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경회루에서 육영수 여사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양지회 주최로 경로잔치가 열렸다. 코미디언 남보원씨를 비롯한 연예인
수명이 나와 노래와 코미디로 노인들을 즐겁게 했다. 악단 연주소리와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가까운 청와대까지 들렸던 모양이
었다. 경호실에서 경복궁 사무실로 연락이 오기를 “각하 집무실에 노랫소리가 들리니 노래를 삼가 달라”는 것이었다. 양지회
총무 권옥순(윤주영 전 문공부 장관 부인) 여사가 영부인께 그 말을 전했다. 육 여사는 괜찮으니 그냥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행사를 다 마치고 나서 나는 영부인을 모시고 청와대로 돌아왔다. 현관에서 경호과장이 나와 인사를 했다. 영부인은 그에게 “거
기서 연락했어요?”라고 물었다. 그가 어물어물하자 “집무실에서 뭐가 들린다고 그래요”라고 언짢게 말했다. 2층 비서실장실에
서 내려오던 김성진 대변인과 마주친 영부인은 “그렇게 과잉충성하지 말아요”하는 것이 아닌가. 김 대변인은 영문도 모른 채 얼
굴을 벌겋게 하고 서 있었다.
▲1973년 5월 8일 어린이회관 주최, 양지회 주관으로 경회루에서 열린 경로잔치. 제1회 어버이날인
이날 육영수 여사는 서울시내 70세 이상된 어버이 1천여명을 초청해 여흥과 게임 등으로 위로하고,
어르신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전통 미덕을 현대적으로 되살려 이를 가정으로부터 국가사회로 확
산시키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어느 날 육영수 여사는 나에게 이런 불만을 털어놓았다.
“청와대에서 발표하는 대통령 관련 기사를 보면 ‘김정렴 비서실장과 박종규 경호실장이 대통령을 수행했다’는 내용이 항상 붙
어 다니는데 국민들이 읽으면 식상할 것 같아요. 대통령께서 지방에 가시면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은 으례 수행하게 되어 있는데 그 사실을 꼭 기사로 보도를 해야 되나요. 그러지 않아도 대통령 측근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런 사람들은 얼
마나 지루하게 느끼겠어요.”
나는 이 말을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에게 전했다. 김 대변인도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대통령 측근에서는 누구도 그 같은 문제점
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항상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애썼던 육영수 여사의 눈에는 그것이 보인 것이다. 그 후로는 그런 식의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
대통령의 생신일
▲9월 30일을 박 대통령의 양력 생일인 줄 알고 모 장관이 사주풀이를 했다는 일화를 실은 경향신문
1979년 11월 3일자 지면 일부.
박 대통령이나 영부인은 면전에서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매우 겸연쩍어 했으며, 아부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생신일이 음력으로 9월 30일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음력으로 생일을 지내는 것이 국민 정서에 맞지 않아서 음력이 아닌 양력
9월 30일을 생일로 했기 때문에 그날은 국무총리가 국무위원을 대표해 화분을 들고 청와대로 올라와 축하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어느 핸가 양력 9월 30일 모 장관이 대통령께 보고를 마친 다음 시간이 늦어서 박 대통령 내외분과 청와대에서 저녁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그 장관은 9월 30일이 매우 길한 날이며 이날 태어난 사람은 위인이 많다는 등 사주풀이를 하고 돌아갔다. 그날은 박
대통령의 진짜 생일이 아니었다. 이튿날 육 여사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남자들은 왜 그렇게 아부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웃었다. 1917년 음력 9월 30일은 양력으로는 11월 14일이다. 그 얼마 후부터는 박 대통령은 양력 11월 14일을 공식 생신일로 삼았다.
육 여사는 혹 부속실 직원들이 영부인을 칭찬하는 말이라도 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속에 없는 말 하지도 말아요”라고 말하곤 했다.
교향악단 공연 취소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1972년 11월 15일 하오 7시 시민회관에서 열린 새마을음악회를 참관했다.
문공부가 마련한 이 새마을음악회는 국립교향악단과 5백여명의 합창단이 출연해서 큰 성황을 이루었다.
1972년 가을 국립교향악단 정기연주회에 박 대통령께서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영부인께 “각하께서는 축구시합 구경만 가시고 예술 활동에는 관심이 없으신 것 같다”는 음악인들의 불평을 전해 드렸더니 두 분이 상의하셔서 그해 가을 국립관현악단 정기연주회에 가시기로 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당일 연주회는 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회가 아니라 국립합창단과 소년 합창단 등을 대거 동원한 교성곡(交聲曲)이란 이름의 대규모 합창제였다. 막이 오르자 음악연주 대신에 사회자가 대통령 업적을 칭송하는 시를 읊고 있었다. 청와대 정무비서실과 문공부 당국자들의 과잉충성이 빚어낸 사고(?)였다. 옆에서 보니 쌍안경으로 무대를 꼼꼼히 살피던 박 대통령의 눈꼬리가 올라가면서 불쾌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관람을 마치고 연주자들을 찾아가서 격려한 뒤 청와대로 돌아온 박 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린이합창단은 왜 동원했느냐. 그런 연주회는 당장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문공부 계획에 따르면 그 연주회는 지방순회까지 예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박 대통령의 모처럼의 교향악단 참관은 그 후 다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통령이 매년 국립교향악단 정기연주회를 참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영부인께서 나에게 모처럼의 건의가 이렇게 돼서 안됐다는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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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 이 : 김두영 (前청와대 비서관)
첫댓글
그 당시 48세셨던 육영수여사 님
어찌 그리도 깊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아울러 가셨던지
지금 이렇게 나이 먹어 생각해 봐도
하늘이 내려주신 국모 셨었는데
이렇게 그 이름 우리들에게 영원히 남기 셨고
아픔을 안고 가셨는가 봅니다
다시 봐도 눈물겨운
우리의 영원한 국모이십니다
최숙영 작가 님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새로운 소식을 알게 해 주셔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