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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나는 겨(시 1편 3- 4)
성경본문: 시편 1: 3-4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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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과 함께 하늘을 향한 길을 나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사람들은 모두 복 받기를 원합니다. 신앙인이나 비 신앙인이나 모두 다 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을 통해서 가장 최고의, 그리고 가장 순수한 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받는지를 지난 주일에 살폈습니다.
그 복 있는 성도의 모습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절)
오늘 본문 시편 1편 4절에는 이와는 아주 다른 종류의 사람을 말합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면 누가 악인입니까?
여기에 나오는 악인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부인하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경건에 속한 것을 조롱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같은 예배하는 날 바깥에 있는 무리들만을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우리와 같은 예배의 자리에 참석해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러면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때때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교에 마음이 열려 있고 주일날 교회에 나오면서도 악인들의 삶을 추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생활을 한다고 교회를 다니지만 바른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심지어 주일을 꼬박꼬박 잘 지켜서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만 경건한 삶을 살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율법의 모든 규정을 지키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있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그가 아직 사울로 불릴 때 그는 신앙생활에 열심히 특심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가장 엄격한 종파 바리새파에 속한 열심당이었습니다.
종교적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과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반면에 본문이 말하는 악인은 매일 살아가면서 한 번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세상을 사는 자입니다.
심지어 종교행사에도, 수련회에도, 예배에도 참석도 하지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자입니다.
심지어는 성찬에도 참석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거기서 신앙의 신비를 접한 적이 없습니다.
설교를 듣기도 하고 기도의 자리에도 나아가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며 하나님께 그 마음을 열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삶에 하나님을 아는 표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한 주간동안 열심히 일합니다만 하나님을 떠올리지 않고 생활합니다.
열심히 사업을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자입니다.
하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일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항상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을 대할 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악인입니다.
그러면 악인에 대해서 본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선언인지 알기 위해서는 앞 구절을 다시 한 번 살펴야 합니다.
악인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악인은 결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뿌리 채 뽑혀 말라버린 나무와 같습니다.
생명이 있는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습니다.
정말 나무에 비유한다면 아무런 자양분이 없는 사막에 말라비틀어진 나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심은 사람이 돌보는 나무입니다.
특별한 관심과 배려 가운데 자라는 나무입니다.
주인도 없는 야산에 자라는 나무와는 다릅니다.
가뭄이 오면 시들고 마는, 그래서 아무런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나무와는 아주 다릅니다.
물론 악인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만, 의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속에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손수 심으셨기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농부처럼 그 열매를 잘 맺도록 가꾸어 주십니다.
하늘의 귀한 이슬을 내려주시고, 날마다 햇빛을 비추심으로 열매를 무르익게 하십니다.
낮의 태양과 밤의 달빛조차도 무심히 비취지 않습니다.
때 따라 땅을 두루 파서 거름을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공황이 일어나도, 기근이 덮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 여러분이 누리는 특권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눅 12:7)
우리를 확실하게 보호할 것을 두고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7)
우린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우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신앙의 시인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여러분이 이 고백에 동참한다면 어떤 처지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향한 눈길은 전지하신 분의 눈길입니다.
여러분을 보호하는 손길은 전능하신 분의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근심 걱정 모든 것을 주께 고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며 전쟁터에 방패가 되십니다. 어두움 가운데 빛이 되시고 인도자가 되십니다.
그러나 악인은 다름이여! 환난의 날에 안길 영원하신 팔이 없습니다.
원수가 둘러 쌀 때 도와줄 분이 없습니다. 그를 향해서 동정의 눈빛을 보내는 분이 없습니다. 그의 처지를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가 없습니다.
철저히 홀로 버려질 것입니다.
광야의 가시떨기나무처럼, 아무도 돌보지 않는 숲속의 잡목처럼 버려져서 결국 날카로운 도끼날이 내려찍히고 뜨거운 아궁이 속에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의 손길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습니다.
시냇가에 심겼기에 그 뿌리는 강물을 향해 뻗어 필요한 자양분을 함께 공급받습니다.
가뭄의 해가 미치지 못하는 복된 장소에 심겨 있습니다.
간간히 뿌려지는 한 줄기 비에 모든 희망이 걸려있는 사막의 나무와는 다릅니다.
강가에 심긴 나무는 날마다 풍성한 공급을 받습니다.
가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핍절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강물로 뻗은 뿌리를 통해 필요한 모든 것을 넘치도록 공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결코 악인에게는 이런 축복이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기쁨, 그들의 만족, 그들의 생명을 보장하는 시냇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릅니다.
쉽게 고갈되는 개울 곁에 심긴 나무가 아닙니다. 흐르는 물이라곤 기대할 수 없는 사막에 심긴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땅의 공급이 다하면 하늘을 바라볼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면 인자되신 주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온 세상이 불안에 떨어도 여러분의 하늘 기업은 안전할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여러분에게 주신 하늘의 기업은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린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조금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음미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데서 공급을 받는 삶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맛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늘 창고는 비워질 수 없고 우리가 맛본 부요함은 다함이 없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과 다함이 없는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누리는 영광이요 실망하지 않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악인에겐 지금 아무런 위로가 없으며 장차 아무런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되돌아 봐도 저지른 잘못에 대한 두려움이요, 내어다 봐도 기다리는 것은 무서운 심판밖엔 없습니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인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2.악인에겐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봄에 있어야 할 열매가 없으며 가을에 맺어야 할 열매가 없습니다.
있다면 말라비틀어진 열매, 썩어버린 열매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리석은 상상을 합니다.
특별히 무슨 죄를 짓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준은 다릅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삿 5:23)
메로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적극적으로 범한 죄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소극적으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다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주를 받았습니까?
예, 극심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왜요?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메로스 거민은 나서서 주 하나님을 대항해서 싸우진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거슬러 대항한 적이 없어, 나는 주님을 미워하지 않아, 주의 백성을 핍박한 적도 없어, 오히려 성도들을 사랑하고 목회자들을 대접하기도 하잖아, 이렇게 주일을 잘 지켜서 예배도 참석하고 설교 말씀도 잘 듣잖아.’하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올라가야할 때, 여호와를 도와 용사들을 치지 아니했으면 저주의 대상에 해당합니다.
거듭되는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함께 모여야 할 때 함께 자리해야 합니다.
좀 바빠서 함께 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지 마십시오. 철을 따라 맺는 열매가 없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심각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범한 무슨 극악한 잘못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들이 함께 나아가는 대열에 동참하지 아니했다면, 앞으로 여러분은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철을 따라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기쁨, 기도 감사가 삶에서 사라질 것이고, 다만 무서운 심판의 불만 기다릴 뿐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여러분은 세상에서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자녀를 잘 교육시키기 위해서 진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대하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으며 어떤 거룩한 사역에 동참했습니까?
제발 주일 날 주차장만 복잡하게 하고 예배자리만 채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여기 모여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군대로 훈련을 받아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0년 전보다 더 잘 살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20년 전보다 훨씬 더 잘 살지만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30년 전보다 상상할 수 없이 잘 살면서도 기쁨이 없는 이들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앉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하늘 보좌를 포기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이 여기 나와 예배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다못해 주일날 주차하는 장소만이라도 가깝고 편리한 곳을 포기하고 조금 더 먼 곳으로 바꾸어 보십시오.
아니 거기 주차하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주일 한 시간 셔틀봉사를 시작하는 결단이 분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주님의 물음에 이제 여러분이 답할 차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인은 그 잎사귀까지도 마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그들은 잎이 시들 것입니다. 당연히 바싹바싹 타들어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그리고 여러분의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그 잎사귀조차 마르지 아니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연세가 드셨지만 그 얼굴 모습이 싱싱하며 그 마음에 주님 주신 기쁨이 가득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얼굴에 주름이 생겼지만 마음엔 상처의 흔적을 갖고 있질 않습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아직도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주님의 일에 더 열심을 내고 젊은 날보다 열배는 더 큰 기쁨으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노년에만 맺힐 수 있는 성숙하고 아름다운 열매로 주위의 모든 성도들을 기쁘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 때는 열심을 내고 주님을 아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는데 세월과 함께 기억조차 희미해지고 관심은 오로지 땅에 묻힐 육신에만 쏟고 사는 분은 없습니까? 나이와 함께 자기 몸을 위한 건강식품, 건강용품에만 관심을 갖고, 자녀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아니한다면 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같은 악한 할머니가 될 것입니다.
비록 나이가 들어 옛날처럼 땅에 있는 것들이 잘 보이지 않고, 젊은 시절처럼 세상소리가 잘 들리지 아니해도, <기독교>는 하늘 음성을 이전보다 더 잘 듣고, 하늘의 기업을 더욱 분명히 바라보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나이가 들수록 더 큰 하늘 기쁨을 안겨주는 종교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하늘 아버지를 향한 기도가 깊어지고, 일마다 때마다 더욱 감사로 채우는 종교입니다.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 얼굴 표정조차도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칩니다.
주님과 오랜 동행을 한 사람만이 간직하는, 화가들이 후광으로 표현한 그 무엇이 깃든 사람입니다.
“더 가깝고 더 가까운”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당연히 그들에겐 열매가 없고 잎조차 시들 것입니다.
그들 또한 눈도 희미해지고 귀도 잘 들리지 않고 본래 이빨은 적어지고 몸은 쑤시고 마른 다리조차 짐이 될 때 근심과 불평이 늘어납니다.
주름은 더 깊어지고 한숨은 더 자주 나옵니다.
한 때는 푸르러 보이던 잎사귀가 이제는 갈색으로 변하고 점점 검버섯이 피기 시작합니다. 나이와 함께 재산도 모우고 존경도 받기도 하지만, 남은 인생 세워갈 굳건한 반석이 없습니다.
눈을 감을 때 맞이해 줄 하늘 아버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마음에는 바닥 모를 불안이 자리합니다.
그 때 여러분의 영적인 형편이 심각할 것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 주제로 가봅시다.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인은 계속 말합니다.
3 악인은 바람에 흩날리는 존재입니다.
광야에 버려진 나무와 같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거기는 최소한 생명이 있습니다만 악인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시인은 뿌리째 뽑힌 나무라고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광야의 말라 버려진 가시덤불이라면 그래도 무언가에 소용될 것입니다.
생명도 없고 별 소용가치도 없는 것에 비유됩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리는 겨와 같다고 시인은 묘사합니다.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혹시 겨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은 없습니까?
쭉정이와는 다릅니다. 쭉정이는 알곡이 여물지 아니한 모습만의 곡식입니다.
그러나 겨는 알곡이 제거된 껍질을 말합니다. 타작을 해서 알곡을 떨어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곡과 함께 남아있는 겨를 분리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타작마당은 대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자리합니다.
키를 담아가지고 키질을 하면 곡식낱알은 키 안쪽에 그대로 남아있고 쭉정이나 알곡을 둘러쌓던 겉껍질, 겨는 키 바깥으로 떨어집니다. 가볍기에 쉽게 흩날리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습니다. 악인은 물위의 거품처럼 쉬 사라질 뿐입니다.
왜 악인을 겨에 비유하는 또 다른 뜻은 무엇일까요?
알갱이가 없고 가볍기에 흩날리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겨란 저급하고 값싸고 별가치가 없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대체로 태워 없앱니다. 기껏 그 재를 거름으로 사용할 뿐입니다.
악인은 정말 겨와 같습니다.
아무 선한 일에 소용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쓸모가 없고 내세에서도 효용가치가 없습니다. 피조물의 찌꺼기와 같고 쓰레기와도 같습니다.
물론 악인의 자기 평가는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무가치합니다.
목에 금 사슬을 두르고, 가슴에 보석으로 장식하고, 머리에는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왕관을 쓰지만, 흙더미 위에 얹어놓은 왕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류에 무용지물이요 하나님의 역사에 거치는 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사악하고 비열한 존재입니다.
질그릇처럼 쇠막대로 깨트릴 것입니다.
차라리 깨어진 질그릇도 한 몫을 합니다만 악인은 아무데도 소용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깨어진 질그릇조각으로 욥은 그 상처를 긁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바람에 나는 겨는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가치를 정산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존재를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놓아 보십시오.
여러분 스스로는 ‘난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아무 가치 없는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사실 쭉정이는 알곡이 들어있는 알갱이와 흡사합니다.
사실 겨란 알곡을 덮고 있던 껍질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알곡이 분리되고 나면 겨라고 불리지만 사실 껍질은 알곡과 함께 자란 처지입니다.
사실 악인도 의인과 겉으로 보면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악인도 어쩌면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났을 수 있습니다.
신앙 좋은 장로님과 권사님의 자녀로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의 품안에서 자라고, 알곡을 휩싸고 있는 껍질처럼 한 때는 처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대우를 받았지만 한 날 알곡과 껍질이 분리되는 무서운 순간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한 때는 신앙의 부모의 기쁨이었고 위로였을 것입니다.
한 줄기에서 자라났는데 주님을 인격적으로 모시지 않으면 영원한 분리, 영원한 심판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 때 어머니에게 안겨줄 고통이 어떠할 것인지를 생각하십시오.
다시는 어머니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어서 더 이상 다가설 수 없습니다.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나이 들면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제대로 신앙으로 키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교육 가정에서부터”는 한 해의 구호가 아닙니다.
옛 선조들은 어떻게 자녀를 키웠는지 아십니까?
오랜 기도를 끝낸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마지막 심판 날 이렇게 살다가 네가 정죄를 받으면 기억해라. 하나님이 너를 정죄하는 순간 난 ‘아멘’ 할 것이다” 그것이 스펄전을 영적으로 각성시킨 순간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처럼 사랑스런 아들에게 내리는 무서운 선고이지만 마지막 정죄의 순간에 아멘할 것이라는 말에 아들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모친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의 대학합격에 목숨을 거는 것보다 자녀의 영혼에 목숨을 거는 어머니가 있어야 우리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겨, 어디로 날립니까?
지금은 건강하고 햇볕은 비취고 하늘은 푸르고, 세상은 조용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손바닥만 검은 구름 한 조각이 하늘에 떠오르면 모든 것이 일순간에 달라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처음에는 미풍과 같이 시작했지만 어느새 폭풍으로 변해서 여러분을 송두리째 흔들 것입니다.
의사의 첫 번째 선고가 무어라고 나도, 삶은 순식간에 위기로 내몰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고를 내리시면 버틸 인생은 없습니다.
미풍은 거센 바람이 되고 거센 바람은 제어할 수 없는 광풍으로 변합니다.
모든 영혼을 쓸어 가십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시 90:3-5)
어디로 쓸어 가십니까?
거기에 아무런 추측을 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주님의 엄숙한 선고만 전하겠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예,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영원치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갈 것입니다.
예, 보기에는 모두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모두들 말씀을 듣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고개를 꺼덕이고 때로는 아멘도 합니다.
어떨 때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한 날 여러분을 기다리는 것은 무서운 심판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가까이 하려고 몸부림치는데 아무런 변화 없이 살아가면 여러분을 기다리는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맹렬한 불과 무서운 심판밖에 없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드는 두려운 일만 남게 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 진저”(히 10:31)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합니다.
거기는 더 이상 여러분을 바라보는 자비의 눈길이 없습니다.
거기는 더 이상 여러분을 향한 은혜의 손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인은 권면합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2)
악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여러분의 생각 대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길을 고집하는 대신에 복된 하나님의 길을 따르던 이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초대가 남아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성도 여러분,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십시오. 주님의 속삭이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채우지 아니하면 한 날 바람에 흩날리는 겨, 죽정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돌이키십시오. 심판에서 생명으로 나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주시는 최상의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불에 던져 파멸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부디 말씀을 사모하는 복된 가을이 여러분의 삶에 시작되길 빕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