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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회고록
“이명박 조심해, ‘그거’ 할 놈이야” 박정희는 정주영에 경고했다
제9회 중동 진출과 ‘35세 사장’ 신화
당신 지금 미친 거 아냐?
1975년 초의 어느 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사무실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XX, 회사를 통째로 망치려고 모두 작정한 거 아니냔 말이야!
그 고성과 욕설이 향한 대상은 엔지니어 총괄 전무 A였다. 그는 대응할 생각도 못 한 채 쩔쩔맬 뿐이었다.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그 자리에 동석했던 나도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을 지은 이가 또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정주영 회장이었다.
큰 소리로 A를 질타하던 이는 놀랍게도 정 회장이 아니었다. 정 회장의 동생인 정인영 현대건설 해외담당 사장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인 고(故) 정인영 한라그룹 창업회장. 부침을 겪으면서도 그룹을 재건해 '재계의 부도옹'이란 별명을 얻었다. 사진 한라그룹
회사와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사안을 논의하던 중에 터져 나온 돌발 상황이었다. 그 사안은 중동 진출이었다.
1970년을 전후해 현대건설을 비롯한 한국 건설업계는 승승장구했다. 경제성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망치 소리가 이어지면서 일거리가 넘쳐났다. 거기에 더해 월남전이 몰고 온 ‘베트남 특수’는 건설업계가 해외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3년 그 모든 장밋빛 풍경을 한 방에 끝장내버린 대사건이 터졌다. ‘중동발 오일쇼크’였다. 중동전쟁의 여파로 배럴당 2달러90센트였던 유가가 하루아침에 5달러로 뛰었고, 3개월 뒤에는 11달러60센트까지 치솟았다.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건설업계 역시 존망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그러나 현대그룹 DNA에서 위기는 곧 기회였다. 정 회장과 나는 오히려 석유 가격 폭등으로 오일달러가 넘쳐나게 된 중동을 기회의 땅으로 삼아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74년 800만 달러 규모의 이란 반다르 아바스 조선소 훈련원 공사를 수주하면서 중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그 공사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진정한 중동 진출 기회는 이듬해에 찾아왔다. 무려 1억5000만 달러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인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ASRY)’ 입찰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디디기 직전, 정 회장과 나는 생각지도 못한 내부 반대에 부닥쳤다. 반대파의 선봉장이 정인영 사장이었다. 난처한 표정으로 A에 대한 그의 질타를 지켜보던 나는 슬쩍 정 회장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의 시선이 동생에서 나로 옮겨지는 걸 봤기 때문이다. 정 회장의 입에서는 결국 내가 원하지 않던 그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이명박 부사장 생각은 어때?
난처했다. 형제 사이에 제대로 낀 나는 그때 어떤 대답을 내놓았을까.
정주영 전매 특허 “해봤어?”…정인영엔 안 통했다
그걸 설명하기에 앞서 정인영 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보려 한다. 그는 도대체 왜 중동 진출을 그렇게 강하게 반대했을까. 그리고 현대의 제왕이던 정 회장은 왜 동생을 단번에 제압하지 못하고 나에게 도움을 구했을까.
현대건설이 작은 회사에서 출발해 자동차와 조선소를 거느린 대기업으로 몸집을 불려가던 격동의 시기, ‘현대맨’에겐 하나의 유행어처럼 자리 잡은 정주영 회장의 말버릇이 있었다.
이봐, 해봤어?
이 짧고 투박한 한마디는 현대그룹을 관통하는 일종의 정신이기도 했다. 기술도 자본도 부족한 우리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때마다 수많은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내부에선 임직원들이, 외부에선 수많은 지식인과 관료들이 ‘안 되는 이유’를 대며 토를 달았다.
그때마다 정 회장은 “당신, 이거 해보기나 했어?”라는 날카로운 한마디로 모든 논쟁을 종결시켰다. 이 말을 정 회장이 수시로 하는 통에 사내에선 “해봤어?”가 유행어가 됐다. 중역은 부장에게, 부장은 다시 일반 사원에게 “해봤어?”를 연발했다. 일단 부딪쳐보고 그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내자는, 이 도전적인 DNA가 현대 임직원들의 몸속에 깊이 배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 회장도 회사의 운명을 가를 중차대한 결정 앞에선 달랐다. 무작정 “해봤어?”라며 임직원들을 몰아붙이지 않고, 그 누구보다 심사숙고하며 조언에 귀 기울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그때 특히 귀 기울였던 게 피붙이인 정인영 사장의 조언이었다. 정 회장은 바로 아래 동생인 정 사장의 의견을 각별히 경청했다. 정 사장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뛰어든 정 회장과 달랐다. 정 회장 가족 중에서는 드물게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을 다닌 일본 유학파 출신이었고,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하기도 했다.
6·25 전쟁 통에 미군 장교 통역을 맡을 만큼 영어에도 능통해 현대건설의 해외 진출 전략에 대해서도 막강한 입김을 행사하고 있었다. 정 회장은 그런 동생의 경영 감각과 국제적 식견을 높이 샀다. 자연스레 그룹 내에서는 정 사장의 발언권이 강했다.
그런 정 사장이 반대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정 사장은 왜 중동 진출에 반대했을까. “풍습도 모르고 법도 모르는 미지의 땅 중동에 잘못 발을 들였다가는 현대그룹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게 그의 반대 이유였다. 정 사장은 입찰을 준비하던 중역과 엔지니어 책임자들을 정 회장 몰래 따로 불러 호통치기도 했다.
너희가 지금 회사를 망치려고 작정한 거냐! 그 위험한 곳을 대체 무슨 배짱으로 가겠다는 거야!
그 사건은 결국 정 회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 회장은 정 사장과 나, A를 자신의 방으로 긴급 호출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정 회장이 동생에게 나지막이 반대 이유를 물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중동 입찰을 이토록 반대하는 게야?
그러자 정 사장이 형에게 대응하지 않고 A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호통을 쳤다. 형에게 쓴소리하기 어려워 A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그의 질타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우리가 언제 중동에 가보기나 했어? 그곳 풍습을 알아? 바레인 법을 알긴 해? 중동은 우리랑은 근본부터 다르단 말이야! 그런 낯선 땅에 가서 이렇게 큰 공사를 맡아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정 회장이 내게 의견을 물어온 건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참으로 난처했다.
정 회장이 듣고 싶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중동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동생은 길길이 날뛰며 결사반대하고 있었다. 형제간 의견이 첨예하게 맞선 상황에서 나의 대답은 곧 어느 한쪽 편을 드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결심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정인영 사장님 말씀대로 중동은 아주 낯선 곳입니다. 그들이 어떤 풍습을 가졌는지, 법체계가 어떤지 정확히 모릅니다. 우리가 지금껏 가봤던 다른 선진국들과는 달리, 중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다는 지적에 깊이 공감합니다. 다만….
다만?
정 회장이 재촉했다.
중동이 미지의 세계라는 건 유럽이나 미국의 경쟁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울산에서 이미 조선소를 직접 지어 운용해본 귀중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생생한 경험을 믿고 나간다면 불가능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소리쳤다.
이 서류들 다 치워! 그리고 모두 이 방에서 나가!
정 회장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정 사장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질책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중대한 선언을 했다.
형님이 만약 이 공사 입찰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나는 그날부로 현대를 떠날 거야.
얼마 뒤, 정 회장은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 입찰 강행을 전격 결정했다. 그리고 선진국의 강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수주에 성공했다.
현대건설의 아랍 수리조선소 낙찰은 중동 건설 붐으로 이어졌고, 오일달러를 역류시켜 ‘한강의 기적’을 견인했다. 동시에 현대건설이 대한민국 최고 기업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이 됐다.
정인영의 독립…중동 발판 삼아 승승장구한 현대그룹
우리는 뜨거운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중동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정 사장의 걱정대로 처음에는 낯선 풍토와 기후 때문에 고전할 뻔했다. 하지만 공사가 시작된 이후에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황량한 백사장에서 울산 조선소를 일궈본 우리에게 튼실한 지원을 바탕으로 한 바레인 조선소 공사는 오히려 수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또 막상 부딪쳐본 중동의 책임자들은 의외로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영어가 유창한 유학파 엘리트로 오히려 우리보다 한 수 위의 지적·경제적 능력을 지닌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다.
1975년 10월에 착공한 조선소는 예정 공기를 앞당겨 1977년 10월에 성공적으로 완공됐다. 이 완공은 곧이어 10억 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 수주라는 ‘초대박’으로 이어졌다. 3억 달러의 공사 선수금은 외환위기를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현대건설은 중동 시장에 본격적으로 안착하게 됐다.
반면 정인영 사장은 자신의 공언대로 바레인 조선소가 완공되기 전인 1976년 현대건설을 떠나 현대양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8년 그는 한라건설을 만들면서 완전히 독립한다. 이후 그는 한라자원, 만도기계, 한라중공업, 한라시멘트 등을 잇따라 창업하면서 한라그룹(현 HL그룹)을 만들고 이끌어 나갔다.
1990년 4월 7일자 중앙일보에 〈정주영·인영 회장 '형제애' 확인〉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정 명예회장과 동생 인영 회장은 70년대 중반 사업상 의견 대립으로 한때 사이가 틀어졌으나 최근 들어 자주 회동,「끈끈한」 형제애를 다지고 있어 재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정 사장의 독립과 그로 인한 조직의 변화는 내게도 엄청나게 큰 전환점이 됐다. 앞서 기술한 대로 1971년 이사로 승진한 나는 이후 상무와 전무를 거쳐 부사장까지 줄줄이 승진 가도를 달렸다.
그러는 사이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으로 탈바꿈했다. 1971년의 일이었다. 현대자동차와 울산 조선소, 단양 시멘트 등 계열사들이 속속 늘어나면서 현대건설은 단순한 건설회사를 넘어 국가의 명운을 짊어진 전략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건설은 정부와의 원활한 조율을 위해 관료 출신 인사를 국내 담당 사장으로 영입하고자 했다. 현대건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를 원했던 박정희 정부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져 1972년 영입된 인물이 조성근 전 건설부 장관이었다. 현대건설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외부 인사 사장 영입 사례다. 조 사장 영입 후 현대건설은 순풍에 돛 단 듯 거칠 것 없는 항해를 이어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76년 정인영 사장과 그를 따르는 인사들이 아랍 수리조선소 입찰 파문으로 대거 퇴사해 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 사장도 같은 해 사장직을 내려놓았다. 조 사장은 1975년 1월 가까운 사람이 초대형 스캔들에 휘말렸다. 그 여파가 현대건설에도 미치면서 결국 퇴사를 결정한 것이다.
국내 담당 사장과 해외 담당 사장, 그리고 창업 멤버들까지 대거 이탈하면서 현대건설은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이를 기회로 바꿨다. 단일 건설사를 넘어 다수의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전환하는 시점에, 과감한 조직 혁신을 통해 새로운 도약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35세 사장’ 신화를 쓰다
정 회장이 나를 부른 건 그때였다. 그는 폭탄선언을 했다.
자네, 이제 사장을 맡아줘야겠어.
나는 깜짝 놀랐다. 당시 현대건설에는 나 말고도 많은 부사장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고 경력이 길었다.
회장님, 이춘림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분을 잘 모시면서 실무를 확실히 챙기겠습니다.
이 부사장은 서울대 건축과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 공대 교수를 지낸 당대의 인재였다. 또한 1957년 현대건설이 아직 구멍가게 수준이던 시절 정 회장과의 인연으로 일찌감치 입사한 ‘개국공신’이었다. 특히 내가 현대건설 입사 면접을 볼 때 내 앞에 앉아 있던 면접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 회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명박 부사장, 자네가 맡아주게. 꼭 그래야만 하네.
거듭된 제안 끝에 결국 나는 정 회장과 일종의 타협을 했다. 이춘림 부사장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는 조건으로 사장직을 수락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77년 정초 이사회에서 나는 불과 35세의 나이에 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1965년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후 불과 12년 만에 이뤄진 초고속 승진이었다. 인사 발령 후 정 회장은 이춘림 사장을 중동 주재 사장으로 내보내고 내게 회사의 관리·운영을 맡겼다.
‘35세 사장’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내 인사를 두고 회사 안팎에선 말이 많았다. “이명박이 정 회장의 큰 약점을 쥐고 협박하고 있다” “저놈 뒤에 분명 엄청난 권력의 ‘백’이 있을 것” 등의 수군거림이 감지됐다. 심지어 내가 박정희 대통령의 숨겨진 친척이라는 헛소문까지 날 정도였다.
물론 그랬을 리 만무하다. 오히려 박 대통령은 6·3항쟁의 주동자인 나를 현대건설이라는 작은 회사에 입사시킨 이후에도 한참이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박 대통령이 정 회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걸 나중에 들은 적이 있다.
임자! 이명박 그놈 반골 기질이 있으니 조심해야 해. 노조를 만들지도 몰라.
짐작건대 박 대통령이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 사이에서 와전돼 “이명박은 박 대통령이 특별히 신경 쓰는 사람”이라는 엉뚱한 소문으로 둔갑했던 모양이다.
혈연관계도 없는 나에 대한 파격적인 인사로 정 회장도 많은 질문을 받은 모양이다.
왜 이명박을 그토록 빨리 승진시키셨습니까?
그럴 때마다 정 회장은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승진시켰나? 스스로 승진한 거지. [출처:중앙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