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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5일 금요일
심심 하시면 한번 읽어 봐주세요
관심이 없으신분은 지금 바로 삭제처리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하오며 깊은 양혜 부탁드립니다
물길따라 고향길 걷기를 잇고자
해외여행을 앞두고 캐리어를 싸는기분정도로
며칠을 기다리다
2020 5 14 경산시외뻐스정류장에 07:40분에 도착했다
저번의 학습효과가 있었기에
동곡방향 출발시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익숙한 사람이 되었다
아침 요기가 적당치 않아 빵과 우유로 떼워야만 했다
동곡에 도착하니
청도나 유천쪽으로 갈 뻐스가 한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정류장에 기다리려다
옛날 동곡재 통학으로 수 많이 걸어본 길을 회상하는뜻에서
걸어보고싶은 마음으로
정류장을 나오자 마자 개인택시가 대기하고 있었다
덥썩 타고 보니 아줌씨 다
금천중 후배라고 하면서
돌아는길에 이용부탁한다면서 명함을 건넨다
버쓰가 장날이면 엄청 싣었다
동네 어른 자리 잡아줄려고 창문으로 가방을 던져넣고
겁나게 올라타
귀여움을 받으려고 도 했다
동곡재는
장날 승객을 많이 실었는날이면
흔히 중간쯤에서 시동이 꺼져버린다
학생들은 내려서 버쓰를 밀라고 한다
밀면 그 반동을 이용하여 쉬지 않고 고개 끝까지 내 달려버린다
그때는 고개가 꾀 높았다
꼼짝없이 고개까지 걸어갈수밖에 없다
요즈음 처럼 정비가 옳게 되지 않은것 같다
당호교에 도착하니
08:30분
지난번 도움을 준 초딩동기에게 아침 농장 출근길에
동곡까지만
같이 갈수 있으려나 부탁할려다 그만 두었다
시간을 조율하여야 하는등
그것 또한 민폐일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나에게 주어진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찿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
누가 강권하는것도
중단한다고 나무랄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어릴때 부터 하고 싶었든일이고
내 자신과의 야속을 이행하고자 함이었다
시작한일에 대한 마무리
성취하고자 하는 욕심도 함께 한것일까
전에 쉼표를 찍은 당호교
북쪽을 쳐다 보니 바로 그 유명한 삼족당이다
하루를 설명해도 모자랄
역사가 어울어진곳 이건만 아는봐가 없으니 느낌도 없이
그냥 지나칠수 밖에 없다
제방을 쭉 내려갔다
온 천지가 아까시아 꽃 항기다
친척 계모임을 하든 매운탕 음식점도 있었다
닭을 방목하며 토종닭으로 판매한다고 하는데 믿을수가 있을까
병아리때부터 키우는게 아니라
보통 성계를 어저께 갖다 놓는다는 소리도 들렸기 때문이다
그 한적한곳에 모텔
행복추구권을 굳이 들먹거리지 않드라도
그건 인간만이 누리는 자유의 영역이다
권리가 있다면
그기에 따르는 의무를 다아 지킨다면 말이다
계속 내려가면 동화로 연결 되려나 싶었는데
개 사육장
요란하게 짖어댄다
주인은 밥때만 오는가 보다
산지개발로 온갖 과일나무다
동화로 이어지지를 않아 다시 되돌아 와
동창보를 겨우 겨우 건너
처진 소나무를 바라보며 동창 동네로 들어섰다
옛날
3년6개월 동안 면사무소에서 근무를 한곳이다
버쓰 정류소 아랫집에 살림을 차렸고
그곳에서 딸도 얻었다
그때는 비포장도로로 먼지구더기 속 이었지만
행복의 밑자락을 놓았는것 같다
세상 끝나는날까지 이 여인을 사랑하리라고
다짐한 신혼시절
곗돈도 붓고 살림 밑천을 장만하기 시작 했다고나 할까
그때의
면직원은 고달펐다
낮으로는 사무실에 근무조차 할수가 없었다
식량증산을 안보차원에서 다룬다면서 영농 독려로
농사행정이 거의 전부였다
오죽하면
도롯가 농사는 면서기들이 짓는다는 말이 나왔을까?
제때 일정에 따른 농사가 진척이 안되면
군청에서 바로 면장에게 경고조치로 문책하기 일쑤였다
때로는 집에서 낮잠을 억지로 라도 자야 했고
문중 제실에서
라면 끓여먹고 농민들의 눈을 피해 고스톱으로
시간을 떼우기도 했다
화투라니....요즈음 이라면 언론에 난리날 것이다
영농독려라고 하지만
바쁜 농사철에 돌아다니는것이
그들의 눈에는 빈둥빈둥 꼴불견으로
비춰지는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산불 발생으로 비상소집도 다 반사 였고
비가 많이 내리면 수해대책을 한다면서
한 밤중에 고용원이 집으로 찿아와 소집당하기도 했다
토 일요일이 없었다
여름휴가도 시작과 동시에 한해대책을 위하여
중단 하라는 도지사 지휘지시가 매년 하달되었다
시간외수당 년가보상비라는 말 자체가 아예 없었다
군청 도청 근무자는 상전중에 상전이었다
그들은 주민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
하부 공무원만 다그치니 같은 공무원이라지만
종자 자체가 틀리는줄 알았다
동병상린 이라고
그래도 면직원끼리는 재미 있었다
귀 했든 호떡도 구워 먹고
물고기를 돌맹이 망치치기로 잡아
회식을 자주했다
겨울 물고기는 달싹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면직원중에는 중학교 동기생이 2명 있었다
울산에 근무하다
고향이라고 찿아가니 반갑다고 곽성일씨 따로 국밥집에서
짬뽕국물로 쐬주를 싸주든 친구다
경산시 가정복지국장으로 정년퇴임한 친구는
고등학교때도 부산 용호동 서대신동 산비탈길을 오가며
교류를 가졌고
일찌기 공직에 투신하여 내가 대학을 재수하고도
실패한후 방황하든 백수시절에
이미 자전거를 타고 담당부락으로 동네에 들락거렸기에
더욱더 친근감이 더 더해졌다
9급 말단에서 국장까지 열심히 한 친구다
다른 한 친구는
7급으로 승진을 하고 운문면으로 전근을 간후
빽을 달아 구미시로 갔다가
경산군이 시로 승격될때 경산시청에 전입했다
6급 계장승진이 안되어
고민에 고민을 하드니만
어이없는 사건으로 유명을 달리 하고야 말았다
동기생 부친도 같이 근무하였는데
고스톱에 장기바둑 심지어 맞 담배까지도 ...
노소를 따질수가 없었다
허물없이 대하여 주셨고 다아 받아주신분이다
창고 뒷편에서 내기 바둑으로 약 올려 먹든일도
생각이 난다
중간 중간 흙 대마를 다 잡아버릴것 같은 공갈도 치면서
친구의 부친이었고 백형의 친구였지만
아랑곳 없었다
자가용이 없든 시절에
오트바이가 이동수단 이었다
부면장도 원활한 업무수행 을 위하여
오트바이 구매를 끈질기게 요구했지만
이곳이 내가 정착할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오트바이를 구입해오면 면직원 모두가 앞 마당에 나와
구경하든 진 풍경을 벌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동기생의 형 형부
중형 종형의 친구분들
거의 다 연결이 되는 사람들 이었다
젊은직원들은 아이들 공부 때문에
면사무소를 벗어나 대도시로 가고 싶어하는
분위기 였다
할애요청제도가 있어
여건이 되면 전출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포항 군위 청도교육장을 거쳐 대구중앙초등학교 교장으로
계시든 종형께 간청하여
대구로 전근을 갈수가 있었다
꿈속에서도 그리든 큰 희망을 이룬 기억이 새롭다
옛 생각이 절로 난다
퇴근후 목욕갔다가도 지천에 널린 다슬기를 잡고
아침 운동으로 동화보에 가면 더 많이 잡을수가 있었다
밤새 어둠을 이용하여 이동하다 그기서 멈춘것이다
간식으로 즐겨 먹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았든것 같다
고성이씨 재실도 유명하다
주변 경치가 좋아 정자로써는 어느곳 못지 않아
옛날 선비들이 풍류를 즐길만한 위치인듯 하다
년대를 환산하는 노력을 기울리지는 않았지만
아마
어울리는 성씨가 틀리니까
삼족당을 의식할수도 있었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옛날 살았든집을 찿았으나
그 흔적을 기억을 되살려 겨우 찿을수 있었다
36년의 세월이 멀기는 멀었든 모양이다
제방을 따라 쭉 내려가니
대추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불루베리 농사 한우축사가
듬썽 듬썽 있었다
논농사는 찿아볼수가 없다
둑이 끝이나는 무심교 전에 매전농협조합장으로 근무하셨든
4촌형의 대추밭이 보였다
아들들이 모두 객지에 나와 직접 농사를 짖지 못하니
남에게 준게 역역히 보였다
나무자체가 신통찮다
소득은 별로고 재산목록에만 있는것일까
4촌형님은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 슬하에 공부하여
농촌지도소를 거쳐 조합장을 3연임 하신분이다
아버지(나에게는 3촌인 작은아버지)가
생전에 고염나무에 접을 부쳐 손수 감밭을 일구어 놓아
요즈음과 달리 그당시 수입이 상당했다
먹고 사는것은 걱정이 없을 정도였다
그 큰형님에 동생은
세무공무원으로 밀양에서 일약 서울 용산으로 발탁될 정도로
잘나갔으나 독직에 걸려 그만두고
고생하다 한보철강 전무이사 당진공장(현 현대제철)장등
으로 제기하였으나
한보의 부도로 인한 재산보증의 문제로 말미암아
말년의 불운을 피하지 못했다
편모슬하의 형제는 우애가 깊지 못하다는 옛이야기가
맞는지는 몰라도
재산의 문제일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형수님 동서간에는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듵리는것 같았다
큰 형님 슬하에는 아들만 셋 두었는데
우애있게 지내는것을 보니
재산분배를 잘 한것 같다
장남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원만하게 잘 정리한 모양이다
재산문제로
형제간에 원수처럼 꼴불견의 다툼이 얼마나 많은가
당장은 별 소득없이 세금만 납부해야 하는
땅 부자들
그런땅이 전국에 얼마나 많은가
지주들은 보유세가 겁이 나고
없는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에 허탈하고 부럽기만 하는 땅 땅
토지공개념 이익 공유제
사회주의적 개념들이 앞으로 어떻게 정리 해결될까 ?
기득권 갖인자들의 삐뚤어진 횡포는 마땅히 개선되어야 하고
사회환수등 선의의 배품을
못 가진자는 그들에게 분노를 표출할게 아니라
피땀으로 이룬 노력을 인정해야 한다
자유경제의 시장논리를 수용하지 않으면
다 같이 파멸하는길밖에 없다
분배는 성장이 이루어지면 스스로 해결되어질 문제라고
한다면
경제원리를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것일까 마는 ..,.
동화다리를 건너
둑길에 올라섰다
옛날에는 순수한 논 밭농사 뿐이었는데
지금은 무슨 작물을 짖는건지 대규모 시설이다
마을 앞 하천부지는 국민학교 소풍 장소로 많이 이용되든곳이다
이전에는 강가에 버드나무 숲을 이루었으나
어느날 흔적이 없어졌고
그 자리에 북지 갈대숲으로 명성을 날리는 장관이었는데
지금은 그마져 사라지고 골재채취가 한창이다
어릴때
어른들이 말뚝을 박고 돌을 쌓아 물을 한쪽으로 모우는 방천일이
생각난다
방천도감 이 그때는 큰 권력자 이기도 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치수 관리자 다
분수(가뭄에 물부족으로 논에 들어갈 물을 분배 하는일)
차릴때는 물을 조절할수가 있었기에
제논에 물을 많이 공급할려고 싸움질 하는일도 잦았다
자식입에 밥들어가는것과
자기논에 물들어 가는것이 제일 보기가 좋다고 할 정도이니
그 싸움질에는 친구도 인척도 예외가 될수 없었다
일부러
골(벌금)을 때우고 자기논에 물을 대는 사람도 있었다
그게 더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부역도 있었다
조선시대 조 용 조 의 세금에서 용 이다
도로의 일정구역을 담당동네가 책임지고 보수하는일이다
일을 나갈수 없는집은 돈으로 때운다
그돈으로 그날 막걸이 빵 등 간식경비로 사용한듯 하다
제방이 생기기 전에는 하천부지에 개간을 하여
과일나무를 심기도 하고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짖기도 했다
물론 홍수로 범람하여 무용지물될수도 있었지만
투기였든 셈이다
둑 안쪽에는 옥답이었기 때문에 쉽게 취득할수가 없어
농토를 얻을수 있는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명대 호방에서 그 사업을 열심히 하신분들이 계셨다
그때는 그분들을 도자 아저씨로 부르는듯 했다
요사히는 포크레인 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불도져 로 명명한듯 하다
불도져에서 흙을 쉽게 파고 메우는 기능까지 첨가된게
포크레인 일까 ?
여름에 범람으로 농사를 망치고
겨울에는 불도져로 또다시 개간을 하였다
아마도 싑게 농지를 취득할수있는 그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한것 같다
낙동강 연안개발 사업으로 제방을 쌓기전
하천가에는
그런땅들 그런일들이 비일비재 했다
이런 제방사업들이 결국은 안정적인 농사를 짖게
만들어준것이다
사회가 발전하는것은 이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될수 있는것이다
동화는 건너 다닐수 있는 다리가 없어
비만 오면 학교에 올수도 없고
학교에 왔드라도 장마철과 강수량이 많이 예상될때는
일찍 귀가 시켜야했다
(비하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니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
환경에 지배를 받을수밖에 없다
비가 오면 어른들은 농사일을 할수가 없어 마냥 놀고
학생들도 학교에 갈수 없으니
덩달아 놀수 밖에 없는일이었다
온동네가 비가 오면 먹고 노는
잔치 분위기에 젖을수 밖에 없다
괜히 물건너 란 이야기가 나왔겠는가?
뒷날 석유공사에 고위직이 이 마을 출신이라
잠수교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소리를 얼핏 들었든것 같긴하다
여름날
뒷소에 물고기 잡으로 가면 강가에서 우연찮게 동화 친구들과
마주하게된다
그런데 이상했다
우리는 소주병이 작았는데(큰 병은 거의 구경할수 없었다)
그들은 댓병 큰병이다
무엇을 말함일까,
우리는 언제든지 상점에 물건 구매가 가능하였는데
그들은 그렇치를 못했다
비가와도 배달 공급이 되지않고
수시로 구매가 불가능하니
작은병은 귀찮고 한꺼번에 일괄 통째로 처리하는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그게 오랜 관행이 된것이다
그래야
배달 공급하는 장사도 수월하니
자연적인 현상이 되어 버린것이다
우리는 배달이라는 것 자체를 몰랐다
그 동네에는 정미소가 없었다
우리 호방에 정미소가 새로 생기는 바람에
북지 정미소와
유치 경쟁을 벌이는듯 했다
그 동네로 봐서는 북지가 편리 했을것 같은뎨
사업주가 그쪽으로 자비를 들려 도로 정비도 해 주고
마을 유지에게 로비를 한지는 알수는 없지만
사업수완을 발휘 하는듯 했다
그때는 무엇이 경쟁인지 알수도 없는 어린 아이에
불과 했지만 느껴지기도 했다
북지 정미소가 그간의 독점으로
배짱을 부렸는지
민심이 인심이 이탈했음은 분명한듯 했다
군대가기전
그 동네로 밤에 토끼 서리를 많이 다녔다
우리동네보다 더 꼴짜기라
우리는 키우지도 않는 토끼를 많이 사육했다
번식이 잘 되어 부담이 적고
잡는것도 소리가 나지 않고 반항이 없어
초보자에게는 수월하였다
반면 닭 잡는것은 많은 경험이 필요했다
손을 사전에 본인 가슴에 넣어 따뜻하게 만든후에
따뜻한 손으로
천천히 날개를 더듬어 꽉 틀어짐과 동시에
목을 움켜 지면서 훼(닭이 앉을수 있도록 만든 나무)에
다리가 닿지 않도록 들어 올려야한다
거의 동시동작 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렇치 않으면
날개가 퍼득이고 발로 훼를 갈취하는 소리와
울음소리를 질러 버리기
때문에
주인에게 들킬 확률이 그 만큼 높아지게 되는것이다
군데 군데 캠핑장 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성업이 되면 모르겠는데
욿은 수입이 되지 않는지 방치하는듯 하여
조금은 흉물스럽기 까지 하다
둑을 차츰 내려오니
완전히 고향땅 호방이다
고성이씨 집성촌으로
옛날에는 명대 마을 보다 세대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1930년대 큰 화재로 마을 전체가 소실되어
명대로 이주를 하였기 때문이다
슬기롭게 살아갈려면
개인보다 이웃과 공동체의 안녕에 더 힘을 쓴 조상님의
지혜가 있었기에
여태 평온한 삶을 영위할수 있었을것이다
구정이 가까워 지면 뻥튀기 장사부터 설친다
집집마다
순서를 다투며 쌀 보리 강냉이 떡국을 튀기고
집에서는 찐쌀 깨 콩 으로도 강정을 만든다
뜨근 뜬근한 떡가래(떡국을 만들기 위함) 를 조청에 찍어 먹으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것은
그런 경우를 두고 말함일것이다
신발과 백프로 잠바는 엄마가 동곡장에 오셔서
가만히 불러내어
칫수를 맞추기도 했다
그런 설빔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손 꼽아 기다렸다
동네 공용목욕탕이 만들어져 여름을 제외하고는
1년에 한번 하는 목욕도 할수 있었다
밑은 뜨겁고 수증기 때문에 옳게 하지도 못한 기억밖에 없지만
순번을 놓고 실랑이도 벌였다
설날 당일에는
놀집을 찿고 빈집을 골라 채전밭 말목까지 빼와 군불을 지피고
밤새도록 판을 두드리며
유행가를 불러대기도 했다
누가 선창을 하면 따라 불렀다
화투치는일도 그렇게 재미 있을수가 없었다
고스톱이 나오기전
육백 삼백을 많이 쳤다
고스톱과 달리 중간에 끝이나는일이 없음으로
종말 말미 에서 양 상대자를 조절 할수 있다는게
쓰릴이고 묘미다
친구와 마을어귀에 있는 감을 밤에 딴다
감 장사집에 갖고가면 다소 헐값으로 앞으로 이런짖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돈은 쳐준다
먹지 않고 팔았으니 도둑질임 은 분명하다
그돈으로 양초를 구입하여 화투칠때 사용한다
호롱불에서 보다는 얼마나 밝고 좋은지 모른다
천지가 개벽한것과 같을것이다
그이후에 전깃불이 들어왔으나
초창기에는 정전이 잦았다
잠깐은 촛불을 켜고 쳣으나 어두워 재미가 없기 때문에
이내 그만둘수 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인간이 얼마나 요물인가?
편리함으로 익숙하고 나면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 가도 불편함을 느끼고
그 향수에 젖어 살아갈수 없는것이다
지금도
경제가 추락한다거나 자유를 억압당한다면
못 살것 같은 이치와 동일할것이다
나이롱뻥으로 묵기내기
도리짖고땡과
구삥의 뒷장빼기 노름
그래도 깊이 빠져 문제를 일으키지 않음은
깊고 얕은것을 알고 절제할수 있었고
그 폐해와 위험성을 잘 알았기 때문일것이다
직장근무시에도
예약문화인 요즈음과 달리 음식이 나올려면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 짜투리 시간과
마금회(매월 마지막 금요일밤)에는 밤을 세워 화투로 보냈으나
말썽 한번 일으키지 않았다
정월대보름이
더 기억에 새롭다
설에 먹다 남겨둔 달콤한 강정도 기다리고 있었다
짚을 집집마다 거두고 소깝(소나무 가지)을 헤아릴수 없도록
자미산을 오르 내리며 나른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 자발적인 행위다
자미산 정상에서 달님이 떠 오르면 먼저 인사하고
재빠르게 들판 논 중간에 설치해둔 불짚으로 내려온다
동네에서
옥동자를 낳아야할 분
소원성취를 빌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분이
막걸이 값을 내고 보름달이 떠오름과 동시에
달집에 불을 지른다
주위에 모든사람들도 각자 소원을 빌며 환호성을 지른다
남자 어린아이들은 평소 준비해둔 무기(대나무 창)로
원앞 아이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어른들은 그 불에 콩 볶아 먹고
풍물을 두드리며 가가호호를 방문 한해의 안녕을 빌어준다
고맙다고 쌀을 내어 놓기도 한다
그렇게 밤은 깊어간다
정월과 이월사이에
윗 친구들 주최로 콩쿨대회 노래자랑 대회가 있었다
유지로 부터 기부금을 받고
1등은 짜고치는 고스톱과 같이 이미 정해 두었으니
경품비를 많이 들이지 않고 짭짤한 수입을
올릴수 있었다
그 이익금으로 그들은 제주도
여행을 갔다
일반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가지 않는 70년도 초반이다
누구의 아이디어 였는지는 몰라도
요즈음으로 치면 수완이 대단한 사업가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뽄 받아
우리 또래는 매월 50원의 적립금을 모은 결과
일정금액이 되어
염소를 구입하여 배네(새끼는 사육하는 사람이 가져가고
어미만 키워줌)를 주어
그것을 되팔아 부여 공주등 2박3일을 여행을 다녀왔다
이월에는
송기떡을 비롯하여 쑥뗙등 각종 떡을 만들어
이웃들과 나누어 먹었다
윷놀이로 온 동네가 잔치 분위기다
농번기가 시작되기전 화전놀이도 있었다
밤꽃 냄새가 물씬거리든 철 이었든것 같다
밤나무를 심어둔 갱빈에 온마을 사람이 모여 물고기 국 끓이고
징 장구로 여흥을 즐기는 하루였다
가을걷이등 농번기는 사람도 아니다
잠자는 3~4시간을 빼고는 종일토록 움직이는 기계와 같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없이 논에서 일하고
저녁먹고는 호야불을 켜 놓고 밤 늦도록 타작을 하였다
온 몸이 가렵지만 샤워는 생각지도 못하고
눈을 붙이는둥 마는둥 잠을 자고
이튿날 새벽에 작은집 타작을 거들어야 했다
물론 품앗이다
발로 밣는 탈곡기로
늦은밤 새벽으로 번갈아 가며 타작을 할수밖에 없는것은
돈을 아낄려고 기계를 1대 밖에 구입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몇날 며칠을 파김치가 되도록 계속할수 밖에 없는것은
혹시나
가을비가 올까봐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가설극장도 빼 놓을수 없는 추억이다
소 먹이고 귀가하는 저녁나절
방송이 흘러 나온다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영화 신성일 엄행란 주연의
비운의 로맨스 라면서 눈물 닦을 손수건을 준비하여
빨리 나오라고 야단이다
이웃동네 처녀도 만나고
모임 그 자체가 좋았든것 같다
그때는 관람료로 계란 마늘도 받았든것 같다
몰래 홈쳐서 갔다 주었다
대한뉴스가 끝나기 무섭게 꾸벅 꾸벅 졸기 일쑤다
그만큼 취미에 맞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취했든것이다
간혹 연극도 왔고
약장수는 수시로 와서 마음약한 노인들에게
환심을 싸고 돈을 훌쳐가기도 한것같다
사람이 사는데 좋치 못한 기억들도 물론있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필설로 표현이 되어 지지않을 정도로
아련히 떠오른다
강가는 예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본래는
이곳 뒷소에서 애안골(장숫골을 경유하여 길명으로 연결되어짐)로 빠지는 포구소쪽이 수심이 더 깊었다
지금은 연안개발사업으로 둑을 막아 농지로
변했지만
소를 먼산에 올려놓고
(밀싸리도 잊을수 없는 추억이다)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모래사장에서 딩굴고 멱을 감든 장소였다
위에 형들의 이간질로 친구들과
쌈박질도 많이 했다
소먹이는 일은 국민학교 저학년부터 시작하여
고등학교 졸업할 시기까지 이어진듯 하다
소가 그때는 재산목록 1호였을 정도로
애지중지 하였다
소를 타기도 하고
윗 동네 곳곳에서 소나기로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 못 건너 올때는
소 꽁지를 잡고 강을 건너기도 했다
강물에 목욕할때는
동네 형들이 일부러 다리를 끌어 당기고 물을 먹였다
어푸 어푸 몇잔을 먹고 허우적 거리면
그때 건져준다
그렇게 단련이 되어 개 헤엄 수영에 자신이 붙는것이다
옛날 뽕밭이 과수원으로 변하고
또 다시 전원주택 단지로
능소화 마을이 생겼다
위치로 남향이고 멀리 강가가 훤히 보이는 적합한 곳이다
우리가 목욕하든 그 장소는 붕어 낚시터로
유명한곳이 되어 있었다
능소화 마을부지는
우리가 알기로는 공동묘지 였는데
선각자가 뽕밭을 일구어 수익을 올렸다
그후 당숙어른이 구입하여 과수원으로 가꾸었다
경북능금조합 전무로 계시면서 조합장에 꿈이 있었다
조합장이 되려면
자기소유의 과수원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대구 봉산동 주택이 도로로 수용됨에 따라
그 모형 그대로 그기에 주택을 지었다
추억과 삶을 그대로 이어가고 싶었을것이다
그러나
당숙모가 뜻하지 않게 일찌기 돌아가시고
본인 생각대로 삶이 진행이 되지 않았음은
안타까윘을뿐이다
둑을 막은 갱빈은 대추밭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하천부지를 점유하여 성공한 사람들이다
뭐든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하다보면 성공하게 되나 보다
지지리도 못 살든 시절이었다
파리 쥐를 박멸하기 위해 그것을 잡아 학교에 제출했다
기생충 박멸 사업으로 회충약을 먹고 기생충 숫자를
헤아려 가기도 했다
대변검사도 했는데
우리동네에 일요일도 모르고 남들이 학교에 가면
따라 나서는 얼쑥한 학생이 콩알만큼 찍어 오라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닐봉지 가득 채워 제출하는 바람에
담임 선생님을 기겁시키도 했다
그러나 그시절에도
앞날을 내다 보는사람이 있었다
홍수로 폐허가 되는 수많은 시항착오를 거쳐도
하천부지를 개간하여
80년초에 대추 한상자에 10만원을 받았다
그것을 700~800상자를 수확했으니
소위 말 하는 그 당시 돈 타작을 한것이다
우리 봉급생활자가
월 20만원쯤 수령했든 그 시절이었을까.?
조금 더 내려오니
장숫골로 들어가는 위치에 우리 괴수원 자리가 보였다
지금은 연안개발사업으로 하천으로 펀입되고
야영장 들어가는 교량 확장으로 거의 형태가
없어져 버렸지만
그 당시에는 꾀 큰 밭이었다
그기에 무슨 그런 확장된 교량이 필요할까 만은
어떻든 큰 다리가 놓였다
소문에는
최경환 국회의원이 역점적으로 추진했다고 한다
다리가
그 그 이전에는 여름에는 아예 없었고
겨울에 나뭇짐을 나르기 위해 군데 군데 말목을 박은 돌로
징검다리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나무로 연결시키는 외 나무다리였다면
요즈음 애들이 믿기나 하겠나
상상이나 할수 있으려나 ?
어찌되었건
경산 청도 사람은 최의원을 욕할수가 없을듯 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오른팔 이었으며
수 많은 공약을 하고 재경부 장관으로써
많은 발전을 할수 있도록 힘을 기울렸기 때문이다
청도 청소년 야영장도 사연이 많은 땅이다
1980년 5공정부에
박찬현 초대 문교부 장관이 신지(선마리) 출신이었다
자기
고향에 줄 선물을 찾다보니 야영장 건립이 떠 올려졌든것이다
같은 값이면
신지에 건립할려 했으나 그쪽에는
부지를 내놓지를 않았고
이쪽에는 온막에서 야영장 까지 들어오는 농토와
건립부지인 뽕밭을 지주들이 기부체납을 했기 때문이다
그대신 장관의 고향 에는
금천중고 체육관을 건립 해주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당시
마을 유지들은 장래 발생할 이득을 놓고
주민들을 설득 하였으나
결론적으로는 땅 만 희사하고 별 소득은 없었다고
할수있다
지역 국회의원인 박권흠씨의 선거 심복
동생이 야영장에 취직 했다는
이야기만 들을수 있었다
60년대 말
1개면1중학교 설립취지에 따라
매전중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온막(명대)에 유치 경쟁을 벌렸다
객관적으로 봤을때 당연히 면소재지인
지금의 동창이 적합하다
명분은
매전초등이 역사가 깊고 오래된 큰집이라는
그것밖에 없었다
지리적으로도 맞지를 않았지만
초등이 먼저 생긴곳에 세워야 한다는 억지의 주장일뿐
유치 하기 위해서 자금을 모금 하기도 했다
유치위원장과 몇몇 유지들이 술 밥간에 잘 놀고
잘먹은 결과밖에는 없을것 같다
물론 사명감까지야 없었을까 마는
무모한 도전 이었다
세상일에 그런 억지가 통하든 시절이었든것 같다
우리 과수원도
둑을 쌓기전에는 매년 홍수와의 전쟁이었다
류실도 되고
복토가 흘러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홍수때 호방둑에서 과수원 이 유실되는것을
바라보고 망년자실 하든 기억이 새롭다
부모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호방쪽 동네 제방도 농토와 가옥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 옛날부터 있긴 있었나보다
그러든것이
1959년 기해년 사라호 때풍때 완전히 소실이 되었다
때마침 본동출신 재일교포가 방문한 시기라
제방건축비 기부를 요구했단다
당장 가져온 돈이 부족하여
서울로 따라 올라가자고 하였든 모양이다
우리마을에는
마른하늘에 단비와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 주신분이다
그분과 가장 가까운 친척 이학기씨와
선친이 서울에 가셨단다
숙소가 조선호텔 이었는데
신발을 벗고 출입하셨다는 일화를 선친께 전해 들었으며
그때의 사진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이병철 삼성회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비서가 바로 돈을 가져 왔다고 한다
그분은 남의 집에 머슴을 살다가
빚에 쪼달려 야반도주 후 일본으로 밀항하여
큰 돈을 번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방직공장 으로는 제일 큰
구미의 윤성방직 서갑호 회장과는
사돈지간 이라고 하였다
71년쯤
농어촌 전화사업으로 전기불이 막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그분께 청원하여 유천에서 우리동네 은행나무 앞까지
전선과 전신주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그 결과 우리마을은 한전으로부터 부채 하나없이
공짜로 다른마을 보다 빨리 전깃불 혜택을 볼수 있었다
그 사업이 끝난후
공덕비 제막식과 점등식이 있었다
보리타작을 할때인데
그전날은 들판에 사람들로 북적 북적 됐는데
점등식 그날은 식장에 참석 하느라
들판에는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식에 참석하면
삶은 계란 카스테라빵 맥주를 주었다고 한다
그것을 얻기 위해 인근 온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기에
참석하였든것이다
요즈음이면 그게 뭐라꼬?
아무것도 아닌데....
그 이후 75년도 쯤인가 본 동네를 방문하셨든
기억이 난다
어린아이들이 가서 인사를 드리면
사람 숫자에 관계없이 무조건 만원짜리 한장씩을 빼 주셨다
그러니
할머니들이 눈에 불을 밝히시고 손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야이누무 소상아(가시나야)
일본아제 오셨는데 인사하러 가야지
어디에 자빠졌다 이제 오노 .?
재빨리 데려가 인사를 시킨다
또 만원이다
그분보다 어른은 직접 찿아뵙고 20만원을 드렸다고 한다
참으로 고향발전에 힘 쓰신분이다
지금생각하면
일시적인 지원을 할것이 아니라 장학금등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렸어면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제실보수다 뭐다 하면서 중간에서 삥당을 쳤고
그게 알려져 미운털이 박혀버린 후에는 지원이 끊혀 버렀다
대구에 사학인수 이야기가 거론되었다는
소리는 그 이후에 들었다
전깃불이 들어오자
Tv가 부잣집의 상징처럼 되었다
김일의 프로레스링 신동파의 농구 메르데카배 킹스컵배
국제축구가 있는날이면
온동네 남지들이 다 모여 왁자지껄 했다
동네에 1~2집
작은집에 있었는데
시청자(동네사람)들이 가고나면 방에 흙이 수북히
나올 정도로 위생관념도 없이 남의 집에
들락거리며 신세를 졌다
잘 수신이 되지 않아 산 중턱에 안테나를 세우기도 했다
산에서 양쪽으로 돌리면서 방향을 맞추고
중간 중간에서 연결의 목소리 로
됐나 됐다를 소리높혀 외치면서 조절하기도 했다
전화는 동이장집에 1대 있었다
누구네 집에 전화왔다고
방송을 하면 재빨리 쫓아가 받았다
재일교포와 일족간에 벌어진
삥땅에 관한 이야기도 웃음짖게 만든다
출입국 비행기 값
오가는 경비 본인의 약간의 수고료를 제외하고
내어 놓게 마련인것을
이해 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차이다
우리 모두가 다 보고싶은것만 보고
믿고 싶은것만 받아드리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에 편에 서서 이해해줄려는 생각은 없다
일본에 출입하여 찬조금을 받아올 정도면
나름의 대단한 일꾼 이라고 말 할수 있다
삥땅은 옛날 뻐스 안내양의 인권 문제로
사회에 많이 회자되기도 했다
몸수색을 당해야 했으니 말이다
시외뻐스는 안내양이 기사에게
담배 바카스 장갑은 기본으로 상납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들에게 유별나게 짐 값을 많이 받는 차장이 있었다
오래된 기사는 그날의 수입을
꿰 둟고 있는것이다
기사와 상납으로 연결되어 있지 읺을까
짐작만 해보았을뿐이다
뻐스기사는 대단한 직업이었다
조수로 몇년을 부속을 닦고 조이고 기름치며
겨울날 기사 먼저 일어나 시동도 걸어두고
틈틈이 운전연습을 거쳐야만 갈수 있는 자리였다
하기사
산천초목이 떤다는 해병대 순검앞에도
기본으로 매일 상납하는 px장갑 위스키가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야 쫌 수월하게 그날을 지나갈수 있었다
지금은 생각지도 못 하는 호랑이 담배 피우든
후반기 포항 포병학교 시절이다
진해 훈련소 12주를 수료하면
대부분의 부모들이 해병으로 간 자식이 고생했다고
면회를 온다
물론 훈련소에서 꼭 올수 밖에 없도록 통보 했겠지만
그때
명대 석진이 부친과
백형이 통닭등을 준비해와
오랫만에 포식을 한 기억이 난다
부모님이 면회와서 돈을 주고간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착취를 당 하는것이다
백령도 자대에 배치되기 까지
진해에서 포항이동시에도
먼저 유혹한후 돈을 거둬 주지 않으면 군가도 못 부르게 했다
포항에서 용산역 이동
인천 해안경비사령부 파견대에서 야간에 괴롭힘
옹진호 여객선 승선
승차책임 선임하사들이 돈에 혈안이든 시절을 겪었다
그들 또한 윗사람에게 상납을 하지 않았겠나
안 그러면 그 좋은 자리를 보전할수가
없을것 아닌가 ?
88올림픽이 끝난후
우리가 자가용을 막 가지기 시작할때
운전면허증 뒤에 오천원짜리 1장 정도는
끼워 두는게 상식아니었나 ?
교통위반에 적발되면
슬쩍 끼워주는게 그때는 그게 미풍양속이었지만
지금은 생각 조차 할수 없게 되었으니
국민의 수준
문화가 바뀌어야 변화도 뒤따라 가는것이다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구조속에
여태 우리는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척결해야 하는게 사회개혁이고
정치권이 할일이지만
작금의 상태가 암울하기만 함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공무원의 부정부패는 반듯이 근절 되어야
마땅하지만
민간사회도 정화 되어야 한다
정의를 가장한 시만단체의 자금집행
대기업 과 중소기업
원도급자와 하도급간에 부정 행위들이
묵인되었어는 앞으로 나아갈수 없다
"와도싸 가도싸"
힘있는자가 와도 싸고 힘없는자가 가도 싸는
이런 문화를 가진 국민성으로는
장래가 있을수가 없다
옛날 이야기 이지만
면직원이 군청에 업무보고차 등청해도
면직원이 밥을 싸야 했고
군직원이 면사무소를 지도방문해도 면직원이 밥을 싸야하는
힘의 작동원리와 마찬가지인 경우다
인간적인 정 의 논리는 없는것이다
동네잔치때 엄마가 일 거들어주러 가면
일부러 자식새끼 불러 귀퉁이에 음식을 챙겨준다
그때 잡체가 맛이 있었다
평소에 못 먹이는것 그때 벌충하는것이다
그런일들은 인간의 본심이기에 하나의 불문률로 묵인
통 하였든것이지만
투명하지 않은 댓가성이 있는 뇌물을 주고받음은
국가 성장발전에 저해요소 일뿐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동물이다
질투 이기심 배신 변덕 속물근성 이중성
원초적 본능으로
어쩔수 없는 본성일수도 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배신도 하고 상황의 유불리에 따라
마음을 바꾸기도 하기 때문에
때로는 인간의 본심을 이해하여야만 할 때도 있다
그래야만 속이 덜 뒤집힌다
나 또한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틀리기도 하여
은혜를 바위에 새겨야 하지만
어쩔수 없이 배신자로 낙인 찍힐수도 있고
상대방의 배신으로 가슴이 터져 버릴수도
미어질수도 있을것이다
생각이라는것이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수도 있고
삶 의 조건이 달라질때 마다
얼마든지 언행이 달라질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당시 선각자가 없었고 주위사람들이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것이라고 감히 이야기한다
우선의 꼿감이 달다고 빼 먹기에 만 급급했다
세상사 주어진 기회는 잘 활용되어야 하는것이다
하지만 복 받은 동네임에는 틀림이 없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둘 넘어 강 건너 이 과수원은
우리 가정사의 온갖 애환이 녹아져있다
땅콩 수박농사도 지었다
수박 먹고간 그 껍데기를
대충 빚어버리고 저녁반찬으로 해 먹기도 한것 같다
익은 수박을 먹고 싶었으나
먹을 만큼 주시지 않았다
팔면 다 돈인데 ...
혼자 있을때 익었을것만 같은것을 따게 보면
생탕 이었다
바로 아까시아 숲속으로 던져 버리기를
몇번씩 하다 익은게 하나 건져지면 그게 행운이었다
중형에게 졸랐다
싫컨 먹어보라고 큰 덩이를 따 온것 같다
그것을 먹고
배가 불러 원두막을 내려오지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
엎고 내려와 물가에 데려다 준 기억도 난다
땅콩은 그렇게 구수할수가 없다
가을에 거두어 지붕에 말렸다가 두지에 가 둔후
겨울에 온 식구가 모여 앉아 껍데기를 까서 팔았다
큰방이 먼지 구덩이가 되었을뗀데
그래도 그걸 모르고 살았다
다 팔지 않고
이듬해 종자를 할려고 광에 보관한 땅콩을 야금야금
훔쳐먹다가 혼줄이 난적도 있다
요만큼 요만큼만 하다가 표시가 날 정도였으니
엄청난 큰일을 저질러 버린것이다
괴수원에는 사흘이 멀다하고 농약을 쳤다
손으로 밀어주고 당기는 분무기로 하다
발동기를 구입하여
피뎃줄로 하니 그럴수 없이 편하고 좋을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발동기가 수시로 말썽을 부렸다
농약을 치다 말고
밀양 농기구상에 가서 고쳐 오기도 하고
세월이 흐르니 백형이 직접 고치기도 하셨다
그러면
멈추었든 기계가 언제 그랬냐는듯 생생하게 돌아갔다
사람도
그 발동기와 같이 일시적으로 고장이 나
멈추어 졌다고 한들
부품교환으로
다시 사용할수 없을까 하는
망상을 해 보기도 했다
사과 한상자(나무)에 천원 정도 받았는것 같다
10원을 두고 다투어
매매 성사가 흐트려지는 경우도 보았다
그때 명대에서 동곡까지 학생 차비가 15원 이었다
명대로 가지 않고 듬들 산비탈로 올라와
무심디미를 거쳐
동화에서 동창가는 신작로에서 타면
차비가 10원 이었다
그 5원을 아끼려고
그 코흘리게 중학생이 부지런히도 걸었다
물론 차액은 눈깔사탕으로 바뀌어 버리지만 ...,
그런저런 생각에
한참을 그자리에 머무니 참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
빠름을 느낀다
본인의 건강관리와 형편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인생에 있어 지금쯤이 ...
고생 다하고 먹을것 많은 풍성한 가을일까
아니면 쓸쓸한 늦가을
또오 그도 아니면 삭풍을 예고하는
초겨울일까
어디쯤 와 있을까... ?
이 강가 가 어릴때 추억의 장소였다
마을 어른들이 물길을 흙으로 돌려 막고
우리는 이를 물 쪼룬다고 한다
그들의 자녀들이
바껫스를 들고 뛰어가면
우리도 눈치를 채고 뒤따라간다
그곳은
완전히 고기판이다
한집에 서너 바께스 씩 잡는다
밀양으로 시집간 누님은
여름날 해걸음에 강가에 가면
잠시만에 다슬기를 한다라이 잡아와 온갖 반찬으로
요즈음으로 치면 그런 호사가 있을수 없다
세상 풍파에 이리저리 시달리는 우리의 삶과 같이
오랜 세월동안 구르고 굴러
반들반들 한 돌맹이들
노는 고기가 휜히 보이든 그 맑디 맑은 물
밤에 불치기로 고기 잡든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휏불을 보고 강가로 나온다고 하니
고기가 많아 여기저기서 잡자는 소리 지르기가 바쁘다
불치기로 잡은 물고기를 팔아
회식을 하기도 했다
여름 둑길은 청년 딸례들의 놀이터 였다
별빛에 달밤은 시내사람이 누릴수 없는
특권 낭만 그 자체였다
장마로 인한 벌람으로 위험을 느껴 주인이 물 건너와 버리면
우리는
동네처녀들 물가에 기다리게 해놓고
헤엄쳐 수박서리 하든곳
수박 하나만 따 오는게 아니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순을 짖밣고 다른 수박까지
다 망쳐 놓는것이다
한해
윗 동무들은 밭 주인의 치밀한 변소(화장실) 검사로
수박씨가 발견되어
밭값을 통채로 물어주기도 했다
서리가 그 당시는 장난이었다
토끼 닭은 물론 달걀
제철에 나는 온갖 과일 말리고 있는 곶감 고구마 감자 옥수수
심지어 잘익은 호박까지도
주인 먼저 맛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것 처럼 ..
시집 보낼려고 맛있게 담그 놓은 김치까지도
흰 쌀밥으로 야식을 해 먹으면 그저 그만이다
그때는
회식이 없고 돼리 라고 하면서
쌀을 거두어
쌀판 돈으로 갈치 싸고 나머지로 밥을 하여
같이 먹는게 그렇게 맛이 있을수가 없었다
라면이 처음 나왔을때
(삼양라면이다)
여학생 딸례들이 물을 적게 붓고 끓여 그 귀하고 아까운것을
먹지 못하고 버린경우도 있었다
그들도 처음 끓여보니 가늠을 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지 상인이 농가로 부터 사과를
구매하여 내일 서울상회로 보낼려고 포장 작업을 한후
은행나무 밑에 쌓아둔것을
우리친구들이 그냥 지나칠리 없었다
사과를 빼 먹고 그 무게만큼 돌로 채웠다
이튼날 당장 발각되지 않기 위함이다
발각되면 그전날 누가 놀았는지 조사하게 되고
시끄러워져
그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상인은 전체 갯수가 맞으니
아무른 의심없이 싣고가 소비자와 매매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사업의 신뢰성에 치명타를 입혀
온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야단법썩을 떤 적도 있었다
나는
공무원 임용을 앞두고 있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겁을 먹었으나
부모님은
집에 먹을 사과가 많은데
가담하지 않았을것이라고 아예 걱정도 하시지
않으셨다
어떻게 무마는 되었지만
무모했고 아찔했다
겨울 고기가 맛이있다
밧데리로 잡아온 꺽둑어 뻥구리를 무우와
버무려 놓으면
천하일품의 민물회다
바닷고기 맛 과는 비교가 될수 없다
쐬주 한잔을 걸치면 이 세상에 남 부러울것이 없다
그래서 동창천 주변 주민들이 디스토마에
많이 감염되기는 했지만 ...
노래방시설이 없든 그시절에 막걸이 마시면서
갱빈(자갈밭)에서 돌맹이로 장단 맞추며 놀든곳이
지금은 수풀로 꽉 우거져 그 흔적을 찿아볼수 조차 없다
과수원 주변은
장연동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있다
호방사람들에게는 지명으로 불만의 소지가 있다
엄연히 호화(호방)땅인데
뜬금없이 왠 장연이냐고....?
취지는 잘 모르겠지만
투자대비 효용가치가 있기는 있는것일까
년인원 얼마나 이용할까
지금도 잡초등 옳은 관리가 되는지 의문스러웠다
갱빈에 물 줄기 따라 둑을 쌓았다
옛날에 우리는 그 하천부지를 백마지기 땅이라고 불렀다
애추(자두)밭도 있었고
과수원 복숭아 밭 이었는데 홍수로 유실이 되어
갱빈으로 변하고
그곳에 제방을 만들어 안쪽은 농지고 바깥쪽은
강으로 만들어 놓은것이다
복숭아 맛은 잊을수가 없다
여름방학이면
괴수원을 평시에는 선친이 잡초를 뽑고 지켰셨는데
명대 장날이면 즐기시든 골패를 하러 가시기 때문에
내가 지키게 되었다
남의 과수원을 거치니 들킬 염려도 없었다
벌건 대낮에
가장 먹음직스러운것을 골라 골라 따 먹을수 있었으니
그 맛을 지금 어찌 재 음미 할수가 있어리요?
둑길에 앉아서
흐르는 강물과 자미산 아래 마을을 쳐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으로 상념에 젖어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찬란한 젊은 시절에
고향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이제는 서서히 스러져 가는게 아쉬울뿐이다
퇴임을 한 지금의 시점에서
지나간 세월도 회상해본다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 까지도
중간학교를 하여 결석이 다반사 였고
대학 재수를 하였지만 마음먹고 공부한적이 한번도 없었다
학교점수가 인생을 결정하지는 않겠지만
많은 장난과 무지와 공부하지 않은 게으름은
지나고 나니 후회 투성이다
농사를 직접 지을수 없고
장남에게 기대어 사는 힘없는 노부모의 뜻을 거역하며
눈칫밥을 먹는줄도 모르고
막둥이가 말썽꾸러기로 엉똥한 길로만
걸어가니 얼마나 속을 썩혔겠나?
동네에서 한목(어머님 택호)댁 막내라면
농댕이로 소문이 날 정도 였다
무위도식하며 식충이 밥벌레였다고나 할까?
71년도 명대들에 농경지 정리를 했다
부산에 고등학교를 다니다
토요일 귀향을 하니
부모님의 몰골이 고된 경지작업으로 말씀이 아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애환과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고
학생의 본분을 지키지 않은것이다
75년 환갑을 맞으셔도
막내가 대학도 들어가지 못 하는 놈팽이 이고
끈을 부쳐 부모로써의 역할도 다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끝네 외면하셨다
79년 군 제대하니
전국민 의료보험(공무원 의료보험 피부양자 등재가
가능했지만 하지도 않았다)이 실시되었지만
노환이라는 핑계로 병원에 한번 모셔가지 못하고
80년말에 아버지 께서
83년도 막내아들이 딸 낳기 사흘전에 엄마까지
유명을 달리 하시니 천하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솔직히
지금 부모님을 뫼시고 있는 친구를 보면
부러움을 느낀다
결론적으로
인생은 정도 바른길을 걸어야한다
그게 진리인것 같다
그게 명품이 되는길이다
그래도
이 만큼은
진사 할아버지의 고손자 로써
집안 내력과 (종)형님들의 위치에 걸 맞게 가려는
일말의 나의 의지와
삐뚤어진 길을 건넌다 해도
결국은 바른길로 돌아올것이라는 기대로
도와주고 격려 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공직생활에 있어서도
인건비등 수십조원의 예산을 집행 하였으나
변상조치가 한껀도 잆었음에
같이 근무한 직원들에게도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공직을 퇴직한지가 어언 5년
공제회 2년 근무를 거쳐 집에 들어앉아 백수가
된지도 벌써 3년이다
퇴직이란 큰 변화였다
퇴직전 알게 모르게 즐겨 들었든 그 달콤한 과장님 국장님의
호칭부터 내려 놓는것이다
사냥한 직원들의 목소리도 이제는 들을수 없다
소위말하는 유통기한이 도과한것이다
진정한 나로 돌아오는것이다
이세상에서
영원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게 행복이란
내가 갖지 못한것은 원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갖고 있는것을 즐기는것 일것이다
좋치않은 기억 마저도
상처로 남길것인가
무늬로 승화시킬 것인가는
오직 나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제는 고민 해야할 숙제도 없다
놓으면 자유요
집착하면 노예다
은퇴하면 설겆이는 하나는 도 맡겠다는
스스로의 다짐 그것 하나도 지켜지지는 않는
삶을 살고있지만 ......
인생에 있어
속도조절도 필요할듯 하다
신호등에서 뒷차가 크랙션을 아무리 울린다 해도
움직임으로 인한 위반에 책임은 앞차가 질수 밖에 없다
주위를 잘 살펴보고
주의를 다 한후라야
위험을 피할수있는것과 같을것이다
옛날의 추억을 더듬기 위해
듬들 뒷소를 걸어보았다
이 길은 동창 동곡으로 가는 지름길로
나도 중학교 다닐때
호방 장연동 학생들의 매전중 통학길 이었다
지금은 차량이 1대 다닐정도로 메꾸어
옛 흔적은 찿아볼수 없고
보 연결 문제 때문에 결국은 차량 통행이 불가능 한데
왜 옛 흔적을 없애고 길을 딱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호방 명대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 있다
이수정 전 문화부장관
이영창 경산청도 전 국회의원이 그들이다
이수정 장관은
경북고 재학중 4.19 기초선언문 작성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자출신으로
5공정부가 들어서자 mbc전무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거쳐
노태우 정부때 장관이 되었고
그 이후 영남대 석좌교수를 지내셨다
지금도 그 사람 땅이 호방 집터로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부인이 김옥숙 영부인과 경북여고 동기동창 이라는
소리가 있고
아들은 국제 변호사라고 한다
이영창 의원은 경찰 출신이다
부산시경국장시 부친상을 당 했는데
대구시경국장조문 화환은 취급을 할수 없었을 정도로
많은 조화가 왔다고 한다
장지와 부산시경간에 직통전화를 바로 설치 하고
매전지서장이 교통정리를
했다고 한다
치안본부장 시절에는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숙식을 할 정도로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었다
국회의원에 입후보 후에는
고성이가 일족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금으로 선거를 많이
도우고 보태었는데
김영삼 정부가 재산공개를 강행하자
많은 재산이 노출되어 배신감을 느끼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부인이 의사이고 오랜 직장생활로
어쩌면 당연할껀데
이해를 할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선되고 난뒤 기대만큼 호응을 하지 못한
서운함의 또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원동 전 청도군수의 가까운 인척으로
재직시 아마도 많은 도움을 받지 않았겠냐는
추측만 할뿐이다
그 당시 국회의원은 시군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군수 본인도 물론 유능했을뿐만 아니라
마음가짐도 바른사람이었다
내가 매전면 병사 업무를 볼때 군청 병사계장을
했으니 가까이서 바라 볼수 있었다
깔끔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전례에 없는 부군수로 자체 승진하고 선출직 군수 까지
역임 할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지금은 명(대)호(방) 양촌에서
내 조카가 행정고시 재경직에 합격히여
공정거래위원회에 재직중이고
명대에도 조카와 초등동기생이 지방고시 1회에 합격하여
국무총리 조정실에 근무하고 있다
두사람 모두가
큰 인물 걸출한 인물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해본다
다시 되돌아 와 다리를 건너
둑길로 쭉 내려가니 곳곳에 여유부지가 있었다
지금도 부지런하면 하천부지 점용허가를 받고
경작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부지런하면 먹고 사는데는 운제가 없을것 같다
하기야 남의집 머슴으로 시작하여
살림을 이룬 사람들이 많다
어디서 떠 내려와 심겨져 있는지
하천 곳곳에 돌복숭아 뽕나무의 오디 열매가 보인다
이건 다 공유다
먼저 보는사람이 임자다
그래도 수확철이 되면 주변 밭주인이 기득권처럼
주장하면 어쩔수 없을것 같다
길명땅이다
그곳에 옛날에는 다리가 없고
배를 만들어 마을 사람들을 싣어 날랐다
물이 깊었다는 이야기다
여름밤이면
그 배는 우리들의 유람선이었다
앞뒤의 줄을 끊어버리고 노를 젖으면서 즐겨 놀았다
홍수가 날때는
길명 동네사람들이 물구경 하러 많이 나와 있었다
집도 돼지도 떠 내려오고 ...
이쪽에서 그쪽이 주인인 땅콩밭에 땅콩을 캐서 흔들며
약을 올려 먹기도 했다
건너 올수도 없는 상황이라 속이 얼마나 울렁거렸을까
우리는 그날 저녁에 땅콩을 삶아 파티를 할수 있었다
조선일보 와 서울 지하철역사에 게재될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종암 시인의 고향이다
그는 부부교사로 대구경북 문인협회 활동도
왕성히 하고 있다
그의 형이 초 중동기생이다
반듯한 친구가 군입대 하기전에
닭서리를 해와 그집에서 볶아먹고 놀면서 환송연을 했다
이튿날 새벽같이 호출이었다
그집 부친이 양심상 도저히 그냥 넘길수 없다며
돈을 주시면서
닭 주인에게 용서를 빌고 갔다 주란다
짧은 생각으로도 말씀이야 지당 하시지만
풀섶을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것과 마찬가지일것 이라는
생각에 미치었다
인간인이상 인간적으로 그 닭값만 받고 말겠느냐
몇년전까지 꼽으로 요구할것이 뻔한게
인간사회의 이치다
하기야
그 어른께서도 갖다 주지 않을수 있겠다는 생각을
아니 하셨을리가 없다
그러나 자기나름의 도리를 다하고 싶었을것이다
그 친구는 당나무에 무사귀환을 빌고
닭값처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채 입대했다
그 닭서리 했든 동네가 바로 이 동네다
그 친구는 봄 가을이면
몸 보신을 위하여 개 염소를 번갈아 먹어면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받든 부잣집 아들이다
서울에 일류대학을 나왔다
근데 지금에 와서 비추어 보면 솔직히 오십보 백보다
오만한 생각일는지는 몰라도
실제로 그에 비해 조금도 초라하게 생각지않는다
축산업으로 넓은 땅을 차지하여
부자는 되었겠지만
쇠죽과 매일 젖을 짜야 하기 때문에
고향친구 모임에도 참석치 못할 정도로
얽매여 산다
물론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생각이 다를것이기 때문에
어느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는 분명 아닐것이다
남양 애암 마을 입구에서도 그랬지만
이곳도 낚시꾼이 텐트를 쳐놓고 장기 투숙하는듯 한
양식없는 행태가 눈쌀을 찌푸리게 만든다
쓰레기도 치우지 않고
지저분함으로 경관을 훼손시키고 있다
지나가다 보니 용암고시원 간판이 보인다
지금은 이렇게 쳐박혀 공부하는 시대가 아닐듯 한데
정보를 교환하고
노량진에서 컵밥을 먹으면서
서로간에 경쟁의식을 느껴야 만이 자극을 받아
목표를 이룰수 있을것 같은데 이해하지 못할부분이다
그, 옛날에는 사찰(절 ) 재실등 에서 고시 공부를 했다
고방앞에도 산에도
밭 농사가 그렇게 많은줄 몰랐다
농촌 인구가 줄어 농사지을 사람이 없을껀데
밭은
어찌 그리 많은지..
고방 마을은
2~3집으로 이루어진 산 마을이다
무엇으로 먹고 살아가는지가 옛날부터 궁금했다
옛날에 밤나무가 빼꼭이 들어차있었다
그때는 수익이 있었는지 모르나
지금은 밤나무 자채가 거의 없는듯 하다
수십년전의 이야기다
자가용 이 생기고 야외 나들이를 다니기 시작할때
간김에 꿀밤 밤을 주워 오기도 한다
타지 외지인들이 밤을 주워가면
밤나무 주인인것처럼 행세 하고 모조리 뻿아 온 기억도
있다
그게 객지인에 대한 고향민의 권리라도 되는양
못된 짖거리다
집단의 사고방식은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게 뺏는일도 혼자라면
어림도 없을 일을 단체는 서슴없이 저질러 버리는
경우 일수가 있다
멀쩡하고 예의바른 사람도
예비군복만 입으면 술한잔 먹고 총 꺼꾸로 차고
행패 부리는 경우와 같다라고 할까
하천에는 골재 채취가 한창이다
가래로 가는길이 연결이 되어있지를 않아
새들보를 건넌다
이곳에도 옛날에는 수심이 깊에 명대사람들이
목욕을 하든곳 이건만 지금은 발밑에도 차지 않겠다
동네로 들어서니
중학교 동기생 형님의 축사가 보인다
대단지다
맨몸으로 들어와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사육과 출하하는 방식이 남다른다는 소리를 듵언적이 있다
우리친구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어렵게 자라 큰 성공을 이룩한 사람이다
그가 이룬 성공의 진실된 사실까지도
아부가 되고
희석이 되어 찬란함에 오히려 누를 끼칠까 두려움에
표현을 다할수 없음이 안따까울 뿐이다
인간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손톱에 기름때를 묻혀가며 열심히 살아온 노력의 댓가다
초심과 펑상심을 잃지 않는 상식적인 판단까지
친구라고는 하지만
속으로는 존경의 마음까지 기지고 있음은
숨기지 못하는 사실일는지도 모른다
아첨이 될까봐
조심스럽고 표현을 다 할수 없음이 다만 안타까울 따름이다
원앞으로 들어가는 길쪽으로는
딸기농사를 짖고 지금은 미나리 출하로 손길이 바쁘다
바로 옆 마을이라도
이런 수확을 하는지도 여태 모르고 있었다
커브를 틀어 용전쪽으로 조금 내려오니
명대 재실이 보였다
그 옛날에는 재실에서 고시 공부를 했다
내 종형도
명대 재실에서 서울대를 졸업하고 외무고시를 준비하든
국민학교 동기생과
사법고시에 메달렸다
요즈음의 로스쿨과 달리 그때는 한해에 몇명을 뽑지 않는
임용시험이었다
형님 말씀이 그때 외무고시를 준비하든 친구는
잠자는 모습을 한번도 구경하지 못 했다고
생전에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항상 친구가 늦게 까지 공부하고 일찍 일어난다는 말씀이셨다
그기서 이미 합격 불합격 여부를 엿볼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부를 하다
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때는
날랜 육상솜씨를 뽐내 주시든 기억이 새롭다
바둑도 초 일류로 인근에서 대적할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선친께서도
바둑을 좋아하시어 밑에 이발소에서
우연히 두어 보시고는
"그놈 공부는 안하고 바둑만 두었나"라고
말씀 하셨단다
유머와 y담에도 대가셨다
젊은 질부들 앞에서도
자연스러웠다
그때는 그 두분이 인근 동네 젊은 사람들의 로망이었다
외무고시를 준비하는 분은 합격하고
여러 나라 대사를 역임한후
외교안보연구원장 등 꾀 높은 외무관료로
퇴임한것으로 알고 있다
종형은
판검사의 꿈은 이루지 못 하고
제1회 군 법무관 시험에 합격하여 공군본부 법무실장을
끝으로 대구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여
화려한 언변 으로 유명세를 날리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변호사 업은 명맥만 유지하다
재 작년에 작고 하셨다
이루지 못한 판검사 꿈은 작은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에서 변호사로 개업 활동중이고
사위가 서울중앙행정법원 부장판사로 대신하고 있다
솔정나무가 있었든곳에는
그 흔적은 찿아볼수가 없고
이운용장군이 쉬어가셨다는 표지판만 덩그러이 놓여 있었으며
주위에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해일 농장이 보였다
성씨가 다르고 고풍이 센 보수적인 마을에 들어와
어려움이 않았을껀데
감말냉이 버섯재배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 기업인인듯 하다
그분은
명대에서 호방으로 나가는길에 상점을 하든
이승복씨와 내고종간이다
대구 집값이 천정부지로 뛸때
공동투자로 인한 수익발생 부분을 놓고
크게 다툼을 벌였다는 소리를 들었는적이 있다
이재에는 밝은분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더 내려오니 태양광 발전 시설이 보였다
수해로 곤욕을 치루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잘 꾸며져 있었다
우리나라의 일조량으로는 수지타산이 맞지를 않다고
하든데
처음 투자한 사람은 돈 벌이가 되었다고 한다
한전에서 금액을 후 하게 쳐서 매입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매입단가가 저렴하여 신통 찮은모양이다
산지라도
일정기간이 종료되면
잡종지로 지목이 전환 되어 주택을 지을수 있는
혜택이 주어진다고 한다
지가 상승의 효과까지 받게 되는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원전을 스톱시키고
풍력 조력등으로
에너지를 공급시키는것은 맞지 않는다고 본다
아무리
친환경을 생각한다지만
경제성으로 비교가 되지 않은일을 저지르고 있다
세계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장동력에 자해 행위를 하고 있는것이다
전기료 인상이 불가피할껀데
그러면
가정도 문제 이겠지만
산업 공장들이 비싼 전기세로 외국기업과 경쟁력에서
뒤 떨어질수 밖에 없는게 현실이라
결국에는 국민의 부담으로 되 돌아오는건데
그때는 땅을 치고 후회해본들 이미 때 늦은일일뿐임을
어쩌하랴
민초가 고차원의 정치를 어떻게 알수 있으련만 ...
이 단계에서 한 발자욱만 앞으로 더 나아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세대가 큰 혼란없이 위기를 지나갈수 있었어면
좋겠다
조상들이 겪은 임진왜란 6 25사변등 전란을 따지지 않드라도
우리세대가 겪은 lmf환란
경제에 어떤 결말이 날지 예측이 되지 않는 코로나 사태
백신이 생산되는 2~3년전까지는 해외여행을
갈수 없을것이라는 이야기가 이미 나오고 있으니
당장 피해가 우리세대에 당면하고 있다
한해라도 나이를 더 먹으면
해외여행 이 곤란할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유적답사 여행이 멈춰버린것이 아쉽기만 하다
또한 퍼주기 경제정책의 종착역은 어디고
결과는 어떻게 전개될까 ?
기금은 바닥이 났는데
수당은 더 지급하겠다고 날리법썩이니
참으로 모순이다
나라의 곳간 걱정은 아랑곳 없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재난지원금 논쟁에서
인간의 심리 상태를 충분히 엿볼수 있다
더 많이 갖기위해 작은일에도 흥분하고
서로를 마구 할퀴면서 분노와 증오를 내뿜는 행위들은
보수와 진보 계층간 양극화를 떠나
서로에게 종말을 촉진할뿐이다
근본적으로는 남과 비교하지 말고
세상이 공평하지 않음을 알아야
인생이 공평해질수 있을것이다
이 혼란스러움 또한
살아가는 과정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무난히 잘 극복될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용전마을로 곧장 이어지는 당끌마을이다
여기까지 가 명대 동네라고 들었다
조그마한 다리 하나 사이에 명대 용전이 갈라선다
용당골 가든이
눈에 확 띠었다
점심때가 되어 시장끼가 완전했기 때문이다
어쩌랴
금일 휴업이라니
이것도 코로라덕분일까 아니면 한적한 시골에서
주말이 아니면 안되어서 일까
어쩔수 없이 그집 평상에서 쉬기도 하고 과일등으로 점심을
떼울수 밖에 없다
용전마을이다
아줌씨들이 다슬기 주워 세탁기등 전자제품 싸고
자식들 대학 보낸다고 했다
그 만큼 다슬기가 풍부한 물길인가 보다
초등 친구의 사촌동생인 이상길 농수산부 차관의
고향마을이다
그 형제분들도 대단하다고 들었다
없는 살림에 고무신 찔찔 끌고 서울 올라가
감사원에 근무하신분도 있고
소위 말하는 출세한분들이라고 한다
조금을 더 내려오니
식당이 보인다
영어로 open이라고 불빛이 들어오기에 반가웠다
동강 어탕집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말일듯 하다
이미 시장기를 달랠만큼의 요기는 했지만
밥은 밥이다
주인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동화 박순태친구가 외사촌 형님이라고 한다
세상이 참 좁다
공직에서 퇴직하고
운문 금천 매전 다 둘러보고 경치가 좋아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민박도 가능 하다고 하니 다음에 기회가 있어서면 좋겠다
가래로 건너가는 보를 물으니
기억조차 못 한다
되돌아 와 골재채취장 주변으로 강을 건널수가 있었다
옛날 물레 방앗간 을 근처를 지나간다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정미소를 한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안되고
유서깊은 사연을 몰라 아쉽기만 하다
그 장소인지는 모르지만 주택이 들어서 있다
초딩 친구의 친정집인데 그집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건너다니든 보는 흔적도 없다
골재 채취가 아니었으면 도로로 걸어야만 했을것 같다
집이 잘 지어져
가까이 가보니 성원사 절이었다
위치가 멋지다
뒤는 산이요 앞은 물이니 ...
맞은편 강건너를 보니 괴목정이다
옛날에도
그 산골을 막아버리면 댐으로 적합할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만큼 이 산꼭데기에서 저 산꼭데기로
장대 하나 걸치면 다다를 만큼의 산 과 산으로
맞 닿아 있는곳이다
논농사는 거의 없고 전부가 밭이다
멀리 큰 공장이 보인다
감말랭이 공장으로 규모가 꾀 크다
가래 마을이다
이곳은 영남대학 총장을 역임한 이효수씨의 고향이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 같이
조순 (경제부종리 역임)학파의 수제자로 유명한 분이다
또한
이승계 변호사의 고향 마을이기도 하다
고려대 법대를 나와
면사무소 방위로 근무하기도 했다
사법고시를 합격하여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향토판사(일명향판)로 임용되어
대구지방법원 경산지원장등 여러 지원장을 역임했다
교육청에 근무할적에
공유재산 분쟁껀으로 찿아가면
성심성의껏 자문 해주시든 인자한 분이셨다
쭉 내려와 다다른곳이 내동마을이다
이곳에 중남교회가 있다
강건너 교회라니
선구자들의 혜안이 남 달랐는든것 같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안 내동이다
안 내동은 길명과 고개를 사이에 두고있다
총각 처녀들이 정상부근에서
데이트를 즐겼다고 하나
사랑을 더 키워 결혼 여부까지는 알수 없다
오른쪽으로 나오니
옛적에는 논길이었는데 큰 도로가 놓여져 있다
중남국민학교에 가 보았다
인구가 줄어드니
어쩔수 없이 폐교가 될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경북에는
학생숫자가 교장 나이보다 많으면 큰 학교라고 한다
그것도 다 문화 자녀가 많이 차지하여
생활지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다
우리가 다닐때는 한학년에 두반씩 한반에 60명이 넘었다
저출산 고령화가 사회문제이건만
정치권에서는 말만 심각하고 대책은 없다
대책이라고는
돈 퍼주기인데 그게 표로 연결되니
다른 정책은 염두에 두지 않음일까 ?
돈이 연결되지 않은 사업이 있을까만
개인에게 퍼 주는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일것이다
폐교가 된 학교에는그곳에는
청도반시농촌쳬험관광센터로
탈바꿈하여
잘 링모델링 하였으나
관리상태로 볼때
이 또한 제 역할을 다 하는지가 의문스러윘다
인건비에 운영비등 예산만 낭비한다면 낭패다
한두군데가 수십군데가 되고
그게 국가 전체적으로 펄쳐져 있다면 엄청난 낭비다
다시 되돌아 나와
물길을 따라 걸으니 지수와 구촌 삼거리다
산길로 가면 근티 마을 송원동 이고
다리를 건너면 구촌마을이다
우리가 초등학교때 소풍 다녔든 구촌 숲은
옛날숲이 아니었다
전원주택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잘 다듬어진 잔듸
주말에 좋은공기 쐬며 즐기는것도
인생을 풍요롭게 살찌우는 길임을
잘 알지만
그런 부를 누릴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돠나?
둑길을 쉼없이 걸어내려 오니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동상이라는 팻말이 보이긴 하다
제방은 튼튼하게 잘 쌓여져 있고
제방 안쪽에는 농사를 잘 가꾸고 있었다
그것이 낙동강연안개발사업으로 마음놓고
농사를 지을수 있도록 만들어준 덕분이다
이런게
우리나라의 저력일것깉다는 생각도 든다
누가 보나 보지 않으나
묵묵히 자기의 역할을 다 하는것
그게 진정한 삶이고 인생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고 돌아가는것은 제 역할을 다 하기 때문이다
건너갈수가 없다
다리가 놓인곳까지 갈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군데 군데 전원주택으로
가까이 가 그들의 삶을 직접 대면 해보면
어떨는지는 알수 없으나
정말 좋아 보인다
도시에서 치열하게 열심히 살다
은퇴후에는 전원주택 하나 갖는것도
멋드러지게 살아가는 한편의 인생일듯도 하다
큰 꿈이 아닌듯 우리 모두의 작은 소망이라면
이루졌어면 좋겠다
국민소득 수준에 따라
골프 승마 요트의 단계가 있듯이
선진국 유럽을 따라 가는것이다
이단계에서 한두계단 만이라도
온 국민이 총력을 기울려 띔박질 했어면 좋겠다
정말 간절히 바래본다
그러면 남 신경쓰지 않고 각자의 일에 충실하며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즐길수 있는것이다
덕정다리를 건너
둑길로 곧장 걸었으나 더이상 둑길이 연결되지 않아
큰 도로로 나오니
매화관광농원 캠빙장이다
이 또한 경제가 활성화 되어 잘 돌아가면
성업을 이룰껀데
경제가 사회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으니 정말 걱정이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데
도로가로 나오니
매전면 맨 끝지락이다
신곡리 입구 표지판이 보인다
청도 신화랑 에코 트레일 4코스 소나뭇길 안내판에
솔향기 쉼터 까지는 4.4키로 라고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걷기로 한다
다음은 이곳에서 진늪숲까지까지다
아마 사촌을 지나 유천을 거치면 먼거리가
아닐듯 싶다
둑길을 걸어면 강 이쪽은 청도읍이고
강 건너는 경남 밀양 일듯 하다
원래 인간은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게 사람이라고 한다
최대한 솔직담백하게 표현하려고 했다
당당함으로 미움을 받고
인간으로써 부족한 부분은 생각이 올바르지 못한 부분은
많이 꾸짖어 주면 달게 받아 드리겠다
이 글들이 내 개인의 카카오스토리에
고스란히 남겨지기 때문이다
동곡에서 유천으로 오는 마을뻐스가 오후 4시반
이었으니
5시가 다 된 지금쯤 올때가 되었다
청도로 와서 의성식당에서 추어탕 한그릇 똑딱하니
6시에 대구로 가는 기차가 기다린다
날을 잡다보니 미세먼지가 많은 하루였다
산이 뿌였기에 송홧가루가 날리는줄만 알았는뎨
미세먼지 지수가 200을 오르내린다
볕은 약간은 따갑지만 바람이 달았다
묵묵한 성찰이었다
하루 여행을 이렇게 멋스럽게 마칠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집에 도착하니 마눌님이 묻는다
요즈음 우울한일이 있느냐고?
꼭 그럴까?
[예종주] [오후 8:17] 승욱이 친구 작가로 등단해라
여느작가보다 글솜씨가 월등하다
대단한 필력이다
잘 읽고 있는데 문득 옛생각이 많이 나더라....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이상관] [오후 9:45] 승욱이 친구 좋은글
단숨에 잘읽었다 옛날추억을 되살려 볼수있어 고맙다 대단하다 자랑스럽다 작가의 소질이 넘친다 책을내면 바로 구입할께ㅡ
[이석진] [오후 9:53] 교육장 친구 덕분에 옛추억도 되살리고 고향 역사도 더 알게 되었네 장편의 글이지만 끝까지 읽을만 하였네 감사^^ 나도 전번주에 집사람과 명대서 호방다리 거쳐 둑길따라 아카시아 꽃향기 맡아가면서 동창 남경매운탕 까지 한시간 반 산책했다네~
[이미형] [오후 10:43] 승욱이친구 덕분에 매전 고향 동네 구석구석 안가본데없이 민경으로보듯 옛추억을 되세기며 귀경한번 잘했다 .
친구야 고맙고~애썼다.
어쩌면 이렇게 글 재주며 총기며 하나도
험잡을데없이 잘 썼을까싶다.
진짜 대단하데이~^^
[이경숙] [오후 10:54] 친구 덕분에 고향 구경 참잘했어요 옛날생각이 어제일 같으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하루 즐거웠어요
2020년 5월 16일 토요일
[김진영] [오전 7:34] .
[박영애] [오후 11:04] 승욱 고향이 내 고향이라 내고향 답사기이네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 몇번이고 입이 귀에 걸릴려고 해서 키득키득 웃었다.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유홍준님 짧막한 글이 떠오르네.
승욱 친구야 긴~글 참 고맙다
잘 읽고 간데이~
[박영애] [오후 11:11] 우리동네도 지나갔네 다음에 또 오시면 차 한잔 하고 가시게 승욱 친구야~
[예종주] [오후 11:26] 진솔한 승욱 친구의 답사기는 우리 모두의 공감을 이끌어 내고 한편으로는 현실에 삶에 이끌려가는 입장에서 보면 한없이 부럽기만 합니다
아무쪼록 친구야 회고록 내도록 해라
꼭 유명한 잡놈들만 내라는 규칙이 있냐
마음에 와닿는 글이 최고입니다
🎀🎀🎀👍👍👍👍👍
2020년 5월 17일 일요일
[이승욱] [오전 6:14] 친구님
가난한 글 졸필 이었습니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편견을 두고 싶지 않았고
아울려 진솔할려고 힘을 기울렸습니다
과찬의 말씀에 몸둘봐 모르겠습니다
이젠 그만 띠워 주시지요
그러다 추락하면 어쩌지요?
공감 해줄수 있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게 고맙지요
부끄러워 어쩔줄모르겠으니
그냥 그냥 없었든일처럼 지나칩시다
우리모두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았든 시절
그것을 떠 올려 보기 조차 싫은 친구도 분명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또다른 여러가지 사유로
꼴보기 싫다는 생각도 분명 있을껍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니 깊으신 아량을 바랄뿐입니다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을까
불편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라는 문제로
솔직히 상당히 조심스러윘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괜히 글을 올려서
톡방만 귀찮게 하여 미안할뿐입니다
격려와 채찍질로 알고
앞으로는 겸손하고 삶에도 성심을 다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가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기를 소망드립니다
[김상구] [오전 6:57] 승욱친구의 박식한글에 감동이다.
어디서 그런 유능한
묘미의 글들이 거미줄처럼 줄줄 나오는지 다시 한번더 올려보여지네
버스만 타면 배꼽잡는 유머들이
친구의 무한한 재능에 다시한번 감동 받았네~~~
작가로 등단하여 좋은책하나 냈어면
(최고)(최고)인기 폭발의 베스트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전기자] [오전 7:16] (최고) 나역시 승욱친구의 줄줄나오는 글 솜씨에 큰 찬사을 보냄니다 그리고 또 다시 동심으로 돌아 갈수있어 좋았습니다 읽는동안 내내 향수에 젖어 습니다 참 좋은 글귀에 너무 감사을 드립니다 친구의 글을 읽고 우리친구들이 모두가 똑 같은 마음이라 믿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다음 또 기대을 하겠습니다~~~
[정연구] [오전 7:38] 승욱 친구 감동 감동이네!!!!
옛날 우리 어린시절 생활상을 뚜렷이 기억하니 대단하신 친구네 앞으로 좋은 글 부탁하네~~~
[이승희] [오전 7:42] 앗싸~~~
울친구들 잘한다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보내는날 되시길 바라면서
~평화~
[이승희] [오전 7:43] 기대한다 승욱씨
[전기자] [오전 7:45] 행복
[박표영] [오전 8:08] 승욱친구야
우리 친구들 모두의 어릴적 고향을 생각하는 멋진글이네
괜히 하는말이아니고
진심으로 감동을받고 하는 친구들의 맘이니 너무과찬이고 그냥 띄우는말들이 아니니 앞으로도 종종 우리카톡방을 사랑해주길 바라네 친구야
[이승동] [오전 8:13] 역시 이 교육감님 이셔^
향토문학가 영애와 함께 중앙무대로 진출하시길 고대!!
수고와 감사♡
[이명숙] [오전 9:55] 승욱이친구 놀랍고놀랍다 장편글쓴다고
고생했다 끝까지읽어보니 너무존경스럽다 우리 친구들 다 건강하자
2020년 5월 18일 월요일
[이순애] [오후 12:57] 친구들 코로나 19 여파로 어떻게 잘 극복 하고 계시는지요.
요즘은 조금 이나마 안정기에 들어 마음의 여유로움이 생길거라 생각 됩니다.
친구들 외출 하실때 마스크는 꼭 착용 하시고 조심 하시길 바랍니다.^^
친구들의 재미 있는 글을 읽을 때면 항상 마음 속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승욱 전회장님께서 정성껏 수필 1권을 우리 친구들에게 선물 해 주셨는데 읽고
그냥 지나칠 수 가 없기에 저도 훌륭한 친구의 글 솜씨를 칭찬 해야겠네요.
저번에 1편에서는 재미 있게 읽다가 내용이 짧아서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는데
이번 알찬 내용 으로 긴 완결판이 연재로 만들어져 재미 있고 (공감.감동.)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달콤하게 꾸며진 소설책 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음 제 3편을 기대 하며~~~ 그동안 훌륭한 글을 준비 하기 위해 버스 타고 매전면 기행을 무사히 마치신 이승욱친구 수고 많았습니다.
친구들 요즘 처럼 어려운 시기에 힘 내시고 항상 건강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