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총기 넘치면 단명운인데, 박정희 전대통령은 관상보다 목소리가 좋아 대통령 됐다.
身·言·書·判. 오랜 세월 동안 동양사회에서 인물을 평가할 때 적용하던 기준이다.
그중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지막 기준인 判이다. 身·言·書를 보는 이유도 최종적으로 판단력을 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판단력에는 두가지가 있다. 바로 理判과 事判이다.
대체적으로 주어진 데이터를 분석, 종합해 내리는 합리적 판단이 事判이고 직관적이고 영적 차원에서 내리는 판단이 理判이다.
사주명리학이란 바로 理判의 세계를 다루는 학문인 것이다.
무턱대고 운명을 먼저 알려고 하는 것은 명리학을 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 뒤 마음을 가다듬어 하늘의 뜻을 묻는 ‘先事判 後理判’의 자세가 올바른 태도인 것이다.
<편집자 주> 신·언·서·판(身·言·書·判). 오랜 세월 동안 동양사회에서 인물을 평가할 때 적용하던 기준이다.
신(身)이란 관상(觀相)을 일컫는다. 남자의 관상을 볼 때 포인트는 눈이다.
정기(精氣)는 눈에서 표출된다고 본다. 그러나 지나치게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면 총기는 있지만 장수(長壽)하지 못한다고 본다.
도교 내단학(內丹學)에서 말하는 인체의 3가지 보물(三寶)은 하단전(下丹田)의 에너지인 정(精)과, 중(中)단전의 에너지인 기(氣), 그리고 상(上)단전의 에너지인 신(神)이다.
눈빛에서 나오는 총기는 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가공하지 않은 자연상태의 원유가 정이라고 한다면, 원유를 어느 정도 가공해 나온 석유가 기이고, 상당히 가공해 나온 휘발유가 바로 신에 해당한다.
휘발유는 상당히 가공된 것이어서 귀하고 비싼 기름이다. 그러므로 평소에도 신이 항상 빛난다는 것은 비싼 휘발유인 신이 지나치게 과소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은 기에서 나오는 것이고, 기는 다시 정에서 생산되는 것이므로, 신을 많이 소비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하단전의 정과 중단전의 기도 이에 비례해 빨리 고갈되게 마련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스위치를 꺼놓아야지 항상 스위치를 켜놓고 있으면 배터리가 빨리 방전되는 이치다. 그러므로 관상가들은 눈빛이 지나치게 반짝거리면 빨리 죽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눈에 총기가 가득한 천재들이 대체적으로 장수하지 못하고 빨리 죽는 것은 이 때문인 것 같다.
회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돌려 아랫배를 관조하라는 말은 눈의 총기를 밖으로 품어내지 말고 내면으로 감추라는 말이다.
자기 몸을 감추는 둔갑술이란 바로 눈빛을 감추는 일이다.
인도의 성자(聖者) 라마나 마하리쉬의 눈빛을 보라! 지극히 고요하고 편안하면서도 보는 사람을 감동시켜 버리는 눈빛이다.
오사마 빈 라덴의 눈빛도 수준급이다. 사람을 폭발시켜 버리는 테러리스트답지 않게 고요하고 편안한 눈빛이다.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눈빛으로 보인다.
기도를 많이 한 것 같다. 관상을 볼 때 또 하나의 포인트가 찰색(察色)이다.
얼굴의 색깔을 보는 일이다. 얼굴 생김새와 윤곽은 선천적으로 타고나지만, 얼굴색은 그때그때 상황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찰색을 일명 ‘기찰’(氣察)이라고도 부른다. 사람의 장기 운세는 관형(觀形)을 가지고 판단하지만, 눈앞에 직면한 단기적인 운세의 판단은 찰색을 보고 예감한다.
예를 들어 이마에서 빛이 나면 관운이나 승진운이 있다고 판단하고, 양쪽 눈 중간의 콧대 부분이 시커멓게 보이면 조만간 죽을 수도 있다고 본다.
관상의 대가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찰색의 핵심은 관상을 볼 때는 반드시 한낮인 정오에 나무그늘 밑에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정오는 태양이 중천에 떠서 자연광이 가장 밝은 시점 이다. 그러나 너무 밝아 얼굴의 미세한 명암을 볼 수 없다.
나무그늘 밑은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이므로 음양이 균형잡힌 지점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조도(照度)다. 저녁때 카페 불빛 아래서는 찰색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결국 조도가 가장 균형을 갖추는 시점에 보라는 말이다.
사주를 보려면 생년월일시를 만세력(萬歲曆)에서 찾아 십간십이지의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지만, 관상은 상대방의 얼굴을 한눈에 판단할 수 있으므로 사주에 비해 신속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관상을 돈오(頓悟:한순간의 깨달음)에 비유하고 사주는 점수(漸修:점진적으로 닦음)에 비유하곤 한다.
중세에 서양 귀족들이 사람을 만나러 출장갈 때 반드시 대동하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명은 이발사이고 다른 한명은 관상가였다고 한다.
정치나 사업이나 결국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상대를 겪어보기 전에 신속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상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없다.
관상을 제대로 마스터하려면 의학까지 공부해야만 하고 최소한 1만명 정도의 임상실험을 거쳐야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다고 한다.
내공(內功)의 힘은 이론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임상실험의 횟수에 비례한다. 경험의 두께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관상의 대가는 하루아침에 배출될 수 없다.
20~30년의 누적된 투자가 필요한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관상의 고수들이 많이 있었지만, 관상 보는 일이 사회적으로 천한 직종으로 여겨지다 보니 소질 있는 젊은 사람들이 이 업종에 입문하기를 꺼려해 현재는 후계세대가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관상과 사주는 頓悟漸修의 상호 보완적 관계이다.
필자도 사주를 연구하다 보니 그 사람의 태어난 시가 불확실할 때는 관상을 참고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관상과 사주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다.
필자는 관상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재야의 숨어 있는 관상의 대가들을 수소문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전혀 뜻밖에도 재야(在野)가 아닌 대학교수 가운데 관상에 깊은 조예를 가진 인물을 알게 되었다.
원광대 서예과 김수천 교수의 소개로 만나게 된, 1997년 당시 성균관대 미대 교수로 있던 이열모(70) 교수가 바로 그 분이다.
지금은 정년퇴직하고 서울 팔판동의 한 미술관 관장으로 있다.
당시 이열모 교수를 만나 관상에 얽힌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이교수로부터 들은 관상담(觀相談) 가운데 유명한 일화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안응모씨의 승진을 알아맞춘 이야기다. 안응모씨는 말단 경찰 공무원으로 시작해 장관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친구였던 안응모씨가 승진할 때마다 이교수는 관상을 보고 그 사실을 미리 알아맞췄는데, 3번 예언에서 3번 모두 적중하였다. “자네 언제쯤 승진할 것 같네”하면 어김없이 그 시기쯤 안응모씨가 승진하곤 했던 것이다.
이교수가 관상을 잘 본다는 소문이 나자 그의 화실로 사람들이 몰려와 관상을 봐달라고 사정하는 통에 화실을 여러번 옮겨야만 하는 고통도 겪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유학시절에도 친분 있는 교포들이 관상을 보러 오기도 하였다.
아무튼 박대통령만 제외하고 이후락 정보부장, 박종규 경호실장을 비롯한 정·관계 모모한 인사들이 중간에 사람을 넣어 이교수에게 자신들의 관상평(觀相評)을 부탁하곤 하였다.
직업적인 술객(術客)이 아니고 동양화를 전공한 현직 대학교수였던 만큼 더욱 신뢰감이 갔던 것일까! 이교수가 처음 관상을 배우게 된 인연도 재미있다.
그는 서울대 동양화과에 다니다 6·25를 만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피난한 사람이 많아 조그만 여인숙 방 하나를 어떤 영감님과 함께 사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영감님이 관상의 대가 김재학씨였다.
같은 여인숙 방에서 피난살이하던 대학생 이열모의 관상을 보고 “너는 난리통에도 절대 죽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언제 대학교수가 되고 이후 이러저러하게 살 것”이라고 예언했다.
결과적으로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이 양반이 했던 예언은 거의 적중했다는 것이 이교수의 술회다.
김재학씨를 통해 이교수는 관상의 세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다 서울대 미대 재학시절 부처상을 소묘하면서 ‘부처님의 얼굴을 왜 이렇게 조성하였을까. 32상 80종호는 무엇인가. 가장 이상적인 성자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길을 가거나 버스를 타면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곤 하였다. 6·25 이후 어느날 대학생 이열모는 우연히 서울 소격동쪽을 지나가다 우연히 어느 관상 보는 집에 들르게 되었다.
관상과 인연이 있어서였는지 거기에는 부산 여인숙에서 만났던 김재학씨가 관상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때부터 시간날 때마다 이교수는 김재학 선생에게 놀러 갔고, 유망한 제자가 들를 때마다 김재학씨는 관상의 핵심을 전수해 주었다. 하지만 김재학 선생은 이열모에게 “자네는 관상에 타고난 소질이 있어서 조금만 더 공부하면 이 분야의 대가가 될 수 있지만, 관상쟁이라는 것이 천대받는 직업이니 대학교수를 하라”고 충고 하였다.
이열모 교수는 한동안 관상의 적중도에 심취했으나 40대 후반 들어서면서 다른 사람의 앞날을 미리 안다는 일이 무섭게 느껴질 뿐더러 동시에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관상 보는 것을 중단하였다.
다만 대학에서 수업을 받은 학생들이 4학년 졸업할 무렵에는 진로 선택에 관련된 조언만큼은 해주었다.
1997년 이열모 교수를 만나 관상 이야기를 나누면서 필자는 이교수에게 ‘한국의 관상학’에 대한 책을 하나 써 주시면 어떻겠느냐고 엉뚱한(?) 부탁을 드린 적이 있다.
사실 이 분야는 한국의 이면문화사(裏面文化史)요, 생활사에 해당하기도 한다.
미술 평론에 관한 책이야 선생이 아니라도 쓸 사람이 많지만, 관상에 대한 내용은 이열모 교수 같은 분이 책을 써 놓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만다. “에라, 이판사판이다”가 뜻하는 것 서(書)는 글씨다. 좁은 의미로는 글씨체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문장력을 말한다.
요즘 이야 붓을 사용하지 않고 컴퓨터 자판을 통해 글을 쓰는 세상이어서 글씨체는 별 의미가 없 다. 대신 문장력은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한국사회의 여론은 여전히 글을 쓰는 칼럼니스트, 신문기자, 논객, 작가들이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 만큼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상당한 능력 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기 생각의 50%만 말로 표현할 수 있어도 그 사람은 웅변가라고 할 수 있고, 자기 말의 50%만 글로 전달할 수 있어도 그 사람은 대단한 문장가에 속한다.
‘판’(判)은 무엇인가. 판단력이다. 신과 언과 서를 보는 이유는 최종적으로 판단력을 보기 위해서다. 결국 판단력에서 인간의 능력은 결판난다.
인생사는 ‘예스’냐 ‘노’냐 하는 판 단의 연속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 한번 잘못 내리면 만사가 끝장날 수 있다.
지도자의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첫번째 능력 역시 판단력이다. 그런 만큼 신언서판 중에서 필자는 판단력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판단에는 두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이판(理判)이고 다른 하나는 사판(事判)이다.
이 둘을 합쳐 흔히 ‘이판사판’이라고 한다. 이판사판의 어원은 불교의 ‘화엄경’에서 유래하였다.
불교 경전 중에서 최고의 경전이라고 일컬어지는 ‘화엄경’에서는 인간사의 범주를 이(理) 와 사(事)로 파악한다.
이는 본체의 세계이고 사는 현상의 세계이다. 이는 눈에 안 보이는 형이상(形而上)의 세계이고 사는 눈에 보이는 형이하(形而下)의 세계이기도 하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할 때 이는 공(空)의 세계이고, 사는 색(色)의 세계와 같다.
양자 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관계에 있다.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점이 사 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화엄경’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격은 이판과 사판에 모두 걸림 이 없는 경지의 인격이다.
대체적으로 사판은 데이터를 분석 종합하여 내리는 합리적인 판 단이고, 이판은 직관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내리는 판단이다.
예를 들어 처녀 총각을 중매 할 때 신랑의 학벌·직업·외모·집안을 따지는 것은 사판에 속한다.
그러나 조건이 좋다고 해도 둘이 만나 백년해로할 것인가는 100% 장담할 수 없다.
조건이 좋다고 무조건 잘 사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놓고 사주와 궁합을 본다.
사주와 궁합을 보는 작업이 이판 에 속한다. 사판 능력은 인생경험에 비례해 증가하지만, 이판능력은 경험세계와 데이터를 초 월한 영역이므로 이 분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판과 사판이 모두 좋게 나오면 일은 거의 성사된다.
이판사판이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이 밀어붙인다는 뜻에서 “에라, 이판사판이다”라는 말이 나왔다.
여기서 유의할 대목은 무턱대고 사주·궁합부터 볼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먼저 사판을 충 분히 검토하고 그 다음에 이판을 보는 것이 순서다.
합리적인 과정을 한번 거쳐 신비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 수순이 지혜로운 자의 태도다.
이름하여 ‘선사판(先事判) 후이판(後理判)’이다.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의 창시자인 중국의 주자(朱子)도 인생 후반부에는 사판 을 거친 다음 이판을 내린 사례가 발견된다.
당시 주자는 조정의 권력자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황제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주자 의 제자들이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아무리 옳은 내용이라도 권력자를 비판하면 틀림없이 화를 입는다고 만류하였다.
주자는 상소문을 올리려고 하고 제자들은 반대하고…. 그러다 마 침내 주역의 괘(卦)를 뽑아 결정하기로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때 뽑은 괘가 바로 천산둔(天山遯)괘였다고 전해진다.
64괘 중에서 33번째 괘로서 위에는 하늘(乾)이 있고 아래로는 산(艮)이 있는 괘다.
이 괘의 내용은 물러가 은둔 하라는 뜻이다. 돈괘(遯卦)를 뽑은 주자는 스스로를 둔옹(遯翁)이라 자처하면서 상소를 포기 하고 운둔하였다.
주자는 제자들과 충분히 토론을 거친 다음 결판이 나지 않는 상황에 이르 자 마지막에 점을 쳤던 것이다. 처음부터 무턱대고 점을 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50대 50으로 결판 이 나지 않는 모호한 상황에서 자존심을 내세워 무리하게 결정을 내리는 행위도 지혜가 없 는 자의 태도다.
주자 같은 인물도 마지막에는 경건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하늘의 뜻을 묻는 점을 쳤던 것이다. 점을 우습게 볼 일도 아니라는 말이다. 점의 역사는 5,000년이 넘는다.
인 류문명과 함께 해온 것이 점이다. 필자가 생각할 때 주자의 판단은 이판과 사판의 종합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 명리학의 3대 거인 이석영·박재완·박재현 이판 가운데 대표적인 방법이 사주명리학에 의거한 판단이다.
그러자면 유능한 명리학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의사라고 다 같은 의사가 아니다. 명의가 있고 돌팔이가 있듯 명리학자 의 수준도 천층만층이다. 고수(高手)는 명리학자라 부르고 하수(下手)는 사주쟁이라 부른다.
필자가 꼽는 근래 한국 명리학계의 ‘빅3’는 자강(自彊) 이석영(李錫暎·1920~83), 도계(陶溪) 박재완(朴在琓·1903~92), 제산(霽山) 박재현(朴宰顯·1935~2000)이다.
만약 명리(命理)를 겨루는 메이저리그가 있어서 한국의 빅3가 동반출전한다면 그야말로 환 상적인 드림팀이 되지 않았을까. 아마 3명 모두 20승 이상은 거뜬히 올렸을 것이다.
필자는 돈이 좀 생기면 한국에서 ‘세계예언자리그’를 개최할 계획이다.
여차하면 미국에 있는 에 드가 케이시(Edgar Cayce·1877~1945)재단과도 협조할 방침이다. 한국에서 ‘세계 예언자리 그’가 열리면 CNN이 도시락 싸들고 중계하러 오지 않을까. 매우 인상적인 이벤트사업이 될 것이다.
이제 이판의 대가였던 한국의 빅3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빅3 가운데 가장 먼저 작고한 자강 선생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볼까 한다. 자강을 빅3에 포 함시킨 이유는 그의 학문적 업적에 있다.
자강이 한국 명리학계에 기여한 최대 공로는 ‘사 주첩경’(四柱捷徑) 총 6권을 저술하였다는 데 있다. ‘사주첩경’ 6권의 비중을 비유하자면 의학의 ‘동의보감’에 해당된다.
‘사주첩경’은 한국 명리학계의 ‘동의보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준이 ‘동의보 감’을 저술함으로써 조선의 의학이 중국의 권위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듯, 필자는 이석영의 ‘사주첩경’이 성립되면서 한국의 명리학계는 중국의 권위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고 평가 한다.
독립이란 바로 토착화가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토착화 없이는 로열티를 지불하면서 영 원히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그동안 한국에서 사주명리학을 배우려면 철저히 중국의 원전에 의지하여야만 했다. ‘연해자평’(淵海子平) ‘명리정종’(命理正宗) ‘적천수’(滴天髓) ‘삼명통회’(三命通會) ‘궁통보감’(窮通寶鑑) 등 한문으로 된 중국 고전들을 해독하느라 고생해야만 했다.
이 들 고전을 해독하려면 여간한 한문 실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단순히 글자만 해독한다고 되 는 것이 아니고 완벽하게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이들 고전에 등장하는 사례들이 거의 중국사람들일 뿐더러, 시대적으로도 몇백년 전 의 상황이라서 산업화, 정보화 시대로 접어드는 지금의 한국적인 상황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사주첩경’은 중국 고전들의 요점들만 요령 있게 적출하여 이를 한글로 정리하였으므로 원전 읽기의 부담을 덜어 준다.
또한 한국 사람들을 상대로 한 임상사례들을 예화로 들었기 때문에 훨씬 현장감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사주첩경’ 최대의 강점은 소위 ‘통변’(通變)이라고 일컬어지는 실전 해독 능력을 배양 해 준다는 데 있다. 사주 공부의 어려운 점은 통변에 있다.
이론은 달달 외우는데 막상 생년 월일시를 적어 놓고 실전에 들어가면 어디서부터 해석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경우를 누구나 체험한다.
마치 호적 서기의 딜레마와 같다.
면사무소에서 주민들의 호적을 담당하는 서기는 서류상으로는 주민들의 가족관계나 이름을 달달 외울 수 있다.
그러나 골목길에서 호적상에 나타나는 당사자를 만나면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과 같다.
호적대장을 통해 이름은 알지만 실제로 그 사람 얼굴은 알아보지 못한다.
사주공부도 마찬 가지다. 실전문제를 푸는 능력인 통변은 그래서 중요하다.
통변이야말로 사주의 핵심 능력이 기 때문에 보통 사주책들은 기본 이론들만 나열하지 정작 중요한 통변에 관한 부분은 노출 시키지 않는다.
어찌 보면 자신의 노하우가 공개되는 것이므로 프로들은 이를 꺼리게 마련이다.
자강은 이 통변에 관한 부분을 처음으로 공개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사주에 입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노하우를 공개한 태도, 바로 이 부분을 필자는 높게 평가한다.
학자적 양심이라고 하는 부분 이 바로 자강 선생의 이러한 공개적인 태도이다.
필자도 1980년대 중반 사주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중국 고전들을 이것저것 읽어보아도 도저히 감히 잡히지 않았는데, 필사본으로 유통되던 ‘사주첩경’을 보고 나서야 사주라는 것이 한번 해볼 만한 공부라는 판단이 들었 다.
“丙申日에 태어난 남자는 외방자식 둘 확률 높다” ‘사주첩경’에서 배운 통변에 관한 초식을 한가지 소개하면 이렇다. 태어난 날짜가 육십갑 자로 따졌을 때 병신(丙申)에 해당하는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역술계에 회자되는 바에 의하 면 병신일(丙申日)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병신이 육갑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때의 병신이란 장애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장님을 비롯한 장애인들이 역술업(육십 갑자)에 많이 종사하였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또 하나는 병신일에 태어난 사람들이 다른 날짜에 태어난 사람에 비해 통계상 역술에 소질 이 많다고 한다. 이는 경험상으로 볼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외에도 ‘사주첩경’에서는 병신일에 태어난 남자들은 확률상 집 밖의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을 낳는 경우가 많다는 사 실을 지적한다.
즉, 외방자식을 둘 확률이 높다. 왜 그런가를 ‘사주첩경’에서는 다음과 같 이 설명한다. 병신(丙申)을 인수분해하면 병(丙)은 화(火)이고 신(申)은 금(金)이다. 화는 금을 극한다. 고 로 화에 대해 금은 재물이 된다. 사주에서는 이기는 것을 재물로 본다. 병일(丙日)에 태어난 남자 사주의 입장에서 보면 신은 재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재물은 여자와 동일시한다. 사 주에 재물이 없으면 여자도 없다고 해석한다. 무재(無財)이면 마누라도 없는 경우가 많다.
다재(多財)이면 여자도 많다. 재벌 회장들은 여자도 몇배나 많지 않은가! 옛날 사람들은 재물과 여자를 똑같이 쟁취하는 대상으로 본 것이다.
재물이 없는 무재 사주는 입산수도하면 딱 맞다. 돈과 여자가 아예 없 으므로 수도에 전념할 수 있다. 반대로 병신일에 태어난 남자는 사주상 돈과 여자를 선천적 으로 깔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이다. 신은 외형상으로는 금에 해당하지만, 내면적 으로는 임수(壬水)가 많이 내포되어 있다.
전문용어로 신의 지장간(支藏干)에는 임수가 함축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신 속에 임(壬)이라는 수가 숨어 있는 것이다. 임은 수다. 수는 화를 극한다. 고로 임은 병을 극한다. 남자 사주에서 자기를 극하는 것은 (자기를 이기는 것은) 자식이라고 본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자식에게 극을 당하게 마 련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병신일의 남자는 신이라는 여자 속에 임이라는 자식이 숨어 있 는 형국이다. 문제는 신이 역마살에 속한다는 점이다.
역마살이란 바쁘게 돌아다니는 살이 다. 역마살 많은 사주치고 일요일날 집에서 TV 보는 사람 보지 못했다. 분주하게 마련이다.
申이 역마살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그 여자가 집안의 여자가 아니라 여행을 가거나 출장을 가서 만난 외부 여자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병신일에 태어난 남자의 사주를 총정리 하면 병에 대해 신은 여자를 상징한다.
이 여자 속에 자식이 숨어 있는데, 그 여자는 밖에 있는 여자다. 그 여자와 관계해서 단순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식까지 둘 확률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몇년 전에 돌아가신 집안 어른의 묘를 이장할 일이 있었다. 그때 이장을 담당하는 지관이 한명 왔었는데 이 지관이 아주 거만하고 무례한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안하 무인격으로 함부로 말을 내뱉는 습관이 있었다. 그날 산일을 도와주려고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집안 어른들을 따라간 필자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막 해댔다. 동안(童顔)이고 하니 아마 나이 어린 대학생 정도로 보지 않았나 싶다. 집안 어른들 체면을 보아서 아무 말 없이 참고 있던 필자는 산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차 안 에서 그 지관의 사주를 슬쩍 물어보았다. 만세력으로 계산해 보니 마침 그 지관의 태어난 날이 병신일 아닌가. 병신일을 확인한 순간 ‘옳지, 이거다!’ 하고는 “당신 외방자식 두었 지?” 하고 조용하게 한방 내갈겼다. 확률 70%였다. 그 순간 지관의 얼굴이 벌개지면서 대 번에 말투가 공손하게 변하였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병신일이라는 단서 하나 가지고 라이트 훅을 한방 날렸는데 운 좋게도 적중하였던 것이다. 이게 모두 ‘사주첩경’을 공부한 덕이라고 생각한다. ‘사주첩경’의 저자 자강 이석영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1920년 평안북도 삭주군 삭주면 남평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과 역학에 조예가 깊었던 조부 이 양보(李陽甫)로부터 훈도받았다. 1948년 월남해 충북 청주에서 몇년간 살다 그후 서울로 옮 겨 1983년 사망하였다. 자강이 본격적으로 명리를 연구하게 된 시기는 1948년 월남한 후에 생계 수단으로 명리를 보면서부터다. ‘사주첩경’ 6권은 1969년에 완성되었다. 1948년부터 대략 20년간의 연구와 실전체험을 정리해 저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석영의 이력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그가 평안도 출신이라는 점이다. 왜 평안도 출 신이라는 부분을 눈여겨보아야 하는가. 조선시대에는 이남(以南)보다 이북(以北)지역 사람들 이 차별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북 사람들은 이남 출신에 비해 고급관료의 배출 숫자가 훨 씬 적었으므로 알게 모르게 소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가 이남보다 상대적으로 이북 지역에서 환영받았던 배경에는 조선시대에 이북 사람들 이 받았던 소외감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누적된 차별과 소외감은 ‘주님 앞에 평등’이라 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서북지 역인 평안도나 황해도 쪽은 이북지역 중에서도 더욱 차별이 심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이야 기다. 서북지역에 대한 차별 때문에 발생한 난리가 바로 평안도에서 봉기한 홍경래 (1771~1812)의 난이다. 명리학계의"동의보감"일 할 "사주첩경"을 저술한 명리학의 대가 이석영 선생. “운명은 사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왜 사주 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소외와 차별이라고 하는 사회학적 변수를 들먹이는가 하면 양자가 모종의 함수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근래 우리나라 사주 대가들의 출신 지역을 추적하다 보니 발견되는 공통점은 이북 출신이 많다는 사실이다. 일제때 대단한 명 성을 날렸던 구월산인(九月山人) 신승만(申承萬)도 황해도 출신이었고, 그 외에도 몇몇 대가 들이 모두 이북사람들이었다. 이석영이 그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중에서도 이석영은 차별이 아주 심했던 평안도 출신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사주라고 하는 것은 생년월일시만 잘 타고나면 왕(王)도 될 수 있고, 장상(將相)도 될 수 있 다는 신념체계다. 반대로 아무리 지체 높은 집안의 자식이라 해도 사주가 좋지 않으면 별 볼일 없다고 믿는다. 사주가 좋으면 신분이 비천해도 기회가 올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혁명사상이 들어 있고, 그것이 타고나면서 결정된다는 측면에서 보면 결정론이자 운명론이 내포되어 있다. 모순되게 보이는 양면이 미묘하게 배합되어 있는 셈이다. 한쪽에는 치열한 현실타파의 노선 이 마련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운명에의 순응이다. 혁명과 운명론의 배합. 이 두가지 요 소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인 변수로 작용하였다. 그 사람들이란 바로 머리는 있는데 출세길이 막혀 버린 사람들이다. 머리는 좋은데 구조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채널이 막혀버렸다고 여긴 사람들이 명리학에 심취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내가 머리는 좋은데 왜 세상에 나가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사회체제가 잘못되어 그런 것이다.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조선조 각종 반란사건에 감초처럼 명리학이 개입되게 된 하나의 원 인이다. 그 다음에는 머리도 좋고 능력도 있는 내가 왜 이처럼 초라하게 살아야 하나, 왜 대접을 못 받고 사나에 대한 해답이 운명론이다. 능력이 있는데 왜 출세를 못하는가. 그 이유를 운명론 이 아니면 해명할 수 없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가운데 매우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사상가라 고 평가받는 ‘논형’(論衡)의 저자 왕충(王充·AD 27~97)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천재였지만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만 했는데, ‘논형’을 읽어보면 왕충은 그 이유를 자신의 운명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도대체 운명이 아니면 이럴 수 없다고 여겼다.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기독 교 사회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명제처럼 사주 신봉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운명론 신봉 자이지만 집단적인 차원에 진입하면 혁명론가로 전환된다. 이북 사람들, 특히 평안도를 비롯 한 서북지역 사람들이 일찍부터 명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배경에는 소외와 차별이라는 사 회적 환경이 크게 작용하였다. 서북지역 출신 수재였던 이석영의 명리학 연구도 이같은 맥 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이석영이 명리학에 입문하게 된 배경에는 사회적인 원인도 있지만, 개인적인 원인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조부인 이양보가 이미 명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석영은 명리학의 고수였던 조부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사주첩경’ 4권에 보면 1927년(정묘년) 이석영 본인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그 사건이란 이석영의 조부가 혼 사를 앞둔 손녀딸(이석영의 누님)의 궁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손녀딸 혼사를 반대한 일이었 다.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조부님께서 우리 누님과 신랑 될 사람의 궁합을 보시고 나의 아버님께 하신 말씀이 “애, 그 청년이 지금은 돈도 있고 명망도 있고 학교도 중학까지 나왔으니 나무랄 데가 하 나도 없으나 단명(短命)한 게 흠이야. 거기에 혼사 하디 말라. 만약 하면 길레(吉女:누님의 애명)가 30을 못넘어 과부가 된다. 그러니 안하는 것이 좋을 거야” 하셨다. 그러나 좋은 사 윗감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아버님과 어머니의 심정이었고 또 누님도 매우 그곳에 출가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결정짓기로 하여 마지막으로 조부님의 승낙을 청하였을 때의 일 이다. 조부님께서는 “허- . 명은 할 수 없구나, 너희들이 평소에는 내 말을 잘 듣더니 왜 이번에 는 그렇게도 안 듣느냐, 저 애가 팔자에 삼십 전(三十前, 누님은 1911년생)에 과부가 될 팔 자다. 그 청년은 서른셋을 못넘기는 팔자이고 보니 기어코 팔자를 못이겨 그러는구나. 이것 이 곧 하늘이 정한 배필인가 보다. 이 다음 네가(누님을 가리킴) 일을 당하고 나서 나의 사 당 앞에서 울부짖으면서 통곡할 것을 생각하니 참 가엾구나. 안하고 하는 것은 너희 마음에 있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씀하셔서 혼인은 성립된 것이다. 그후 재산과 부부간의 금슬 면에서는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게 살았는데, 자손에 대해서는 애가 태어나면 죽고, 나면 죽고 하여 6남매(4남2녀)를 낳아 모조리 실패하였다. 기유(己卯) 년(1939년) 9월14일에 득남하고 매형은 그해 12월30일 별세하고 말았다. 조부님은 이미 2년 전인 정축년에 작고하셨고 누님은 기묘년에 상부(喪夫)하여 과연 조부님의 사당 앞에 가서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누님의 모습이 지금도 나의 눈에 훤하고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나의 매형 사주는 무신(戊申)년 정사(丁巳)월 기묘(己卯)일 경오(庚午)시였다.(‘四柱捷徑’ 卷4, 韓國易學敎育學院, 309~311쪽) 심리학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유년시절의 체험이 그 사람의 인생행로에 깊은 영향을 미친 다고 한다. ‘사주첩경’의 저자인 이석영도 어린 시절 누님의 운명에 얽힌 참담한 광경을 목격하였다. “나의 사당 앞에서 울부짖으며 통곡할 것”이라는 조부의 예언이 현실로 들어 맞았을 때 그 장면을 목격한 이석영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고인들이 탄식하였던 ‘명막도 어오행’(命莫逃於五行·운명은 오행(사주)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의 이치를 깨달았던 것 일까. 이석영이라는 걸출한 명리학자의 출현은 서북지역의 소외감, 명리학의 대가였던 조부의 영 향과 어린 시절의 체험이 모두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빅3 가운데 나머지 두사람. 도계 박 재완과, 제산 박재현은 이석영과는 전혀 다른 인생행보를 보이는데, 이 두사람에 관한 이야 기는 다음호에 싣기로 한다. =============================================
옛날하고 먼 옛날, 호랑이 바베큐 씹던 시절이었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시어머니가 떡국을 끓여놓았는데, 그 떡국을 그만 개가 다 먹고 말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의심해 모진 시집살이를 시켰다. 며느리는 견디다 못해 한스럽게 죽고 말았으니***. 죽어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었을까. 한 마리 새가 되어 시어머니 집 뒷산에서 "떡국은 개가 먹었다"고 "떡국 떡국 개개개" 하고 온 여름내 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새를 떡국새라 했는데, 나중에 뻐꾹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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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가족은 할머니 아빠 저 이렇게 세 식구입니다. 모두 광주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아주 어릴 적 이혼하셨을텐데, 솔직히 이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 사업은 중국에 다니시면서 중국 골동품등을 한국에서 파시거나 잡지사와 계약해서 잡지 내용 등과 중국 물건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어서 운영하시기도 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신 적도 많습니다.
저한테 직접 말씀해주시진 않지만 옆에서 보면 그동안 힘드셨던 적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돈이 뭔지 싫어지기도 하고 초라해지는 아빠모습이 싫기도 합니다. 얼른 아빠가 자리를 잡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빠를 무서워하는 편입니다. 아빠와 이런 저런 일로 갈등도 많았고 그래서 저는 아직도 아빠와 조금 거리를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빠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습니다. 아빠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고 아빠가 미울 때도 많지만 앞으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아빠랑 한번씩 싸우거나 아빠에게 심한 말을 들을 때면 정말 집도 싫어지고 아빠에게 들은 심한 말을 가슴에 꼭 담아놓고 혼자 많이 울기도 했는데 아빠가 제 생각해서 하신 말일꺼라 생각하고, 내 행동에서부터 문제를 찾아보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할머니는 어릴적부터 저를 키워주셨습니다. 할머니 말씀 안들은 적이 너무 많아서 죄송한 면도 많습니다. 할머니는 일제시대 때 전남여고를 졸업하셔서 공부도 꽤 잘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신지 다른 사람들이 다 교양있으시다고도 하고 친구들도 할머니가 좋다고 합니다. 할머니들이 다 그렇겠지만서도 할머니가 잔소리가 많으셔서 한번 하시면 짜증날 때도 많은데 저희 할머니도 다 절 생각해서 그런거라 생각하고 잘새겨들으려고 합니다.
할머니한테 정말 잘해드리고 싶고 집안 일도 많이 도와드리고 싶은데 막상 그러지 못할 때가 많아서 너무 죄송스럽고 또 저를 뒷바라지 해주시느라 할머니께서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마음속으론 늘 미안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마음을 표현 못하는게 많습니다. 저희 가족이 화목하고 행복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할머니와 아빠도 이런 저런 일들로 싸우실 때도 많으시고 그런걸 보면 집이 싫어지고 가족도 다 싫어질때가 많지만 그래도 가족은 하나이니까 언제나 웃고 화목할수 있는 가족이 되었으면 하고 저부터 집안에서 말잘듣고 철좀 들어서 착한 딸이 되야겠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일
긴 시간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그동안 슬펐던 일들이 정말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 되새기기에는 기억이 더딘, 일들도 많은데 제일 슬픈 일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본다면 고모가 돌아가셨던 일입니다. 고모는 어릴 때 저를 키워주셔서 엄마라고 부르고 엄마나 다름없는 분이셨습니다. 어렸을 적에 고모가 재혼하셨을 때도 정말 슬펐습니다.
그때 고모랑 같이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까 대충 눈치를 챘었는데 절데 믿고 싶지 않았었는데, 재혼하셔서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고모를 이해해야겠다는 것보다 눈물이 먼저 나고 나를 버리고 갈 것 같아 서러웠고 원망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모 결혼식 때 사진을 보면 저는 엄청 인상을 쓰고 우울한 표정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고모집에 자주 왔다갔다 하면서 지내던 중 고모가 배에 혹이 나셔서 수술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별 일 아니겠지 했는데 병원을 가면서 큰고모가 몰래 말해주셨는데 암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이 먼저 흘렀습니다. 고생 많이 하시던 고모가 그래도 재혼하셔서 행복해지실꺼라 믿었는데***. 정말 왜 착한 사람이 그렇게 되야 하는지 이해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때 선고받은 날짜가 6개월이었습니다. 전 절데 어떤 사실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안하면서도 절데 살 수 있을꺼란 생각과 희망만 굳혔습니다. 아니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나오던 그런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걸 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모는 좀 더 큰 병원에 가셔서 치료를 받으시면서 예정했던 6개월을 넘기시고 차츰 차츰 나아지셨습니다. 고모가 항암치료를 받고 힘이 다 빠지셔선 오실 때마다 가슴이 아팠고 한줌한줌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이게 정말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과 나도 이런데 고모는 어떨까 항암치료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에 고모한테 큰 힘도 못되어 드리고 정말 아무 힘도 없는 제가 원망스러울 때도 많았습니다.
고모가 점점 나아지시면서 그로부터 1~2 년정도를 더 사셨습니다. 방심했던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고모가 병쇠가 많이 악화 되셨던 모양입니다. 고모는 머리도 많이 자랐고 이젠 다 낳았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암이 제일 무서운게 재발이었습니다. 완치라는게 없는건가 아니면 그동안 방심하면서 꾸준히 식이요법에 매달리지 않아서였을까 요양원에 머물다 오신 고모는 정말 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물론 머리도 다 빠져있었고 걷는 것 조차 힘들어 보였습니다.
아무렇지 않은척 고모네댁에서 고모를 맞이하고 어깨를 주물러 달라는 말에 어깨를 주물러 드리는데 어깨에 살 한줌조차 잡히질 않고 만져지는 게 뼈 뿐이었습니다. 그 순간 죽을 만큼 안간힘을 써서 눈물을 참았습니다. 정말 꾹 참았습니다. 지금 내가 우는 것은 내 감정을 달래는 것일 뿐 고모를 위한게 아니었으므로 그 후로 고모는 아무 것도 먹질 못하고 물 한모금도 토해냈습니다. 제가 그때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서라도 어떻게든 빌고 싶었던 소원은 고모의 완치였습니다. 사람은 간사하게도 불리한 상황에서만 신을 찾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교회도 안나가던 제가 하나님께 그렇게 간절히도 빌었건만.
고모는 기독교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아마 치료보다는 죽을 날까지의 고통을 덜고 편안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병원에 찾아가는 날이면 고모는 자꾸 이상한 사람들이 보인다고 그랬습니다. 조금은 무섭기도 했지만 그런 것보다도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 후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고모는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바보같이도 고모에게 아니 엄마에게 하고싶었던 말들을 적었던 편지는 전해드리지도 못하고 고모에게 꼭 낳으라고 힘내라는 말도 한마디 못해드리고 고모 아프셨을 때도 그렇게 속도 많이 썩힌 제가 한없이 부끄러웠고 무엇보다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항상 엄마 없으면 절데 못산다고 생각했던 내 옆에 정말 엄마가 돌아올 수 없느곳으로 가셨다는 게 믿을 수 없고 실감도 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염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금방이라도 다시 눈을 뜨고 말할 것 같은 우리 엄마가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니.. 아마 태어나서 제일 많이 울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울다 지쳐서 멍해져 있다가 화장터에서 태워지는 순간에도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죽음이란 게 뭔지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할머니가 그러셨습니다. 살다가 가끔씩 생각나면 슬퍼지는 거라고..
정말 내곁에 꼭 있어줬으면 하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힘들게 세상을 떠난 일이 저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슬픈 일입니다. 꽤 시간히 흐른 지금도 엄마 사진을 보면 도저히 실감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엄마가 생전에 항상 말했던 데로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한 제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슬펐던 일은 집을 나갔다 돌아왔을 때 아빠가 우셨을 때 중학교에서 안좋은 일로 할머니 학교에 오셨을 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정말 그때 아빠와 할머니께 너무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앞으로 좋은 모습으로 죄송한 마음 갚고 싶습니다.
인생에서 기뻣던 일은
가장 최근에는 이번 시험에서 반 1등 난 것이 정말 기뻤습니다. 사실 중학교 1학년때는 상위권 유지했었는데 그 뒤로 공부 안하고 맨날 친구들하고 어울려 놀다가 성적이 계속 떨어지기만 해서 계속 마음 못잡고 실업계 오게 돼서 처음에 많이 실망도 했는데 고등학교 와서 정말 열심히 해야지 생각해서 이번에 애들이랑 독서실도 다니면서 했는데 이렇게까지 좋은 결과가 나올줄 몰라서 너무 기뻤습니다.
사실 기쁜일을 떠올리려니 별로 생각이 안납니다. 제가 좀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서 안좋은 일만 마음속에 꿍 담아 둬서 그런건지 또 기쁜일은 슬픈일에 가려져서 쉽게 잊는다고 하던데 음.. 또 기뻣던일은 친했던 친구들과 안좋은 일로 사이가 멀어졌는데 중학교 졸업여행때 화해했던 일입니다.
사람 사이에 오해나 불만은 오래 담고 있어서 정말 좋을게 못되는 것 같습니다. 화해하고 싶어도 그 잘난 자존심때문인지 무엇때문인지 그렇게 친했으면서도 꽤 오랜시간을 어색함을 풀지 못했습니다. 이제까지 친구들과 싸우고 화해한게 무척 많았지만 특히나 졸업여행에서였기 때문인지 놀면서 자연스럽게 어색한 것도 풀어지고 더욱 우정을 돈독히 했던 것 같아 그 어떤때보다 의미있는 화해였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뻤던 일은 초등학교 3학년때 친했던 친구를 8년만에 연락이 되었던 것입니다. 연락이 돼서 서로 많은 애기도 나누고 지금은 정말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힘든일 기쁜일 항상 나누고 누구몫지 않게 내옆에 없어서는 안될 좋은 친구가 생겨서 기뻤습니다.
친구란 존재는 정말 소중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좋은 친구를 많이 만들고 싶고 다음에 누군가가 기쁜일을 물어본다면 정말 많이 대답할 수 있도록 기쁜일이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현재 자신의 위치와 미래의 꿈 정리
아무래도 저는 혼자이다 보니 아빠에게는 하나 뿐인 귀한 딸이고 할머니에게도 귀한 손녀일 것입니다. 그래서 할머니도 아빠도 저에게 거는 기대가 크실텐데, 사실 전에는 말썽을 너무 많이 피워서 아빠와도 많이 싸웠고 할머니도 속상해 하셨던 적이 많았습니다. 이제 고등학생이니 철들어서 말도 잘듣고 공부도 잘해서 할머니와 아빠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구요, 할머니께도 공부 열심히해서 좋은 일자리 얻어서 할머니께 고생안시켜드린다고 약속도 했으니 얼른 성공해서 가정에서 저의 위치가 말안듣고 말썽피우는 못난 애물단지가 아니라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아빠의 딸이 되고 할머니의 손녀가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래픽디자인과에 오게 되었으니 그래픽디자인관련쪽으로 미래를 정하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저의 꿈은 건축분야에서 일하는 건축설계사나 인테리어 디자이너입니다. 처음에 그래픽디자인과에 오게 되어서 아무래도 장래를 디자인쪽으로 나가야 할텐데 어떤분야로 나가볼까 생각해봤는데 건축설계쪽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예전부터 해보고 싶단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나중에 커서 좋은 집을 만들어서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무엇보다도 편안하게 쉴수 있는곳을 만들고 싶었고 그런 집을 많은 사람들에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것 등의 이유로 설계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어서 꿈을 갖게 되었는데, 제 생각보다 많이 힘든 분야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일은 다 힘들게 마련이긴 하지만 건축계에서 종사하면서 인정받는 것도 힘들고 희망보다는 절망적인 부분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해서 포기할까도 생각했는데,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첫댓글 두고 두고 음미하면서 읽어야 겠습니다...감사합니다..
시간이 나면 좀더 세밀히 읽어보고 지식으로 쌓아볼까 합니다. 접해보기 어려운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