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스라엘 중에 섞여사는 무리 (민수기 11:4)
민수기 11: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중 ‘섞여 사는 무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낱말 ףספסא (‘아사프수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여기서만 딱 한 번 출현한다. ‘모이다, 모으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어근 ףסא가 두 번 겹쳐서 만들어진 이 낱말은 ‘어중이떠중이’란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말 개역에 ‘이스라엘 중에’라고 번역된 것은 사실상 직역하면 ‘그 가운데’ (וברקב)이다.
민11:4에 있어서 우리말 개역 성경은 다분히 이들이 ‘이방인’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표준 새번역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사실상 이들은 출12:38에 언급된 바 있는 ‘중다한 잡족’ (ב ב, ‘에레브 라브’)과도 같은 무리로 보여진다: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하였다.” 그리고 어쩌면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 사이에 태어난 사람도 아마 이런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레24:10-11 참조).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부류는 ‘너희 곧 너희 두령과 너희 지파와 너희 장로들과 너희 유사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 유아들과 너희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무릇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라고 열거되어 있다 (신29:10-11). 민11:4의 ‘아사프수프’나 출12:38의 ‘에레브 라브’는 아마도 여기 ‘네 진중에 있는 객(ר, 게르)과 무릇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라고 묘사된 이들과도 거이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구약 성경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사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용어는 ר (‘게르’)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거주할 때부터 이미 서서히 유입되기 시작한 이방인의 무리는 광야 시기에도 모세의 장인 족속인 미디안 사람들이 유입되고 (민10:29 참조),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로는 거기 남게 되는 가나안 땅 원주민들이 대거 스며들어 오기 시작한다. 이후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하던 시대처럼 이스라엘이 강성할 때 이들은 흔히 부역에 동원되었지만 (대상22:1; 대하2:17-18 참조), 이들중 일부는 다윗의 군대에서 종사하며 충성을 바치기도 하였다 (삼하8:18; 왕상1:38 참조).
모세 율법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들 ‘게르’에 대하여 신분과 권한상 약간의 차이는 두고 있지만 학대는 금지되어 있다. 오히려 그들은 보호와 사랑의 대상이요, 종교적으로도 여러가지 면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동등한 의무 및 권한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이들 일반에 대한 전 민족적 차별감정이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출12:38의 표현은 결코 이스라엘 자손을 따라 이집트를 떠나는 이방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적 언사가 아님을 먼저 밝힐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민11:4에 있어서 히브리어 낱말 ףספסא (‘아사프수프’)가 주는 뉴앙스는 약간 다르다. 이들은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이방인으로서, 자기들이 품고 있는 탐욕을 이스라엘 자손 무리에게까지 번지게 한 장본인들이다. 따라서 민수기 저자는 이들을 가리켜 출12:38의 ב, (‘에레브’)와는 달리, 썩 좋지 않게 들리는 ףספסא (‘아사프수프’)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민11:4의 이 표현은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얼마든지 ‘어중이떠중이’ 내지는 이와 유사한 류의 우리말로 번역할 수 있다고 본다.
2. 모세와 아론의 중대한 잘못 (민수기 20:1-13)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모세의 간곡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히려 진노하시며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허락하지 않으신다 (신3:23-26). 아론 뿐만 아니라 모세까지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므리바에서 일어난 한 사건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사건이었기에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크게 진노하시고 이 위대한 영도자들의 가나안 입경을 막으셨는가?
지명을 빌어 ‘므리바’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사건은 민수기 20장에 기록되어 있다. 마실 물이 없어서 시작된 이 사건 외에도 식수로 인한 불만과 그에 따른 조처는 출애굽기 15:22-25 (마라에서), 출애굽기 17:1-7 (맛사 또는 므리바에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 17:1-7의 기록과 민수기 20:1-13의 기록을 동일한 사건으로 혼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두 사건은 별개의 것이다. 전자는 ‘신’ (ןי)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도착하여 (출17:1) 발생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요, 후자는 ‘찐’ (ן) 광야의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 (민20:1) 거기서 발생한 시건을 기록한 것이다. 또 출애굽기 17장에서는 ‘호렙산의 반석을 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지만, 민수기 20장에는 ‘그 반석에게 말하여 (히브리어 동사 רבד) 물을 내게 하라’는 하나님의 지시가 있다.
이처럼 장소와 세부 사항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이나 성경 독자에게 오해와 혼동이 있는 것은 우선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서로 다른 지명인 ‘신’ (ןי)과 ‘찐’ (ן)을 다같이 ‘신’으로 음역하여 혼동을 불러일으켰고, 둘째는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다같이 ‘므리바’ (이는 단순히 ‘다툼’이라는 뜻임)라는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는 이 메마른 광야에서 40년 방황하는 동안 수없이 있었을 법한 식수 사건을 지나치게 단순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민수기 20:1-13에 기록된 사건을 별도로 떼어 낼 때, 왜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셨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는 물로 인하여 불평하는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단지 ‘바위에게 말함으로써’ 물을 내게 하시고 또 그 일로 영광을 받고자 하심이었다 (8절). 그러나 모세가 취한 조치는 하나님의 의도에 따른 구체적인 지시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모세는 불평하는 백성에게 분을 발하며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고 말하면서 자기 지팡이로 그 반석을 두 번 친다. 물론 물은 솟아 나왔다.
이 과정에 있어서 모세와 아론에게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던 것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진노와 열정은, 아무리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결과일지라도, 하나님의 의도와 지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단순히 자기의 기분에 이끌려 하나님의 영광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할 때, 결국 하나님의 분노를 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므리바에서 모세와 아론의 실수는 그들 본인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성경은 여기저기서 이 사실을 상기시킨다 (민20:12, 24; 27:14; 신32:51; 시106:32 등).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구원 계획에 대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하면서 열심히 간한 베드로에게 떨어진 예수님의 대답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였다 (마태16:21-23).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이처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자기의 열성과 분노를 따라 행동할 때, 그는 얼마든지 ‘사탄’의 경지로도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3. 홀로 사는 민족 (민수기 23:9)
한때 고독을 즐긴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으나, 실상 인간은 누군가의 말대로 사회적 동물인지라 고독을 싫어하는 존재라고 하겠다. 그렇지 아니하고야 어찌 죄수를 일반 사회와 격리시키는 감옥이 형벌의 장소가 될 수 있겠으며, 그중에서도 독감방에 두는 것이 중한 형벌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고독 내지 고립은 때때로 지적 및 정신적 성장에 아주 중대한 요인이 됨을 경험하게 된다.
구약 성경을 통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실중의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립 내지 격리이다. 일찌기 하나님이 아브라함더러 그가 태어나 자랐던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라고 명하신 일은 달리 보면 아브라함을 그의 혈연 및 지연적 뿌리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함이었다. 아브라함은 순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뿌리를 끊어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는 새로운 삶의 과정에 들어간다. 그의 아들 이삭은 아버지의 독특한 삶의 자세 때문에 자칫 희생이 될 뻔했던 위기를 겪은 바 있으며 (창세기 22장), 나이 마흔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고 아버지 아브라함의 조처를 기다려야만 했다 (창세기 24장; 25:20). ‘들에서 배회하는’ (창24:65) 이삭의 모습은 그의 고독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야곱의 일생 역시 그의 고립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쌍동이 형 에서와의 마찰로 사랑하던 부모와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야곱, ‘에서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만 외삼촌 집에 피하여 있으면 곧 사람을 보내어 야곱을 불러 오겠다’(창27:44-45)는 어머니 리브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20년 험한 세월을 객지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뿐이던가? 딸 디나의 일로 주변 거민들을 더욱 경계하며 살아야만 했던 일 (창세기 34장), 더 나아가서 야곱은 애지중지하던 아들 요셉마저 잃게 되어 그의 슬픔과 고독은 극에 달하게 된다: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창37:35). 그는 자그마치 20년동안 요셉이 죽었다고 믿으면서 속아살게 된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요셉의 삶 역시 고독의 과정을 보여준다. 열 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형들에게 팔려 먼 타국으로 노예가 되어 끌려가는 요셉, 애매한 누명으로 인한 수년간의 감옥 생활 등은 그의 고독과 고난을 잘 설명해준다. 요셉은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애굽 여자와 결혼하여 자식을 얻은 다음에야 고의 고독을 어느 정도 삭힐 수가 있었다. 그러기에 첫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고백하며 그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불렀던 것이다 (창41:51). 하지만 그의 고독은 잠시 잊혀졌을 뿐이지, 영원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죽음에 임박하여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고 친족들의 다짐을 받은 것이었다 (창50:25).
이스라엘 자손이 처음으로 민족다운 형태를 이룬 것은 그들이 모세의 영도하에 애굽을 빠져나와 광야에 이르렀을 때였다. 애굽에서 약속의 가나안 땅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은 ‘블레셋 길’이라고 불리웠던 시나이 반도 북쪽 지중해변의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광야 길로 그들을 인도하신다 (출13:17-18).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타민족과 접촉하여 충돌(전쟁)하기 전에, 그들을 별도로 고립된 장소에 모아서 특별한 훈련을 시키고자 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40년 광야 생활은 그들이 하나의 선민으로서 발돋움하는데 필연적인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찌기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신23:4) 발람은 모압왕 발락의 부름을 받고, 광야에 진을 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러 산에 오른 적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 입에 주시는 말씀 외에는 한 마디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말대로, 발람은 이스라엘 자손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며 말하기를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고 하였다 (민23:9). 어찌보면 발람의 이 예언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특성을 한 마디로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준 표현이라고 하겠다.
발람이 지적한 바, 이스라엘 민족의 고립성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 곧 유대인의 지난 2000년 역사 가운데서도 잘 입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지구 위 어디를 가든지 현지에 사는 족속과 어울리지를 못한다. 겉으로는 어느 사회에든지 잘 적응하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도 오르고 왠만한 경제력도 갖추는 것 같지만, 내면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철저히 타민족에의 동화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종교 전통과 문화 유산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고집하며 사는 것이 유대인의 특성이라고 하겠다.
소수 민족으로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절대 다수 민족에의 동화를 거부할 때 간혹 생기는 불행한 일이 바로 미움과 질시와 더 나아가서는 핍박 및 민족의 집단 학살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유대인처럼 이러한 비극을 강도깊게 당한 다른 민족이 없다는 사실은 바로 이웃에 동화되지 못하고 자신의 것을 고집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영위해나가는 그들의 근성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를 잘 드러내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유대인의 고립성은 어느정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끌어내어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변 이방 민족의 삶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요구하셨다. 그리하여 광야에서 성막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지켜 행할 율법을 주신다. 하나님은 당시 우상 숭배가 만연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였던 세대에 이스라엘 자손을 택하셔서 따로 불러 내시고 그들에게 독특한 율법을 주시어서 주위의 타민족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명하신 것이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19:2)는 명령은 비단 광야 생활을 다룬 레위기의 주제일 뿐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심도깊게 흐르는 주요 사상중의 하나이다. 후기 왕국 시대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형식에만 치우친 ‘거룩함’을 신랄하게 비난하신다. 하루하루의 삶에 아무런 반영없이 지나치게 가식적이고 종교화된 ‘거룩함’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거룩함’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외식, 가증’이라는 것이었다.
지난 2000년간,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퍼지기 전부터 이미 유대인들은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자신들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통하여 주위 민족들에게 색다른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좋건 나쁘건 간에 큰 영향을 미쳐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유대인은 지상 어느 민족보다 더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소유하며, 타민족의 구설수나 미움의 대상으로서 쉽게 오르내림을 보게 된다. 오죽하면 일찍부터 ‘반유대 감정’이라는 표현이 서구 사회에 퍼졌겠는가.
유대인 역사의 독특성은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며,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공상이나 허구가 아닌 진정한 사실임을 입증해준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은 역사의 마지막 시점까지 ‘열방 중의 하나로 간주되지 아니하고 홀로 처하는’ 민족으로 남을 것이다. 유대인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격리시킨 것은 역사의 주인이신 조물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일이기에 그들의 독특성이나 모남이 우리 이방인들에게 기분나뿐 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일찌기 이스라엘 민족을 열방으로부터 구별하여 내시고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시점에 다시금 그들을 부르시고 모으셔서 그들을 위한 대대적인 구원 작업을 펼침으로써 또 한 번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기에 발람은 고백하기를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고 하였다 (민23:10).
4. 하나님의 후회에 관하여 (민수기 23:19)
성경 독자들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은 후회하시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개역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주장은 대표적으로 민수기 23:19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발람의 입을 통하여 나온 이 말은 많은 성경 독자들을 당혹하게 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경우를 몇 번 씩이나 접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 보는대로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경우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창6: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신32:3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삼상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삼상15: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삼하24:16 = 대상21:15)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이제 상기한 구절들을 히브리어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창6:6의 ‘한탄하다’는 동사형 ם을 번역한 것이다. 이는 동사 םחנ의 니팔형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삼상15:11, 35; 삼하24:16 (= 대상21:15)에서도 동사 םחנ의 니팔형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32:36의 ‘후회하다’는 동사형 ם을 번역한 것으로서, 이는 동사 םחנ의 히트파엘형에 해당한다. 한편 민23:19에서는 신32:36과 동일한 히트파엘형 ם이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민23:19의 ‘하나님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과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다른 구절들 사이에 ‘후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만 두고 볼 때, 별 차이점이 없음을 알게 된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히브리어의 םחנ과 우리말 ‘후회’가 주는 뉴앙스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는 것보다는 우리말로만 읽을 경우에 오해의 소지가 더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서로 상반되는 주장으로 보이는 구절들에 대하여 전후문맥을 가지고 그 이해를 위한 접근을 시도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실제로 홍수 직전 사람들의 죄악상을 보고 땅에 사람 지으셨음을 슬퍼하셨고,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일을 한탄하셨고, 다윗 때에 백성에게 재앙 내리신 일을 마음아파 하셨다. 이상의 기록들은 모두, 구약 성경에서 자주 그러하듯이, 마치 피조물인 인간에 대하여 기술하듯이 (anthropomorphism, 신인동형론), 하나님에 대하여 묘사한 것들이다.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을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로보트인 양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23:19에서 의도한 바는 다르다. 발람은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언급하고 있다. 민23:19-24에서 강조하는 중심 내용은 이스라엘의 선택과 지위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섭리이다. 하나님은 피조계를 다스리시고 섭리하심에 있어서 후회하심이 없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변함이나 후회하심이 없다. 아마도 민수기 23:19의 발언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문구는 신약 성경 로마서 11:29의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가 아닌가 한다.
5. 도피성과 대제사장의 죽음 (민수기 35장)
살인 행위는 피를 흘리는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피흘림으로써 갚도록 되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9:5-6 참조). 그런데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고, 실수하여 살인한 경우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 중에 도피성 제도가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도피성을 두어 실수로 살인한 자들을 보호하도록 하게 하는 제도이다. 도피성은 어디서든지 쉽게 도달할 수 있도록 교통이 좋은 곳에 위치하여야 한다 (신명기 19:3 참조). 그리고 실수로 살인한 자들을 영접하여 그들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도피성에 피하여 죽음을 면하게 된 살인자는 우선 회중의 판결에 넘어간다. 그리하여 그가 실수로 살인한 것이 판명되면, 그는 다시 도피성에 돌려 보내져서 거기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도피성 안에서는 보호를 받을 수 있으나, 도피성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일체의 보호 권리를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피살자의 가족이나 친척이 그 살인자를 도피성 밖에서 발견하고 원수를 갚을 경우 이는 정당한 행위로 간주되어 전혀 법적 제재를 받지 아니한다 (민수기 35:22-27).
이 살인자가 도피성을 빠져 나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게 될 경우’이다 (민수기 35:25, 28). 이스라엘에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대의 책임을 맡은 대제사장은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이 오직 한 사람,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어야만 도피성에 갇혀 나갈 수 없는 비운의 살인자가 그 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도피성 제도는 우리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고 하겠다. 인간은 마치 실수로 살인한 자와도 같다. 살인 자체는 분명히 죽음을 면치 못하는 죄이다. 그러나 이 엄중한 죄가 애초에 본인의 의도로 저질러지지 않았다는 데에 그에 대한 형벌을 재고할 필요성이 있게 된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신학적 설명은 왠지 속시원한 설명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죄를 온 인류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좀 억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류의 책임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 세상에 들어온 죄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5:12 참조). 그리고 죄의 값은 결국 죽음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의 입장은 실수로 살인하여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자의 입장과도 유사하다고 하겠다.
하나님은 이들 죽음에 직면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시었다. 율법은 마치 도피성과도 같이 그 안에 피하러 들어온 사람을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율법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 보호 범위를 벗어나는 자를 죽음에서 구해낼 수 없으며, 그리고 보호받으러 그 안에 들어온 자일지라도, 진정 그의 문제를 해결한다기 보다는, 그를 임시로 죽음에서 보호할 뿐이지, 결국은 그의 자유를 빼앗는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 안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율법 안에 사는 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늘 기억하게 되며 (로마서 3:20), 율법이 제공하는 ’보호‘라고 불리우는 부자유 속에서 평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도피성에서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없듯이, 율법 안에서는 죄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 있을 수 없다. 율법은 일시적인 보호만을 제공해줄 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는 점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임)의 죽음이 인간의 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여 온전한 자유를 주는 것처럼. 예수의 죽음은 율법에 갇힌 인간을 풀어준다. 진정한 자유를 그에게 준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머물고자 고집하고 있다. 거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자 안간 힘을 쓴다. 율법도 ‘하나님의 의(義)’임에는 틀림이 없다 (로마서 3:21). 그러나 그것은 ‘대제사장의 죽음’이 있기까지 인간을 죽음에서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이제는 이미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도피성을 나와도 안전한 때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너무나 오랫 동안 도피성 (=율법)에 머물러 있으면서, 도피성 밖에는 죽음이 있다는 강박 관념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안전하다는 ‘복음’을 믿으려 하고 있지 않다. 이들은 아직도 도피성의 노예로 안주(安住)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이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으신 것과 또 이 일을 통하여 그들이 이제까지 안주해온 도피성 곧 율법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율법이나 또는 특정 계명에 안주하고자 하는 경향은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일부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나치게 제도화된 교회의 틀에 묶여서 교인 노릇하는 이들은 도피성에 갇혀있는 자와 다를 바가 없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 복음 8:32).
김경래 교수/“그 말씀” 1996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