한의 행복이 시작되는 지점인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어서 한 사람 한 사람 때가 되면 다음 세대에게 이 행복한 삶을 넘겨주고 쉬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의 종말인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면 그때 다 일어나서 그때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엄숙 자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