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충하 尹忠夏(1855 ~ 1946)】 "을사오적 처단 의거 참여"
경상남도 거창군(居昌郡) 출신이다. 1907년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53세로, 1885년생으로 추정된다. 1907년 을사오적 처단 의거와 1919년 파리장서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1921년 태극단 대표로 활동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 박탈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였다. 이때 조약 체결에 동의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일컬어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하였다.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은 조국을 일본에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을사오적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1907년 2월 3일 ‘을사오적 처단 의거’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비밀결사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200여 명에 달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나인영·오기호·김동필(金東弼)·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정인국(鄭寅國)·김영채(金永采)·이광수(李光秀) 등과 상의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며 ‘을사오적 처단 의거’를 결의하였다. 거사에 필요한 무기와 자금 조달을 위해 부인들의 패물을 팔았고, 이광수(李光秀, 성균관 박사) 20,000냥 어음·이용태(李容泰, 전내부 궁내부대신) 1,700원·정인국(鄭寅國, 전 군수) 300원·윤주찬(尹柱瓚, 농상공부 주사) 1,000원, 최익진(崔翼軫, 호위국원) 200원, 민형식(閔衡植, 학부 협판) 14,000냥, 김연호(金然灝, 전참봉) 5,000금(金) 등 많은 자금이 모금되었다.
이 거사 자금으로 김동필이 인천에서 권총 50정을 구입하였고, 거사일을 1907년 2월 13일로 정하였다. 거사일로 정한 2월 13일은 (음)1월 1일로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진하(陳賀)차 입궐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경계 강화로 지방에서 모집한 결사대원들이 서울로 집결하지 못하자, 박대하가 거사일을 3월 25일로 연기하였다.
결사대원으로 선발된 30인은 이기가 작성한 자신회취지서(自新會趣旨書)와 그가 작성한 애국가(愛國歌)·동맹서(同盟書)·참간장(斬奸狀)과 무기를 휴대하였다. 또한 윤주찬은 이광수와 함께 대한제국 정부에 올리는 글과 일제 통감부와 군사령부 그리고 각국 영사관에 보내는 공문 및 내외국인들에게 알리는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자신회에 가입하여 을사오적 처단 계획에 따라 1907년 (음)2월 초순 두 차례에 걸쳐 실행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음)2월 12일 을사오적들이 공무(公務)로 출근하는 길목을 동지들과 나누어 매복하고, 같은 시간에 각각의 장소에서 을사오적을 처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사동 노상에서는 권중현을 저격하였으나 적중시키지 못하였고, 다른 곳에서도 실패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거의 숨이 끊어질 정도의 모진 악형과 심문을 당하였고, 1907년 7월 3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유형(流刑) 10년을 받아 지도(智島)로 유배(流配)되었다.
풀려난 후 1919년 2월 거창에 있는 곽종석(郭鍾錫)을 방문하여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대한 내용과 전망, 서울 유림(儒林)들의 독립문제에 대한 동태를 세밀히 보고하였다. 이에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것이 독립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이므로 곽종석이 대표로 나서 줄 것을 권유하였다. 이후 곽종석의 지시에 따라 곽윤·김황(金榥) 등과 함께 상경해 김창숙(金昌淑)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를 작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면우 곽종석의 문인 윤충하(尹忠夏)는 서울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1919년 2월 19일 거창으로 곽종석을 찾아갔다.
곽종석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때에는 서울로 와서 상소로써 과감한 항쟁을 할 뿐 아니라 은퇴생활을 하면서도 항시 해외의 망명지사들과 은밀한 연락을 갖고 한국의 독립은 오직 국제정의에 호소해야 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곽종석을 찾은 윤충하는 파리평화회의에 대한 내용과 전망 그리고 독립불원서 문제로 인한 서울 유림들의 동태를 자세히 보고하면서 이즈음에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것이 우리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과 또 곽종석이 이 운동에 대표가 되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그리고 실행 방법은 고종의 인산이 3월 1일로 공포되었으니 그때를 이용하면 전국 유림들의 서명운동도 용이하다는 사실도 아울러 논의 하였다.
곽종석은 즉석에서 쾌락하면서 몸이 자유롭지 못하여 자기를 대표할 청년을 서울에 파견하여 상의하게 하겠다고 윤충하를 돌려 보냈다. 그날 저녁에 서울에 있다는 김창규(金昌圭)가 찾아와서 곽종석의 면회를 청하였는데 윤충하와 꼭 같은 의견이었다. 곽종석은 자기의 조카 곽윤(郭奫)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견을 전달하도록 하고 격려하여 돌려 보냈다.
그 뒤 곽윤과 김황(金榥)을 서울에 보내서 다방면으로 정세를 알아 보고 윤충하와 상의하여 추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장서운동의 출발동기는 (가) 민족자결주의의 신조류 (나) 일제의 사주를 받은 유림대표의 ‘독립불원서’에 대한 반박의 표시 (다) 고종황제 급서에 대한 국민의 충격 등인데 그 과정이 3·1운동과 다른 점은 3·1운동은 국민봉기로써 대내 투쟁을 제1차적인 목적으로 하는 반면 장서운동은 유림의 총의를 비밀리에 망라하고 그것으로 국제무대에서 공개적으로 투쟁하려는데 그 차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유림측이 설명하는 논리이고 실제로는 3·1운동에 소외되었던 반발의식의 작용도 없지 않았다.
2. 파리장서 운동의 착수
처음 이 운동을 일으켰을 때는 장서란 말은 없었다. 유림간에 서로 연락하는 용어(用語)는 ‘독립청원서’였다.
그뒤 이 거사가 발각되어 일제측에서 취조할 때 본 사건의 이름을 ‘유림단사건’이라 붙었고 해방후에는 ‘파리장서’라고 호칭하였으니 즉 파리에 보낸 긴 편지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러진 것이다. 이 운동은 이미 서술된 바 윤충하·곽윤·김황 등이 곽종석의 지시에 따라 활동이 시작되었고 또 그와는 별도로 성대영·김창숙과의 서면 연락에서 3·1운동을 기점으로 파리장서 계획을 세우고 활동을 준비하던 중 김황·곽윤 등을 만나 합류하게 됨으로써 본 운동의 완성을 보게 되었던 것인데 김창숙과 성태영과의 관계 동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월 19일 성주(星州)에 있는 김창숙에게 서울로부터 성태영의 편지가 전해왔다. 그 내용은 고종황제 국장일을 기하여 대사건이 책동되고 있으니 빨리 상경하라는 것이었다. 편지를 받아 본 김창숙은 모친의 병환으로 즉시 상경하지 못하고 25일에야 서울에 올라와서 즉시 성태영을 만나니 각 종교대표들은 3월 1일 국장일을 기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유림대표 김창숙을 독립선언서에 연서할 것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선언서의 인쇄가 완료되어 서명의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쉽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3월 1일은 닥쳐 왔다. 김창숙은 성태영·김정호(金丁鎬)와 함께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을 듣고 군종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렇게도 우렁차던 만세소리는 눈물과 울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김창숙은 성대영·김정호와 밤을 새워가며 실천방법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즉 독립청원서의 기초, 대표의 추대, 모금의 방법, 전국 유림의 동원 등 치밀한 계획이 마련되었다.
김창숙도 곽종석의 문인인 만큼 곽윤을 통하여 서울에 온 김황·윤충하 등과 만나 합류하기로 결론짓고 일을 추진하였다.
1921년 9월에는 태극단(太極團)의 대표로 태평양회의에 일제 한국 강점을 부인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한국정부로 승인해 줄 것과 파견된 한국위원의 출석권을 요청하는 내용의 청원서에 서명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줄기차게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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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평리원, 1907. 7. 3) [판형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