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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네디 피격 순간, 영화에서...
[ 영화 JFK]
1991년 말, <플래툰>, <살바도르> 등의 명작으로 잘 알려진 올리버 스톤 감독이 연출한 영화 <JFK>가 미국에서 개봉하였습니다. 상영시간이 무려 3시간이 넘는 이 영화의 내용은 케네디 암살은 미국 군산복합체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짐 게리슨 검사의 주장에 입각해 이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 짐 개리슨 검사
언제나 논쟁을 피하지 않는 올리버 스톤 감독은 베트남전 후유증을 다룬 충격적인 <7월 4일생> 이후 또다시 사람들에게 분노와 경악을 안겨준 것이 이 영화였습니다.
* 게리슨 검사로 나온 케빈 코스트너
아직까지도 케네디 암살사건의 배후에 대하여는 온전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이런 배경을 깔면서 올리버 스톤은 몇 가지 추측들을 필름에 담아 매력적인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영화의 중심에는 짐 개리슨(케빈 코스트너)이 있습니다. 그는 뉴올리언즈 지방검사로 JFK의 암살에 얽힌 자신만의 이론을 갖고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수사를 진행했던 실존인물입니다. 스톤 감독은 개리슨—어떤 사람들은 그가 터무니없는 음모이론과 진짜 실마리를 구분할 줄 모르고 마구잡이로 흥분하는 인물이라고 생각도 합니다—의 이론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영화의 출발점이자 상징적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1963년 11월 22일 있었던 미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살인 사건(그리고 아직까지도 완전히 풀리지 않은 살인사건. 그날 목격자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안다면 정말로 충격적인 일입니다)에 대해 누군가를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려고 시도한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스톤은 다큐멘터리 필름을 사용하고 회상과 재연, 빠른 편집, 대사와 음악을 능숙하게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막대한 양의 증거와 증언을 토대로 수많은 의견과 이론을 엮어내면서도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눈가림을 하지 않습니다.
숨막히는 세 시간이 지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후에도 우리는 어떤 결론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리 하비 오스왈드가 단독으로 행동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만은 확신하게 됩니다. 댈러스의 자동차 퍼레이드에서 케네디가 암살되던 장면과 잭 루비가 오스왈드를 살해하는 장면 등, 1963년에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그 사건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사람들을 위한 모든 것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 영화에서...
우리는 개리슨이 보는 그대로 그 장면을 봅니다. 스톤은 이 평범한 남자로 하여금 그 많은 기사와 보도문을 뒤지게 합니다. 아마도 CIA와 카스트로 지지자들 혹은 다양한 극렬 집단이 연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음모를 파헤치도록 확신을 심어준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수많은 거물급 배우들이 작은 역할들을 통해 끊임없이 들락날락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시종일관 우리의 주의를 붙잡고 있는 코스트너의 강렬한 연기가 없었다면 스톤은 이 진실의 탐구에 우리가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영화에서...
용의자 클레이 쇼 역의 토미 리 존스부터 조 페시와 게리 올드만(오스왈드 역), 도널드 서덜랜드, 잭 레먼, 월터 매튜, 케빈 베이컨 그리고 스페이섹 등도 한결같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지닌 올리버 스톤 감독의 진정으로 경이적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7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다른 나라에서도 흥행에 성공하면서 케네디 암살과 관련한 기존의 음모설을 강화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영화에 깊이 몰입한 관객들은 영화관을 나올 때쯤이면 거의 대부분 음모설을 확신하는 표정을 짓게 됩니다.
* 영화에서...체포된 오스왈드(오른쪽, 게리 올드만 분)
각종 음모설에 대하여는 이 글 마지막에 살펴봅니다.
이 영화는 골든글로브 감독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 8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나 편집상. 촬영상으로 2개 부문 수상에 그쳤습니다.
[ 간략한 영화 줄거리 ]
1963년 12월 22일 오후 12시 30분, 텍사스 주의 댈러스.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딜리 풀라자를 달리는 링컨 콘티넨털 오픈카를 향해 세 발의 총탄이 날아들었습니다. 첫 총탄은 케네디(스티브 리드 분)를 명중시켰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총탄이 날아와 앞좌석에 타고 있는 텍사스 주지사 코널리를 관통했습니다. 이어서 또 한발의 치명적인 총탄이 대통령의 머리에 직통으로 날아들었습니다.
* X(익명의 제보자, 도널드 서덜랜드 분), 오른편
그리고 총격이 있은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24세의 백인 남자가 체포되었습니다. 용의자인해병대 출신의 리 하비 오스왈드(게리 올드만 분)는 한때 소련에 망명한 적이 있으며, 그해 여름에는 뉴올리언즈에서 카스트로 지지운동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23시간 동안 계속된 수사에서, 오스왈드는 계속 "아무도 쏜 적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로부터 2일 뒤, 경찰서에서 호송되던 오스왈드는 텔레비젼으로 중계되는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그를 쏜 것은 잭 루비(브라이언 도일-머레이 분)라는 자로 스트립 쇼를 하는 술집 주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잭 루비 역시 2년 뒤 감옥에서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은 국내 여론과 외국의 의심을 무마하기 위해 급히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한 진상조사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대법원장 얼 워렌을 의장으로 하는 이 위원회에서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포함한 여러 자료를 토대로 '워렌 보고서'를 작성, 이 사건이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지었고,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수많은 학자와 수사관들은 이 위원회의 수사방법에 의문을 제기했고, 자기 나름대로의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짐 개리슨(케빈 코스트너 분) 검사로 그는 JFK 암살 사건의 배후인물을 재판장에 최초로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때 게리슨 검사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는 X(도날드 서덜랜드 분)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X는 게리슨에게 누가, 어떻게 케네디를 죽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케네디를 죽였는가"가 사건의 본질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게리슨에게 당신의 승리는 예측할 수는 없지만 사실을 들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면서 그를 격려합니다.
* 법정에서 게리슨
하지만 게리슨이 유력한 증인으로 법정에 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차례로 의문사 당하고 게리슨 팀 내에서 조차 내분이 일어날 정도로 게리슨은 곤궁에 처합니다. 63년에 일어나 종결 된 지 6년 후인 1969년 게리슨은 JFK 저격사건의 배후 인물로 남부지역에서 입김이 센 경제인 클레이 쇼(토미 리 존스 분)를 기소해서 법정에 세웁니다.
하지만 클레이 쇼는 결국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게리슨이 법정을 나가며 영화는 끝납니다. 그리고 이런 자막이 화면에 잡힙니다.
"1979년 짐 게리슨은 대법원 판사가 되었다. 그는 1989년에도 다시 대법원 판사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JFK의 암살은 아직도 미궁이며, 그의 대한 기록은 2023년에야 공개 된다."
< 케네디 암살 사건의 전모 >
1963년 11월 22일 오전 11시 38분, 텍사스 주 댈러스 공항에 대통령 전용기가 착륙했습니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한 사내와 매력적인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바로 대통령 존 F. 케네디와 퍼스트레이디 재클린 케네디였습니다.
케네디의 이번 텍사스 여행은 사실상 완고한 반대 세력 달래기였습니다. 그 다음해, 즉 1964년은 케네디에게 있어서 재선 선거가 있는 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텍사스는 그의 초능력에 흔들리지 않는 주들 중 하나였습니다. 시민권 문제, 케네디가 카스트로를 공격하지 않은 것 등에 대해 보수적인 텍사스 주민들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단순히 정치적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댈라스에는 수많은 폭력적 극단주의자 단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결국은 사단이 나지만 대통령의 안전한 자동차 퍼레이드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 단란했던 한 때, 말을 탄 캐럴라인, 아들 존 존
* 케네디의 피격 직전의 카 퍼레이드
오후 12시 30분 직전에 케네디의 자동차 행렬은 메인 스트리트의 딜리 플라자로 들어와 휴스턴 스트리트에서 우회전합니다. 그리고 한 구역 지난 후 교과서 창고 밑에 있는 엘름 스트리트 쪽으로 좌회전했습니다. 이것은 거의 120도 회전이어서 그때 자동차 행렬의 속도가 시속 16km로 떨어졌습니다.
가장 먼저 두 대의 오토바이가 왔고 그 뒤를 이어 케네디의 리무진이 왔는데 대통령과 재키는 뒷좌석에 탔고 코널리 주지사 부부는 앞좌석에 탔습니다. 엘름 스트리트 연도의 군중들은 소리 지르며 손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코널리 부인이 “대통령 각하, 당신은 댈러스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고, 대통령은 “그렇고 말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케네디와 재키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바로 그 순간, 첫 번째 총탄이 날아왔습니다. 그 총탄은 케네디의 등 윗부분을 관통했습니다. 이 총탄은 척추를 건드리지는 않았으나 충격파로 인해 6번 경추부가 손상되었습니다. 다시 두 번째 총탄이 날아와 앞좌석의 주지사 존 코널리를 맞혔습니다. 그도 심각한 총상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마침 그때 그곳에 있던 민간인 재프루더가 우연히 찍은 동영상을 보면 아주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즉 대통령의 팔은 거의 턱까지 올라가서 팔꿈치가 튀어나오고 주먹을 꽉 쥐었으며 팔은 안으로 꽉 껴안고 있었습니다. 케네디는 팔을 껴안은 채 재키에게 기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팔을 뻗어 이 이상한 자세로부터 남편의 왼쪽 팔꿈치를 끌어내리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케네디의 두개골 오른쪽이 날아가 버렸다. 치명적인 세 번째 총탄이 날아온 것입니다. 코널리 부인은 재키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그의 뇌가 내 손 안에 있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시가행진에 환호를 보내던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단 6초 동안,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총에 맞은 사실이 확인되자 리무진은 급히 가속기를 밟아 5km 떨어진 인근의 파크랜드 병원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갔습니다.
* 피격 장소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들은 대통령을 소생시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총상으로 머리의 1/4 정도가 날아간 대통령을 되살리긴 어려웠습니다. 시계가 1시를 가리킬 무렵, 바쁘게 움직이던 의료진의 손이 멈췄습니다. 대통령의 얼굴 위에 하얀 천이 덮였습니다.
2시 4분, 케네디의 시신이 병원을 출발해 2시 18분 대통령 전용기에 안치되었습니다. 2시 39분, 혼잡스러운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린든 존슨 부통령은, 피묻은 옷차림 그대로 충격에 싸여 있던 재키 그리고 급히 달려온 사라 휴즈 연방 판사를 앞에 두고 제36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습니다.
* 붙잡힌 리 하비 오스왈드
* 존슨 부통령의 대통령 선서 장면
케네디가 시가 행진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24살의 리 하비 오스왈드라는 남자가 댈러스 시내의 변두리에 있는 조그만 공원 딜리 프라자에 자리 잡은 교과서 배부회사인 텍사스 교과서 창고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오스왈드의 직장이었습니다. 오스왈드는 수많은 비밀을 감출 수 있을 만큼 온화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뉴올리언스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두 달 전에 죽었으며,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외톨이(그의 짧은 전 생애를 통해 외톨이라는 단어는 그를 항상 따라 다녔습니다)가 된 오스왈드는 총기에 매료되었습니다. 10대가 되어서는 좌익 성향에 빠졌으며 어머니인 마가릿을 때릴 만큼 폭력적이 되었습니다. 몇 번인가 어머니에게 칼을 겨누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에도 불구하고 1956년 17세 때, 해병대에 입대했는데 몇 주 동안의 훈련만으로 특등 사수의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망원조준장치의 도움 없이도 10에 8번은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25cm 크기의 과녁 중심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 준비는 끝났다
하늘은 맑게 갰고 날씨는 따뜻했으며 군중들은 이미 자동차가 지나갈 길가에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행진 경로는 신문에 발표되어 있었습니다. 행진의 무렵에 케네디는 딜리 플라자로 가도록 계획되었는데 그곳은 오스왈드가 근무하는 교과서 창고 건물 앞이었습니다.
창고 직원들은 삼삼 오오 창가에 모여서 행렬을 내려다보았는데 오스왈드는 그 건물 6층의 동남쪽 모퉁이에 혼자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쌓아놓은 교과서 상자 더미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 교과서 창고로부터의 세 발의 총격
그의 손에는 망원 조준기가 달린 이탈리아제 만리커 칼카노 라이플총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 총은 시카고에 있는 총기 통신판매회사로부터 구입한 것이었습니다. 후에 음모론자들은 만리커 칼카노가 변변찮은 라이플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움직이는 목표물을 맞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FBI 실험에서는 매우 정확한 총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 총은 1초에 600m의 속도로 6.6mm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왈드는 그날 아침 긴 갈색 뭉치를 들고 출근했는데 동료들에게는 ‘커튼 봉’이라고 말했습니다. 12시 정오, 오스왈드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 외로운 암살자
리 하비 오스왈드에 관한 많은 연구는 그가 전형적인 ‘고독한 암살자’의 성향을 가졌음을 증명합니다. 짧고 불행한 해병대 복무(그는 사회주의적 성향으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를 마친 후 그는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의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오스왈드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소련으로 건너가 민스크에 있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거기서 마리나 니콜라예브나 프루사코바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련 시민권을 얻는 데 실패한 후 자살을 시도했으며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 케네디 묘지
정신병원에서 풀려나자 소련이 자신을 거부한데 화가 나 미국으로 돌아와 딸 준과 댈러스에 가까운 포스워스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여러 하찮은 직장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일이 없을 때에는 사회주의자의 신념을 실천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쿠바를 위한 페어플레이’라 불리는 조직에 잠시 들어가서 멕시코로 건너갔으며 쿠바와 소련대사관을 찾아가 망명을 위한 비자를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모든 사회주의적 행동들이 후에 오스왈드가 소련이나 쿠바 심지어 CIA를 위해 일했다고 믿는 음모론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음모론의 문제점은 그와 접촉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오스왈드는 비정상적인 불안정을 지닌 인물”이라고 입을 모은데 있습니다. 그의 성격은 너무 괴팍해서 암살자는 고사하고 간첩으로 쓰기에도 적합하지 않았으며 전문적 정보기관의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 피격 장소(동그라미)
오스왈드는 케네디 암살 전에도 암살자의 행동을 단독으로 한 적이 있었습니다. 1963년 4월 그는 전직 육군 대장이며 가장 보수적인 인종분리주의자인 에드윈 워커의 뒷마당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그에게 총을 발사했습니다. 탄알은 창문턱에 맞고 튀었으나 파편이 워커를 스쳐지나갔습니다.
케네디 암살 후 경찰이 오스왈드의 집을 뒤져 워커의 집을 찍은 사진을 발견할 때까지 그는 용의자 선상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워커의 저격에 실패하자 오스왈드는 그 사람이 좌익이건 우익이건 세상의 권력자에 대한 분노를 더 키워갔습니다.
* 자프루더의 필름이 보여주는 것
오늘날에도 오스왈드의 단독 저격으로 단정하여 암살을 설명하는 것은 열정적 음모론자들로부터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말도 안 돼! 우산 든 남자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하고 그들은 묻습니다. 일명 ‘우산을 든 남자’는 유명한 자프루더의 필름에 등장하는 한 사람입니다.
일명 ‘우산을 든 남자’라는 그는 특별한 이유 없이 맑게 갠 날 JFK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고 총성이 울린 바로 그 순간에 우산을 폈다가 접었습니다. 많은 음모론자들은 이 사람이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합니다.
* 루비가 오스왈드를 쏘는 장면
자프루더 필름은 딜리 플라자의 달-텍스 빌딩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의류 제조업을 하는 58세의 아브라함 자프루더가 찍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열성적인 골수 민주당원이었고 케네디의 지지자였습니다.
그는 8mm 카메라를 들고 딜리 플라자로 가서 엘름 스트리트를 따라 걸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교과서 창고를 지나 잔디로 된 동산과 케네디의 차량 행렬이 통과하게 되어 있는 3중 교차로의 하부 도로 가까이에 있는 정자 위로 올라갔습니다. 자프루더가 연이어 찍은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영상은 JFK 암살 수사에서 필수적인 증거물이 되었습니다.
* “나는 희생양일 뿐이다”
오스왈드는 라이플을 상자들 뒤에 숨기고 교과서 창고 뒤쪽 계단을 달려 내려왔습니다. 그때 이미 총을 빼들고 그 건물에 들어와 있던 경찰이 그를 검문하려 했으나 오스왈드의 상사가 “그는 우리 회사 직원입니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오스왈드는 유유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숙집으로 돌아와 권총을 집어들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그의 행동은 누가 보기에도 하도 수상했으므로(경찰차가 지나갈 때마다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습니다) J.D. 티펫이라는 경관이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오스왈드는 즉시 그에게 네 발을 발사했고 티펫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 암살 직전의 카퍼레이드
그때쯤 교과서 창고에서 라이플이 발견되었으며 오스왈드를 체포하기 위해 전 지역에 긴급 체포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얼마 후 그는 숨어 있던 극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케네디 대통령과 티펫 경관 살인 혐의가 적용되었습니다. 기자들이 잠깐 동안 그를 보았을 때 그는 “나는 결백하다”고 주장하면서 그가 소련에 살았었기 때문에 체포된 “희생양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 오스왈드의 영원한 침묵
유치장에 갇혀 있던 짧은 시간 동안 오스왈드는 잘난 체하며 이빨을 드러내면서 웃거나 코웃음을 치곤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계속 부인했습니다.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잭 루비라는 한 스트립 클럽 주인에 의해 살해되는 바로 그 순간까지 오스왈드는 굉장히 즐기고 있는 듯 했습니다.
잭 루비의 동기는 단순한 복수인 듯합니다. 그는 평소에 JFK를 이상형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댈러스 경찰들과 친했기 때문에 오스왈드가 이송될 때 그 주변으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음모론자들에게 또 다른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루비가 마피아와 연루되었으며 오스왈드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고용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루비의 마피아 연루는 결코 증명된 바가 없으며.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루비가 음모의 일부”라는 주장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루비가 불안정하며 격정에 못 이겨 행동하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 장례식 장면
루비는 1964년 오스왈드 살인죄로 유죄를 선고받았으며 항소심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재판이 열리기 전에 1966년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죽음이 임박해서도 그는 오스왈드 살해에 관여한 다른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사실과 1966년 워렌위원회의 조사 결과(오스왈드는 단독 범행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에도 불구하고 음모론자들은 계속해서 그날의 딜리 플라자 사진에 몰두하여 공범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잔디가 깔린 동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으나 그것은 나뭇잎의 그림자로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노숙자로 위장한 CIA 요원들을 발견했으나 그들은 실제로 노숙자들로 판명되었습니다. 광장의 모든 방향에서 들리는 총소리도 사실은 음향학적인 메아리였던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 저격 직전 장면
아! 우산 든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산을 든 남자는 루이 윗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음모론자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혐의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1978년에 정식으로 이름과 얼굴을 밝혔습니다. 윗트는 약간 괴짜로서 케네디를 야유하기 위해 우산을 흔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그 우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 풀리지 않는 의문점들
FBI에 따르면, 케네디 암살은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었고 배후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극렬 공산주의자이자 자신의 감정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오스왈드가 홧김에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오스왈드가 소련에 망명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냉전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소련에 망명했던 자가 쉽사리 미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존슨 대통령마저 암살 음모의 일부인 것처럼 소문에 휩싸이자 독립적인 조사위원회의 구성이 불가피해졌습니다. 대법원장 얼 워렌이 조사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워렌 위원회는 10개월간 552명의 목격자들로부터 증언을 청취한 뒤 1964년 9월 암살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보고서는 오스왈드가 텍사스 교과서 창고 건물 6층 창문에서 케네디를 단독으로 저격했으며, 오스왈드 살해 사건도 루비 단독 범행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워렌 위원회의 공식적인 발표와는 달리 케네디 암살 사건에는 석연치 않은 여러 의혹이 있었습니다. 먼저 목격자들의 진술과 수사결과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목격자들 대부분은 총알이 오스왈드가 있던 텍사스 교과서 창고 쪽이 아닌 글라시노르 언덕에서 날아왔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글라시노르 언덕에서 총성을 들었고 화약 연기를 직접 목격했다고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케네디가 저격당한 장소에서 볼 때 교과서 창고는 5시 방향에 있고 글라시노르 언덕은 1시 방향에 있습니다. 방향이 앞과 뒤로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워렌 위원회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무시하고 창고에 있던 오스왈드를 암살범으로 지목했습니다.
* 케네디 일가...오른쪽이 아버지, 오른쪽 다섯번째가 어머니
파크랜드 병원에서 대통령의 죽음을 확인했던 의료진들이 목격한 케네디의 머리 상처와 워렌 위원회에서 발표한 그것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 또한 의문점이었습니다. 파크랜드 병원의 의사들은 후두부, 즉 뒤통수에 큰 구멍이 있다고 한 반면, 워렌 위원회는 정수리, 즉 머리 앞부분에 큰 구멍이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보통 총상은 날아온 방향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총알이 몸 안에 들어갈 때는 조그만 상처를 내나, 나올 때는 커다란 구멍을 내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르면 파크랜드 병원 의사들의 진술은 저격 장소가 전방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워렌 위원회의 발표는 저격 위치가 암살 당시 오스왈드가 있던 후방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FBI나 워렌 위원회도 이런 의문점들을 묵과했습니다. 그들은 오스왈드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그에게 모든 혐의를 씌웠습니다. 과연 오스왈드 혼자 케네디를 암살한 것일까요? 앞에서 살펴본 드러나지 않은 , 혹은 FBI와 워렌 위원회가 무시한 증거들을 보면 그가 단독으로 케네디를 암살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각종 음모설 >
댈러스에서의 그 길고도 암울했던 날 이후 수많은 음모론이 판을 쳤습니다. 마피아의 소행이라는 둥, CIA의 공작이라는 둥, 소련 또는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이 배후에 있다는 둥 온갖 설이 난무했습니다.
연방 대법원장 얼 워런이 진두지휘한 공식 수사는, 지금까지 암살당한 모든 미국 대통령들처럼 존 F. 케네디 역시 광신자의 단독 범행이라는 결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암살자 그 이상이 연관되어 있다는 가설에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 재클린 케네디, 시동생들과...왼편 로버트 오른편 에드워드
* CIA 음모설
CIA(또는 일부 과격한 요원)는 케네디가 빨갱이에 굴복해 CIA를 해체하려 한다고 불안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에 망명한 적이 있는 오스왈드를 고용해 범행을 맡긴 것이라는 음모설입니다.
심지어는 오스왈드는 위장에 사용됐을 뿐 실제로는 다른 장소에 배치된 저격의 명수에게 케네디를 저격하도록 했다는 음모설까지도 있습니다.
CIA 음모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데, 케네디 대통령이 재임기간 동안 CIA의 어떤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 제안이란, 미국 전역의 대도시에서 가짜 테러를 일으켜서 쿠바와 공산권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명분을 만들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케네디가 이 제안을 거부한 지 1년 만에 그는 암살되었습니다.
약간은 어거지같은 추론입니다.
* 마피아 음모설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 당시, 마릴린 먼로와 정사 스캔들 무마 등에 범죄조직의 힘을 빌렸으면서도 오히려 조직범죄 단속을 강화하자 마피아가 그를 배반자로 간주했다는 설입니다. 오스왈드에겐 마피아 조직에 숙부가 있었고, 루비에게도 마피아에 친구가 많았습니다.
이들과 같은 조무래기를 이용하는 편이 조직의 개입이 드러나지 않아 유리하다고 생각한 마피아 우두머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마피아 주도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대통령 암살이라는 위험한 일을 과연 이들 조무래기들이 맡으려 했을까요. 어떤 방법으로 루비에게 오스왈드를 살해하도록 설득했는지도 알 수 없고, 오히려 루비가 입을 열어 꼬리가 잡힐 위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 쿠바 음모설
카스트로는 미국이 사회주의혁명이후 반미정책을 실시한 자신의 암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보복을 위해 케네디 암살을 지령했다는 설입니다. 암살은 음모였다고 믿은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이 열심히 지지한 설입니다.
오스왈드는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친 카스트로파였습니다. 그는 케네디 암살 2개월 전에 멕시코시티의 쿠바 대사관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암살지령을 내리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고 카스트로 본인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설령 상대가 신원이 탄로나기 쉬운 오스월드가 아니라 해도 암살지령을 내리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케네디 묘지, 순례객들
* 군산 복합 음모설
올리버 스톤 감독이 영화 <JFK>에서 제시한 이론입니다. 미국 기성 체제의 악한들(베트남 철수를 저지하려 한 군부나 무기상들)이 손을 잡고 케네디 암살을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역사는 그들의 소망대로 진행된 듯하지만, 암살집행부대, 검시팀, 워렌 위원회 등 진상 은폐 협력자들이 이 정도 많았다면, 어떻게 이런 치밀한 계획을 세워 진행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점과 하필이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퍼레이드에서 암살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의문점이 연달아 생깁니다.
* 실수설 (1)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탄도학 전문가 하워드 도나휴가 제기한 설입니다. 후속 차에 타고 있던 경호원이 실수로 방아쇠를 당겨 그 총알이 대통령에게 명중했다는 것입니다. 도나휴는 오스왈드의 발포음을 듣고 경호원이 총을 꺼내들었을 때 오발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당시 암살 현장은 발사음이 뒤섞이기 쉽기 때문에 총을 쏜 당사자도 몰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차에 타고 있던 당사자를 제외한 9명 중에서 발사음을 들었다고 증언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오발했다고 간주되는 당사자는 당연히 도나휴의 질문에 응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최고의 시절
* 실수설 (2)
오스왈드의 처 마리나는 남편이 사실은 동승한 텍사스 주지사 존 코널리를 저격하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증언했습니다. 해병대에서 불명예 제대처분당한 오스왈드는 무사고 만기 제대자에 수여되는 명예제대증을 신청했다가 기각되어 당시 해군 장군이었던 코널리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가 루비와 함께 코널리 암살을 모의하는 것을 엿들었다는 댈라스의 변호사도 있습니다. 표적을 벗어난 것치고는 오스왈드(또는 다른 누군가)의 총탄은 너무나 정확히 케네디에게 명중했습니다. 사격이 서툴렀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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