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와 푸틴 대통령 간에 지난 7일 전화 통화가 이뤄졌다는 다소 뜬금없는(?) 기사가 10일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터(WP)에 실렸을 때, 살짝 놀랐다. 맨 먼저 든 생각이 '진짜? 그게 가능해?'였다.
그도 그럴 것이, 7일은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흑해 휴양도시 소치에서 밤 늦게까지 국제 러시아 전문가 모임인 '발다이 클럽'의 포럼 참가자들과 함께 대외 정책을 논의한 날이다. 그 자리에서 그는 "트럼프 당선자에게 먼저 전화를 못할 것도 없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고 대화 의지를 표명했다. 푸틴 대통령에게 먼저 접촉 의사를 밝힌 트럼프 당선자의 미 NBC 전화 인터뷰와는 상관없이, 최소한 그때까지는 두 사람 사이에 전화 통화가 없었다는 말이다.
7일 발다이 포럼에 참석한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트럼프 당선자가 푸틴 대통령의 '발다이 포럼' 발언을 듣고 곧바로 러시아로 전화기를 돌렸을 수는 있지만, 양국의 시차를 감안하면, 7일의 전화 통화 보도는 그 시점상 뭔가 뜬금 없었다고 해야 옳다. 주말이라 보도의 사실 확인도 불가능했다.
◇트럼프-푸틴 전화 통화 부인한 크렘린
역시나,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월요일인 11일 첫 브리핑에서 "전혀 사실이 아니다. 거짓 정보"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자의 접촉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다"며 "꽤 존경받는 언론(WP와 로이터 통신)에도 게재되는데, 완전히 사실이 아니며, 그들의 정보조차 그 질(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사례"라고 꼬집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11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폼페이오 (전 미 국무장관) 거부와 트럼프-푸틴 전화통화'(Отказ от Помпео и созвон Трампа с Путиным) 코너에서 "WP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전화 통화)를 통보받았다고 썼지만,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고 전했다. 또 트럼프 당선자의 공보 담당자 스티븐 정이 '트럼프 당선자와 다른 국가 지도자들 사이의 사적인 대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고 접촉 사실 확인을 거부했다고 했다.
2019년 푸틴-트럼프 정상회담 모습/사진출처:크렘린.ru
이 정도면, 남은 것은 통화 상대방의 확인이다. 트럼프 당선자와 윤석열 대통령 간의 전화통화는 우리 대통령실이, 젤렌스키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나중에 대통령실) 확인했고, 연정이 붕괴된 뒤 트럼프 당선의 1등 공신인 일론 머스크 태슬라 CEO와 감정 싸움을 벌인 숄츠 독일 총리와 트럼프 간의 통화 사실은, 슈테펜 헤베슈트라이트 독일 정부 대변인이 공식 발표했다.
집권 1기 내내 껄끄러웠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트럼프 당선자에게 축하 전화를 했다고 CNN 등 미국 언론이 보도했으나, 중국 외무부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는 뜻이다. 트럼프 당선자와의 전화통화를 자랑스럽게 발표하지는 못할 망정, 최소한 부인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크렘린 대변인의 '거짓 정보'란 말은 통화가 아예 없었다는 확인이나 다름없다. 나아가 그는 “푸틴과 트럼프의 접촉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WP의 오보(앞으로 더 두고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명백한 오보다/편집자)는 트럼프 진영과 가까운 미국의 폭스 뉴스에 의해서도 확인됐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당선자는 11일 SNS '트루스 소셜'에 자신의 당선 후 세계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다룬 폭스뉴스의 기사를 공유했다. 그러나 거기에 푸틴 대통령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
대화를 나눈 해외 정상들의 면면을 다룬 폭스 뉴스를 공유한 트럼프 SNS/캡처
◇오보를 낳은 서방 언론의 저널리즘
언론의 오보는 어떤 이유로든 사실 확인을 등한시하거나 거의 불가능할 때 이뤄진다고 본다. 또 의도적이고 무리한 '이슈 선점', 욕심(특종)이 과할 때 벌어지곤 한다.
특히 최고위급 인사의 만남이나 접촉은, 양측의 사실 확인을 거치는 게 기본이다. 취임식까지 70일 가까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당선자 자격인 트럼프의 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여러 억측이 나올 수 있지만, 활동 그 자체에 대한 보도에는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푸틴-트럼프 전화통화가 사실이 아니라면, 그가 말했다는 '우크라이나 확전 자제 권고'나 '조만간 재논의 의향' 등 향후 정세 변화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들이 모두 엉터리라는 뜻이다. 그 메시지는 인터넷상에 남아 앞으로 엉뚱하게 인용되고 또 인용될 위험도 있다.
이론적으로 사실 확인이 가능한 푸틴-트럼프 전화통화에 관한 세계적인 언론(WP와 로이터 통신)의 보도가, '정보의 질(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사례'(페스코프 대변인)라면, 사실 확인이 거의 불가능한, 서방 언론의 우크라이나 전쟁 보도는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우크라이나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국제법상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서방 언론들은, 조그마한 틈새라도 생기면, 전세를 우크라이나의 승리 쪽으로 몰아갔고, 또 계속 그럴 태세다.
굳이 비유하자면, 이런 식이다.
우크라이나군의 방어 요새를 중국의 삼국지 소설 속에 나오는 하나의 성(城)으로 본다면, 성을 공격하다 죽거나 다친 공격측(러시아군)의 피해에 초점을 맞추고, 그 성이 함락된 사실에는 애써 눈을 감는 것이다. 그것도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발표를 근거로 연일 크게 보도한다면, 전쟁의 흐름을 왜곡하는 일이라고 본다. 또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요구하는 저널리즘의 길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국내에는 아직 전쟁 저널리즘의 정의와 원칙, 규범 등이 구제적으로 정립된 것 같지는 않은데, 이번 기회에 '전쟁 저널리즘'에 대한 논의가 우리 학계에서 활발해졌으면 싶다.
◇쿠르스크 격전 보도를 보면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북한군이 투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본토 쿠르스크주(州) 전투에 관한 보도다. 러-우크라 양쪽 모두 격렬해졌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스트라나.ua는 12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의 '전선 상황'(Ситуация на фронте) 코너에서 "쿠르스크 전투는 계속 격렬해지고 있다"며 친우크라이나 매체 '딥스테이트'를 인용해 "우크라이나군이 교두보를 마련한 남서부 지역의 '다리노' 마을을 향해 러시아군이 진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군사전문 텔레그램 채널들은 러시아군이 '다리노'를 점령했으며, 북쪽의 '올고프카'숲에서 공격을 가하는 등 전선 곳곳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다고 썼다. 일부 부대는 우크라이나군의 강력한 방어에 막혔다고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11일 밤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우크라이나군이 쿠르스크에서 5만명의 러시아군에 맞서고 있다"고 밝혔다. WP의 전날(10일자) 보도를 확인한 것이다. WP는 러시아가 대규모 공격을 가하기 위해 북한군을 포함해 5만명의 병력을 쿠르스크 지역에 집결시켰다고 전한 바 있다.
전장에서 수세에 몰린(?) 듯한 전황을 군최고통수권자(대통령)가 굳이 공개한 이유가 뭘까? 나토(NATO)의 개입을 요구하는 SOS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요구한 대로 장거리 미사일들을 빨리 제공하고, 그것으로 러시아 본토 공격도 가능하게 해달라는 무언의 메시지다. 북한군을 들먹이며 우리나라의 살상무기 지원을 압박하는 의도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쿠르스크주 국경마을에 진입한 우크라이나군/사진출처:우크라군 텔레그램
영국 일간지 텔레그라프는 영국의 정보 기관을 인용해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 당선자의 취임식인 내년 1월 20일 이전에 쿠르스크 지역을 수복할 것을 지시했다고 12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우크라이나가 장악했던 쿠르스크 땅의 약 절반을 이미 러시아군에게 빼앗긴 상태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군도 트럼프 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전쟁의 패러다임이 전쟁에서 평화로 바뀔 수 있다고 판단, 이미 확보한 쿠르스크 교두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예비 병력으로 이 지역에 우선 투입하고 있다고 스트라나.ua는 썼다. 나아가 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는 우크라이나가 주 전선인 돈바스보다 더 많은 전투부대를 쿠르스크 전선에 배치했다고 11일 전하기도 했다.
◇러시아 움직임도 심상찮다?
긴박하게 움직이는 것은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국방부는 12일 전황 발표를 통해 "러시아군은 지난 24시간 동안 쿠르스크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을 계속 소탕하고 있다"며 "수호이(Su)-34 전폭기와 각종 포대를 동원해 우크라이나군 병력및 군사 장비가 집결된 쿠르스크 지역과 우크라이나 수미주(州)를 집중 공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의 반격도 7차례나 격퇴했다고 밝혀 우크라이나군의 저항이 만만치않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추운 겨울을 앞두고 높아지는 쿠르스크 난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공공 서비스및 주택 정책을 총괄하는 마라트 후스눌린 부총리를 현지로 급파했다. 또 주민들의 불만을 산 대표적인 지역(수드자)의 수장(지자체단체장)이 전격 해임됐다. 국경지대의 민심 이반 차단에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추운 겨울은 쿠르스크 난민들에게 '고통의 시간'이다.
쿠르스크 국경지대 주민 12~13만명은 지난 8월 6일 우크라이나군의 습격 이후 서둘러 고향을 떠났다. 이들은 초기와 달리, 날이 갈수록 정부로부터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당초의 약속이 어그러지자, 타지 생활의 애로를 토로하고, 정부에 불만이 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