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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김호정
관심
이번 주 ‘김호정의 더 클래식’은 지휘자 정명훈(71)을 이야기합니다. 한국의 대표적 음악가이자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세계적 악단과 함께하는 지휘자죠. 정명훈의 지휘는 뭐가 다를까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피아노와 공연예술학을 공부한 김호정 기자는 정명훈을 ‘소리가 무거운 지휘자’라고 설명합니다.
아, 그리고 이번 주에는 특별 이벤트가 있습니다. ‘김호정의 더 클래식’을 감상한 뒤 멋진 댓글을 다신 분 중 세 분에게 공연 티켓 각 두 장을 드립니다. 정명훈 지휘자가 KBS교향악단과 함께하는 베르디 레퀴엠 연주에 초대합니다. 소프라노 서선영, 테너 김우경 등 솔리스트도 화려합니다. 3월 7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이 공연의 티켓(S석)을 선물하겠습니다.
정명훈 스타일: 소리를 채굴하는 지휘자
더 클래식 3회의 주인공인 지휘자 정명훈. 사진 Matthias Creutziger
‘세계적인 지휘자’ ‘한국 최초의 지휘자’.
우리는 어쩌면 이런 표현에 너무 길들여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명훈의 이름 앞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지요. 1984년에 베를린필, 로열 콘세르트헤보 오케스트라, 뉴욕필, 1993년에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하지만 수식어를 떼면, 정명훈은 어떤 지휘자인가요? 그의 음악은 무엇이 다른가요?
결론부터 말하면 정명훈은 ‘소리에 매달리는 지휘자’입니다. 소리 말고 나머지는 종종 과감히 버리기도 합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요. 이번 주 ‘더 클래식’의 정명훈 스타일 분석에는 지휘자 김광현(43)이 함께합니다. 김광현은 경기필하모닉(부지휘자), 원주시향(음악감독)을 거친, 현재진행형 지휘자입니다. 최근 현장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그와 함께 정명훈의 스타일을 하나하나 파헤쳐 보겠습니다.
좀 안 맞아도 괜찮아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의 시작 부분을 꼭 보세요.”
김광현은 지휘자들의 스타일을 이 부분에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명훈의 지휘를 먼저 보겠습니다.〈40분49초부터 재생되는지 확인해 보세요〉
김광현은 이 부분을 들려주고 “어딘가 이상하죠?”라고 묻습니다.
눈치채셨나요? 입으로 부는 악기들과, 손으로 두드리는 악기 팀파니가 한꺼번에 ‘빵~’ 하고 첫 음을 내야 하는데요, 동시에 소리를 내지 못하는 걸 느끼셨나요? 팀파니 소리가 한참 먼저 들리네요. 왜 그럴까요? 악보를 좀 보겠습니다.
베토벤 9번 4악장 시작 부분의 일부. (1,2)박이 없고 3박에서 시작해 한 번에 맞추기가 힘들다.
딱 맞추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4분의 3박자인데 맨 처음 마디에 보면 3박 중에 두 박이 없고, 마지막 박의 음표(4분음표)로 시작하죠. “여기서 지휘자의 선택지는 둘입니다.”(김광현)
우선 온전한 3박을 다 저어주면서 오케스트라가 마지막 박에 딱 맞춰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지휘 스타일입니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예비박을 주는 지휘를 한번 보실까요.〈47분10초부터〉
지휘자가 ‘하나, 둘’ 할 때 준비하고 ‘셋’에 다같이 연주를 시작하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정명훈은 큰 예비박 하나만 주고 시작하는 ‘기습 지휘’를 선택했습니다. 질문은 이겁니다. 정명훈은 왜 ‘하나, 둘’을 본인이 친절하게 세지 않고 단원들에게 맡긴 채 시작할까요? 특히 트럼펫 같은 금관악기들은 숨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너무 힘들죠. 이렇게 전열이 흐트러질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정명훈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소리의 캐릭터입니다. 정명훈의 베토벤 9번 4악장은 성급한 소리로 시작합니다. 금관악기 소리도 찢어지는 듯 들리게 됩니다. 정명훈이 해석한 음악의 성격에는 이런 소리가 맞는 거죠. 이 첫 소절은 흔히 ‘공포의 팡파르’라고 불립니다. 앞서 세 개 악장에서 쌓아 올렸던 것들을 한순간에 부정합니다. 불완전하게 내뿜는 팡파르가 어울리지 않나요?
원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 어떤 것들은 과감히 버리기도 합니다. ‘사운드 홀릭’이란 표현이 걸맞은 지휘자죠.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1악장에서도 정명훈이 추구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조용한 피아니시시시시시모(pppppp)후에 난데없이 요란해지는 부분입니다. 먼저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들어보겠습니다. ‘목숨을 건 듯 강렬한 해석’으로 꼽히는 연주입니다.〈9분22초부터〉
이번에는 정명훈의 지휘입니다. 〈9분55초부터〉
일단 속도가 느린데요, 그래서 즉각적인 놀라움을 부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무게가 잔뜩 실린다는 점입니다. 짧은 16분 음표 하나까지도 묵직합니다. 특히 바이올린·비올라의 현악기 사운드를 들어 보세요. “이런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연습 단계부터 현악기들이 활을 더 깊고 무겁게 연주하도록 지시해야 합니다.”(김광현)
김영옥 기자
맨 첫 음만, 다시, 계속!
정명훈이 원하는 소리는 대부분 무겁고 깊습니다. 낮은 음에 무게중심이 실리도록 설계하는 대표적 지휘자입니다.특히 현악기들에 요구하는 소리는 아주 특별합니다.
지휘자 김광현이 직접 겪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20년 전쯤 정명훈에게 공개 지휘 레슨을 받았다고 하네요. 연주곡은 드보르자크 교향곡 8번 2악장. 바이올린·비올라·첼로가 느린 메조 피아노(조금 작게)로, 그러나 풍성하게 시작하는 음악이죠. 처음 만나는 지휘자이니 당연히 현악기 소리가 제대로 안 났겠죠. 그랬더니 지켜보던 정명훈이 지휘대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정명훈 지휘자가 현악기 연주자들에게 맨 첫 음만 연주하도록 시키는 거예요. 소리는 풍성하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또 그 한 음만 소리를 내라고 지시했어요.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소리를 내세요’라면서요.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그리고 ‘서로 들으세요’ 하고 또 ‘다시 한번’. 계속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때마다 소리가 깊어졌죠. 제가 지휘대에 다시 올라갔을 때, 소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얻고자 하는 소리를 ‘채굴’해 가는 지휘는 결국 이렇게 됩니다. 차이콥스키 ‘비창’ 1악장의 클라이맥스입니다. 〈13분22초부터 15분까지〉
현악기들의 소리가 특별히 깊죠. 이런 정명훈 사운드는 어쩌면 그의 태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단의 박스 기사에서 확인해 보세요.
정명훈의 지휘는 밝은 곡보다 어두운 음악, 아기자기한 곡보다는 굵은 선이 있는 음악에 어울립니다. 베토벤의 후기 작품들, 브람스,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 등입니다.
해외의 리뷰에서도 구조적 훌륭함보다는 소리를 칭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리미’하고 ‘부드럽고 평화롭다’고 말입니다. 정명훈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소리를 거부하기는 힘듭니다. 2015년의 음반 말러 교향곡 9번(서울시향)에 대해 ‘말러의 속도보다 빨랐다’거나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비평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도 깊고 풍부한 느린 악장(4악장)의 소리만큼은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현악기 연주의 24분’이라는 평이 눈에 띕니다. 말러 9번 4악장은 정명훈식 사운드가 가장 잘 들리는 곡입니다. 보다 산뜻한 편인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상반된 해석과 비교해서 들어보세요. 시작 부분 조금만 들어도 당장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처음 나오는 긴 음에 각각 얼마만큼의 무게를 싣는지 비교해 보세요. 〈두 영상 모두 처음부터〉
이런 이유에서 정명훈은 악단과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춰야 하는 지휘자입니다. 음표 하나의 소리도 오랜 시간 뽑아내야 하니까요. 김광현은 “지휘자는 언제나 선택의 순간을 만난다. 그때마다 정명훈은 그 곡에 맞는 사운드의 감동을 구현해 내는 지휘자”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부터 정명훈을 비롯한 지휘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찾아보면 어떨까요. ‘더 클래식’은 또 다른 지휘자의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김영옥 기자
완벽주의 누나의 흔적이 있는 정명훈 사운드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히 연주했던 정트리오. 왼쪽부터 정명훈ㆍ명화ㆍ경화. 중앙포토
“솔직히 나는 피아니스트보다 바이올리니스트에 더 까다롭다. 웬만해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정명훈은 예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엄청난 재능을 가졌던 누이들 때문”이라고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첼리스트 정명화(80)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76)가 그의 누이다.
현악기의 소리에 대한 정명훈의 특별한 감각은 누이들의 재능과 떼어놓을 수 없다. 특히 정경화는 연주가 마음에 안 들면 대기실 벽에 머리를 쿵쿵 쳐댔을 정도로 전설적인 완벽주의자다. 피아노를 치던 정명훈은 누나들과 함께 1969년 백악관 연주로 ‘정트리오’ 활동을 시작했다. 정트리오의 1982년 뉴욕 카네기홀 연주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거의 이상에 가까운 조화”라는 기록을 남겼다. 정명훈이 누나들의 정상급 현악기 사운드와 함께 연주하던 시절은 지휘를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이들의 스토리는 서울 명동에서 출발한다. 부모가 명동의 ‘고려정’이라는 불고기와 냉면 음식점을 경영했는데 7남매 모두가 음악을 했다. 1961년 시애틀로 온 가족이 이민을 갔고, 정명화·경화 자매는 줄리아드 음대가 있는 뉴욕으로 먼저 옮겨갔다. 정경화가 레벤트리트 콩쿠르(67년), 정명화가 제네바 콩쿠르(71년), 정명훈이 차이콥스키 콩쿠르(74년)에서 우승 또는 입상하면서 이들의 신화가 시작됐다. 정명훈은 7세에 서울에서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서긴 했지만, 14세까지는 음악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 “부모님 햄버거 가게에서 요리를 열심히 도와주고, 식당 한쪽의 피아노를 재미있게 쳤을 뿐”이라고 했다. 14세에 세계적 지휘자 주빈 메타를 찾아가 쇼팽 스케르초 2번을 연주하고 칭찬을 받았다. 그제야 그는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미국 매네스, 줄리아드 음대에서 정명훈은 연습실에 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늦게 나오는 학생으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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