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기념 법어 1
- 태이자(이재운, 국제여래선원)
* 법어 2 https://cafe.daum.net/biocode/3w8I/885
* 부처님오신날은 붓다의 생일이 아니라 열반한 날을 기리는 날이다 https://cafe.daum.net/biocode/3w8I/886
붓다는 공(空)을 깨우쳤다.
하지만 붓다가 열반에 든 뒤 제자들은 교리 분석에 치우쳐 공의 본뜻을 점차 잃어갔다. 부파불교의 승려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일부러 왜곡하려 했다기보다는, 법(dhamma)을 지나치게 잘게 나누고 갈라 들여다보다가 '아비달마(교리 연구)'라는 틀에 갇혀 실체론(사물이 저마다 고유한 自性을 가졌다는 주장)으로 흘러간 탓이다. 이는 마치 성리학자들이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져 유학(儒學)의 본질을 잃고 한계에 부딪혀 무너진 것과 같다.
초기 대승학자들은, 8만4천 법문으로 상징되는 붓다의 법을 딱 한 자로 줄이면 바로 '공(空)'이라고 보았다. 이 가르침은 고통받는 중생을 건너게 해줄 뗏목이거늘, 부파불교 승려들은 강가에 모여앉아 뗏목의 나무 재질이 무엇인지, 못은 몇 개가 박혔는지 분석하느라 정작 강을 건널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대승학자들은 붓다가 깨달은 반야의 본질인 공(空)을 처음부터 다시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이 100년 이상 줄기차게 이어지면서 붓다의 공(空)은 대승의 《반야경》으로 새롭게 피어나고, 나가르주나의 <대지도론(저 언덕으로 건나가는 절대지혜를 논하다)>으로 해석되고, 훗날 이 《반야경》을 줄이고 줄여, 커다란 광석(鑛石)에서 금을 뽑아내듯 《반야심경》 260자로 추려냈다.
초기 대승학자들이 《반야경》을 통해 공 개념을 본격적으로 밝혀내면서 비로소 구름에 가려진 태양처럼 흐릿하던 공(空)의 진짜 얼굴이 또렷이 드러났다. 붓다의 제자들과 그 뒤를 이은 부파불교 승려들이 저지른 실체론적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대승학자들은 공을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다시 말해 '태어남과 사라짐이 없고(不生不滅) 더러움과 깨끗함도 없으며(不垢不淨),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不增不減)' 중도(中道)의 세계로 인식했다.
나가면 색(色)이고, 돌아오면 공(空)이다. 인연을 만나 나타난 현상이 색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이 텅 빈 본질이 공이다. 공에서 색으로 물질화하고, 색에서 다시 공으로 돌아가는 역동적인 순환 과정이 바로 붓다가 선언한 연기(緣起)다. 따라서 색과 공이 둘이 아니요, 색과 공 사이에 무수히 변화하는 연기가 곧 우주의 실상임을 뚫어보는 눈, 그것이 바로 반야(般若)라는 지혜다.
현대 물리학으로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들이 힉스 장과 상호작용하여 질량을 얻고 비로소 형체를 드러낸 것이 색의 세계다. 그러나 이 물질들도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 쌍소멸하는 순간, 질량은 남김없이 사라지고 순수한 에너지의 파동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고정된 형상이 사라져 본래의 텅 빈 상태로 돌아가는 격렬하고도 역동적인 변화, 이것이 바로 현대 과학이 증명하는 공의 실체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소립자들이 힉스 장을 거치면서 질량을 얻고 정지질량을 갖는 순간 원자를 이룬다. 그 기본 바탕이 수소(H)의 원자핵인 양성자다. 이 양성자가 6개 융합하면 탄소가 되고, 7개면 질소가 되며, 8개면 산소가 된다. 본질은 같은 알맹이인데 몇 개가 뭉쳤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원소가 되는 것이다. 26개면 철, 79개면 금, 82개면 납이 된다. 실험실에서 원자 번호 82번인 납의 원자핵에서 양성자 3개를 빼내어 79번인 금으로 변환하는 연금술 같은 핵반응이 실제로 증명되기도 했다.
놀랍지 않은가. 근본 바탕은 모두 같지만, 산소 원자 1개와 수소 원자 2개가 인연으로 만나면 물이 된다. 탄소, 수소, 산소라는 세 가지 기본 원자만 모여도 조합에 따라 에탄올(C2H6O), 포도당(C6H12O6), 아세트산(CH3COOH), 설탕(C12H22O11) 같은 무수한 분자 화합물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인연으로 뭉친 분자 화합물도 불에 타거나 소화되어 분해되면 다시 기본 원자로 흩어져 돌아가 버린다. 불에 타든, 망치에 부서지든, 오래되어 썩든 그 기본 원자는 터럭만큼도 타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썩지 않는다.
원자의 세계에서도, 분자의 세계에서도 끊임없는 연기(緣起)가 일어났다 꺼졌다 한다. 이렇게 생성과 소멸의 연기가 끝없이 오가는 우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바로 공을 이해하는 길이며, 반야를 아는 것이며, 이를 가리켜 깨달음이라 부른다.
이 거대한 흐름을 동양 철학은 제각각의 언어로 가리켰다. 만 가지 현상이 하나의 본질로 수렴하는 '만법귀일(萬法歸一)'과 모든 것이 마음의 일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색에서 공으로의 회귀라면, 근본 실재가 만 가지 현상으로 펼쳐지는 '일분위만(一分爲萬)'과 성리학의 '이일분수(理一分殊)', 도교의 '도생만물(道生萬物)'은 공에서 색으로의 나투심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공과 색을 하나로 아우르는 자리가 바로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세계다.
그러나 경계할 일이 있다. 이 이치를 머리로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붓다는 이 반야를 또렷이 깨달으려면 깊은 삼매에 들어 비파사나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가섭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아들 라훌라에게도 말하고, 시자인 사촌동생 아난에게도 말했다.
이 실천의 문을 통하지 않고는 오늘 사부대중이 두 눈으로 읽은 이 이야기 또한 한낱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으며, 강을 건너지 못한 채 뗏목 위에서 물풀처럼 흘러다니며 그렇게 늙어가는 것과 같다. 그대여, 이 이치를 도구 삼아 스스로를 경계하고 오직 실천으로 나아가라.
* 이 글의 마지막에 나는 '경계의 말씀'을 적었다. 알음알이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글을 보고 영혼의 질량을 얻었다면 편도체 뇌에 새겨진 인간 욕망을 따라 빛의 속도로 달리던 당신이 비로소 '멈추는 법' 을 알게 될 것이고, 그래서 '멈추어 반야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당신의 욕망은, 절대지혜인 이 반야를 만나 욕망을 멈출 것인가, 마치 소립자가 힉스 장을 통과하며 얻은 질량 덕분에 원자가 되는 것처럼 천변만화하는 이 색계(色界)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
그래서 나의 자비심을 뽑아 한 편 더 알리고자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자연인은 이 반야를 깨우친 뒤, '반야를 깨우친 사람'이라는 뜻의 붓다가 된 뒤 40년간 오로지 또 다른 붓다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제자를 만들고,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하지만 그는 제자를 남기지 못했다. 아니, 제자는 많았지만 붓다가 된 제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400여년이 지나서야 나가르주나라는 진정한 붓다가 나타났다. 그 자신은 '보살(Bodhisattva ; Bodhi는 깨달음, 지혜, 반야). Sattva는 생명 있는 존재, 중생. 나가르주나가 스스로 고타마 붓다를 높이고 자신을 낮춰 만든 '붓다의 새로운 명칭'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글이요, 그 나가르주나급(級) 붓다가 되려면, 다시 말해 보살이 되려면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지 짧은 글을 남긴다.
보살은 이 색계의 진짜 주인공이니, 그 까닭을 밝히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