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 진씨의 본관은 여양(驪陽:홍성) ·삼척(三陟) ·나주(羅州) ·강릉(江陵) 외에 여러 본이 있으나 모두 여양진씨의 후손으로 나주 ·삼척 ·강릉은 이미 《여양진씨대동보》에 환보(還譜)함으로써 사실상 여양진씨로 일원화되었다. 시조는 고려 제17대 왕 인종 때의 명장 진총후(陳寵厚)이다(종래의 문헌에 시조로 나와 있는 고려 참지정사 俊은 총후의 아들이다). 《여양진씨대동보》에 따르면, 그가 인종 때의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공을 세우고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짐으로써 여양진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선대는 원래 중국 사람으로, 송(宋)나라 때 우윤(右尹) 벼슬을 지낸 수(琇)가 고려에 귀화하여, 여양현 덕양산(德陽山) 아래에 은거한 것이 한국 진씨의 효시이다. 그러나 문헌에는 명(明)나라 때 고려에 귀화한 이(理)와 봉의(鳳儀)의 후손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원(元)나라 말기에 스스로 칭제(稱帝)했던 우량(友諒)의 아들로, 1369년(공민왕 18)에 주원장(朱元璋)이 고려로 추방했으며, 조선 태종 때에 순덕후(順德侯)에 책봉되고 그의 후손이 뒤에 ‘흥덕(興德)진씨’의 일파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한편 봉의는 명나라 종인부(宗人府)의 의빈(儀賓)이었는데, 명나라가 망할 무렵, 그의 현손이 한국으로 망명, 귀화한 것이다. 어쨌든 이 ·봉의의 후예가 현재까지 전해지는지 미상이지만, 만일 있다면 여양진씨와 동성이족(同姓異族)일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이와는 달리 정유재란 때 명나라 수군을 이끌고 한국에 왔던 제독 인(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진씨(廣東陳氏)가 경남 양산(梁山)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rm런데 총후를 시조로 하는 여양진씨는 그의 증손대에 이르러 시중공파(侍中公派) ·어사공파(御史公派) ·예빈경파(禮賓卿派) ·매호공파(梅湖公派) ·전농공파(典農公派)의 5파로 대별된다. 진씨는 고려 ·조선 시대에 비교적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있는데, 주요한 인물로는 고려 신종 때 공주지사(公州知事)를 지냈고 당대의 명문장으로 이름났던 화(斟), 조선명종 때 부제학을 지낸 식(寔), 선조 ·인조 때의 무장으로 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운 무성(武晟)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밖에 고려 명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식(湜), 조선 세종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의귀(義貴), 명종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복창(復昌) 등이 두드러진다. 진씨는 조선시대에 27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에는 총 1만 442가구 가운데 2,000여 가구가 북한지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1960년도 조사에서는 1만 3653가구에 인구 7만 8386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49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2만 9413가구에, 인구는 121만 3087명으로 274성 중 제49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