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FONT color=#008000>신경림 시 모음 41편<BR>☆★☆★☆★☆★☆★☆★☆★☆★☆★☆★☆★☆★<BR>《1》<BR>가난한 사랑의 노래<BR><BR>신경림<BR><BR>가난하다고 해서 <BR>외로움을 모르겠는가<BR>너와 헤어져 돌아오는<BR>눈 쌓인 골목길에 <BR>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BR><BR>가난하다고 해서 <BR>두려움이 없겠는가<BR>두 점을 치는 소리<BR>방범대원의 호각소리 <BR>메밀묵 사려 소리에<BR>눈을 뜨면 멀리<BR><BR>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BR><BR>가난하다고 해서 <BR>그리움을 버렸겠는가<BR>어머님 보고 싶소 <BR>수없이 뇌어보지만<BR>집 뒤 감나무에 <BR>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BR>새빨간 감 <BR>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BR><BR>가난하다고 해서 <BR>사랑을 모르겠는가<BR>내 볼에 와 닿던 <BR>네 입술의 뜨거움<BR>사랑한다고 <BR>사랑한다고 <BR>속삭이던 네 숨결<BR>돌아서는 내 등뒤에 <BR>터지던 네 울음<BR><BR>가난하다고 해서 <BR>왜 모르겠는가<BR>가난하기 때문에 <BR>이것들을...<BR>이 모든 것들을 <BR>버려야 한다는 것을<BR>☆★☆★☆★☆★☆★☆★☆★☆★☆★☆★☆★☆★<BR>《2》<BR>가을비 <BR><BR>신경림 <BR><BR>젖은 나뭇잎이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는 <BR>간이역에는 찻 시간이 돼도 손님이 없다 <BR>플라타너스로 가려진 낡은 목조 찻집 <BR>차 나르는 소녀의 머리칼에서는 풀 냄새가 나겠지 <BR>오늘 집에 가면 헌 난로에 불을 당겨 <BR>먼저 따끈한 차 한잔을 마셔야지 <BR>빗물에 젖은 유행가 가락을 떠밀며 <BR>화물차 언덕을 돌아 뒤뚱거리며 들어설 제 <BR>붉고 푸른 깃발을 흔드는 <BR>늙은 역무원 굽은 등에 흩뿌리는 가을비 <BR>☆★☆★☆★☆★☆★☆★☆★☆★☆★☆★☆★☆★<BR>《3》<BR>갈대 <BR><BR>신경림 <BR><BR><BR>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BR>조용히 울고 있었다.<BR><BR>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BR>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BR><BR>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BR>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BR>까맣게 몰랐다.<BR><BR>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BR>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BR>그는 몰랐다. <BR>☆★☆★☆★☆★☆★☆★☆★☆★☆★☆★☆★☆★<BR>《4》<BR>겨울밤 <BR><BR>신경림<BR><BR>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BR>묵내기 화투를 치고<BR>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BR>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BR>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BR>펑펑 쏟아지는데<BR>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BR>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BR>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BR>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BR>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BR>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BR>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 뿐<BR>올해에는 닭이라고 쳐 볼거나<BR>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BR>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BR>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BR>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BR>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BR>하얗구나 눈이여 쌓여<BR>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BR>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BR>숨은 저 계집애들한테<BR>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BR>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 뿐<BR>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BR>☆★☆★☆★☆★☆★☆★☆★☆★☆★☆★☆★☆★<BR>《5》<BR>그 여름 <BR><BR>신경림<BR><BR>한 사람의 울음이 <BR>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BR>한 사람의 노래가<BR>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왔다<BR><BR>구름을 몰고오고<BR>바람과 비를 몰고왔다<BR>꽃과 춤을 불러오고<BR>저주와 욕설과 원망을 불러왔다<BR><BR>한 사람의 노래가<BR>온 거리에 노래를 몰고오고<BR>한 사람의 죽음이<BR>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다<BR>☆★☆★☆★☆★☆★☆★☆★☆★☆★☆★☆★☆★<BR>《6》<BR>기차<BR><BR>신경림<BR><BR><BR>꼴뚜기젓 장수도 타고 땅 장수도 탔다 <BR>곰배팔이도 대머리도 탔다 <BR>작업복도 미니스커트도 청바지도 타고 <BR>운동화도 고무신도 하이힐도 탔다 <BR>서로 먹고 사는 애기도 하고 <BR>아들 며느리에 딸 자랑 사위 자랑도 한다 <BR>지루하면 빙 둘러앉아 고스톱을 치기도 한다 <BR>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끝에 <BR>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투기도 하지만 <BR>그러다가 차창 밖에 천둥 번개가 치면 <BR>이마를 맞대고 함께 걱정을 한다 <BR>한 사람이 내리고 또 한 사람이 내리고.....<BR>잘 가라 인사하면서도 남은 사람 가운데<BR>그들 가는 곳 어딘가를 아는 사람은 없다 <BR>그냥 그렇게 차에 실려 간다<BR>다들 같은 쪽으로 기차를 타고 간다 <BR><BR>☆★☆★☆★☆★☆★☆★☆★☆★☆★☆★☆★☆★<BR>《7》<BR>길 <BR><BR>신경림 <BR><BR>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BR>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 않는다<BR><BR>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BR>큰물에 우정 허리를 동강내어<BR>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든다<BR><BR>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BR>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사는 <BR>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BR><BR>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BR>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BR>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BR><BR>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BR>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BR>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BR><BR>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BR>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BR>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BR>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BR>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BR>☆★☆★☆★☆★☆★☆★☆★☆★☆★☆★☆★☆★<BR>《8》<BR>까치소리 <BR><BR>신경림<BR><BR>간밤에 얇은 싸락눈이 내렸다<BR>전깃줄에 걸린 차고 흰 바람<BR>교회당 지붕 위에 맑은 구름<BR>어디선가 멀리서 까치 소리<BR><BR>싸락눈을 밟고 골목을 걷는다<BR>큰길을 건너 산동네에 오른다<BR>습기찬 판장 소란스런 문소리<BR>가난은 좀체 벗어지지 않고<BR>산다는 일의 고통스러운 몸부림<BR><BR>몸부림 속에서 따뜻한 손들<BR>뜰판에 팽개쳐진 이웃들을 생각한다<BR>지금쯤 그들도 까치 소리를 들을까<BR>소나무숲 잡목숲의 철 이른 봄바람<BR>학교 마당 장터 골목 아직 매운 눈바람<BR><BR>싸락눈을 밟고 산길을 걷는다<BR>철조망 팻말 위에 산뜻한 햇살<BR>봄이 온다고 봄이 온다고<BR>어디선가 멀리서 까치 소리<BR>☆★☆★☆★☆★☆★☆★☆★☆★☆★☆★☆★☆★<BR>《9》<BR>裸木 <BR><BR>신경림<BR><BR><BR>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BR>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BR>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BR>드러낸 몸통에서 흙속에 박은 뿌리까지 <BR>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BR>터진 살갛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BR>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BR>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BR>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BR>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BR>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 안고 <BR>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BR>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BR>☆★☆★☆★☆★☆★☆★☆★☆★☆★☆★☆★☆★<BR>《10》<BR>나무 <BR><BR>신경림<BR><BR>나무를 길러 본 사람만이 안다 <BR>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BR>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BR>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BR>제 치레하느라 오히려<BR>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BR>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BR>또는 못나고 볼품 없이 자란 나무에 <BR>보다 실하고 <BR>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BR><BR>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BR>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BR>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BR>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BR>동무 나무가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BR>훼방한다는 것을 <BR>그래서 뽑거나 <BR>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BR>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BR>☆★☆★☆★☆★☆★☆★☆★☆★☆★☆★☆★☆★<BR>《11》<BR>나무를 위하여 <BR><BR>신경림<BR><BR>어둠이 오는 것이 왜 두렵지 않으랴<BR>불어닥치는 비바람이 왜 무섭지 않으랴 <BR>잎들 더러 썩고 떨어지는 어둠 속에서 <BR>가지들 휘고 꺽이는 비바람 속에서 <BR>보인다 꼭 잡은 너희들 작은 손들이 <BR>손을 타고 흐르는 숨죽인 흐느낌이 <BR>어둠과 비바람까지도 삭여서 <BR>더 단단히 뿌리와 몬통을 키운다면 <BR>너희 왜 모르랴 밝는 날 어깨와 가슴에 <BR>더 많은 꽃과 열매를 달게 되리라는 걸<BR>산바람 바닷바람보다도 짓궂은 이웃들의 <BR>비웃음과 발길질이 더 아프고 서러워 <BR>산비알과 바위너설에서 목 움추린 나무들아 <BR>다시 고개 들고 절로 터져나올 잎과 꽃으로 <BR>숲과 들판에 떼지어 설 나무들아<BR>☆★☆★☆★☆★☆★☆★☆★☆★☆★☆★☆★☆★<BR>《12》<BR>낙타 <BR><BR>신경림<BR><BR>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BR>별과 달과 해와 <BR>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BR>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BR>손 저어 대답하면서, <BR>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BR>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BR>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BR>별과 달과 해와 <BR>모래만 보고 살다가, <BR>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BR>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BR>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BR>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BR>길동무 되어서. <BR>☆★☆★☆★☆★☆★☆★☆★☆★☆★☆★☆★☆★<BR>《13》<BR>날개<BR><BR>신경림<BR><BR>강에 가면 강에 산에 가면 산에 <BR>내게 붙은 것 그 성가신 것들을 팽개치고 <BR>부두에 가면 부두에 저자에 가면 저자에 <BR>내가 가진 그 너절한 것들을 버린다<BR>가벼워진 몸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BR>훨훨 새처럼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BR>그러나 어쩌랴 하룻밤새 팽개친 것 <BR>버린 것이 되붙으며 내 몸은 무거워지니<BR>이래서 나는 하늘을 나는 꿈을 버리지만 <BR>누가 알았으랴 더미로 모이고 켜로 쌓여 <BR>그것들 서섯히 크고 단단한 날개로 자라리라고 <BR>나는 다시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BR>강에 가면 강에서 저자에 가면 저자에서 <BR>옛날에 내가 평개친 것 버린 것 <BR>그 성가신 것 너절한 것들을 도로 주워 <BR>내 날개를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면서 <BR><BR>☆★☆★☆★☆★☆★☆★☆★☆★☆★☆★☆★☆★<BR>《14》<BR>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 <BR><BR>신경림<BR><BR>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BR>돌아가길 단념하고 낯선 길 처마 밑에 쪼그려 앉자<BR>들리는 말 뜻 몰라 얼마나 자유스러우냐<BR>지나는 행인에게 두 손 벌려 구걸도 하고<BR>동전 몇닢 떨어질 검은 손바닥<BR><BR>그 손바닥에 그어진 굵은 손금<BR>그 뜻을 모른들 무슨 소용이랴<BR>☆★☆★☆★☆★☆★☆★☆★☆★☆★☆★☆★☆★<BR>《15》<BR>냇물을 보며 <BR><BR>신경림<BR><BR>소녀들이 한떼 새옷을 입고 나들이를 나왔다 <BR>재넘어 바람에도 재잘대고 깡총대고<BR>감추려 해도 부끄러운 속살 자꾸만 드러나서 <BR>벼랑을 뛰어내리기 전엔 엄살도 떨어보이는데 <BR>달음박질에 도는 바위너설에 햇살이 더 곱다 <BR>마을 앞은 게걸음으로 저자는 깨끔발로 지날 즘엔 <BR>새옷에 때도 묻고 종아리엔 얼룩도 지겠지 <BR>방죽이 가로막으면 서로 팔을 끼고 <BR>어기영차 밀어서 길을 터라 힘은 곱으로 솟고 <BR>그때쯤 몸은 더렵혀지고 갈기갈기 찢겨 있겠지만 <BR>무슨 상관이랴 지친 다리 끌고라도 <BR>저 들판만 지나면 넓고 푸른 바다인 것을 <BR>새파란하늘에 두듕실 구름만 떠 있을 것을<BR>치마를 들추는 바람에 발걸음 크게 허공에 차리 <BR>☆★☆★☆★☆★☆★☆★☆★☆★☆★☆★☆★☆★<BR>《16》<BR>농무(農舞) <BR><BR>신경림<BR><BR>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BR>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BR>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BR>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BR>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BR>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BR>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BR>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BR>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BR>철없이 킬킬대는구나<BR>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BR>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BR>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BR>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BR>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BR>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BR>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BR>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BR>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BR>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BR><BR>☆★☆★☆★☆★☆★☆★☆★☆★☆★☆★☆★☆★<BR>《17》<BR>눈 <BR><BR>신경림<BR><BR>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BR>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BR>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BR>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BR><BR>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BR>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BR>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테다<BR>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 올랐다가<BR>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BR><BR>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BR>지상에서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BR>이윽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BR>그때 가서 다 잊는다 해도<BR>☆★☆★☆★☆★☆★☆★☆★☆★☆★☆★☆★☆★<BR>《18》<BR>늙은 소나무<BR><BR>신경림<BR><BR>나이 쉰이 넘어야 <BR>비로소 여자를 안다고<BR><BR>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BR>사랑을 안다고 <BR><BR>나이 쉰이 넘어야 <BR>비로소 세상을 안다고<BR><BR>늙은 소나무들은 <BR>이렇게 말하지만 <BR><BR>바람소리 속에서 <BR>이렇게 말하지만. <BR>☆★☆★☆★☆★☆★☆★☆★☆★☆★☆★☆★☆★<BR>《19》<BR>동해바다 <BR><BR>신경림<BR><BR>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BR>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BR>동산만하게 커보이는 때가 많다.<BR>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BR>남에게는 엄격하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BR>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BR>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BR>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BR>깊고 짙푸는 바다처럼<BR>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BR>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BR>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BR>☆★☆★☆★☆★☆★☆★☆★☆★☆★☆★☆★☆★<BR>《20》<BR>뗏목 <BR><BR>신경림<BR><BR>뗏목은 강을 건널 때나 필요하지<BR>강을 다 건너고도<BR>뗏목을 떠메고 가는 미친놈이 어데 있느냐고<BR>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빌려<BR>명진 스님이 하던 말이다<BR>저녁 내내 장작불을 지펴 펄펄 끓는<BR>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절방<BR>문을 열어 는개로 뽀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BR>곰곰 생각해본다<BR>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지지 않겠다고<BR>밤낮으로 바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BR>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야 할 것들을 떠메고<BR>뻘뻘 땀 흘리며 있는 것은 아닐까 <BR>☆★☆★☆★☆★☆★☆★☆★☆★☆★☆★☆★☆★<BR>《21》<BR>만남<BR><BR>신경림<BR><BR>살구꽃 지고 복사꽃 피던 날 <BR>미움과 노여움 속에서 헤어지면서 <BR>이제 우리 다시 만날 일 없으리라 다짐했었지<BR>그러나 뜨거운 여름날 느닷없는 소낙비 피해 <BR>처마 아래로 뛰어드는 이들 모두 낯이 익다 <BR>이마에 패인 깊은 주름 손에 밴 기름때 한결같고 <BR>묻지 말자 그동안 무얼 했느냐 묻지 말자 <BR>손 놓고 비 멎은 거리로 흩어지는 우리들 <BR>후즐근히 젖은 어깨에 햇살이 눈부시리<BR>언제고 다시 만날 걸 이제서 맏는 우리들 <BR>메마른 허리에 봄바람이 싱그러우리 <BR>☆★☆★☆★☆★☆★☆★☆★☆★☆★☆★☆★☆★<BR>《22》<BR>매화를 찾아서 <BR><BR>신경림<BR><BR>구름떼처럼 모인 사람들만 보고 돌아온다<BR>광양 매화밭으로 매화를 보러 갔다가<BR>매화는 덜 피어 보지 못하고<BR>그래도 섬진강 거슬러 올라오는 밤차는 좋아<BR>산허리와 들판에 묻은 달빛에 취해 조는데<BR>차 안을 가득 메우는 짙은 매화향기 있어<BR>둘러보니 차 안에는 반쯤 잠든 사람들뿐<BR>살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과 악취가<BR>꿈과 달빛에 섞여 때로 만개한 매화보다도<BR>더 짙은 향내가 되기도 하는 건지<BR>내년 봄에도 다시 한번 매화 찾아 나섰다가<BR>매화는 그만두고 밤차나 타고 올라올까 <BR>☆★☆★☆★☆★☆★☆★☆★☆★☆★☆★☆★☆★<BR>《23》<BR>목계 장터<BR><BR>신경림<BR><BR>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BR>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BR>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BR>잡초나 일깨우는 잔 바람이 되라네<BR>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BR>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BR>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BR>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BR>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BR>산 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BR>물 여울 모질거든 바위에 붙으라네<BR>민물 새우 끊어 넘는 토방 뒷마루<BR>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BR>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BR>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BR>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BR><BR>☆★☆★☆★☆★☆★☆★☆★☆★☆★☆★☆★☆★<BR>《24》<BR>봄날 <BR><BR>신경림 <BR><BR>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BR>늙은 소나무 아래서<BR>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판다<BR><BR>벚꽃잎이 날아와 앉고<BR>저녁놀 비낀 냇물에서 처녀들<BR>벌겋게 단 볼을 식히고 있다<BR><BR>벚꽃 무더기를 비집으며<BR>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BR>하얀 달이 뜨고<BR>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이 딸이<BR><BR>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파는<BR>삶의 마지막 고살<BR><BR>북한산 어귀<BR>온 산에 풋내 가득한 봄날<BR><BR>처녀들 웃음소리 가득한 봄날<BR>☆★☆★☆★☆★☆★☆★☆★☆★☆★☆★☆★☆★<BR>《25》<BR>빛<BR><BR>신경림<BR><BR>쓰러질 것은 쓰러져야 한다 <BR>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뽑힐 것은 뽑혀야 한다 <BR>그리하여 빈 들판을 어둠만이 덮을 때 <BR>몇 날이고 몇 밤이고 죽음만이 머무를 때 <BR>비로소 보게 되리라 들판 끝을 붉게 물들이는 빛을 <BR>절망의 끝에서 불끈 솟는 높고 큰 힘을 <BR><BR>☆★☆★☆★☆★☆★☆★☆★☆★☆★☆★☆★☆★<BR>《26》<BR>산에 대하여 <BR><BR>신경림<BR><BR>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BR>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BR>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아래 <BR>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이 엎드려 있고 <BR>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BR>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BR>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BR>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BR>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BR>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BR>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BR>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BR>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BR>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BR>눈개비 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BR>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BR>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BR>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BR>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BR>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BR>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BR>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BR>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BR>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BR>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BR>어깨로 바람 맞받아 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 <BR>☆★☆★☆★☆★☆★☆★☆★☆★☆★☆★☆★☆★<BR>《27》<BR>새벽은 아우성 속에서만 <BR><BR>신경림 <BR><BR>새벽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BR>길고 오랜 비바람 속에서 태어나고 <BR>백날 백밤 온 세상을 뒤덮는 <BR>진눈깨비 속에서 태어난다 <BR>새벽은 어둠을 몰아내는 <BR>싸움 속에서 태어난다 <BR>비바람을 야윈 어깨로 막는 <BR>안간힘 속에서 태어나고 <BR>진눈깨비 맨가슴으로 받는 <BR>흐느낌 속에서 태어난다 <BR><BR>새벽은 먼저 산길에 와서 <BR>굴 속에 잠든 다람쥐를 간지르고 <BR>풀잎을 덮고 누운 <BR>풀벌레들과 장난질치지만 <BR>새벽은 다시 산동네에도 와서 <BR>가진 것 날선 도끼밖에 없는 <BR>늙고 병든 나무꾼을 깨우고 <BR>들일에 지쳐 마룻바닥에 쓰러진 <BR>에미 없는 그의 딸을 어루만지지만 <BR>새벽은 이제 장거리에 와서 <BR>장사 채비에 신바람이 난 <BR>주모의 치맛자락에서 춤을 추고 <BR>해장국집에 모여 떠들어대는 <BR>장꾼들과 동무가 되기도 하지만 <BR><BR>새벽은 아우성 속에서만 밝는다 <BR>어둠을 영원히 몰아내리라 <BR>굳은 다짐 속에서만 밝는다 <BR>비바람 진눈깨비 다시 못 오리라 <BR>힘껏 낀 어깨동무 속에서만 밝는다 <BR>다람쥐도 풀벌레도 산짐승도 <BR>늙고 병든 나무꾼도 장꾼도 <BR>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사람들도 <BR>모두 하나로 어깨동무를 하고 <BR>크고 높이 외치는 <BR>아우성 속에서만 밝는다 <BR>☆★☆★☆★☆★☆★☆★☆★☆★☆★☆★☆★☆★<BR>《28》<BR>세월 <BR><BR>신경림<BR><BR>흙 속을 헤엄치는 <BR>꿈을 꾸다가 <BR>자갈밭에 동댕이쳐지는 <BR>꿈을 꾸다가…… <BR><BR>지하실 바닥 긁는 <BR>사슬소리를 듣다가 <BR>무덤 속 깊은 곳의 <BR>통곡소리를 듣다가…… <BR><BR>창문에 어른대는 <BR>하얀 달을 보다가 <BR>하늘을 훨훨 나는 <BR>꿈을 꾸다가…… <BR>☆★☆★☆★☆★☆★☆★☆★☆★☆★☆★☆★☆★<BR>《29》<BR>싹<BR><BR>신경림 <BR><BR>어둠을 어둠인지 모르고 살아온 사람은 모른다 <BR>아픔도 없이 겨울을 보낸 사람은 모른다<BR>작은 빛줄기만 보여도 우리들 <BR>이렇게 재재발 거리며 달려나가는 까닭을<BR>눈이 부셔 비틀대면서도 진종일<BR>서로 안고 간질이며 낄낄대는 까닭을<BR><BR>그러다가도 문득 생각나면 <BR>깊이 숨을 소중하고도 은밀한 상처를 꺼내어 <BR>가만히 햇빛에 내어 말리는 까닭을 <BR>뜨거운 눈물로 어루만지던 까닭을<BR><BR>☆★☆★☆★☆★☆★☆★☆★☆★☆★☆★☆★☆★<BR>《30》<BR>쓰러지진 것들을 위하여<BR><BR>신경림<BR><BR>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BR>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BR>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BR>몇 십만이 모이는 유세 장을 마다하고<BR>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 했다<BR>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BR>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BR>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BR>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BR><BR>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BR>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BR>☆★☆★☆★☆★☆★☆★☆★☆★☆★☆★☆★☆★<BR>《31》<BR>압록강에서 <BR><BR>신경림 <BR><BR>강은 가르지 않는다. <BR>사람과 사람을 가르지 않고 <BR>마을과 마을을 가르지 않는다. <BR>제 몸 위에 작은 나무토막이며 <BR>쪽배를 띄워 서로 뒤섞이게 하고, <BR>도움을 주고 시련을 주면서 <BR>다른 마음 다른 말을 가지고도 <BR>어울려 사는 법을 가르친다. <BR>건너 마을을 남의 나라 <BR>남의 땅이라고 생각하게 <BR>버려 두지 않는다. <BR>한 물을 마시고 한 물 속에 뒹굴며 <BR>이웃으로 살게 한다. <BR><BR>강은 막지 않는다. <BR>건너서 이웃 땅으로 가는 사람 <BR>오는 사람을 막지 않는다. <BR>짐즛 몸을 낮추어 쉽게 건너게도 하고, <BR>몸 위로 높이 철길이며 다리를 놓아, <BR>꿈많은 사람의 앞길을 기려도 준다. <BR>그래서 제가 사는 땅이 좁다는 사람은 <BR>기차를 타고 멀리 가서 꿈을 이루고, <BR>척박한 땅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은 <BR>강 건너에 농막을 짓고 오가며 <BR>농사를 짓다가, 아예 <BR>농막을 초가로 바꾸고 <BR>다시 기와집으로 바꾸어, <BR>새터전으로 눌러 앉기도 한다. <BR><BR>강은 뿌리치지 않는다. <BR>전쟁과 분단으로 <BR>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제 고장 사람들이 <BR>뒤늦게 찾아와 바라보는 <BR>아픔과 회한의 눈물젖은 눈길을 <BR>거부하지 않는다. <BR>제 조상들이 쌓은 성이며 저자를 <BR>폐허로 버려 둔 채 <BR>탕아처럼 떠돌다 돌아온 <BR>메마른 그 손길을 따듯이 잡아 준다. <BR>조상들이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하여 <BR>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BR>수없이 건너가고 건너온 <BR>이 강을 잊지 말란다. <BR><BR>강은 열어 준다, 대륙으로 <BR>세계로 가는 길을, <BR>분단과 전쟁이 만든 상처를 <BR>제 몸으로 말끔히 씻어 내면서. <BR>강은 보여준다, <BR>평화롭게 사는 것의 아름다움을, <BR>어두웠던 지난날들을 <BR>제 몸 속에 깊이 묻으면서. <BR><BR>강은 가르지 않고, 막지 않는다. <BR>☆★☆★☆★☆★☆★☆★☆★☆★☆★☆★☆★☆★<BR>《32》<BR>어둠 속으로 <BR><BR>신경림 <BR><BR>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들 가고있다 <BR>꽃으로 피어 서로 시새우던 안타까움을 두고 <BR>뜨거운 햇볕에 몸을 익히던 어려움을 잊고 <BR>달빛과 이슬에 들뜨던 부끄러움을 버리고 <BR>한낱 과일로 떨어져 푸섶에 썩기 위하여 <BR>섬돌에서 우는 귀뚜라미 울음도 듣지 못하는 <BR>가을 하늘을 나는 기러기떼도 보지 못하는 <BR>깊고 긴 어둠 속으로 허둥대며 가고 있다 <BR><BR>☆★☆★☆★☆★☆★☆★☆★☆★☆★☆★☆★☆★<BR>《33》<BR>여름날 <BR><BR>신경림<BR><BR>마천에서 <BR><BR>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BR>소나기 한 줄기 지났나보다 <BR>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BR>머뭇거리는 동구 앞 <BR>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BR>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BR>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BR>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BR>☆★☆★☆★☆★☆★☆★☆★☆★☆★☆★☆★☆★<BR>《34》<BR>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BR><BR>신경림<BR><BR>일상에 빠지지 않고 <BR>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BR>억눌리는 자에게 헌신적이며 <BR>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BR>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BR>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BR>목숨을 걸고 치열히 <BR>순간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BR>날마다 진보하며 <BR>성실성에 있어 <BR>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BR>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BR>새로운 모습을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BR>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BR>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BR>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내며 <BR>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BR>내가 잊어서는 안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BR>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BR>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BR>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BR>끊임없는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BR>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BR>☆★☆★☆★☆★☆★☆★☆★☆★☆★☆★☆★☆★<BR>《35》<BR>장미에게 <BR><BR>신경림<BR><BR>나는 아직도 네 새빨간<BR>꽃만을 아름답다 할 수가 없다<BR>어쩌랴, 벌레 먹어 누렇게 바랜<BR>잎들이 보이는데야<BR>흐느끼는 귀뚜라미 소리에만<BR>흘릴 수가 없다<BR><BR>다가올 겨울이 두려워<BR>이웃한 나무들이<BR>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BR><BR>꽃잎에 쏟아지는 달빛과<BR>그 그림자만을 <BR>황홀하다 할 수가 없다<BR>귀기울여 보아라<BR>더 음산한 데서 벌어지는 <BR>더럽고 야비한 음모의 수런거림에<BR><BR>나는 아직도<BR>네 복사꽃 두 뺨과<BR>익어 터질 듯한 가슴만을 <BR>노래할 수가 없다.<BR>어쩌랴, 아직 아물지 않은 <BR>시퍼런 상처 등뒤로 드러나는데야<BR>애써 덮어도 곪았던 자욱<BR>손등에 뚜렷한데야<BR>☆★☆★☆★☆★☆★☆★☆★☆★☆★☆★☆★☆★<BR>《36》<BR>정월의 노래<BR><BR>신경림<BR><BR>눈에 덮여도<BR>풀들은 싹트고<BR>얼음에 깔려서도<BR>벌레들은 숨쉰다.<BR><BR>바람에 날리면서<BR>아이들은 쉬 놀고<BR>진눈깨비에 눈 못 떠도<BR>새들은 지저귄다<BR><BR>살얼음 속에서도<BR>젊은이들은 사랑하고<BR>손을 잡으면<BR>숨결은 뜨겁다<BR><BR>눈에 덮여도 <BR>먼동은 터오고<BR>바람이 맵찰수록 <BR>숨결은 더 뜨겁다<BR>☆★☆★☆★☆★☆★☆★☆★☆★☆★☆★☆★☆★<BR>《37》<BR>진달래<BR><BR>신경림<BR>1<BR>냇물 타고 내려온 복대기가<BR>마당을 덮은 가겟집<BR>씨리목 산울타리에<BR>진달래가 섞여 피었다<BR><BR>키가 큰 그 집 의붓딸이<BR>나는 좋았다<BR>가겟방 들마루에 나앉으면<BR>소나무 가지 사이로<BR>달 뜨는 게 보이고<BR><BR>그애 제 죽은 애비 자랑에<BR>툭하면 밤이 깊었다<BR>후미진 골짝 돌자갈 밑에 누워<BR>소쩍새 울음에 눈물 삼킬 그애 애비<BR><BR>2 <BR>나는 삼짇날 그애 꿈을 꾼다<BR>산울타리에 섞여 피던<BR>진달래를 본다<BR>재봉틀에 손 찔리며<BR>쏟아지는 잠 쫓는 그애의 딸을 본다<BR><BR>골목 안을 서성대는<BR>가난한 어머니를 본다<BR><BR>무엇인가<BR>우리를 하나로 묶고 있는<BR>이 길고 질긴 줄은<BR><BR>소나무 사이로<BR>달 뜨는 걸 본다<BR>☆★☆★☆★☆★☆★☆★☆★☆★☆★☆★☆★☆★<BR>《38》<BR>집으로 가는 길<BR><BR>신경림 <BR><BR>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BR>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BR>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BR>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BR>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BR>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BR>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BR>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BR>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BR>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BR>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BR>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BR>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BR>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BR>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BR>☆★☆★☆★☆★☆★☆★☆★☆★☆★☆★☆★☆★<BR>《39》<BR>초원<BR><BR>신경림<BR><BR>지평선에 점으로 찍힌 것이 낙타인가 싶은데<BR>꽤 시간이 가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BR><BR>나무토막인가 해서 집어든 말똥에서<BR>마른풀 냄새가 난다.<BR><BR>짙푸른 하늘 저편에서 곤히 잠들었을<BR>별들이 쌔근쌔근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BR><BR>도무지 내가 풀 속에 숨은 작은 벌레보다<BR>더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BR><BR>내가 가서 살 저세상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하니<BR>갑자기 초원이 두려워진다.<BR><BR>세상의 소음이 전생의 꿈만 같이 아득해서<BR>그립고 슬프다.<BR>☆★☆★☆★☆★☆★☆★☆★☆★☆★☆★☆★☆★<BR>《40》<BR>파도<BR><BR>신경림<BR><BR><BR>어떤 것은 내 몸에 얼룩을 남기고 <BR>어떤 것은 손발에 흠집을 남긴다 <BR>가슴팍에 단단한 응어리를 남기고 <BR>등줄기에 푸른 상채기를 남긴다 <BR>어떤 것은 꿈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BR>아쉬움으로 남고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BR>고통으로 남고 미움으로 남는다 <BR>그러다 모두 하얀 파도가 되어간다 <BR>바람에 몰려서 개펄에 내팽개쳐지고 <BR>배다리에서는 육지에 매달려지기도 하다가<BR>내가 따라갈 수 없는 수평선 너머 <BR>그 먼곳으로 아득히 먼 곳으로 <BR>모두가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BR>☆★☆★☆★☆★☆★☆★☆★☆★☆★☆★☆★☆★<BR>《41》<BR>파장(罷場) <BR><BR>신경림<BR><BR>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BR>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BR>목로에 앉아 먹걸리들 들이키면<BR>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BR>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BR>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BR>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BR>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BR>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BR>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BR>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BR>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BR>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BR>☆★☆★☆★☆★☆★☆★☆★☆★☆★☆★☆★☆★</FONT><BR><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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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즐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