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우 하면 소나무,
소나무 하면 배병우로 인식될 만큼 그는 오랜 기간동안 서정시처럼 투명한 소나무 사진으로 우리에게 다가섰다. 몸짓이 우람하여 전혀 섬세함이나
감수성과는 무관해 보일 듯 한데도 그가 그처럼 감성적이고 내밀한 영상을 이끌어 낸 것을 보면 역시 남도 여수의 정서가 그에게도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지난 10년 동안 그의 주변에 머물면서 나는 배병우라는 작가의 일상과 그가 불태웠던 사진적 정열을 보았다.
또한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사진 교육자로 걸어온 족적 역시 참으로 대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척박한 한국 사진에서 일관되게 지켜왔던 그
작가정신과 교육자로서의 노력 그리고 예술적 업적들은 지금 이 시점에서 보면 크게 부각될 성질은 못되지만, 그러나 지난 5년간의 발자취만
뒤돌아보아도 그가 한국 사진의 발전과 그 위상 제고에 기여한 중추적 인물 중 하나였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진에 있어 큰 획을 그었던 「한국 사진의 수평전」(1991-1994)은 그가 주축이 되어 이끌어냈던 전시였고 또한 한국 사진이 어떤
방식으로 국제화하고 독창적 영역을 구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몸소 실천해 보였던 몇 안되는 사진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국내 사진가로서는
처음으로 소나무 사진을 통해 일본의 미토 미술관과 도쿄 국립현대미술관에 입성했으며, 금년 9월 캐나다 토론토의 파워플랜트 미술관과 이어 독일
베를린 미술관의 입성도 눈앞에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사진화랑으로 명망 높은 뉴욕 로렌스 밀러 화랑이 그의 사진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기에 만약 그가 뉴욕까지 진출한다면 명실공히 국제 사진무대에 두루 활약하는 유일한 한국 사진가가 되는 셈이다.
배병우는
서정시처럼 투명한 사진세계를 갖고 있다. 그 부드러움과 고요, 그리고 내밀함과 정조(情調)적 아우라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잊었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마라도」가 그랬고 「소나무」가 그랬으며 현재 제작중인 「바다」도 그러하다. 따라서 정서적 감흥을 분기시키는 서정적 풍경은 그만의
독특한 아우라라고 할 수 있고 아무도 훙내낼 수 없는 그만의 확고한 표현적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한때 그는 인물을 찍은 적 있고 남산
어귀에서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할 때는 패션사진에 관심을 둔 적도 있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그런 사진들이 그에게는 정서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반, 관훈미술관에서 잠시 선보였던 「인물사진(Portrait)」(1982)이 그의 작품세계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풍경사진이
아닌 것에 속한다.
배병우의 사진세계가 지금까지 일관되게 자연 풍경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일상적 삶, 즉 그의 삶의 방식과
유관하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보다는 시골 체질이고 술도 양주보다는 소주를 더 좋아한다. 또한 그는 어느 때고 마음이 동하면 경주로 구례로
여수로, 산과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자연의 사나이다. 자연 앞에 서 있는 그의 모습에서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읽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기 위해 준비하는 그의 동작과 셔터를 누르는 그의 손가락에서 역동적 에너지를 느끼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는 자연 앞에 서면 언제나 무상(無想)으로 빠져든다. 그리고서 마치 혼나간 사람처럼 촬영에 몰입하며 그의 그런 행동들은 카메라에
필름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지속되곤 한다.
배병우의 작품에는 세 가지 절대적인 사진적 요소가 존재한다. 그 절대적
요소란 "빛"과 "시간"과 "공간"이다. 그의 사진에 있어 빛은 형을 만드는 근간이고 시간을 대상을 읽는 관념이며 공간은 또한 대상과 관찰자간에
형성된 정서적 아우라이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독립적인 요소가 아니며 서로 화면 속에서 긴밀히 상호작용을 한다. 예를 들어 빛은 점과 선과 면을
만드는 형상일 뿐만 아니라 최후에는 내적 이미지로 전환되는 관념적 풍경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사진적 요소들은 작품 속에서 때로는
독립적으로, 때로는 서로 밀접하게 상징적으로 다의적인 기능을 발휘하곤 한다.
우선 시간성과 공간성에 깊게 개입하는 빛은 화면을
구축하는 가장 이차적인 형상으로서 배병우의 사진에서는 어쩌면 독립적인 오브제보다 더 우선시 된다. 빛에 대한 중요성의 인식은 일찍이 모홀리
나기(Moholy-Nagy)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큰데, 자신의 대학원 학위논문 주제이자 응용미술을 공부했던 그로 하여금 사진에 빠지게 했을 만큼
모홀리 나기의 빛의 개념은 배병우의 사진에서 절대성을 갖는다.
"사진은 빛의 컴포지션"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조형의 근간을 빛에서
찾았던 모홀리 나기와 마찬가지로 배병우 역시 빛을 통해 점과 선과 면을 구획하고 공간의 무한함을 탐색했다. 바로 그 점에서 빛과 색이 하모니를
이루었던 초기 작품 「마라도」는 빛에 대한 그의 순수 조형의지를 읽는 최초의 단초적 작품에 속한다. 1985년에 선을 보였던 「마라도」는 한국
최남단에 위치한 마라도라는 역사적, 지리적 공간(site)에서 대지, 바다, 하늘, 구름, 그리고 어둠을 모티프로 했던 풍경이기는 하나
사진에서의 빛의 유려함은 단순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넘어 관념적 풍경으로까지 확장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가 지금까지 선보였던 사진 중에서
유일하게 칼라 작품인 마라도 사진은 빛의 개념 못지 않게 한편으로는 색에 대한 조형의지도 읽을 수 있는데 그가 색을 통해서 공간을 확장하는
방법은 칸딘스키에게 영향받은 바가 크다.
배병우의 사진세계에 있어 빛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조형적 요소라고 한다면, 그의 사진에
있어 시간은 소재와 연관된 중요한 미학적 담론에 속한다. 그에 있어 시간, 즉 시간성이란 역사성과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사진적 소재가 되었던
바다, 섬, 소나무, 혹은 바위와 같은 대상물들은 자신은 물론 한국인의 보편적 삶과 밀접히 연계된 시간성과 역사성을 내재하고
있다.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소나무」는 바로 그 시간성과 역사성이 내포된 중요한 사진적 소재중 하나다. 태백산맥을 따라
굳건히 뿌리를 내리는 소나무에서 그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기상과 기개를 읽고 그리고 그 기상과 기개를 곧바로 작가 자신의 내적 이미지로
승화시킨다. 즉 그는 소나무라는 퇴적된 우리의 역사성과 한국인의 고고한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정신적 표상물을 굳건한 삶을 살았던 자신의
아버지의 삶과 연계시킴으로써 사적 표상물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 말고도 만약 우리가 배병우의 소나무에서 한국성과 결부된 또다른
어떤 보편적 담론을 이끌어낸다면 아마도 거기엔 우리 민족의 원형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질고 질긴 연(緣)과 정한(情恨)이 자리할 것이다.
소나무를 통한 연과 정한성의 표출은 작가가 부여한 몇몇 제목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되는데 이를테면, 「만나고 헤어지고」라는 제목에서
우리는 한국인의 기상과 기개를 포상하는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굳건한 소나무 못지 않게 한국인의 역사적 정한을 상징하듯 얽히고 설킨 소나무의
형상을 보게 된다. 이처럼 배병우의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기상과 기개는 물론이고 모질고 질긴 연과 정한, 나아가 작가 자신의 일상적 삶을
투영한 내밀하면서도 실질적인 우리의 시간성과 역사성을 이끌어 냈던 것이다.
소나무가 배병우에게 있어 마치 아버지 같은 상징성을
갖는다면 바다는 어머니와 같은 상징성을 갖는다. 즉 소나무 사진이 순천이 고향이었던 아버지의 이미지라면 바다 사진은 여수가 고향이었던 어머니의
이미지인 것이다. 최근에 제작된 「바다」사진을 보면 과거 단순히 바다에 대한 감수성과 마라도라는 섬의 역사성에 근착했던 제주 앞바다의 서정적
이미지와는 달리 철저히 추상적 이미지를 통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바다에 대한 우리 민족의 원형적 이미지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바꿔 말하면 최근의 바다는 작가의 어린시절 향수적 이미지를 넘어 여수가 고향이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나아가
우리 민족이 공유한 바다에 대해 보편적 정서, 즉 한과 끈질긴 생명력을 드러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시간이 배병우의 사진에 있어
소재와 관계된 중요한 미학적 담론을 이끈다면, 공간, 즉 그가 꾸미는 사진적 공간성은 그의 예술의 근간이 된다. 그는 오래 전부터 화면을
구성하는 공간성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마라도 사진과 같은 80년대 초기 작품들이 주로 조형성을 심화시키기 위해 공간성이 강조됐다면,
90년대의 소나무 사진은 관념성을 심화시키고 공간성을 강조한 경우이고 최근작인 바다 사진은 조형성과 관념성을 두루 심화시키려 했던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제작된 바다 사진을 보면 아주 치밀하게 공간성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바다라는 소재가
어떤 구체적인 오브제로서가 아닌 관념적인 오브제로서 인식되기를 작가가 원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따라서 색채가 개입해 공간성이 만들어지고
확장되었던 가거 마라도 사진의 바다와는 달리, 최근 바다 사진의 경우는 철저하게 단색조 화면과 점, 선, 면이 조형성의 근간을 이룬 기하학적
추상성으로 인해 바다는 우리에게 또 다른 서정적 아우라를 맛보게 한다.
파노라마 카메라가 갖는 사진적 프레임은 배병우 사진에서
조형성 못지 않게 중요한 또 다른 공간적 요소가 된다. 파노라마 프레임은 원래 소나무 사진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소나무 사진에서 그 표과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까닭은 그 파노라마 프레임이 안개와 같은 스푸마토(sfumato)에 의해 공간성이 밀려났기 때문이고 또한 소나무가 갖는 수직적
힘의 파노라마가 형태를 주도했기 때문에 파노라마 프레임 때문에 화면의 공간간 이 크게 변하기 시작한다. 특히 점, 선, 면을 근간으로 한 심리적
조형성과 모노크롬 사진의 추상성이 파노라마 프레임 안에서 상호작용 함으로써 화면에 특별한 공간성이 창조된다.
바다 사진에서
보여주는 드넓은 수평선은 일반적으로 안정감이라는 심리적 요소를 갖지만 바다의 수평선이 파노라마 프레임에 갇히고 또 모노크롬 우상성에 구속됨으로써
마치 억압과 죽음이라는 특정 관념성까지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순차적으로 면 분할된 시퀀스 형식의 바다 사진의 경우도 공간의 변화에
따른 운동성 못지 않게 바로 그 파노라마 프레임이 구축한 여백으로 인해 오히려 동양적인 관념미까지 표출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가 있다. 따라서
배병우의 바다 사진은 파노라마 프레임이 갖는 그 공간성과 작가가 치밀하게 구성한 기초 조형성, 그리고 흑백 사진 특유의 심리적 추상성이 서로
밀접히 연계됨으로써 바다라는 독특한 공간성과 우상적 이미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배병우의 사진을 본 사람들은 대체로 그의
사진을 한 편의 서정시라고 말하거나 혹은 마치 풍경화를 보는 듯 하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그의 사진이 어떤 문학적 요소나 회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인데 어쩌면 그것인 사진 외적인 요소가 작품에 스며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예술 행위가 궁극적으로 작가의 어떤
사건이나 자전적 이야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면 배병우 역시 그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은 거의 모두가 자신의 특정 삶이
투영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철저하게 생의 울림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사진 어느 하나 사적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은 사진이 없을
정도여서 소나무 사진은 물론이고 바다 사진과 멀리 마라도 사진까지 그의 생의 울림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일 선생도
「마라도」 서문에서 밝혔듯이, 배병우의 사진은 바라보면 볼수록 정감이 어리고 그가 선사하는 자연의 모습은 작가의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은 물론,
삶에서 우러나는 그 섬세한 감수성과 생의 울림 없이는 결코 형상화될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이 서정적이라 말해진다면, 우리가 작품의
순수성이란 작가의 삶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한 배병우 사진의 서정성은 사진적 소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이른바 순수사진 이라고
말해지는 어떤 방법론적인 것에서 오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삶이 담보된 그의 내적 순수성에서 온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에서 찾은
투명한 한편의 서정시, 바로 그 투명한 삶의 울림이 배병우 사진의 멋이자 그의 사진세계의 요체(要諦)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