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도들의 기쁨과 삶을 담은 사도행전 읽기 15] 위선적 신앙의 위험성(사도 4,32-5,11)
참된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지만, 정반대로 위선적 모습을 보인다면 이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도록 만드는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또한, 바르나바라고도 불리는 요셉과 하나니아스라는 인물의 비교를 통해 위선적 신앙이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려줍니다.
앞서 2,42-47에서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이 어떠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친교는 친목 도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나누는 나눔의 친교였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 발 앞에 놓으면서 나눔의 친교를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돈을 교회에 봉헌했는가 안 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얼마나 금액이 많았느냐보다 얼마나 진실하게 봉헌했느냐가 더 중요함을 하나니아스의 일화를 통해 전해줍니다.
하나니아스는 요셉처럼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려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에 재산을 바쳤는지 아닌지에 관한 사실 여부가 아니라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곤 교회에 다 봉헌한 척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같은 행동에 대해,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인 사피라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둘 다 교회에 재산을 바치는 위대한 일을 하고서도 자신의 실적을 부풀리려는 위선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잃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선적인 모습은 사도행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야고보 서간 2,1-13은 교회 안에 재물로 사람을 평가하면서 생기는 차별대우가 있었음을 전해줍니다.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에게는 좋은 자리를 내주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발판 밑에 앉도록 했던 것이 그러한 사례 중 하나였습니다. 야고보 서간은 이 차별이 바로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며,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행위임을 지적합니다. 또한 복음서에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가 나옵니다.(마르 12,41-44; 루카 21,1-4 참조) 즉 하느님은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 빈곤한 과부의 전 재산인 렙톤 두 닢을 더 크게 보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진실한 이들은 지켜주시나 거만하게 구는 자에게는 호되게 갚으시기”(시편 31,24)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위선과 관계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앙인이 자주,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이 위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위선이 아닌 솔직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위선적 신앙의 삶은,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목숨을 빼앗아 갔듯이 하느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반대로 솔직하고 진실한 신앙은 하느님을 만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바룩서
6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바룩서는 내용적으로 살펴보면 성경 목록 바로 앞에 위치한 예레미야서, 애가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애가 그리고 바룩 모두 바빌론의 예루살렘 정렴과 유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룩서 서문인 1장에서 바룩서의 저자라고 말하고 있는 바룩이 예레미야서에서 예레미야의 비서 또는 서기관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기에(예레 36,1-8 참조)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들을 하나로 생각해서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바룩서의 실제 저자는 예레미야서에서 말하고 있는 바룩이 아닙니다. 바룩서 1장 서문에서 전해주고 있는 정보들이 예레미야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시기상으로 일치하지 않으며, 6장의 예레미야의 편지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단락 역시 글의 구성이나 방식등이 서로 상이합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바룩서는 최종 편집자가 바룩이라는 예레미야의 서기관이었던 인물을 차명 저자로 내세운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장 1-14절은 바룩서의 도입부로서 역사적 서문에 해당합니다. 이 부분은 바룩서가 어떠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작성되었으며 어떤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불태운지 오 년째 되던 해, 그달 초이렛날”(1,2), 즉 BC 582년에 바룩서는 작성되었으며 당시 바룩과 모든 백성들은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저마다 돈을 모아서 예루살렘의 남은 백성들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빼앗긴 성전 기물들을 돌려받아 유다 땅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남은 백성들에게 이 돈으로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마련해서 하느님의 제단에 바치면서 유배를 온 자신들이 바빌론 치하에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청합니다.
이어지는 1장 15절부터 3장 8절까지는 참회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여기서 바룩은 먼저 지난 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합니다. 바룩은 이집트 탈출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판관의 시대와 왕정 시대를 거치면서 하느님께서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한 가르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깨우셨지만, 그들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하느님을 거스르고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 하느님 보시기에 옳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경고가 현실이 된 것이라고 바룩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의롭고 공정하신 하느님이시기에 그런 점에서 자신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은 분명히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빚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바룩은 “전능하신 주님, 이스라엘의 하느님! 고통 받는 목숨과 지친 영혼이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주님, 들어 주소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으니 자비를 베푸소서.”(3,1-2)라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하느님의 자비에 간청하고 매달립니다.
3장 9절부터 4장 4절까지는 지혜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바룩은 이스라엘을 향해 생명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고한 뒤, 지혜의 샘을 저버렸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파괴되었고 유배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하느님만을 믿고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킬 때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룩서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근원이라는 전형적인 지혜문학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슬기는 하느님의 명령과 길이 남을 율법을 기록한 책이라고 말함으로써 지혜가 곧 토라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이러한 토라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영원히 살지만 토라의 길을 저버린 사람은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장 5절부터 5장 9절까지는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와 위로가 주어집니다. 바룩은 다시 한 번 유배라는 비참한 상황에 놓인 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하느님을 저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의인화한 예루살렘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은 남의 땅에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도울 힘이 없는 비참한 처지를 탄식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포기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면서 부르짖으라고,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먼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독려하는 대목이 전해진 다음 뒤이어 예루살렘을 향한 위로도 주어집니다. 바룩은 “용기를 내어라, 예루살렘아! 너에게 이름을 지어 주신 분께서 너를 위로하시리라.”(4,30)라고 말하면서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위로하실 것이며, 예루살렘을 침략한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떠나보낸 아들들이 온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할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버리고 다시금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6장은 예레미야의 편지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유배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 경배드릴 분은 당신뿐이십니다.”(6,4)라고 말하면서 어려움 속에서도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고 하느님만을 섬기라고 권고합니다. 당장은 이방 민족들이 섬기는 신이 더 힘센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들은 실체가 없는 것들이며 하느님만이 참 하느님이시며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면서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룩서는 바빌론 유배와 관련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에서 살펴봤듯이 서문의 정보가 연대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고려할 때 일반적으로 바룩서의 제작 시기를 유배 이후의 헬레니즘 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예레미야의 편지도 유배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나와 있지만 우상숭배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편지도 헬레니즘 시대, 그 중에서도 외래 문화와 종교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며 맞서 싸웠던 마카베오 항쟁 시대에 작성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바룩서는 헬레니즘의 종교와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졌던 선조들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지었으며, 그 결과 나라를 잃고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유배를 가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독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21) 유배 이전 예언자들
회개하라 꾸짖고 멸망을 경고한 예언자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임금이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할 때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말로 예언을 시작하고 끝맺습니다. 예언자들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언자들의 사명은 임금이 잘못할 때에 두드러집니다. 임금들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빠질 때 이를 나무라고 경고하는 이들이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임금들은 예언자들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에서 임금과 예언자 사이의 갈등은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됐습니다.
예언 운동은 북 이스라엘에서 발전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는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같은 예언자들이 나타나 백성들을 깨우치고 회개하라고 호소했으나 무위로 끝납니다. 예언서들을 남긴 예언자들 이전에 활동한 예언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예언자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1열왕 17장-2열왕 8장) 엘리야는 바알 우상을 섬기는 이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쳐 싸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말로 “나의 하느님은 야훼”라는 뜻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자기 이름 그대로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수호자였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에 이교 신전을 세우고 우상 숭배를 한 아합 임금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 18,21)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카르멜 산 위에서 450명이 되는 바알의 예언자들과 홀로 싸워 주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온 백성에게 드러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또 아합이 나봇의 재산을 탐해 그를 죽이고 포도밭을 차지하자 아합의 자손들이 처참하게 죽을 것을 예언하면서 임금이 하느님 위에 있을 수 없음을 선포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했을 때 아모스 예언자는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사치 풍조를 규탄하며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으나 역시 실효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쪽 예언자들 활동에서 주목할 것은 ‘메시아 사상’이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메시아란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구약 시대의 임금이 즉위할 때 기름으로 축성했습니다. 사제가 성직에 오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로는 예언자도 기름으로 축성했습니다. 따라서 왕이나 사제, 예언자도 메시아였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가 임금을 세우면서 하느님께 바치는 백성들의 제사 의식은 왕실의 제사로 변질되었습니다. 12지파들이 새해 축제 때에 시나이 계약 갱신 의식을 거행하던 것이 왕정 시대가 열리면서 하느님께서 다윗 왕조의 영속성을 보장했다는 것을 기념하는 축제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이런 의식을 거행하지만 선정을 베푸는 임금은 드물었습니다. 거의 모두 악행만 저지르며 실망시켰습니다. 그래서 제사 의식에서는 차츰 훌륭한 임금이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소망이 깃들게 됩니다. 다윗 후손 가운데에서 이상적인 임금이 나타나 주길 바라는 소망이 바로 메시아 사상의 기원이 됩니다. 곧 메시아 사상의 못자리는 제사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남과 북 두 왕국에서 하느님의 눈에 드는 임금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유다 지배층의 부패를 규탄하고 사제들의 부정 불의를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과 성전도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까지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유다 왕국의 멸망을 예언하면서도 베들레헴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보였습니다. 이는 다윗 왕에 대한 향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 사상을 재해석합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무조건 믿고 안심하는 그릇된 희망을 가져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시나이산 계약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 곧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사야 역시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피력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과 평화로운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가장 비극적인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유다가 망한다는 예언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도 장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계약을 맺을 때가 온다고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현재 질서나 왕국, 그리고 현 사회 체제가 완전히 와해된 다음 폐허 너머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시어 세우시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이 이 메시아가 다스릴 새 왕국에 대한 희망을 백성들에게 남겼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유배의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유배 이전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죄 때문에 심판이 다가오는 것을 경고했다면, 유배 시절부터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어 다윗 왕조를 재건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목자와 양 떼
광야가 넓게 자리해 있는 이스라엘에는 양 떼를 방목하는 베두인 목자가 많습니다. 성경에 목자의 비유가 자주 나와서인지 빈 들에서 풀을 뜯는 양들을 보면 야릇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양은 시력이 좋지 않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겁이 많고 소심해 무리 지어 있기를 좋아합니다. 소심한 성격을 반영이라도 하듯 꼬리가 아래쪽으로 처져 있어 매우 순종적으로 보입니다.
베두인 목자들은 양의 약점을 보완하려고 보통 염소를 섞어 키웁니다. 성경에 나오는 “양 떼”(에제 34,17 등)도 보통 양과 염소를 함께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시력이 좋고 호기심이 많은 염소는 마치 돌격 대장처럼 앞서가며 풀이 많은 곳을 잘 찾아냅니다. 그러면 양들이 염소를 따라다니며 풀을 뜯어 살이 오르게 됩니다. 염소는 활달한 성격처럼 꼬리가 쫑긋 올라가 있어 양과 쉽게 구분됩니다. 우리나라 동물원에서도 양은 서로 오글오글 모여 있는데, 염소는 엉덩이에 뿔 난 송아지처럼 우리 지붕에까지 올라가곤 하지요. 이런 특징 때문에 마태 25,32-33에서도 꼬리가 아래로 내려가 순종적으로 보이는 양을 의인의 상징으로, 꼬리가 위로 솟아 교만해 보이는 염소를 악인의 상징으로 삼은 듯합니다.
그런데 양은 청력이 좋습니다. 자기 목자가 부르면,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갑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샘 가에서 여러 무리가 섞여 쉬어 갈 때도 자기 목자의 소리가 들리면 양은 거기서 빠져나와 목자를 따라갑니다. 그래서 즈카 13,7에는 “목자를 쳐서 양 떼가 흩어지게” 한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그렇다고 목자가 다 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대 유다 법전인 『미쉬나』(기원후 200년)에는 ‘삯꾼’ 목자에게서 양털이나 젖을 구입하지 말라는 금령이 나옵니다. 주인의 허락 없이 양 떼를 착취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 목자와 양 떼가 외진 곳에 따로 떨어진 경우에는 생존 차원에서 예외였습니다. 요한 10,12-13에서도 삯꾼 목자는 보수에만 관심이 있어, 위험이 닥치면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고 꼬집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불성실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악한 목자’에 비유하며 꾸짖었습니다(예레 23,1-8; 에제 34,1-10 등).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대신 맡았으면서도 ‘주인’의 허락 없이 양의 등골을 빼고 잡아먹는 ‘삯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회복의 시대가 되면, ‘타락한 이스라엘 지도자들 대신 당신께서 직접 목자가 되시고’(이사 40,11; 에제 34,11-16 등) ‘당신의 대리인으로 이상적인 다윗의 후손을 세우시겠다’(에제 34,23-24; 37,24)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구약의 비유와 약속이 요한 10장으로 이어져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로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목자로 말입니다(요한 10,14-15).
마르코 복음서 이야기 (17) 예수님의 세례(1,9-11)
세례자 요한의 증언(1,7-8) 이후 곧바로 마르코 복음서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등장하는데, 그분의 첫 모습은 매우 아이러니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자신보다 “더 위대한 분”,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크신 분으로 예언했습니다. 이야기를 접하는 수신자는 자연스럽게 그 위대한 분의 장엄한 등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예상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분은 인간 행렬이나 천상적 수행원(가령, 천사 무리) 없이 홀로 등장하십니다. 게다가 요한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으로 요한을 찾아오십니다. 특히 나자렛은 구약성경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작고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로 위대한 인물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요한 1,46 참조).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가장 역설적인 점은 미래에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이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요한으로부터 받았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분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납니다(15,39 참조).
마르코 복음서는 아이러니라는 문학적 기법을 통해 인간의 생각과 논리를 뒤집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한 분’이시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어, 여느 사람처럼 인류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게다가 죄인의 모습으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 모든 예수님의 행적은 하느님이 세상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에게 멀리 떨어져 그들의 삶과 전혀 관계없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함께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습이라는 점은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가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에 놓이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비둘기는 노아의 홍수 시기에 처벌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표징(창세 8,8-12)이자 구약에서 희생제물로 인정되는 날짐승(레위 5,7; 12,6; 14,44; 15,14)이었습니다.
또한 이야기를 접하는 수신자는 하늘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증언을 듣습니다. 이 증언을 통해 예수님과 하느님 사이는 막역한 사이이며,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특별한 분으로 이 세상에 보내어진 참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됩니다. 설화자로부터 들었던 예수님의 신원이 참임을 확인하면서(1,1 참조), 수신자는 앞으로 예수님이 이루게 될 하느님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