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말,송초의 8세기 후반에서 10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중국사에서 커다란 획기이다. 이것은 일본의 內藤湖南이 당송 사이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변화상을 지적한 이래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변화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이 변혁의 역사적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통일된 견해가 나오지 않고 있다. 내등호남을 중심으로 한 경도학파가 당송변혁을 근거로 송 이후의 시대를 근세라고 주장하는 데 비해, 前田直典을 중심으로 한 동경학파에서는 당말까지는 고대이고 송 이후의 시대는 중세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여러 견해들이 분분하나, 당송간이 하나의 큰 변혁기라는 점은 틀림없다.
당송을 경계로 한 사회의 성격을 달리 보는 입장들이 있으나, 그 변혁의 시작은 대개 안사의 난에서 비롯되었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安史의 亂(755-763)은 중국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다 준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다. 안사의 난으로 계기로 정치면에서는 당의 귀족정치가 몰락되고 부병제가 붕괴되면서 당말 오대의 번진형세를 이루게 되고 사회경제적인 것으로는 부병제의 붕괴와 동시에 균전제의 토지제도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난후 양세법이 실시되었고 이와 동시에 호적의 문란, 도호의 증가, 이민족 번진의 등장 등을 볼 수 있다. 이 난으로 당전반기까지의 사회 모순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사회적, 제도적 조치가 취해지면서 전반적인 사회의 성격에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안사의 난의 배경,원인을 고찰하는 데는 이전부터 여러 견해가 있었으며, 많은 연구자들은 당시 사회의 여러 모순 현상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특히 卞麟錫씨는 안사난을 이민족의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안사난의 배경을 Nomadism의 복귀 에서 찾고 있다. 이 글에서는 안사난의 원인을 보는 여러 견해과 그 중에서 특히 변인석씨의 노매디즘 복귀설에 대해 주로 정리해보고, 또한 안록산의 난의 형성,전개 과정을 이족의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安史亂의 原因
1.安史亂의 原因에 관한 諸見解
(1). 奸妄邪智說
전통적으로 중국사에서 인물평가의 기준이 불분명한 자에게는 흔히 奸惡邪智 니 奸妄邪智 라는 표현을 가하곤 한다. 安祿山 역시 이같은 평가를 당하는데 이는 중국 사서가 정통성에 입각하여 반역자에 붙이는 일방적인 혹평이다.중국 사서에 보이는 奸妄邪智 , 狡힐 , 癡直 , 奸謀 등이 지닌 의미는 雜胡출신으로서 중국 문화에 접촉할 때 부정적으로 비추어진 질시가 가득 차있는 편견으로 보게된다. 즉 그는 간망사지에 능하여 처음부터 異志를 가지고 장안에 드나들었고 劉駱谷으로 하여금 京師에 머물게 하여 조정의 정보를 염탐케 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사서에는 왕조에 대한 역모가 근본적으로 부인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2). 天德說
天德이란 천자의 덕치를 강조하는 말이다. 이러한 덕치에서 볼때 현종대는 開元(713-741)과 天寶(742-756)로 나뉘어진다. 개원은 당의 盛世가 최고에 달한 시대로 정관시대와 비유되기도 한다. 개원은 재상에 있어서도 宋 璟,張九齡 등이 있었고 또 현종이 韋后를 몰아낸 女禍의 宮中肅淸과 더불어 개혁적인 신세대의 분위기가 가득한 가운데 등장하였지만, 천보는 그 자신이 환락에 빠져 궁중의 人幕에 가리게 되었다. 이 때의 재상은 李 林保,楊 國忠이었다. 이런 생활은 그를 안일하고 소극적인 태도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당은 안으로는 宦宮이 전권을 담당하고 밖으로는 번진이 발호하여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이같은 현종 천보대의 정치 상황은 천덕과는 상치되는 것으로, 현종이 천덕을 잃음으로써 쇠망의 길로 가게 되었다는 천명사상 이다. 현종 정치의 부패가 안사난의 배경으로 고찰되는 데는 현종의 失德,이임보의 정치, 양국충의 專橫 등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데, Pulleyblank와 谷川導雄은 李林甫와 楊國忠의 정치배경이 되는 대립적 상황을 분석하였다. 그것은 아마 資治通鑑 등에 비치고 있는 안사난의 禍源을 이임보의 외인기용책 에 돌리는 정치적 배경에서 풀려는 문제로 여겨진다. Pulleyblank는 安祿山事跡 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안록산의 叛擧에 따르는 소외 및 알력을 양국충과의 관계에서 분석하고 있다. 정치부패가 지주와 농민 사이의 알력을 심화시켰고 백성들에 대한 착취를 조장하여 마침내 군벌의 混戰,외족 침입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종래의 해석이다.
(3). 節度使禍說
절도사가 禍源으로 이해되는 것은 舊唐書 와 卄二史箚記 에서이다. 당의 지배질서를 파괴하는 데 절도사가 역할이 컸으며, 즉 변경절도사의 확대가 문벌귀족제도의 몰락과 부병제의 파괴를 촉진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부병제는 西魏大統에서 시작하여 唐天寶에 폐지되었다. 그 원칙은 징병제, 내중외경의 편재 등으로 그 주요 임무는 숙위였다. 당초에는 거의 전국적으로 설치되었으나 현종대에 와서 이것이 적극적인 외정으로 인하여 절도사의 용병화로 변질되었다. 당초의 총관은 외족의 征討를 위해서 수시로 설치한 장군이고 도독은 상설의 군관구의 장관이다. 장군은 군사적인 정벌을 주로 하고 도독은 병사의 훈련과 軍需를 주로 하였다. 고종 이후 도독대사가 節을 가짐으로써 절도사의 직권이 커졌다. 唐會要 에 의하면 절도사는 대총관과 도독의 직권을 종합한 것이라 한다. 후에 절도사의 군벌화는 더윽 가속화되어 마침내 안사난의 화근으로 발동되었다.
(4). 統治內部의 모순설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을 지적하고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것은 마르크스 사관에 의거한 성과가 주로 있다. 정치 대립설에는 陳寅恪에 의한 관롱집단과 신흥 귀족의 대립이 있다. 당고조대의 정치지배집단인 관롱귀족이 태종대로 이어졌으나 이후는 측천에 의해 큰 대립을 보게 되었다. 그는 과거를 통한 신흥 관료를 기반으로 구세력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천보10년(751)부터는 무후 이래 와해된 관롱세력이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는데 이들 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나타난 것이 안록산의 난이라는 것이다. 대립이 심화되어 안록산은 양국충의 토멸을 명분으로 삼게 되었다. 이 점에서 안사난의 召亂은 양국충에게 돌리는 견해도 있다.
전백찬은 당수의 양조가 위진이후 귀족이 가진 선거제를 폐지하고 과거제를 채택함으로써 많은 보통지주,상인의 자제가 과거 출신이 되어 구귀족 관료와 대립하자 붕당이 생겨나고 이권 쟁탈의 풍조가 일어난 것을 안사난 발생 이전의 정치배경으로 보고 있다. 그는 현종 개원대를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이 격심한 시기로 보고 천보시대는 이 모순이 폭발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안사난을 제국 쇠망의 기점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로부터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이 일발하여 수급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韓國磐은 당조 통치자들이 한족이외의 각족에 대한 우대가 전대의 봉건왕조에 비하여 개명하였지만 종족의 岐視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근거로 舊唐書 券 106 李林甫傳을 들고 있다. 그는 안사난의 원인을 계급모순의 심각화, 종족 기시를 들고 있다. 이들은 사회의 변화를 사회 내부의 모순 즉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 계급간의 모순, 新舊간의 모순 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다.
(5)治亂대립설
奚 風이 안사난을 당조의 할거세력인 지방번진세력과 중앙세력간에 일어난 종족 투쟁으로 보는 까닭으로는 전쟁 중에 행한 쌍방의 잔폭한 屠殺 을 들고 있다. 林連은 정치부패와 종족의 질시가 일치될 때는 종족 투쟁의 반란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岑仲勉은 敵我 의 입장에서 중국의 군사행동과 민족압박을 중시하였는데 안사난은 바로 이점에서 이족질시가 원인으로 되고 있다고 하였다. 안사난은 사회적 모순의 기초위에서 피압박소수민족과 당정, 지방과 중앙의 모순이 노출되어진 것으로 보게 된다. 즉 당통치계급내부의 대립은 지방번진의 할거세력과 중앙세력의 투쟁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2.노매드 복귀설
종족 대립설과 노매드 복귀설의 차이는 대립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대상에 있어서는 노매드 복귀설이 중국 영역으로 들어온 內徙民을 주로 해서 말한다면 종족대립에는 종족간의 알력대립을 넓게 포함시킨다고 할것이다.노매드 복귀설은 대립의 근저에 유목주의가 깔려지는 本俗으로의 회귀를 살피고 있다. 雜胡의 중국대립에는 이들이 이족본위주의(Nomadism)로 복귀하는 데서 종족대립이 파생된다. 五胡의 민족이동을 기준으로 할때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어느 정도 개화된 잡호에 의한 변형이 降胡徙民의 복귀적인 전개로 나타난 것이 노매드 복귀설이라고 할 수 있다.
異族이라 할때 오로지 밖의 상황으로만 생각되는 것이 아니고 중국사의 내부에 내장된 이족들의 내부전개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족 문화의 내용과 잔영, 제도창출의 사회사적 배경, 토지개발과 사민, 토지문제와 邊叛 이외에도 이족과 중국사의 분립이라는 측면에서 내부전개가 큰 비중을 갖는다. 안사난을 이른바 胡亂으로 규명하는 데는 안사집단의 구성에서만이 아니라 삼수降胡의 徙民이라는 측면에서도 종족대립이 격화되었던 것을 볼 수있기 때문이다.
노매드복귀설은 이족관점에서 출발한것으로 7개의 가설을 두고있다.
1.동화상의 미분해 이족의 복귀설
2.당사의 주류와 이족과의 수평발전
3.남북중국의 양속적인 교차지로서 잡거지, 잡호의 설정
4.남북을 교합하는 주도적 매체로서 잡호집단
5.잡호의 동화상의 개념과 시대사 속의 영속성
6.교차지를 중심으로한 다원대립
7.양속성의 교환적 매체작용 및 역할
이것은 시대발전에 따르는 구분론과는 다른 것이지만 4세기 민족이동에서 당 중기의 안사난까지를 묶는 하나의 시대영역에 있어서는 이족의 離巢性的 전개와 이족의 歸巢性的인 복귀의 전개로 이어지는데서 한의 주기적인 파악이 된다. 이족이 비록 사민을 통하여 동화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본래 수초를 따라 이동한 유목생활에서 조성된 본속으로의 복귀를 중국사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지만 주변관계사의 입장에서는 忽視될 수없는 것이다.
위진오호의 민족이동과 안사난 이후에 오는 당말 오대의 이족의 전개는 하나의 주기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비록 수당의 통일이 이걱의 정지를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문화적으로 종족적으로는 호,한의 융합에서 미분해되는 이족의 복귀를 드러내고 말았다. 당말오대는 이족전개의 세계인데 이 난세를 개단한 것이 안사난이다. 즉 당말, 오대 이족의 내외적인 소요는 모두 노매드의 복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사난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큰 것이라고 한다면 이같은 사건의 기인이 무엇이며 이것을 전후로 하는 시대성격이 노매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는 위진오호의 민족이동과 당말 오대를 하나로 묶는 데서 시대상황의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안사난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은 중국사 안으로 들어온 이족이 그들의 이족주의,노매디즘으로 복귀되는 데서이며 또 이러한 복귀는 당말, 오대와 연속되는 것이다. 노매드의 복귀는 중국을 분국적인 군국으로 만들었고 이후 송의 통일로 노매드의 전개는 중국 내에서 건설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안사난의 형성을 융합이라는 당사와 연결시킬 때 잡호의 개념을 중요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중간잡호지가 중국사에서 등장하는 것을 당의 중기로 보고 이것의 해석이 굳 바로 안사난의 원인과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 된다. 중간잡거지의 해석을 문화적인 배경 위에서 또는 시간의 역사성과 공간적 결합 위에서 주목할 때 하나의 역사적 사건과 접근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역사를 치난설로 보아왔기 때문에 안사난은 당대 성쇠의 분기령이니, 성쇠전환의 추기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남북중간의 잡거지 란 사서에 나오는 그대로의 용어인데 이의 범위는 특정한 지역에서 양속성을 지니는 것이며 결코 띠로 묶는 지대는 아니다. 하북만 하더라도 범양,평성이 정치,문화,사회,경제에서 때로는 독립성의 분립적 경향을 나타내었다. 양속성이 교합되는 지역은 독립적 생활이 영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북은 치난의 역사적 주기에 따라 분립의 경향을 나타내기가 쉬웠다. 안사난이 정치,제도.사회의 파괴에 영향을 주었다는데 주목되지만 교차이동 의 창조적인 중간잡거지,잡호세력을 등장시켰다는 데서도 주목된다. 안사난으로 인한 사회변화는 중간잡거지,잡호라는 매채에 주목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어렵게 된다. 다시 말하면 종래 남북대립의 이원세계를 가지고서는 안사난이후의 뚜렷한 사회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이 점에서 양속성의 교차이동 을 주목하게 된다.
. 안사난의 형성,전개과정
1. 안록산의 등장과 異民族 傭兵集團의 形成過程
安祿山(705-757)은 營州柳城의 雜胡로 巫人의 母가 신에 應을 받아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다. 어렸을 때의 그에 대한 기록은 알려있지 아니하여 알 수 없으나 거개의 낙후된 이민족의 호인,잡호가 호족이나 군벌의 그늘 아래서 생활하였다고 한다면, 그도 변진의 전사단에서 또는 영주를 중심으로 하는 중개상업 지역에서 유년기를 보냈을 것으로 본다. 그가 九蕃어에 능통하여 互市郞이 되었다는 것도 낙후된 여러 주변 이민족이 모일 수 있는 변경의 병영이나 이에 부수되는 商賈,중개상업에서 가능하였으리라 보인다. 그는 일찍 父를 여위고 母가 재가함에 따라 의부 安廷偃의 성에 따라 冒性을 붙였다. 아명은 軋락由이다.
수말 돌궐인이 대릉의 서북에서 동북선으로 대거 남하하였는데 이후에도 계속 남하하였다. 이런 사실을 볼때 그의 선대는 이주한 유이민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자신이 유이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영주지방이 개원 5년(717)에 많은 돌궐의 유이민으로 성황을 이루었는데 이때 그의 부락이 파산하여 중국으로 逃出하여 온 것이 아닌가 보게 된다.어쨌든 그가 당의 관직을 들어오기까지는 오래 동안 중간잡거지역을 통하여서만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 잡거지는 상업의 중개지로서, 문화에서는 화이의 이중적 계통이 혼용되어 있는 곳이며 하북지방의 胡化가 농후하였다. 그도 유목민족의 호전적 기질이 농후하여 殘忍勇致 하였고 사서에는 奸戒殘忍 多智計 善취人情 등으로 적고 있다.
사서의 기록에서 처음 보이는 사건으로는 그가 양을 도둑질하여 죽음 앞에 섰을 때이다. 그는 오히려 동북의 적대국인 거란을 멸하지 않고 어찌 그냥 죽을 것인가 하고 그냥 풀려 났다. 이후 그의 군공이 더하여져 員外左騎衛將軍에 가수되었고 張守珪의 양자가 되었다.
안록산의 승진은 개원 24년에서 천보 13년까지 19년간 삼도의 절도사를 비롯하여 10여개를 겸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장악한 병권은 전국의 1/3이나 되었다. 이같이 그가 승진과 세력확장이 빠른 것은 당시 권력의 주위에 결속될 수있었던 假父子的 관계에 섰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가 현종으로 부터 신망을 얻게 되고 제약없이 궁중출입이 자유스러운 것은 당시의 정치현상과 현종의 備邊策 등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장수규의 양자가 된 것, 호부시랑 吉溫과의 형제결연,현종의 총비 양씨의 양아가 된것은 이 때의 정치현상에 따르는 하나의 途徑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안록산은 외형으로 癡直한 풍모를 가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는 사람 섬기기를 잘하며 때로는 이민족의 관습과 우직스러운 행동을 저질러 현종으로부터 환심을 사면서 총신의 자리를 굳혀 가고 있다. 藤善眞證氏의 안록산 에서는 이상한 지역 에서 이상한 성격 으로 형성된 수수께끼의 인물로 그려 보이고 있다. 이상한 사람 이란 비중국적인 요소를 많이 지닌 사람으로 보아도 좋다. 그러나 이때 이상한 지역 이란 단순한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잡거지역의 북방세력을 규합하고 그 세력을 조직화할 수 있었던 중간지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풀이된다. 이같은 잡거지역을 배경으로 세력을 조직화한 사람이 안록산이다. 현종 말기에는 주변에 총신이 출현하여 이들이 개인과 개인의 인격적 결속에 의한 관계를 정치현상 위에까지 노출했다. 이같은 정치현상을 중당이후 과거귀족의 몰락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정치현상의 표면에 등장할 수 있었던 절도사 가운데, 특히 이민족의 호장은 그 거개가 성격상으로 구래의 귀족이나 관료에 대항할 수 있는 미천한 새로운 형의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안록산은 전형적으로 총신이 된 사람이다. 또 이때의 인맥관계에서도 가부자적 결합관계가 그 바탕이 되는 것이었다. 당대에 있어서 가부자제의 출현은 분국적 정치의 혼란시기에 나타난 것인데, 이를 보면 당시대에는 3개의 시기가 있다. 안록산의 등장이 이같은 가부자제의 정치현상 위에서 부상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임보의 외인 기용책과는 커다란 관계를 갖고 있다. 이임보는 그의 지위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 邊帥의 入相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邊帥入相之路 를 두절시키는 건의를 현종에게 내놓았다. 이같은 것이 정적을 숙청하는 데도 나타나 당시 정계 인물을 재야에 들게 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그리고 정치의 중요한 간쟁도 사라져버려 완전히 그의 독단이 되었다. 이 임보의 蕃將起用策 은 安思順을 朔方절도사로 안록산 등 호인을 充用하였고 이후 당의 절도사는 호장의 진출로 인하여 충용되어지는 것이 많아졌다. 그래서 지방군정의 대권이 호장의 손에 장악되는 위기를 만들었다. 이민족의 邊帥기용은 변수 그 자체의 성격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와서 첫째 出將帥入相의 길이 완전히 끊어짐으로써 중앙정치와의 관계가 줄어져 변수 쪽으로도 점차 독립적인 형세가 되었고 둘째 절도사의 상주,구임으로 인하여 적어도 형세상으로는 분국적인 용병집단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안록산은 14년간이나 삼도의 전권을 쥐고 분국적인 강대한 세력으로 확대시켜갔다.
당초의 변방군은 부병에서 파견되는 소수의 군단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대부대의 주둔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 軍,城,守捉,鎭등 軍鎭이라 불리우는 새로운 변방기관이 생겨났다. 군진의 병원은 처음에는 부병을 주로 하였으나 점차 제주로부터 생겨난 兵募,團結이 변경에 출현하여 健兒라는 모병에 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원 25년(737)에는 長征健兒라는 직업적인 용병이 성립되었다. 군진의 指軍官으로는 각기 그들의 使가 있었고 최고의 지군관으로는 절도사가 생겨났다. 이같은 군진의 召募에 客戶,蕃人이 모여들어 절도사의 막하에 용병되었던 것이다.
이민족 출신의 胡將節度使나, 胡將,胡卒이 등장될 수 있었던 현상은 당이 세계제국으로서의 내용적 규모로 발전해 가는 데 피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배경에서 현종대의 胡化는 장안이 그 극치를 이루었던 것이다.현종의 開元(713-741),天寶년(742-755)이 그의 정치업적에서도 다르게 구별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될 때 그의 대외책에서도 변화는 있을 것이다. 현종의 천보년의 失政이 바로 당실의 亡禍를 가져온 것으로 볼 때 이임보의 외인기용책이 얼마나 큰 영향을 가져온 것인가를 알게 된다. 개원대의 대외책은 주변민족을 제압하는 것이었으나 개원 29년의 전성시대가 지난후 이민족 제압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와서 天寶元載(742)에 이르러 십절도경략사 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안록산의 세력부식을 가져다 주는 계기가 되었다.
현종이 안록산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개원 24년(736) 張守珪의 斬殺請許의 上申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종이 免誅하도록 한 것은 이같은 동북의 비변책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하지만 현종 만년의 안일하고 소극적인 대외책은 이민족 호장절도사의 위험을 키웠다. 종래 사관들은 안사난을 불러 일으킨 원인으로 이임보의 독단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점은 近人의 연구에서도 주목되어진 바이다.즉, 임보의 堅固를 만들기 위한 임보의 계책은 바로 현조의 변방책과 서로 합하여져 안록산의 亂華 에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외인기용책의 관점에서 해석해 보는 것이다.
異志 란 반당부적인 군사쿠데타를 가르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갖는 범위는 그 叛擧의 과정에 한하여 쓰여지는 듯하다. 이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에 주의해보면, 당대에 일어난 반난의 사건이 모두 叛,亂,賊,反 등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오직 안사의 난만이 그 전단계라 할 수 있는 異志 라는 것을 강하게 적어 놓고 있다. 이민족 호장으로서 등장한 안록산이 하북일대에 구축한 그의 세력을 기반으로 난을 몰고 갔으니 당은 이것으로 인한 일격을 받아 드디어 망화의 길로 가게 되었으니 이 난의 의의는 큰 것이다. 당시 사관들은 안사난에서 이 이지 라는 용어에 한하여 쓰기를 거의 못박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같이 해석될 수 있을것 같다. 즉 중국의 전통사관들은 안록산을 완전히 漢化된 사람으로 보며 이민족 호인세력 또는 한화된 잡거지역의 이민족의 집단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천하관적인 역사기술에서 나온 용어로 보인다.
안록산의 이지가 처음 밖으로부터 탐지되어진 것은 양국충의 上申에서라 할 수있다. 사서에는 이지 , 이심 의 迹,祭,狀 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상신이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였으며 이것은 당시 총신의 측근정치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배경에 관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급한 변방의 정세 때문이었다고 할 수있다.
안록산이 반의를 가졌던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범양을 중심으로 한 雄武城을 쌓음으로써 이를 중심으로 병기를 모으고, 병력을 주둔시키는 등 異志蘊蓄 의 출발이 확실해지고 있다. 異志陰蓄의 내용을 웅무성의 축조에서 먼저 살펴보자. 雄武城의 축조; 웅무성은 범양의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민족의 내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축성된 요새이다. 忠嗣로부터 안록산이 꼭 반할 것이라는 상신이 있었던 것도 이 웅무성을 거점으로 하는 병기의 전비, 적곡, 병력의 이동, 거란,해,동라 등 이민족의 핵심용병 등으로 탐지되었을 것이라 할 때 이곳이 안록산 용병집단의 중심기점이었음을 알 수있다.
控馬의 양축; 안록산의 이민족 용병의 기마집단이 갖는 전략상의 특징은 그들 본래의 호전적 기질에 있을 것이다. 북방민족은 기마가 따르는데 당시의 전투에 있어서 기마의 위력은 보병의 몇 갑절이 되었을 것이다. 안록산이 이러한 기마의 양축에 주력하여 나타난 수는 수만필에 달하고 있다.
控弦의 양성; 안록산의 용병부대 안에는 특수전사의 전위대가 있었다. 이들은 돌궐,동라,해,거란,실위 등의 이민족으로 조직되어져 曳落河 라 불리어지는 假子 들이다. 이들 종족을 포함하는 용병조직은 군의 조직체계에서, 또한 안록산과 개인적인 인격결합에 의한 가자적 관계에서 결속되는 이중체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들 용병집단이 세력구성에 있어서는 예낙하 라는 이민족출신의 전사가 주축이 되고 있다. 이 예낙하라는 낱말은 안록산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며,이후 중국사서에 계속 나타나고 있다. 예낙하에 대한 중국사서의 해석을 보면, 안록산사적에 의하면 그의 용병적 집단에 핵심세력이 된 것이 이민족의 예낙하 및 범양,평로,유,소의 잡거지에 가까운 민중이 이에 속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그의 가부자적 관계에 결속된 무리였다.
그의 이지가 점차 온숙되어 가는 데 있어서 가속시켜 준것은 당부로부터 그에 대한 일련의 의심이 탐지되어 갔다는 것이다. 안록산은 그의 최후가 되는 今此의 입조에서 양국충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을 의식하여 거북스럽게 느꼈을 뿐만 아니라, 현종을 정점으로 하는 측근에서 점차 소외되어가는 위기감을 받았을 것이다. 이임보-양국충으로 이어지는 것은 상위의 정치세력이나, 현종의 총임으로 등장된것은 이임보-안록산-양국충으로 된다. 양귀비 일족의 등장과 함께 양국충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묘한 대립이 생겨날 수있었다. 안록산이 먼저 현종으로부터 후총을 받고 있어서 양국충이 이를 증오하여 상기되었고 안록산으로서도 양국충이 재상된 데 못마땅했을 것이니 그의 독단이 뿌리를 내려 갈수록 안록산에 의한 이지의 모반도 굳혀 나갔다고 보인다. 안사의 난이 당조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보여지는 것도 이 같은 사항에서이다. 그가 현종으로부터 받은 절정적 후총의 封王加授가 뜻밖에 양국충에 의하여 제지될때, 더우기 그것이 글모르는 이민족 으로 제약된다고 할때 그 공파구는 그가 갖고 있는 막강의 세력밑에 깔려있는 특유의 호전적 가열성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양국충을 숙청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천보 14년(755) 11월 범양에서 예낙하를 핵심으로 하는 반군 15만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안사난이 외강내약의 군편향에 따라 이미 호,한의 모순을 들이대었던 것이라 본다면 안록산과 양국충간의 권력투쟁은 그 중대한 원인이 된다고 할 것이다. 변진의 강대한 세력을 지닌 안록산이 드디어 무력적 실력에 의지하여 양국충울 숙청하겠다는 것은 반거의 표면에 내새운 명분이라 할지라도 그 도화선에 있어서는 두 사람간의 권력투쟁이 주요한 점화를 붙인 것이 된다.
이 때 당의 부강은 최고에 달하였으나 이민족.변방에 대한 대외책은 내정에 뒤다르지 못하였다. 10절도사의 설치는 이같은 변방의 문제를 표현해 주는 것이 된다. 주변 이민족에 대한 비어책을 강구한다는 것이 호장의 기용을 가져왔고 그리하여 용병집단을 형성시켰다. 이 같이 이민족 전사를 핵심으로 하는 용병집단의 형성이 당의 정치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면 이들 세력에 의하여 폭발된 다음의 세력이라는 것은 당시의 질서로서는 수급할 수없는 커다란 사건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안사난은 양국충과의 반목에서 불시에 야기된 것이라기 보다는 범양을 중심으로 하는 비당적인 조직의 세계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데 주목하게 된다.
2. 안사난의 발동과 연제국의 건립,붕괴
안사부대의 주동적 전사가 강건한 노매드의 이른바 예낙하 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족의 남성적인 결합이라 할 수있는 Nomadism이 농후하게 나타난다. 중국 번진에서 호장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적, 구조적 구조를 이루어 나간 것은 변방이 차지하는 역사적, 지리적인 조건에 기인된다고 할것이다. 역대 창업왕조의 기의가 거의 하북이나 잡거지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아도 이곳이 변진용병의 공급원을 가까이 하고 있는 데서라고 말할 것이다. 중국 왕조에서 건설되는 노매드 의 통일적 세계는 외부로 해,거란,구성,동라 등과 연계함으로써 그 세력은 막강하였다. 양국충과의 불화는 곧 안록산의 이지를 촉진시키는 심리적 갈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태자에게 불배 하였던 것은 한문화와 전혀 다른 이족적 문화의 배경을 깔고 있는 것이다.
역사발전에서는 대립도 중요하나 화합 역시 중요한 것이며, 중국사의 주류는 이들을 융합시켜 나가는 방항으로 볼 때 특히 당문화는 외래문화의 융합이 강조되는 이른바 제 2의 개화기이기 때문에 위진오호의 삼浸을 통합시킨 데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문화의 화합에서 분리되어 가는 이소성적 인 현상을 사민,전쟁,교통 등의 동화에서 보게 된다. 안사난은 바로 호인 집단의 이소성적 인 현상으로 보려는 것이다. 이들의 반거가 동기를 이용하여 기습전을 펴는 데서도 유목적인 생태를 보여준다. 연중 11월은 추수가 끝난 후가 되므로 약탈물도 온 동리가 충분히 갖추게 되고 또 농촌도 한가한 시기이므로 이 기회를 틈타는 것이다. 이때 중국은 평화가 지속되어 부병의 운영이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남하에 속수무책이었다.
1) 낙양,장안의 점령
안록산은 755년 11월초 何千年을 선발대로 삼아 奚騎 20을 이끌고 射手를 선발해 올린다는 이유를 내세워 太原을 기습하였다. 이를 시발로 하여 동년 11월 9일에는 조정의 밀지로 양국충을 주토하기 위한 병력의 이동으로 사칭하면서 동년 19일에는 파죽지세로 博陵을 장악하였다. 당부는 북경부유수 楊光홰가 피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양국충으로부터 전세가 곧 호전될 것이라는 낙관에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심상치 않는 것을 예상하고 모병을 실시하였다.
당군은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12월에는 동경이 함락되었다. 안록산은 고각대,기병을 앞세우고 도경으로 입성하여 마구 살경을 저질렀다. 안록산이 동도를 함락시키고 있을 때 북방에서는 삭방군과 충돌하였다. 그의 일당인 대동군사 高秀巖이 공격을 전개하여 진무군을 유린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정변군을 궤멸시켰다.범양에서부터 낙양까지의 교통로가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 하남 방면의 작전이 수월할 수가 없었다. 당부는 사태가 위급해지자 현종으로 하여금 양귀비와 황자, 비, 궁인들을 이끌고 연추문을 빠져나와 몽진길에서 헤메게 되었다. 백성들은 궁중질서가 허물어지자 궁정과 왕실의 제택으로 몰려가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하북에 스며든 이른바 잡호인 燕갈 들이 제국을 건설한 후에는 점차로 침체의 길로 치달았다. 그 이유는 이들이 독자적으로 중국문화를 채택하는데 조화를 이루는 창조적 문화를 발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기도하였던 전제군주화의 실패는 부자살육을 몰고 왔다.
2) 연제국의 건립
안록산이 范陽에다 燕帝國 을 세운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있다. 첫째 하북은 종족적으로 문화적으로 이른바 연갈, 强사들이 의거하는 바가 되었는데 안사난 후에는 더욱 이들의 근거지로 변하였다. 이곳은 오호북조의 遷徙民族이 주로 잡거하였다. 그래서 잡호가 사회적으로 기질적으로 통합되는 노매디즘을 연제국 위에 건설한 것이다. 둘째 안록산이 대연을 세워야 했던 배경에는 사적이고 지역적인 그의 지배세력을 독자적으로 공식화하는 데 있었다. 그들의 지배세력이 확대되어짐에 따라 이른바 연갈,잡호들의 집권화가 필요하였다. 침략전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군주화의 중앙기구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중앙기구가 전제군주화의 강화를 만들기 위해 부득이 중국 문화를 모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급기야 그들의 기상이 쇠락하게 되었다. 그들이 중국식 제도를 모방한 제국의 중앙기구는 이족 본래의 기상이라 할 수 있는 부락적인 전투조직을 약화시키고 또 사치에 물둘게 하였다. 안사난은 安祿山-安慶緖, 史思明-史朝儀의 양 부자가 서로 前帥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내부분열을 드러낸 것이다. 안사반군의 주력이 와해되기까지 9년간에 걸친 소요가 평정될 수 있었던 것은 의병에 의한 단합된 반격에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 내부의 분열에 힘입었던 것이다.
燕 帝國의 붕괴는 자기 분열에 있었으며 여기에다 중국문화의 섭취 모방이 빼놓을 수 없는 요인으로 가속되었던 것이다. 하나의 사적인 용병집단이 남하함에 따라 확대되는 여러 가지의 문제를 감당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중앙기구의 건립이 바로 그러한 것 중의 하나인데 결국 이의 팽창이 자기 분열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들의 초기적인 작전에서 수행되었던 일원적인 단순 조직이 제국의 전제화에 따라 복잡하게 되어 때로는 신속하지 못하였다.
*맺음말
앞에서도 말했듯이, 안사난은 중국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당말에서 오대를 거쳐 송에 이르는 변혁기는 그 전후가 성격이 달라지는 시대로 구분된다. 이에 대해서 일본학계에서는 내등이 중세와 근세로 변화한다고 말했고 전전직전이 고대에서 중세로 바뀌는 시기라고 하였다. 반면 중국에서는 당송사이가 하나의 획기라고는 하지만, 시대구분을 하지 않고 봉건사회내의 여러 시기로 나누고 있다.
안사난 이후에도 당은 오랫동안 지속하여 이 사건을 당의 붕괴를 몰고 오는 것으로 바로 볼 수는 없으나 중요한 것은 안사난으로 이전의 전성기가 무너졌으며 당 지배체제의 형태, 사회 전반적인 성격이 변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안사난 전후로 한 중국 사회의 성격 변화에 대해서 고찰하기보다는 안사난이라는 사건 자체에 대한 것을 보았다. 이러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중국 전통적인 사서에 보이는 입장에서부터 6개의 제 견해로 나누고 있으며 그 중에서 변인석씨의 견해인 노매드 복귀설에 대한 정리가 주가 되고 있다. 안사난에 대한 연구는 정치적인 측면, 사회경제적인 측면등 다방면에서의 연구가 되고 있고 이것을 바라보는 데는 보다 다원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이 필요한 것 같다.
첫댓글 정말 대단하네요. 선배님 감사합니다.
오래전에 제 홈피 자료실에 두었던곳을 근래 둘쳐보니 같은게 있어 올려 드렸써요..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