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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규제 벽 허무는 日… 은행 신사업 발묶인 韓
[리셋 K금융, 新글로벌스탠더드로]
〈5·끝〉 세계는 금융혁신 경쟁
일본 최대 은행인 미쓰비시UFJ은행은 지난해 7월 ‘미쓰비시 트레이딩’이라는 신규 법인을 설립해 기업의 재고 물품을 인수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전통적 금융업에서 벗어나 재고를 사들여 자금을 제공한 뒤 기업이 필요할 때 이를 되사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은행 측은 재고 매입액과 환매액의 차이를 이용해 수익을 얻는다.
이처럼 기업 재고를 일시적으로 매입하는 ‘인벤토리 금융’ 서비스는 기존에 씨티은행이나 맥쿼리은행 등이 활발하게 펼쳐 왔지만 금산분리 규제가 엄격한 일본에서는 원래 은행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2021년 법을 개정해 은행이 할 수 있는 업무에 ‘은행업 고도화 등 업무’를 추가하고 비금융 자회사 설립도 허용하면서 미쓰비시 트레이딩 같은 기업이 등장할 수 있게 됐다. 미쓰비시UFJ 관계자는 “글로벌 사업을 하는 기업은 원자재 조달, 재고 활용 등을 통한 공급망 대응이 필수”라며 “새로운 무역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 기업 경영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日은행, 채용-광고 등 비금융사업도 진출… 韓, 규제탓 혁신 지체
일본, 규제완화로 신사업 활로 열어
은행 활용한 경제 활성화 정책 추진
韓 금산분리-업권 갈등에 혁신 막혀
“규제완화 속도 내야 글로벌 경쟁”
● 규제 완화해 금융혁신 나선 日
일본은 한국과 유사한 금융규제 체제를 갖고 있어 이전부터 ‘관치금융’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혀 왔다. 하지만 2020년 관련법을 개정해 ‘금융 서비스 중개업’이라는 새로운 업종을 도입하는 등 금융사가 각종 신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혁신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2위 은행인 미쓰이스미토모(三井住友)은행은 지난해 5월 일본 대형은행 최초로 기업의 탈탄소 경영을 지원하는 클라우드 서비스인 ‘사스타나’를 출시했다. 기업들의 탄소 배출량 계산부터 탄소 저감량 목표 설정, 목표 달성을 위한 해법까지 제공하는 서비스다. 미쓰이스미토모은행 관계자는 “은행은 기업의 탄소배출량 측정뿐만 아니라 이를 저감하기 위한 지원도 한다”며 “탈탄소 사회를 견인하는 서비스로서 존재감을 늘려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미 500곳 이상의 기업이 이용 중인 사스타나는 환경 보호 목적도 있지만 본래의 은행업과도 일맥상통하는 ‘윈윈’ 사업으로 꼽힌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공장 설비 투자 및 기계 임대가 필요할 경우 그에 따른 자금을 은행이 대출해 주기도 하는 것이다.
김혜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은행을 과도하게 규제하는 대신에 은행의 인프라를 활용해 지역경제 활성화와 기업 생산성 향상 등에 나서겠다는 것이 일본 금융당국의 정책방향”이라며 “규제 완화 이후에 전자계약 서비스나 인재 소개, 광고, 사업자 연결 등 은행의 다양한 사업 진출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금융사 신사업 진출 매우 제한적인 韓
그러나 한국에서는 금융회사가 신사업에 나서는 길이 상당히 비좁은 게 현실이다. 당국의 규제 강도가 높은 데다, 다른 업권과의 갈등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 금융회사들도 은행들이 비금융 사업에 시범적으로 진출한 사례는 일부 있다. KB국민은행의 알뜰폰 사업 ‘리브엠’이나 신한은행의 배달앱 ‘땡겨요’ 같은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 서비스는 모두 개별적인 심사를 통해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되고, 그 이후에도 2년 단위로 ‘시한부 허가’를 받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처럼 특정 서비스나 사업을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해주는 상황이다 보니 한국 금융사들은 혁신 동력 자체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다.
한 금융지주 본부장급 관계자는 “강력한 금산분리 규제가 남아 있어 금융사의 신사업 진출이 사실상 막혀 있는 상황”이라며 “어떤 사업을 할 수 있을지가 불확실하니 금융사들로서는 규모 있는 혁신 사업을 구상하거나 추진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의료계와의 충돌 때문에 장기간 표류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실손보험 가입자가 보험금을 청구할 때 의료기관이 바로 보험사에 관련 서류를 전송하게 하자는 것인데, 의료계가 비급여 정보가 노출될 것을 우려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가 업권 간의 갈등을 풀고 조정에 나서야 하지만 10여 년째 진전을 보지 못한 채 공회전만 반복하고 있다.
금융당국의 규제 완화 속도가 지나치게 느린 것도 문제다. 지난해부터 국내 금융지주사들은 그룹 전체의 서비스를 한곳에 모은 이른바 ‘유니버셜 앱’을 준비 중인데, 아직도 당국의 허가만을 기다리고 있다. 금융당국이 지난해 유니버셜 앱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를 공언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기준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 금융지주사 관계자는 “계열사 간의 정보 공유를 어느 수준까지 할 수 있을지를 놓고 당국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금융 규제혁신에 대해 정부가 좀 더 근본적인 개선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금융과 비금융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빅블러’ 현상은 세계적으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라며 “금융사의 주요 건전성 기준은 유지하되 새로운 사업에 나설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금융사도 ‘이자장사’ 논란을 벗어나면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김도형 기자
英, 금융 전문가 유치 위해 급여상한 폐지
[리셋 K금융, 新글로벌스탠더드로]
‘금융 강국’들 쉼없는 규제 혁신
싱가포르, 소비재 중개 플랫폼 허용
은행이 주택-자동차 등 서비스 중개
기존의 ‘금융 강국’들은 요즘도 금융산업 규제 완화를 쉬지 않고 밀어붙이고 있다. 규제 강도를 낮춰서 금융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키우는 한편으로 디지털 전환에도 적극 대응하려는 노력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말 영국 정부는 30년 만의 대대적인 금융 규제 완화 방침을 밝혔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후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는 금융업의 부활을 위한 조치다. 제러미 헌트 영국 재무부 장관은 “EU 규제를 따르지 않아도 되는 ‘브렉시트 자유’를 토대로 금융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영국 정부는 우선 고연봉을 받는 은행 임직원 급여의 상한을 폐지해 실력 있는 금융 전문가들을 유치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보험회사는 주택, 풍력 발전소 등 장기적인 투자처에 투자할 수 있게 허용한다.
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도입된 금융안정성 규제도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은행의 소매 금융과 고위험 투자 부문을 분리하도록 규정한 이 규제가 금융회사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아시아권의 대표적인 금융 중심지로 꼽히는 싱가포르는 은행들도 비은행 사업에 진출할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금융규제 완화에 나서고 있다. 2017년 관련 규제가 대폭 완화되면서 싱가포르에서는 은행의 소비재 중개 디지털 플랫폼 사업, 소비재 및 서비스 온라인 판매 등이 새롭게 허용됐다.
싱가포르개발은행(DBS)의 경우 외부 사업자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DBS 마켓 플레이스’라는 플랫폼을 구축했다. 은행이 주택, 여행, 자동차, 교육 등 다양한 영역의 서비스를 중개해 주는 사업에 나선 것이다. 자동차의 경우 차량 구매와 내 차 팔기, 보험, 대출, 유지보수 등의 종합 서비스를 한곳에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싱가포르 대화은행(UOB) 역시 자회사 ‘UOB 트래블’을 활용해 은행 및 카드 고객을 대상으로 여행 관련 서비스를 제공한다.
정유신 서강대 기술경영대학원장은 “영국이나 싱가포르는 금융 산업이 그 나라의 핵심 산업이라 규제 완화를 끊임없이 추진 중”이라며 “금융 선진국들 역시 규제를 풀면서 금융의 디지털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김도형 기자
글로벌 은행 위기에… 韓, 챌린저뱅크 도입 등 주춤
[리셋 K금융, 新글로벌스탠더드로]
SVB 파산에 특화銀 신중 목소리
비은행권 종지업도 사실상 보류
국내에서도 금융당국을 중심으로 은행권 경쟁력 강화 방안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은행 위기 등 예기치 못한 변수들이 불거지면서 그 추진 동력이 다소 떨어진 상황이다.
9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은행권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은행권의 경쟁을 촉진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6일 은행장들을 만나 “국내 은행 산업은 독과점력을 활용해 예대마진을 확보하는 손쉬운 수익 수단에 안주해 왔다”며 “구조 개선, 금리 체계, 성과보수 체계 등의 경영 관행과 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TF에서 중점적으로 거론된 방안은 소규모 특화은행(챌린저뱅크) 도입, 비은행권에 대한 종합지급결제업(종지업) 허용 정도였다. 은행업 인가 단위를 잘게 쪼개 특정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은행을 만들고 보험, 카드사 등에 지급결제계좌 개설을 허용해 업권 경쟁을 활성화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성공적인 챌린저뱅크 사례로 꼽혔던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면서 소규모 특화은행 도입에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병호 금융연구원 금융혁신연구실장은 “SVB처럼 자산 포트폴리오가 다양하지 않은 은행은 특화된 영역에서 문제가 생기면 경영난이 발생할 수 있다”며 “경쟁력 강화라는 취지에는 동의하나 금융시장 불확실성을 고려해 관련 논의를 당분간 연기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비은행권 종지업 허용 여부에 대한 찬반 양론도 뜨겁다. 특히 한국은행이 결제 리스크 확대를 이유로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사실상 이 방안의 추진은 보류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은행은 “고객의 편의 증진 효과는 미미한 반면, 지급결제시스템의 안전성은 큰 폭으로 저하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강우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