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하느니- 이상화
저는 두뇌 조종무기 가해놈들이 딱 일제놈들하고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정신과 육체를 빼앗긴 것과 우리 조국이 식민수탈되고 개처럼 유린된 것이
똑같았습니다.
두뇌조종무기가 나치와 일제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 더욱 분노하게 합니다.
https://youtu.be/A8WsHucpgkI?si=29sgGQCLlES6eWAD
영웅 장부가. / 안중근 의사님의 이토히로부미 저격 의거를 정성화님이 연기하신극입니다.
이상화 시인의 독립운동 생애-
1919년 3.1운동 당시 이상화는 대구에 있었다.
상화는 거사 모임에는 참석하였으나 주요 인물들이 검속되자 서울 박태원 하숙으로 피신, 화를 모면하였다.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 발발로 서둘러 귀국한 상화는 서울 가회동에 기거하면서 시작에 몰두, 대표작의 하나인 '나의 침실로'(백조 3호)를 내놓았고, 1926년에는 마침내 명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6월 호)에 완성 일약 시단의 총아가 되었다.
1928년 6월 대구에서 이른바 한글의 첫 글자를 딴 'ㄱ당 사건'이 터져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 간사직에 있던 이상화는 동지 9명과 함께 구금 송치되어 말 못 할 고초를 겪었다.
1937년 큰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으로 가 북경, 남경 등지를 유람하다 돌아온다. 돌아오자마자 일본관헌에 붙잡혀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귀국한 상화는 교남학교 조선어, 영억, 작문 교사로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했는데 교가에 '만주벌 바람 타고'라는 가사를 집어넣었다가 대구서에 구속되고 가택 수색을 당해 그 통에 자신의 시고를 물론 이장희의 유고까지 압수당하였다.
소동이 가라앉은 1939년 상화는 학교에서 물러나 문학에만 열중했으나 이미 병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가 있었다.
그는 국문학사를 저술하려던 계획도 이루지 못한 채
1943년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39년 이래 살아온 계산동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만 42세 젊은 나이로 불꽃이 사그라지듯 숨을 거두었다. 병명은 위암. 위암 진단을 받은 지 불과 한 달 만의 죽음이었다.
(조국과의)
이별을 하느니
이상화(1901~1943, 42세)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남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꼭두로 오르는 정열에 가슴과 입술이 떨어 말보다 숨결조차 못 쉬노라.
오늘 밤 우리들의 목숨이 꿈결같이 보일 애타는 네 맘속을 내 어이 모르랴.
애인아 하늘을 보아랴 하늘이 까라졌고 땅을 보아라 땅이 꺼졌도다.
애인아 내 몸이 어제같이 보이고 네 몸도 아직 살아서 내 곁에 앉았느냐?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뉘어 생각하며 사느니보다 차라리 바라보며 우는 별이 되자!
사랑은 흘러가는 마음 우에서 웃고 있는 가비여운 갈대꽃인가.
때가 오면 꽃송이는 고와지고 때가 가면 떨어지고 썩고 마는가?
남의 기림에서만 믿음을 얻고 남의 미움에서는 외롬만 받을 너이었더냐.
행복을 찾아선 비웃음도 모르는 인간이면서 이 고행을 싫어하는 나이었더냐.
애인아 물에다 물 탄 듯 서로의 사이에 결계가 없던 우리 마음 우으로
애인아 검은 그리매가 오르락내리락 소리도 없이 어른거리도다.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우리 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우리 둘이 나뉘어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피울음 우는 두견이 되자!
오려무나 더 가까이 내 가슴을 안으라 두 마음 한 가락으로 얼어보고 싶다.
자그마한 부끄럼과 서로 아는 믿음 사이로 눈감고 오는 방임을 맞이하자.
아 주름잡힌 네 얼굴 이별이 주는 애통이냐? 이별을 쫓고 내게로 오너라.
상아의 십자가 같은 네 허리만 더위잡는 팔 안으로 달려만 오너라.
애인아 손을 다고 어둠 속에도 보이는 납색의 손을 내 손에 쥐어다고.
애인아 말해다고 벙어리 입이 말하는 침묵의 말을 내 눈에 일러다고.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뉘어 미치고 마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두 마리 인어로나 되어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