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당님이 그을 논리적으로 못쓰는건지 나의 이해력이 떨어지는건지
님의 글은 모순 투성이고 사실과도 다르게 보입니다.
우선 이 부분에 대하여 사과를 요구합니다. 추정과 단순한 사건으로서, 남의 글을 모순투성이라고 논의하는데는...아마 인격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좋은제도와 지배층의 문제라...임란을 통한 부족분과 모순이라고 하는데요, 과연 그랬을까요?
물론 후대에는 부패가 일어나긴 합니다. 그러나, 운영은 현실적으로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치적 사건으로서 사화나, 기타등등의 모습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사건입니다. 이는 조선뿐아니라 어느 국가나 비일비제한 것입니다. 그것을 지배층에 비판으로 보는데, 과연 그러했을까요? 맨 위에 글에 나오다시피, 세종조, 세조에는 130만결의 토지(아랫글을 참고하세요.)가 등록됩니다. 세종의 경우 국가세수가 남아있어, 오히려 세금을 가벼이 하였고, 성종조에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현신정치의 틀이 어느정도 완성됩니다. 연산조에 사화를 당하였으나, 신원이 회복되고, 중종이후의 회복기를 거쳐서, 외척인 윤원형등이 득세하고 사화가 있었으나, 훗날 다시 복귀됩니다. 그것은 대간들과 유생 등의 세력이 개입한 것이었죠. 정치적 질곡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잘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답답하시군요..세종때의 130만결의 토지에 상당히 흥분하시는데요,
왜 답답한가요? 흥분? 역사적 사실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실록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최소 8/10은 돌아갔겠죠.
그것이 집권세력이 아닌 평민에게 얼마나 혜택이 돌아갔을까요.
제 말씀을 차근차근 들어보십시요.
고려말 정도전 주도하의 토지개혁을 했을때 개경의 문벌귀족의 토지문서를 태우는 연기가
개경하늘을 덮자 이를 본 공양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죠.
"이것은 고려가 망하는 불길이라고..."
그것은그 불길에 타고있을 토지문서중 일부가 공양왕 자신의 것도 상당부분 있었기 때문이죠..
정도전의 개혁이 어디까지 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정도전 자신이 결국 제거됨으로 해서
주도권은 다시 보수적인 전통 사대부가문들에게 돌아갑니다.
그들은 한양뿐 아니라 지방 곳곳에 개인농장과 토지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철이되고 때가되면 지방의 특산물과 수확물들이 한양으로 올라오죠.
흉년이 들거나 재해가 나서 한해 농사가 망치면 평민들에겐 타격이 크겠죠?
사대부 가문들은 그런걸 개인자산 늘리는 호기로 삼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권력과 편법을 동원하여 줄기차게 농토를 늘립니다.
먹을게 없어 생계가 곤란한 농민들은 정부의 세금도 내야하는데 당장 끼니는 없으니
사대부가문에 빚을 내거나 저당을 잡힙니다.
흉년이 반복되거나 사대부들의 위세에 눌려서 농토를 빼앗기게 되면
차라리 사대부가문의 개인농장에 노비가 되는게 낫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두해 견디다 못해 결국 노비가 됩니다.
님이 칭찬을 하시는 경국대전 체제하의 조선은 이들을 보호하지 못하죠.
그렇게 세금과 부역을 감당하는 평민의 수가 줄어들고 반대로 일부 사대부 가문들의 자산은
계속 늘어갑니다. 일가친척들을 지방관으로,또는 중앙정계의 요직에 심어놓고
그물같은 권력지도를 형성해 놓았기 때문에 결국 왕도 웬만한 이유로는 그들을 제거하지도
재산을 몰수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군역과 부역과 세금을 감당할 양민이 줄어드니 국고가 줄어들고
전체적으로 국가의 시스템이 삐그덕 거리게 됩니다.
할말 없네요...기본지식이 있나요? 고려말의 상황이죠? 저는 조선을 논합니다. 따라서 시대착오적 진술입니다. 아울러 군왕의 정치기반은 백성입니다.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것은 양민이며, 따라서 지배층이 권력기간이라느니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도 태종같은 경우는 정기적으로 외척과 공신들을 숙청하며 견제를 하였으나
정통성 기반이 약한 세조 같은 경우는 그들을 제거할경우 자신의 권력기반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그들의 권력과 부축척을 용인합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사대부 가문이 아니라 사대부중에서도 또 그들위에 특권층을 만들어 놓는것이지요.
한명회 같은 경우는 지금의 경기도 지역에 왕실가의 땅이 많은지 한씨가문의 땅이 많은지 알수 없을 정도 였고, 세조때 포악하기로 유명한 최측근 홍윤성 같은 경우는
홍윤성 집안의 노비가 양반을 죽이지만 처벌을 하지 못합니다.
조선의 법률에 이런 하극상은 당장 죽음이죠. 하지만 그 노비조차 처벌을 못합니다.
나중에 그 죽은 양반의 아내가 죽기를 각오하고 행차길의 세조에게 직접 일렀는데,
세조는 그 노비만 죽이고 홍윤성은 처벌하지 않습니다.
한번은 홍윤성이 집 근처 밭을 마음대로 빼앗았는데, 그 밭의 주인인 노파가
앉아서 죽으나 가서 얘기나 해보고 죽자고 하면서 홍윤성 집의 문을 두드렸는데
홍윤성은 말없이 그 노파를 거꾸로 처박아 죽입니다. 그래도 처벌받지 않습니다.
농사짓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소를 잡아먹지 못하게 법을 만들죠.
양민들에겐 엄격히 적용을 합니다.
하지만 어디 상류층사람들이 소고기 안먹고 살수 있나요?
세조때 양성지의 상소에 의하면 하도 소를 잡아먹어 소뼈로 다리가 만들어질 정도라는
탄식을 합니다.자연히 밀도축이 성행을 하는데 자신들이 관여되어 있으니
흐지부지 수사를 끝내게 됩니다.
사회 각 부문에 이런식으로 문제가 누적되고 그것이 관행이 되면서
특권층위의 특권층이 만들어지고 그들은 사돈에 겹사돈으로 서로가 보호막이 됩니다.
연산군의 폭정때 1위가문 광주이씨가 몰락을 하지만 중종반정을 통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단결하면 왕로 갈아치울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습니다.
중종때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를 보면 전하께서 나라를 잃으실까 심히 우려된다는등..협박에 가까운 언사를 보입니다.
중종 자신도 왕실의 재산과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도 급급할뿐
사대부가문의 위세를 막아낼수가 없어지죠.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인 무인 박원종은 연산의 흥청기생 300명을 자신이 가로채서 데리고 삽니다. 하루는 공무때문에 젊은 관원 둘이 박원종의 집을 찾았는데
박원종은 내집에 왔으니 술이나 한잔 하고 가라며 대낮에 잔치를 벌이고 기생들의 춤과 가무가 이어집니다. 별천지같은 광경에 정신을 차릴수 없었던 두사람은 나중에 우리도 그렇게 살자며 돌아오면서 서로에게 다짐을 합니다.
이들이 당시 지배층의 대표라는 증거를 대어 주십시요. 이들이 당시의 사서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특수한 경우라는 겁니다. 아울러, 팔대문벌이라 함은 누대에 걸쳐 세습적으로 정권을 갖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대의 인물들이죠.
제가 말씀드리는건 사대부가문중에서 일부가 정치적으로 연결되고
그들이 자신의 가문과 그들만의 부와 권력을 추구하면서 조선의 사회 시스템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임란을 만나면서 그게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걸 말하려고 위에 여러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예는 이런것 말고도 너무 많습니다.
아울러...전쟁이 일어나니 모순이 드러나죠. 뭐 당연한 걸 가지고 흥분을...일부가 됬다고 하는데, 그 일부 얼마나 오래 가던가요?
조선시대에 고려후기 8대가문같은 집안이 없었다구요?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더이상 할말이 없군요.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만 읽어봐도 그 가문이 이 가문이고 서로가 연결되어 있고..라는걸
느낄수 있을텐데요.
정말 읽어보기는 하셨습니까? 양반이 국민입니까? 그 가문이 연관안되게...당시에 양반의 숫자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차라리 예를 들자면 명나라를 예로 드십시요.
중국에선 황제들이 공신가문을 주기적으로 숙청을 하여서 2대를 이어가는 재상가문이
정말 드물답니다. 황제권이 강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조선에서 2대, 누대에 걸친 재상가를 예로 들어보시죠...숙청하면 다라는 사실은 뭡니까? 김재규가 박정희 죽이고 나서, 박근혜 안 나오던가요? 조선조에는 극히 희박한 경우입니다.
그리고 상업을 모..정신적으로 안 받아들였다는건 또 뭔가요.;;;
권력이란 실제적 현실이구요,
조선시대 권력자들은 비록 조선이라는 나라의 큰 그림을 그리진 못해도
냉철하게 현식을 파악 할줄아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자신의 가문과 학연을 더 중요시 하고 그걸로 만족한것이 문제지만요.
성경의 부자가 천국가기가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것 보다 어렵다..라는 말씀까지 인용하는걸 보니 님도 어지간 하시군요.^^;;
그 구절이 상업의 중요성을 국가에선 정신적으로 안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씀이죠?
님이 말한 농업우선이라는 건 어느 왕조에서는 있을수 있지만
다른 국가체제에서는 상업이 더 우선시 될수 있는거 아닌가요?
님 말씀은 전세계 모든 고대국가가 정신적으로 상업을 안 받아들이고 농업을 우선시 했다..
이런건 아니죠?
이런걸 식민주의 사관이라고 주장하는 님의 주관적인 태도는 좀 실망스럽습니다.
이걸식민주의 사관이라고 논한게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한반도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의 입장에서 말하는 거지요. 논자분께서는 분명히 정체되어 있다고 쓰셨고, 그것의 내용이 정체성론의 내용과 같습니다. 식민사관은 파악을 하고 계십니까? 아울러 고대국가라고 파악한다면, 저 일본의 후꾸다라는 학자가, 조선은 일본의 고대후지와라 정권(10세기경)과 같은 사회다라는 것과 맞물려 저의 심증을 더욱 굳게 하시는군요...
조선이 고대국가라고 파악하는 그 자체가 의심스러우며, 아울러, 동양식으로 말씀드리면, 머리아파질 것 같아 안했지만 이야기 드리며, 성경의 구절은 세계사적 보편성을 말하는 겁니다.
상인은 인간이지만, 인간으로서 태어날 때, 천리와 기질의 문제에서, 기질의 영향을 더 받기 쉽습니다. 율곡에 의하면, 인간의 형질은 기발이승일도하며, 그 기발이승일도에 대해서, 성심정에서 지각하는 반응이 다른 사람보다 악의 경향성이 높습니다. 이는 본래, 이는 기질에 품부되고, 그 가운데서 기만이 움직일 수 있는데, 상인은 기본적으로 이 악한 경향성을 띄는 기질이 더 많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인은 더 악할 가능성이 많아, 예로서 교화시켜야하는 강도가 농이나 공보다 훨씬 높고, 국가는 이들을 용인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성학집요를 보세요.)
그리고 청나라가 2대만에 망한다구요? 아닌데요.
청의 4대황제가 강희제 인데 그의 즉위기간이 자그만치 61년입니다.
그의 손자 건륭제도 60년간 재위합니다.
무슨 소리인지? 저는 조선조의 왕을 기준한 것인데요? 논리적으로 파악 못하시네요. 원과 고려를 논했으면, 청과 조선을 논하는 것은 당연한거 아닌가요? 접속사 그리고는 등치접사입니다.
그리고 금나라의 여진족과 청나라의 여진족이 같은 계열이죠?
요나라의 거란족이 과거 고구려를 농락했던 선비족계열 이라는건 알고 계신가요?
흉노가 망하고 선비족이 득세하면 흉노족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게 아니라
흉노족에 속했던 부족들이 선비족 밑으로 들어가서 복속하게 된다는걸 의미합니다.
초원의 부족들은 계속 그들의 삶을 이어가지요.
다만 역사서에 흉노족이 쇠약하고 선비족이 융성했다라고 기록이 되구요.
선비족의 영토라고 기록되지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조상그대로 삶을 사는거구요.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을 읽어보세요. 민족이 같다느니 어쩌느니 하는데, 흉노는 본래 한의 한 군현의 인구수만도 없으나, 초원제국을 건설하며, 그는 모두가 흉노라고 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울러 조상그대로삶을 산다면, 역사에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선비와 흉노가 뭐가 다르며, 여진과 만주족이 뭐가 다른지를 구별하여 써 놓은 것을 간과하지 마시지요.
또 정조사후 실학자들의 죽음을 정치투쟁에서 졌다..라고 표현하셨는데
노론계열의 집권층이 주자학이 아닌 다른 학문을 받아들이면 이단으로 몰아서 죽이지 않나요?
송시열이후 그것이 더욱 심화된걸로 아는데요.
그건 일제식민사학, 예하 당신의 생각입니다. 송시열이후 생겨난 역현상이지, 그리고 그것도 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계에 등용이 안 됬다는거지. 추정하지 말고 증거를 대세요.
그리고 정약용선생이 살아난건 대신 이가환선생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남인의 영수는 정약용이 아니라 이가환 이었습니다.
채제공의 뒤를 이를 정승감은 바로 이가환이었고 그 10년뒤의 정승감이 정약용 이었죠.
노론은 이가환의 죽음으로 남인계의 뿌리를 뽑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약용형제는 물론 귀향을 보내구요.
남인계의 뿌리를 뽑았으면, 정약용형제 귀양보낼 이유도 없겠군요. 과연 그렇게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뿌리뽑ㅂ고 제기불능상태까지 갔는데요? 아울러, 제가 정약용의 자손인데요?
그런데 님은 혹시 따로 어떤공부를 하시는지요.
동유학안? 그게 무슨 책인가요?
동유학안이란, 동방유자들의 학안입니다. 중국에도 학안이 있지요.
따로 하는 공부는 뭐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논자분이시야 말로, 대전제, 소전제 결론의 과정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합니다. 당대의 유명한 인물이 꼭 그 시대 전부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발상도 문제있으며, 남의 논리를 모순투성이라고 한 그 자체도 문제있군요. 논어에 이르기를 박문약례라 하였으니, 아마도 논자께서는 예를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역사적 주장에는 시대를 나타내는 보편적 근거와, 특수적 근거, 아울러 그것이 시대와 맞는 것 등 여러가지 근거를 토대로 하여야 합니다. 아울러, 논자분의 논리는 제가 따로이 반박할 필요없이,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역사학보나, 등등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도 번역되어 있으니 한번 보시길 바라며, 나머지는 사고전서에서 찾아보길 바랍니다. 남사나 북사에도 잘 나와있지요. 다 사고전서 안에 있으니 읽어보시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제가 새로이 보강된 논지가 없고, 선왕의 예법에는 화를 중시하여, 이를 귀히 여겼다 했으니,(논어) 이쯤에서 논쟁을 마칠까 합니다.
첫댓글아울러 송자대전을 봤다면, 송자대전은 조선후기, 붕당정치기의 역작용이 절정에 이른 뒤에 나온 책입니다. 그것으로 조선전기까지 논한다면, 그것은 시간을 역산하는 오류입니다. 조선이 500년이나 견뎌내었다는 사실을 있지 마세요. 만약논자분의 생각같으면, 조선은 그 절반도 못가서 무너졌을 겁니다. 그것은 그만큼
송시열의 생각이자, 노론의 생각입니다. 노론이 그렇게까지 비추어야만 했던 것은,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압축할 수 있으며, 송시열은 주자율곡정통조선성리학자입니다. 성리학에서는 강상의 도가 분명하고, 귀천의 차가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기로 나뉘는 선천적품부이기 때문에 송명이학의 개념을 알고 보시기
첫댓글 아울러 송자대전을 봤다면, 송자대전은 조선후기, 붕당정치기의 역작용이 절정에 이른 뒤에 나온 책입니다. 그것으로 조선전기까지 논한다면, 그것은 시간을 역산하는 오류입니다. 조선이 500년이나 견뎌내었다는 사실을 있지 마세요. 만약논자분의 생각같으면, 조선은 그 절반도 못가서 무너졌을 겁니다. 그것은 그만큼
송시열의 생각이자, 노론의 생각입니다. 노론이 그렇게까지 비추어야만 했던 것은,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압축할 수 있으며, 송시열은 주자율곡정통조선성리학자입니다. 성리학에서는 강상의 도가 분명하고, 귀천의 차가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기로 나뉘는 선천적품부이기 때문에 송명이학의 개념을 알고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