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과 : 한국어문학부
학번 : 98301035
이름 : 조혜정
쾌청한 날씨였다. 강의를 함께 듣는 친구는 전주에서 올 예정이고, 익산에서 떠나는 나는 혼자서 조금 어색한 마음이었다. 허나, 쾌청한 4월의 하늘이 이런 어색함을 서서히 불식시키고 있었다.
버스가 처음 닿은 곳은 1894년 3월 25일, 강경한 격문을 통해 결의를 다짐했던 백산성이었다. 각계 인사들의 기념사와 격문 낭독 등의 조금쯤 지루한 시간 끝에 따갑고 청청한 햇살을 맞으며 모두 걷기 대회를 시작했다. 함께 강의를 듣는 친구가 우여곡절 끝에 전주에서 백산에 당도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우리는 오래 헤어진 혈육을 만난 듯 호들갑스레 기뻐하며 이미 저만큼 걸어가고 있는 무리에 합류하였다.
오래전, 열일곱살 봄에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열린 기념 걷기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백산에서 어느 지점까지 꽤 오랜 시간을 걸었었는데 그 무렵 함께 했던 선생님들, 언니들, 친구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어느 지점에선가 빵과 우유를 먹은 기억도 나는데…나는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 즈음 간식을 나누어 주었고 간식을 먹은 후 얼마 안되어 다시 버스에 승차하였다. 생각보다 짧은 걷기였기에 나는 퍽 아쉬운 마음이었다.
다음 답사지는, 전봉준 장군 고택이었다. 그 곳에서 처음 등장하신 교수님에게 설명을 들으며 아늑한 초가삼간을 둘러 보았다.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태워졌다가 1974년 복원이 됐다는 고택은, 그 당시, 가난한 농민으로 살았을 전봉준 장군의 집이라기엔 복원이 너무 윤택하게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의 여러 지도자 중 한분이었던 전봉준 장군의 생시를 상상하는 야릇한 감흥에 젖기도 했다.
버스를 타고 작고 조촐한 말목장터를 지나 정읍시 이평면에 있는 만석보 유지비로 향해 갔다. 하차하여 만석보 터로 향하는 긴 길 가득 난데없이 노래가 퍼져 흐르고 있었다. '솔아 푸르른 솔아'를 비롯, '광야에서', '마른잎 다시 살아나' 등의 노래가 커다랗게 흐르고 있었는데, 노래의 영향인지 긴 길을 다 걸어 만석보 터에 닿았을 때 어느때보다도 마음이 벅차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왁자함도, 발소리도, 귓전을 때리지 않을만큼 상상의 여지는 넓어져 갔다. 양성우의 시 '만석보'를 훑으며, 주변의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100여년 전, 분노한 농민들이 함성과 힘으로 무너뜨리고 말았던 만석보를 떠올렸다. 그러나 농민들이 쓰러뜨린 것이 단순히 보 하나 였으랴. 가렴주구를 일삼던 지독한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더 나아가 농민들 수난의 근거지를 향한 독기일진데.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옛날의 농민들 얼굴을 오버랩 하여보며 발길을 돌렸다.
다시 황토재 전적지로 향해 갔다. 그 곳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극단 길라잡이의 마당극 '밥'을 보았다. 연기자들의 해학스런 표정과 몸짓, 대사에서 얼마나 많은 웃음을 쏟았는지. 시골의 농부가 상경하여 수세식 화장실에서 겪는 고초(?)에는, 얼마간 과장이 섞였다고 여기면서도 흥이 나는 것은 여전했다. 또한, 우리 할머니가, 발우공양 하듯 말끔하니 진지를 잡숫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먹으라 하시며 밥 한톨 버리는 것 다 죄로 간다, 하시던,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거기서 나온 우리들의 '똥'으로 밭을 가꾸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웃음 끝에서 새삼, 마음 숙연해졌다.
답사는 계속 되었다. 황토재를 벗어나 향한 곳은 고부관아지, 지금은 고부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고부관아지 곁엔 고부향교와, 조병갑이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군자정이 있었는데, 향교의 높다란 계단 아래 모여서 설명을 듣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향교를 벗어난 내 눈에 들어온,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현수막의 글귀가 보였다. 향교 들머리에 걸려 있던 현수막은 '전통가족제도수호 범국민협회 고부향교 유족회지부' 라는, 긴긴 이름의 단체에서 내건 것이었는데,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전통윤리인 호주제도와 동성동본금혼제도를 수호하자" 나는 쓰게 웃으며 버스를 향해 갔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체였던 농민들은 그들을 억압하는 체제를 향해 정면 도전하였다. 물론, 의식이나 사상이 체계적으로 학습, 육화되진 않았다지만 농민들은 억압의 현재, 그리고 그것의 부당함을 똑똑히 깨닫고 있었다.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 보았다. 그 긴긴 이름의 단체, 거기 속한 사람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주장하고 있는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것인지를.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 역시, 전통이라는 허울로 자행되는 폭력에 신음하고 있는지를. 나는, 서둘러 '호주제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에 회원 가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부면 신중리 대뫼 마을 역시, 지금껏의 답사지와 근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때문에 향교를 벗어나 버스를 타자 곧장 나타나 보였다. 아담한 터엔 무명농민들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곳은 무척 고적하였고 그 고적함이 오히려 옛날 농민들의 저항의 정신을 오롯이 드러내 주고 있는 듯 했다. 그 곳에 도착해 교수님이 다시 등장하셔서 여러 설명을 하시며, 설명 끝에, "조선 팔도를 바라보며 이 곳에서, 농민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들 스스로 살 길을 모색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라 말씀 하시었는데, 나는 참 숙연한 마음이 되었다. 잘 배우지도, 힘이 있지도 않은 농민들, 그네들이 현재의 실체를 똑바로 바라보고 깨닫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현재를 타개하려 실천하려 분투했다는 사실이, 새삼,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들었다.
부끄러움과 울림으로 다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안가 동학혁명모의탑이 있는 곳에서 하차를 하였다. 1969년 세운 탑은 사발통문이 발견된 후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다는데 강의 시간을 통해서도 배웠듯 사발통문의 진위여부는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했다.
바람은, 잦아드는 햇살 속에서 유난히 시원하였고, 모의탑 주변에 펼쳐진 고만고만한 시골집들과 평야는 답사의 끝무렵에 문득 잔잔한 감흥을 일으켰다. 혁명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흔적은 곳곳에서, 바람처럼 햇살처럼, 문득 문득 조용히 피어오르고, 그러면 백여년 후의 청년은, 부끄럽고 나약한 현재를 바라보며 새롭게 눈을 뜨고 주먹을 쥐는 것이다. 너무 오래 부끄럽지 말자고. 아무런 사색 없이 청년을 허송하지 말자고.
유난히 마음 저리게 하는 사람의 얼굴이 있다. 그 사람이 이미 죽고 없을 때, 그 사람의 생이 오랜 후 젊은 나를 깨워 흔드는 치열한 삶이었을 때, 그때 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커다란 부끄러움이고 또한 짙은 슬픔이다.
청년 윤동주의 얼굴, 전태일의 얼굴,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예술가 나해석, 그리고…서울로 가는 전봉준.
답사가 끝나고, 피로한 몸을 뉘다 바라본, 책 속의 사진 한 장. 서울로 압송해 가는 전봉준 장군은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 교수님 말씀마따나 동학혁명 최고의 터프가이라는 김개남 장군, 준수한 용모라는 손화중 장군, 그리고 다른 수많은 무명 농민혁명가들의 얼굴, 그네들이 꿈꾼 미완의 세계와 그리고 절절한 희망이, 그 한 장의 사진 속에 함축되어 강렬한 빛을 뿜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새삼, 심호흡을 깊게 하며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