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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중 들어가기의 일부분 발췌
제들마이어는 현대예술의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들을 몇 개의 근원(뿌리)으로 환원시킨다. 제들마이어에 따르면, 현대예술이라는 복잡한 숲을 이루는 그 모든 가지는 결국 네 개의 "공동의 뿌리"에서 자라 나왔다고 한다.
1. 순수성의 추구
2.기술적 구축
3. 광기의 탐닉
4. 근원의 탐색'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를 제들마이어는 현대예술의 '근원 현상'이라고 부른다. 순수, 기술, 광기, 근원, 이것이 20세기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운동을 추동해온 네 가지 충동의 이름이다.
1. 순수성을 향하여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순수성의 추구'일 것이다.
건축
"전적으로 순수해지려는 예술의 충동은 건축에서 제일 먼저 나타났다. 20세기의 건축은 순수해지기 위해 우선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 외적 요소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가령, 회화적 -장식적 요소, 상징적 우의적 요소, 의인적 요소, 그리고 대상적 요소들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을 제거하면 결국 순수한 건축적 형태, 즉 '입방체와 다면체만 남을 것이다. 여기서 아무런 장식도 의미도 재현도 없이 세 개의 공간적 축으로만 이루어진 순수 기학적 건축이 탄생한다. 이 입방체와 다면체로된 건축이 아무것도 묘사하거나 재현하지 않는 절대 회화와 절대조각의 전주곡이 된다'
회화
회화 역시 순수해지려고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조형적, 건축적 요소를 배제한다. 여기서 '조형적 요소'란 명암을 이용해 평면 속에 입체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회화는 입체를 그리는 것을 포기한다. 한편, 회화에서 '건축적 요소'란 원근법을 이용해 가상의 무대를 세우는 것을 가리킨다. 현대회화는 이 무대를 없앤다. 그 결과 그림 속의 대상이 마치 지지대를 잃고 허공을 떠도는 것처럼 보인다. 극단적인 경우, 아예 그림에서 위/아래의 구별이 사라지기도 한다. (칸딘스키는 옆으로
누운 그림을 그 상태 그대로 작품으로 인정했다.) 이렇게 "건축적 요소가 흔들리고, 평면적 완결성이 득세" 할 때 "사람들은 평면을 그림의 본질
이라 생각하게 된다."
과거에 회화는 물체를 묘사함으로써 뭔가를 '의미'했다. 하지만 현대회화는 '묘사'에서 '의미'를 분리하여 그마저 배제하려 한다. 물론 비구상 회화라고 해서 무조건 의미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칸딘스키는 자신의 추상이 '정신적인 것'의 표현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림으로 뭔가를 의미하려 하는 한 칸딘스키는 여전히 구시대 예술의
마지막 단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순수한 회화라면, 그 어떤 것도 의미함이 없이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여야 한다. 물론 이는 성공
하기 어려운 시도다. 의미를 배제할 경우, 회화는 한갓 장식이나 무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추상회화의 걸작들은 대부분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서 탄생했다.
칸딘스키처럼 추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그림에서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의미에 맞추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구상 회화는 대상과의 연결이 끊겨 이미지의 의미가 혼란하고 모호하다. 이 다의성이 외려 현대예술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것은 예술적 단점이지 결코 장점이 아니다. 혼란하고 모호한 의미란 결국 '암호'일 뿐이다. 암호에는 보통 해법이 있지만, 현대회화에는 객관적 해법이 없다. 결국 현대회화가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이리라 제들마이어는 이것이 "인간 행위의 근본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본다.
이 극단적으로 주관적이고 마치 사이비종교 같은 비교(敎)적인 예술은 ・・・・・・ 선전을 통해서 수용자들에게 억지로 파고들어 가야 한다.
이 경우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예술을 모르는 속물이거나 수구적이라고 낙인을 찍겠다는 위협을 느끼게 된다.
회화가 의미 없이 지내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존재한다.
하나는 "객관적으로 물리학적 근거를 가진 색의 미학'을 만드는 길이다. 하지만 물리적 색채 이론에 따라서 그림을 그릴 경우,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 과학의 삶에 불과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거기에 "음악적 구조를 부여"하는 길이다. 실제로 '미술의 화성학'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은 현대음악의 문법이 되었지만, 칸딘스키의 회화론은 그저 그만의
주관적 체계로만 남았다.
"12 기법이 ・・・・・・ 광범위하게 수용되는 체계에 도달한 반면, 절대회화는 비슷한 체계를 만드는 실험 속에서 산산이 분열되고 말았다"
음악
음악의 경우는 어떤가? 음악에서 음악 외적인 것. 가령 인간적인 것을 배제하는 경향은 낭만주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낭만주의자들은
기반이 '순수한 음악이며 성악은 '제한적 음악'이라고 보았다. 절대음악은 이 경향의 정점에 서 있다. 그것은 음악에서 감정의 요소들을 배제하고 오직 '수학적(mathematic), 조합적(combinatoric)' 요소만 남기려 한다.
제들마이어는 하필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하여 이를 비판한다.
요소들의 원자적인 배열을 통해서 음악적 연관이라는 개념이 허물어졌다. 그런 연관이 없는 음악에 대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수미일관에 대한 숭배는 우상숭배로 변했다." 이는 절대회화의 말기에 벌어진 현상과 유사하다.
시
시에서 '순수'를 향한 운동은 말라르메와 더불어 시작됐다. 순수시란 단어의 소리에 따라 음악을 전달하는 시. 즉 의미 없는 음성시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 순수의 공식은 시인들을 진퇴양난으로 몰아넣었다. 발레리는 "시적 감흥만이 있는 시를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했고, 엘리엇은 "시작(詩作)에서 시간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 시마저
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라르메 자신은 어떤가? 그의 시 중에서 위대한 것들은 순수시의 원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거기에 '반(反)해서 탄생했다. 사실 의미 없는 소리란 아예 단어가 아니다. 시에서 절대회화에 해당하는 것은 문학적 다다이즘일 것이나, 거기에서는 결국 "예술적 창조" 자체가 부정되고 만다.
차라가 모자에서 종잇조각을 꺼내게 하고 그렇게 우연히 모든 단어를 나열하고서 그것을 시라고 했을 때, 시인은 자기 역할을 영감 대신에 우연에 맡기게 된다. 이것이 미학적 허무주의가 아니면 무엇이 허무주의인가
2. 기술적 구축의 의지
1920년대에 이르면, 순수를 향한 운동이 정점에 달하여 모든 예술에서 더 이상 제외할 요소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자극을 상실한 순수예술은 이 시점에서 새로운 유행에 사로잡힌다. 바로 현대의 지배자로 등극한 기술이다. 혁명의 첫 번째 시기에 각 예술이 순수성과 절대성을 향하여 서로 떨어져 나갔다면, 혁명의 두 번째 시기에는 개별 예술들이
기술 속에서, 기하학적 구축 속에서 다시 하나로 통합되려는 경향을 보인다. 현대예술은 기술 속에 뭔가 '정신적인 힘이 있다고 오해했다.그리고 그 착각에서 스스로 기술 결정적으로 되려고 했다. 그리로 나가는 통로를 마련해준 것은 예술의 순수화를 이끌어왔던 '기하학'의 모범이었다.
두 번째 혁명은 건축을 기하학과 동일시했다. 육면체, 원통형, 원추형이 이제 건축의 원형이 되었다. 철근 콘크리트는 형태의 급진적 구축
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 재료는 주물처럼 부어 어떤 형태로든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혁명의 원인을 재료의 변화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현대건축은 무엇보다 기계를 자신의 모범으로 받아들였다. 기계에서 필요 없는 부품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듯이, 건물의 행태 역시 이제 "미학적 결정이 개입될 필요 없이 오직 재질과 목적에
대한 고려에서 지능적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기능주의'의 원칙이다.건축에서 기능과 관계없는 전통적, 문화적 요구들은 낭만적 감상주의로 취급당한다.
조각 역시 기술적 구축을 위해 기계의 모범을 따르게 된다. 수정과 같은 기하학적 결정체, 혹은 수학의 방정식을 표현한 구불구불한 입체를 닮은 현대조각은 '아무 목적이 없는 기계처럼 보인다. 칼더, 뒤샹,타틀린은 조각에 아예 기계의 또 다른 특징인 운동을 도입한다. 재치있는 지적 유희, 매력적인 미적 유희를 위한 그들의 작품은 '절대적 건축 구성을 가진 어느 공간에나 아주 잘 어울린다. 칼더의 모빌이 우아한 현대적 상점의 쇼윈도로 간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현대조각은 기술적 성격을 가진 공예 작품이다. 여기서 형이상학적 요구, 즉 조각이 그 무언가의 정신적 표현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자발적으로 포기된다.
회화에서는 이미 입체주의가 자신을 기하학적 정신으로 규정한 바 있다. 1920년대에 들어와 예술은 더욱더 기하학적이며 기술 구축적인
영역으로 동화된다. 가령, 몬드리안이나 레제의 작품에서 회화는 공장에서 사용하는 기술적 청사진, 즉 기계의 도면이나 공장의 설계도와 비슷해진다. 과거의 화가는 그림을 그렸으나, 현대의 화가는 그림을 구축한다. 이제 "아틀리에는 실험실로 발전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실험을 하고 제작을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창작은 이른바 '몽타주', 즉 공장에서 기계를 조립하는 일로 여겨진다. 이처럼 현대회화의 광대한 영역은 자발적으로 그 정신을 예술의 창조력과는 거리가 먼
기술적 세계의 정신에 맞춘다.""
미술에서만이 아니다. 12음 기법을 사용한 '절대음악'도 오래지 않아 소음의 음악, 즉 전자음악과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음악몽타주로 넘
어간다. 문학에서는 시를 창조하는 대신에 낱말을 조립하거나 한 낱말을 다른 낱말로 교체하는 "기술자로서 시인"이라는 관념이 등장한다.
물론 '창조'와 '구축'이 늘 서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신석기시대 이후 둘은 늘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 둘을 분리시킨 후 구축을
창조의 위에 올려놓고, 거기에 창조를 능가하는 초창조력(Uber-Schöpfung)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로써 창조자로서 신이 제거된 후 이제 인간의 창조력마저 기술에서 나오는 초창조력을 위해 제거되기에 이른다.
3. 자유의 도피처로서 광기
초현실주의는 '순수하지 않다. 그것은 여전히 구상적이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초현실주의를 “구체적인 비합리성의 천연색 즉석 사진"이라고 불렀다. '구체적인 비합리성'이란, 가령 '수술대 위에서 재봉
틀과 우산의 즉흥적 결합' (로트레아몽)처럼 삶 속에서 발견되는 꿈을 가리킨다. 사물을 엉뚱한 맥락에 놓을 때 일상은 불현듯 몽상처럼 느껴진다. “실제적인 것과 몽상적인 것이 더 이상 모순적 대립으로 여겨지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것. 그것을 초현실주의자들은 '혼란의 체계화"라고 불렀다. 사물을 제자리에서 떼어내어 (ent-stellt) 엉뚱한 맥락에 놓을(ver-rückt) 때, 일상은 왜곡(entstellt)되고, 정신은 광기에 (verriickt) 다
가간다.
'구체적인 비합리성'은 우리의 내면에도 존재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내면의 이 체계화된 혼란 역시 즉석 사진에 담으려 했다. 거기에 사용된 것이 '자동기술법' 즉, 아무 고려 없이 말이나 상을 의식에 떠오르는 대로 기록하는 기법이다. 하지만 초현실주의가 이 자동기술에 집착하는 한, 그것은 "원료의 단순한 재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
눈에 보이는 세상의 단면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예술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꿈을 그대로 기술하거나 착상을 떠오르는대로 기록하는 것이 그보다 나을 이유가 뭐 있겠는가. 여기서 묘한 역설이 발생한다. '자신의 원리를 충실히 따를 때 초현실주의는 더 이상 예술이 아니게 된다.'
초현실주의도 결국 자기 운동의 극한에서 비예술로 전락한다. 초현실주의의 비논리적 모티프는 실은 완전히 논리적 배경을 갖는다. 그것은 "실제의 정신 분열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계산된 정신 분열에서 나
왔기 때문이다. 사실 "무의식에 떠오르는 비논리적인 것은 순수한 상태로 표현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대단히 논리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현실주의는 자신이 공격하던 논리주의적 오류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서로 대립하는 논리주의와 비논리주의가 결국 같은 지점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즉, 현대예술의 논리주의적 극단에서 예술가가 기술자가 된다면, 그것의 비논리주의적 극단에서 예술가는 자동기계가 된다.
4. 근원적인 것을 찾아서
표현주의도 과학주의와 주지주의의 세계를 거부한다. "영혼의 적수로서 정신", 이것이 표현주의의 전형적 구호였다. 하지만 표현주의의
거부는 열정적일지언정 다다이즘의 그것처럼 냉소적이지는 않았다. 초현실주의가 일체의 도덕을 억압으로 여겨 거부했다면, 표현주의는 모종의 에토스를 유지하려 했다. 표현주의 역시 절대예술처럼 순수함을 추구했으나, 현대예술처럼 그 과정에서 공허해지지는 않았다. 표현주의의 영혼은 근원적 일자(Ur-einem), 근원적 순수(Ur-Reinem)에 대한 열망으로 차 있었다. 그것을 찾으려면 모든 사물의 모태, 정신과 영혼과 감각이 분화되지 않은 곳, 예감이 가득한 세계로 들어가야 했다.
표현주의의 세계 감정은 이 세계가 본래의 순수함을 잃고 타락했다.는 느낌이다. 근원적 순결을 찾으려면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야겠다. 여기서 표현주의는 '원시적인 것'으로 눈을 돌린다. 가령, 문명이전의 원시 문화, 훈련 이전의 소인 예술, 성숙 이전의 정신병자의 그림, 때로는 인간 이전의 동물의 세계, 표현주의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되찾아야 할 근원'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표현주의는 태고의 신화, 상상과 묵시적 예언, 아직 결정되지 않은 재생성되는 혼돈 속에 "의식과 이성을 가지고 죽어가는 인간을 구원할 길을 찾는다. 그런 의미에서 표현주의는 '종교적이다. 그것은 예술을 통해 종교를 부활시키려 한다.
제들마이어는 표현주의에 내재된 모순을 지적한다. 표현주의적 창작의 전형적 특징은 "의식적인 순진성"이다. (이는 초현실주의의 "의도적인
정신 분열과 대비된다.) 표현주의는 순진해지기 위해서 아직 선악의 구별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아간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죄 없이 악하다." 하지만 이 순진성은 그것이 의식적 노력의 산물인 이상.이미 순진한 게 아니라 가장 가공된 것이다. 즉, 그것은 죄 없이 악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악한 것이다. 순진해지려고 노력한 결과 인간은 외려 더 악해지고, 그럴수록 순진함에 대한 열망은 더욱 강해진다. 여기서 표현주의는 결국 악순환에 빠져든다.
"우리는 무죄 상태를 잃어버렸다. 그와 함께 무죄 상태에 대한 향수는 점점 커졌고, 더불어 우리가 아직 순결을 간직하고 있었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바람도 점차 커졌다. 향수가 커질수록 사람들은 무죄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점점 더 자연 속에 잘 감춰진 무의식의 어두운 심연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더욱더 큰 순결의 상실이었다. 그런 식으로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악순환이 만들어졌다"
결국 표현주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이성과 정신을 제물로 삼아 근원으로 되돌아가거나 예술을 통해 신화와 종교
를 다시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노력에는 모종의 숭고함이 있기에, 우리는 그들의 실패 속에서도 어떤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우상과 혁명
제들마이어는 이 네 가지 규정 속에 담긴 현대예술의 모순과 역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가령, '순수성'을 지향하는 현대예술은 의미까지
배제하다가 단순한 비예술로 전락한다. 기하학'을 추구하는 흐름은 표현력과 창조력을 잃고 기술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광기'에서 도피처를 찾은 흐름은 예술가를 자동기계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토록 반대하던 흐름과 동일한 결과에 도달한다. '근원'을 찾아 순결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더 큰 순결의 상실로 빠져든다. 의식적 순진성은 그 자체가 이미 가공된 순진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은 어쩌다가 이런 자가당착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까?
제들마이어는 이를 설명하는 두 개의 관점을 제시한다. 첫번째 관점은 현대예술이 일종의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현대인은 신을 부인할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세계를 우상과 귀신을 동원하여 소생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에 직면했다 " 인간은 신에 대한 믿음을
거절할 자유가 있지만, 초월성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신을 대신하여 땅 위의 특정한 물체에 대한 신앙이 등장했고, 거기에 인간은 절대자의 힘과 권위를 부여했다. 이 새로운 절대자가 바로 예술지상주의, 기술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 광기에 대한 숭배였다. 이것이
현대예술이 섬기는 '그릇된 이상인 우상이다.
두 번째 관점은 현대예술이 하나의 혁명, 그것도 자기 파괴에 이를 정도로 급진적인 혁명이라는 것이다. 제들마이어에 따르면,
"이 혁명의 진정한 본성은 ...... 예술이 예술 외적인 힘을 표준으로 삼거나 스스로 자율화하다가 그 자율화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비(非)예술로 해체된 데 있다."
한마디로, "예술의 극단적으로 혁명적인 유파들은 스스로 나는 예술이 아니고자 했다." 현대예술의 네 가지 우상은 결국 하나로, 즉 "죽음의 숭배"로 모아진다. "우상으로 지적된 모든 가치를 두루 탐색하고 포기한 후에 결국 모든 가치를 부인하는 허무주의가 나타난다." 이 미학적 허무주의는 곧 예술의 죽음을 의미한다.
전통으로 복귀
모더니즘 비평은 이 결정적 사실을 망각했다. "모더니즘적 예술비평의 모호함은
・・・・・・ 현대건축과 현대조형을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모든 구시대의 예술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인식하면서도 ・・・・・… 거기
에다가 전통적 창작물에 부여했던 것과 똑같은 이름을 붙여준 데 있다.
예술이라는 이름이 그것이다.모더니즘 비명은 예술이 아닌 것을 억지로 예술'이라 부르는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잘한 예술의 대안은 어디에 있는가? 제들마이어는 자기가 생각하는 진정한 현대예술의 조건을 제시한다
예술이 구체적인 형태에 의미 있는 방식으로 다가가고 형식과 과제가 갖는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서, 예술이 비예술적 힘에 굴복하
기를 거절하는 데서, 예술이 인간적인 내용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 예술이 세계 질서를 인정하고 그에 따르는 데서, 우리는 그런 현대예술을 만날 수 있다.
이어서 '미래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라'는 셀링의 말을 인용한다.
진정한 미래는 파괴하려는 힘과 유지하려는 힘이 만드는 공동의 결과일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복음에 사로잡히는 나약한 정신이 아니라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강인한 정신뿐이다.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강인한 정신",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영원한 예술의 이념"이라는 표현은 우리 귀에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하지만 현대예술의 논리적 모순에 대한 그의 분석은 예리하며, 모더니즘이 생명력을 다했다는 그의 진단은 정확하다. 이 책이 나온 지 몇 년 후에, 그러니까 1960년대에 미술은 '실재로 귀환' 하고, '과거로 회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