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가톨릭 다이제스트 2002년 1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늘나라 전례에 들어가신 트리악카 신부님을 기억하며)
“끌레멘테 인, 본 조르노?” (인 끌레멘스, 안녕?)
아직도 기억에 선한 트리악카 신부님이 나를 볼 때마다 건네셨던 첫 인사말이다. 원고를 부탁받았을 때 무엇에 대해 쓸까하고 고심을 하던 차에, 트리악카 신부님이 로마에서 귀천(歸天)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고(故) 트리악카 신부님은 전례학 학위 논문을 지도해주신 은사 신부이시다. 신부님과 내가 나눈 인연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하늘나라에 계신 트리악카 신부님은 평생을 로마 성 안셀모 대학교 교황청 설립 전례연구소에서 후배들에게 전례를 가르치셨던 이탈리아인 교수 신부님이시다. 그분이 속한 공동체가 청소년 사목을 주로 하는 살레시오 수도회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신부님은 연세는 많으셨어도 강의를 하실 때나 평상시 우리 전례학부 학생과 만날 때도 항상 유머와 여유가 넘친 분이셨다. 99년 말 내가 전례학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 신부님께서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신다는 소식을 유학 중인 동료 신부들한테서 접했다. 그리고 몇 년의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지난 10월 3일에 하느님 품으로 가셨다는 부고를 받았고, 10월 8일 11시 30분에 고인의 장례미사가 로마에서 있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유학 생활은 무척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참으로 뜻 깊은 시절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나한테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해 주셨다. 그 중에서도 내가 트리악카 신부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나는 신부님을 만나기까지는 마음으로부터 스승이라고 부를만한 분을 별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트리악카 신부님을 만나면서 스승의 참 모습을, 더 나아가 신부님한테서 우리의 참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
신부님은 전례를 가르치시면서 많은 한국 신부와 수녀를 만나셨고, 또 몇몇 한국 수녀에게 고해성사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 한국 사람의 문화와 민족성에 대해, 특히 서양어와 한국어의 차이점에 대해 잘 이해하셨던 분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 사람보다 몇 배 노력을 하지만 그 놈의 말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다는 사실을 잘 아셨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같이 유학 중인 수도원 선배 신부님과 함께 자동차를 빌려 어디를 갔었는데 주차장은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남은 곳이라곤 장애인을 위한 주차 공간만 있었다. 선배 신부님은 용감하게도 차를 장애인 자리에 세우는게 아닌가. 난 놀래서 “형, 차를 장애인 자리에 세우면 어떡해?” 선배 신부님의 대답인즉, “야, 우리는 장애인들 중 언어 장애인이 아니냐? 그러니 여기 세워도 되지.”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면 우리말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서양말 때문에 벙어리 아닌 벙어리 신세이다. 이런 코리아 사람의 처지를 트리악카 신부님은 한국 사람과 만난 당신의 경험을 통해 잘 이해하셨던 것이다.
나는 로마와 뻬루지아에서 이탈리아어를 6개월 정도 배우고 곧바로 성 안셀모 대학의 전례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니 강의를 못 알아듣는 것은 당연지사. 처음 일년간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내가 강의 내용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른 외국 학생들은 다 알고 있었다. 전례 교수님 대부분은 다른 나라에서 유학 온 학생 가운데서도 말 때문에 고생하는 한국 학생들이 강의를 잘 이해했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 일사천리로 강의만 하셨다. 그러나 트리악카 신부님은 다르셨다. 신부님은 강의 시간 중에 한 부분을 설명하시고 나면 꼭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인 끌레멘스, 잘 알아들었는가? 너는 학생들이 내 강의를 잘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못 알아들었는지에 대한 거울이야.” 난 이처럼 학생들이 신부님께서 강의하신 내용을 잘 이해했는가에 대한 잣대였다. 그러면 모든 학생들은 나를 보며 웃었다. 난 얼굴이 빨개지면서 대답했다. “씨, 로 까삐또 (예, 알아들었어요).” 그러면 스승님은 나를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셨다. 만일 내가 못 알아들었다고 대답하면 신부님께서는 친절히 다시 설명해주셨고 끝에는 꼭 나한테 확인하셨다.
내가 트리악카 신부님의 지도로 학위 논문을 쓴다니까, 안셀모 대학의 다른 교수 신부님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끌레멘스, 논문 지도 신부님이 트리악카 신부님이라구? 그러면 너는 논문을 결코 끝내지 못할거야.” 나도 익히 알았지만 트리악카 신부님은 논문 지도를 너무 엄격하게 하신다는 소문이 전례학부 안팎에 널리 퍼졌던 까닭이다. 실제로 신부님한테서 논문 지도받는 학생들 가운데는 몇 년이 지났는데도 논문을 끝내지 못한 이들이 꽤 있었다. 더 나아가 논문 분량 또한 다른 교수 신부님보다 더 요구하셨다. 그러니 신부님의 악명 아닌 명성은 전례학부에 널리 퍼졌던 것이다. 신부님과 논문을 쓴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나는 신부님의 실력과 인품을 잘 알았기에 이러한 소문에 흔들리지 않고 그분의 지도로 논문을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신부님은 나한테 확실한 것을 요구하셨다. 이것은 당신이 평생 쌓으신, 전례를 연구하는 방법론을 나한테 정립시키기 위해서였다. 보통은 학생이 논문 지도 교수한테 먼저 만날 약속을 청해서 논문 진행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 정상인데, 트리악카 신부님은 그 반대였다. 신부님이 먼저 나한테 전화하셔서, “끌레멘스, 논문이 어느 정도 되가나? 언제 만날까?” 하고 나를 채찍질하셨다. 어떤 때는 내가 밤늦게까지 논문을 쓰다가 아침에 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가 울려 받아보니, 그건 바로 트리악카 신부님의 전화였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처럼 자상한 아버지처럼 게으른 나를 항상 격려해주셨으며 앞에서 끌어주셨기 때문에 논문을 제 시간에 끝낼 수 있었다.
논문 심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귀국하기 전 신부님과 만났을 때 신부님께서는 학문의 스승뿐만 아니라 영적 스승으로서도 내가 한국에서 해야 할 수도생활과 사제 생활에 관해 여러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이러한 스승님을 만나도록 안배해 주신 주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주님, 신부님을 당신 품에 받아주소서.
항상 웃으시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트리악카 신부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하나되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 영광과 찬미를 바치소서.
언젠가 저도 신부님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겠나이다. 아멘.
글쓴이 : 인 끌레멘스 신부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