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3. 다음은 전투부대의 임무와 주둔지는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그리고 전투부대의 파병경위에 대해서 당시상황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답) 제가 비 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의 파병을 위하여 선발대장으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 인사차 “웨스트모얼랜드”사령관을 예방하였습니다. 그날은 마침 2일 전인 2월7일부터 2일간에 걸쳐서 월맹에 대하여 북폭을 감행하였는데 그 후 적의반응을 주시하고 있다고 하면서 나에게 사이공에서 그 추이를 지켜보고 귀국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를 하였습니다. 이 북폭은 일요일인 2월7일 새벽 2시에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미군 헬리콥터와 군용기 18대가 파괴되고 사상자 7명 부상자 109명의 큰 피해를 입은 사건에 대한 보복 폭격이며 북위 17도선 북방 경계선 부근에 있는 베트콩의 수사기지“동호이”를 미․월 양군 공군이 합동으로 맹타한 사건입니다. 나는 긴장된 현실을 지켜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느끼면서 예정대로 다음날 10시 30분에“사이공”을 출발 일본“오키나와”를 거쳐 2월11일 서울에 귀국하였습니다.
나는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본부장에 대한 귀국보고서에서「월맹과 베트콩이 2월7일과 8일 양일에 걸친 보복 북폭에 대하여 자제하지 않고 또다시 도발하게 된다면 미국은 경계선 북방의 군사시설에 제한하고 있는 폭격을 확대하고 또한 하노이가 계속 월맹 정규군을 증강시키고 남쪽에 위협을 가한다면 미국의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 하게 되고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띄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주월 미군사지원사령부에서 나에게 극비사항을 브리핑해준“월남정세분석과 미국의 전략”에 대해서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월남을 출발하여 귀국 길에 올라있었던 2월10일 밤 베트콩은 중부지역 항만도시“퀴논”의 미군하사관 숙소인 호텔을 기습공격하여 4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는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로부터 2일 후인 12일“존슨”대통령은 북위 19도선 이남의 월맹영토 안에 있는 군사목표에 대하여 공격명령을 하였습니다. 3월2일 미공군은 지금까지의 보복 폭격과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폭격을 단행하고 다음날인 3월3일 미국무성은 미국공군의 북폭은 월맹의 무력침략에 대항하는 미국과 월남정부의 집단방위를 위한 것이다. 미국은“게릴라”전이 국내적인 내전 상태에서 계속되고 있다면 지상 전투부대의 지원을 할 수 없으나 월맹으로부터 무력침략을 받고 있다면 월남정부의 요청에 의해서 지상군의 투입을 고려할 수 있다고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미국은 이러한 성명을 발표하고 5일 후인 3월8일“다낭”에 있는 미공군기지 경비를 위하여 해병대가 상륙을 개시하였으며 9일까지 2개대대 3,500명의 전투병력이 상륙하였습니다. 이것은 최초의 지상군파병이며 이때부터 월남전의 양상은 새로운 형태로 발전할 조짐을 보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최초의 지상군인 해병대를 월남“다낭”에 상륙시키고 약 2개월이 지난 1965년 5월16일“존슨”미국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였습니다.“존슨”미국대통령과 박대통령은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지고 5월18일 공동 성명을 통하여 양국간의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우호관계를 재확인하고 영원한 평화를 달성하는 공동목표를 추구함에 있어서 긴밀한 협조를 유지하려는 굳은 결의를 재 천명하며 그 주요 내용 중에는 ①북괴 재침 시 즉각 개입 및 지원 ②한국군 유지를 위한 충분한 군사 지원 ③대 월남 지원에 밀접한 협조 계속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ㆍ존슨” 성명에서 양국 대통령은「월남 지원에 있어서 계속 밀접하게 협조할 의도를 재확인하였다」고 월남사태에 관하여 비교적 간략하게 언급하고 한국군 증파부대는 표면상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국 수뇌의 정상회담에서 전투부대의 파병에 대해서 이미 합의를 보았던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귀국한 다음날 청와대에서 정부여당연속회의를 주재하고 이 자리에서 전투부대 파병문제를 협의하였으며 월남정부로부터 정식요청이 오면 파병동의 요청 안을 국회에 제출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그 후 20일이 지난 1965년 6월21일 월남정부로부터 한국군 전투사단의 파병을 요청하는 “구엔 카오 키”수상의 친서를 보내왔습니다.
정부는 7월 2일 1개전투사단을 월남에 증파키로 의결하고 동의 요청 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습니다.
국회에서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의원들 중에서도 파병을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으며 비 전투부대를 파병할 때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8월14일 찬ㆍ반 양론으로 토론 끝에 야당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가결통과되었습니다. 국방부는 국군 전투부대 파병동의 요청 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연락장교단을 편성하고 1965년 8월18일 현지로 파견하였습니다.
나는 합참의장의 지시에 따라 “이세호”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연락 장교단과 함께 월남으로 가서 군사실무협정을 전담하여 처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8월 18일 연락장교단 일행은 김포공항을 떠나 다음날 16시30분에 사이공“탄산누트”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제가 사이공을 다녀간지 6개월만이며 3번째로 월남에 발을 디디게 된 셈입니다.
이번에는 선발대가 아니고 연락장교단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사이공에 다시 오게된 것입니다. 도착과 동시에 한국대사관으로 직행하여 월남의 정세에 대해서 소개를 받고 각기 담당분야별로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였습니다. 다음날은 월남군총사령부와 미군사지원사령부를 방문하고 브리핑을 청취하였습니다. 이 브리핑에서는 국제군사원조군의 임무를 중심으로 하여서 앞으로 전개될 한국군이 어떠한 밥법으로 흡수될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월남의 전반적인 군사적 상황과 그리고 월남군 단독으로 베트콩의 공격을 저지하고 역공세를 취하여 베트콩을 섬멸하고 영구히 축출함으로서 월남의 합법적인 민주정부로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하여 월남의 병력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으며 국제군사원조군은 다음과 같은 형태의 작전을 수행할 것이 요구되고 있었다. 1)수색 및 섬멸작전 2)소탕작전 3)확보작전 4)예비 또는 반응작전 5)대민활동 작전
월남에서의 모든 작전은 월남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실시되며 따라서 국제군사원조군의 모든 작전도 월남군 지휘관과의 적절한 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제군에 대하여 일정한 작전지대나 전술지역을 할당해 줌으로서 상호 협조하는 수도 있고 그때그때 협조하는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월 미군사지원사령부에서 계획한 한국군에 대한 작전 개념을 살펴보면 한국 해병여단은“캄란만”지역에 전개하여 작전임무를 수행하게 되며 주둔지 주위 지역에 대한 육상과 해상에 대한 수색과 섬멸작전을 하게 될 것이며
수도사단(-)은 2개제대로 구분하여 “퀴논”과 “빈케” 지역에 전개될 것이며 수도사단 사령부와 제1연대는“퀴논”지역에 전개되어 “퀴논” 항만시설을 확보하고 부근지역에 대한 수색 및 섬멸작전을 실시하고 최종 제대로 도착하는 기갑연대는 “빈케”지역 및 그 동북쪽에 있는 19번도로를 확보하고 그 전술지역에 대한 수색 및 섬멸작전을 실시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며 미군측에서 제시한 내용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울에서 미군측의 의도를 알고 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둘기부대의 임무와 작전지역을 살펴보기 위해 정찰을 한바 있었으나 이번에는 전투부대의 임무를 결정하기 위하여 다시 예상 작전지역의 정찰을 하였습니다.
-예상 작전지역 정찰-
첫 번째 기착지는 월남군 제2군단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플레이크”였습니다. 2군단 사령부를 방문하여 관할 지역의 군사 정세에 대한 브리핑을 청취하였습니다. 제2군단 지역의 특징은 대부분이 높은 고원지대이고 비교적 넓은지역을 관할하고 있어서 제한된 병력으로 작전상 어려움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특히 베트콩의 공세가 가장 격렬했고 월맹의 정규사단병력이 투입되어 있으므로 고전하는 지역임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병참선인“퀴논”과 “플레이크”를 이어주는 제19번도로도 적의 교란 작전으로 거의 제구실을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보급을 공수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제2군단사령부의 방문을 마치고 우리는 미제3해병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항구도시 “다낭”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해병사단을 방문하여 현황을 들은 다음 예하 제9연대를 돌아보았습니다. 전형적인 야전생활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후 월남군 제1군단사령부를 방문하여 브리핑을 듣고 월맹과 경계선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실상을 파악한 다음“다낭”항을 공중 시찰하고 사이공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은 “티우”국가원수와 비둘기부대와 제1이동외과병원을 방문하는데 동행하였습니다.“티우”장군은 우리 한국군의 활동에 크게 만족하면서 한국군의 업적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증파 될 전투부대에 대하여 최대의 사의를 표한다고 하였습니다. 오찬 후 비둘기부대의 임무와 부대이동 문제등을 중심으로 월남측의 의견을 물어보았습니다.“티우”장군은 한국군 전투부대가 증파된 후에도 비둘기부대는 계속“디안”에 머물러 현 임무를 계속하여 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일선정찰 제3일째 되는 날 한국군 전투부대의 예상지역인“퀴논”과“캄란”지역을 정찰하기 위하여 아침 7시부터 주요 보급로인 1번도로를 따라 공중정찰을 하면서“퀴논”에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미군측의 안내를 받아“퀴논”항만시설을 시찰하였습니다.
항만자체의 자연적인 조건은 좋은 것이었으나 갑자기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여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안케”에 주둔하게될 미군 제1공정기갑사단의 선발대 병력이 선박에서 하선 상륙하는 실상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항에 정박하고 있는 수송선에서 병력과 장비를 작은 선박으로 옮겨싣고 상륙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LST에 실린 장비와 병력은 직접 해안의 부두에 대놓고 하선시키고 있었습니다. 항만 능력이 크게 부족하였습니다. 항만 및 군수 시설의 시찰을 마치고“퀴논”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월남군 제22사단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관할지역내의 적정과 치안상황 그리고 우군의 상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받은 다음 미군 측에서 제시하는 한국군 사단사령부와 제1연대가 주둔하게될 후보지역을 답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해안과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서 부대배치와 경계는 비교적 용이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단사령부와 연대가 주둔할 일반적인 지역만을 선정하고 구체적인 시설의 위치는 해당부대에서 파견되는 선발대가 결정하도록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기갑연대가 주둔하게 될“빈케”의 지형을 정찰하기 위하여 군용짚차를 타고 떠났습니다. 당시 미제1공정기갑사단을 “안케”에 진주시키기 위하여 주요 병참선인 제19번도로의 개통작전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빈케”지역의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미군과 월남군들이 배치되어 있는 최전방까지 돌아보고 비행기편으로 사이공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군 야전 사령부(FFV)방문-
다음날인 28일에는 해병여단 주둔 예상지역인“캄란”과“나트랑”을 정찰하였습니다. 우리는 먼저 월남군 제2군단지역내의 미군을 통합 지휘하고 증파되는 한국군전투부대를 수용하기 위해 준비를 총괄하고 있는 미군야전사령부를 방문하였습니다. 사령관“라슨”소장의 영접을 받은 후 현황 브리핑을 청취하엿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지역에 추가 투입될 미군의 배치계획에 대해서도 그 내용을 청취하였습니다.
우리는 수일간에 걸친 정찰과 미군야전사령부의 브리핑을 통하여 한국군 전투부대와 작전지역을 확인하고 그 임무의 중요성과 월남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이 지역이 차지하는 전략적 가치를 평가함으로서 주월미군사원조사령부에서 계획한 작전개념에 입각한 한국군 전투부대에 대한 임무와 작전지역의 실정은 적절한 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귀로에 해병여단의 작전지역인“나트랑”지역과“캄란만”을 다시 굽어 보고 사이공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돌아오는 기상에서 우리 전투부대의 임무와 작전지역 특히 “퀴논”항 “19번도로” “나트랑”과 “캄란만” 그리고 공군기지 등이 새삼스럽게 뇌리에 스쳐갔습니다. 돌이켜 보면 육군대학시절 아프리카지역에서의 상륙작전을 가상한 기지개발계획을 연습하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항만개발, 도로 및 교통망, 통신망 구축, 파이프라인부설, 정비 및 보급시설의 설치 등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인력동원 등 월남전이 본격화되면 월남의 영토의 특성으로 보아 항만을 통한 기지개발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사회간접시설이 불충분한 미개발국가에서의 기지개발은 전쟁 못지 않은 또 하나의 전쟁을 방불케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월남전을 수행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특수가 아니겠는가 이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긴급하고 이 엄청난 일을 빠른 시일 안에 충족시키려면 군대의 병력만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개인기업과 민간인의 참여가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미국 사람들만으로는 안될 것이고 현지인은 물론 국제적인 규모에서의 참여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퀴논”과“캄란”등 주요 전략적 지역을 직접관리 장악하게 되는 한국군을 배경으로 이곳에 한국기업과 인력이 진출하게 되다면 참으로 좋은 여건이 아닐 수가 없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앞에서 내가 말하는 전략적 가치란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가이익의 차원에서 보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