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한반도 사찰에 세워진 하마비의 조사 목적
하마비는 중국인 대륙에서 시작되어 한반도에 정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많은 불교사원이 있고 중요시설이 있었기에 하마를 하는 곳이 많았지만
성문법으로 정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사회적 약속의 개념으로 남아 있다가,
고려시대까지 이어오다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祠宇 등등이 많이 지면서 하마비를 세우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
현재 하마비에 대한 최고의 기록은 목은 이색 선생의 詩에서 보이나, 그 전에도 하마비는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실물이 남아 있지 않는다.
한반도와 일본 , 대만과 베트남에 남아 있는데 대부분 중국과 교류가 깊고 유교적 사회에서 남아 있어,
하마비에 대한 인식은 오래전 부터 있었다.
그 중에 사찰에 하마비는 몇 개나 되는지 언제 부터 나왔는지에 대한 것은 낭설만 있을 뿐 정확하게 조사 되지 않고'연구'되지 않았다.
어떤 기록에는 중종때 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불교 들어온지 15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하마비는 그 보다 더 오래전에 생긴 것인데도 정확한 기록이 없이 여러 기록이 난무하고 있어 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이제 까지 하마비가 조사된 기록은 이희득의 저 하마비를 찾아서 1권5권이 집대성이 되어 있어 약400여개의 하마비가 조사된 것으로 나왔지만 사찰에 보이는 하마비는 불과 20여좌이고 그중에 오래 되고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왕살의 원찰에서 보이고 있는 현실이다.
즉 유교 국가에서는 사후 세계를 위한 것은 없고 제사만 존재하기에 불교에서는 극락왕생을 기원 하는 것이 있고, 기복 신앙도 포함된 사찰에 귀의 하다보니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많은 혜택이 있으니 그리 하였고 조선에서는 이단이라 하여 유생들의 횡포가 심하기에 하마비를 세워서 왕실의 권위와 사찰의 보호를 위하여 하마비를 세운 것으로 풀이된다.
조선이 건국이 하면서 1413년에 비로소 하마비를 어디에 세워라 하고, 벼슬별로 내리는 곳 까지 지정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본다.
다만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하마비라 하지 않고 하마패라 불렀으며, 대부분 목재로 만든 것으로 생각되며, 석비로 만든 하마비는 지금 남아 있는 성균관 하마비가 최조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사찰에는 부처가 계시는 곳이라 친견 하려면 말에서 내려서 와야 하기에, 하마비를 세우지 않았지만 무언의 반드시 하마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사찰의 하마비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유생들의 행패와 왕실의 원찰이 되면서 자구책으로 하마비를 세우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검색을 하여 보면 문정왕후가 명령으로 사찰에 하마비를 세우게 하였다는 글이 보이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러한 내용이 전혀 없기에 잘 못 된 정보가 아직도 범람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반도에 남아 있는 사찰의 하마비는 20여좌 내외로 남한에만 조사를 하였기에, 북한에도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직 알려 진 것이 없다.
남아 있는 사찰의 하마비는 오래된 것도 있고, 현대에 다시 세운 것도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현대에 세운 하마비가 오래되었다고 할까 여기에 포함시켜 본다.
남아 있는 남한의 사찰 하마비에 대하여 세심하게 논하여 본다.
연구 방법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기에 남한에 있는 하마비를 직접 찾아가서 사진촬영하고
실측하고 몇 좌의 하마비가 있는지 조사하고, 기록에는 하마비를 세웠지만 소실된 것을
복원 한 하마비도 포함 시켰다.
하마비에 나타나는 서체와 재료인 돌을 분석하고 위치도 알아 보고 어떻게 해서 하마비가
사찰에 세워지게 되었는지 연구를 하여 본다.
약 20여 좌의 하마비를 보면 오래되었다고 하나 찾아가면 원래의 자리가 아닌 곳에 있고 어떤것은
새롭게 조성된 것도 있지만 하마비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없고 세운 시기기 불분면 한 비가 많아서
이번 기회에 조사를 하여두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에 세운 시기를 추정 할수 있는 하마비는 간지가 새겨진 고성 옥천사 하마비 정도이며, 그 외는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이 큰 아쉬움 이었다.
하마비의 기준
하마비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조사 하여보니 돌로 만든 부처가 있으면 참배를 하려
말에서 내리거나, 祈子石, 입석에서 말을내리는 경우에도 있고, 조선 시대 역참에도
하마비가 있다 하여 가보니 말을 묶는 돌 말뚝을하마비 칭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선착장에 부근 말을 묶는 돌 말뚝도 하마비라 하기에 어떤 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정확한 기준을 두고 정하였다.
즉 돌기둥에 '下馬'라는 명문이 있는 경우만에 하마비를 인정하여 조사와 연구 범위에
포함 시켰다.
그리고 고전 번역원db와 한국문집총간, 등의 자료에서도 사찰관련 하마비를 찾았지만
없었으며, 대부분 사찰에 있는 왕실과 관련이 있지만 조선왕조 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에는
나오지 않아 국가명의 받아서 세운 하마비는 아닌것으로 생각된다.
사찰 하마비 실측
단위 cm
번 호 | 위 치 | 가로 | 세로 | 두께 | 건 립 년 도 |
1 | 대구파계사 하마비 | 43 | 113 | 17 | 영조시기 |
2 | 남양주봉선사하마비 | 37 | 93 | 18 | 근대 |
3 | 의성지장사하마비 | 27.8(상부) | 68 | 12 | 조선후기 |
22(하부) |
4 | 순천송광사하마비 | 65 | 102 | 24.7 | 조선후기 |
5 | 서울진관사하마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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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부산범어사하마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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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
7 | 양산통도사하마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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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
8 | 삼척신흥사하마비 | 29 | 46 | 31 | 2000년대 초 |
9 | 성주선석사하마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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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보은법주사하마비 | 39 | 84.5 | 18 | 조선후기 |
12 | 강릉청학사하마비 | 39.5 | 122.5 |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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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홍천수타사하마비 | 52.5 | 106 |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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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고성옥천사하마비 | 40.5 | 95 | 16.4 | 1861년 철종12년 금석문조사총람집3에서발췌 |
15 | 순천선암사하마비 | 46 | 82 |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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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성주관운사하마비 | 48 | 120 | 22 | 1597년추정 |
17 | 영천은해사하마비 | 28.5 | 117.5 | 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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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남해용문사하마비 | 71 | 77 |
| 두께측정불가 일제 강점기 |
첫댓글 발품팔아서 정리하신 귀한자료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석사논문 일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