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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의 교회 화합을 위한 모색
Ⅰ. 서 언
Ⅱ. 에라스무스의 루터와의 결별: 교회 화합 이념의 반증
Ⅲ. 에라스무스의 교회 화합을 위한 중재·중도의 모색
Ⅳ. 에라스무스의 교회 화합의 궁극적근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관
Ⅴ. 결 언
I. 서 언
유럽 역사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기인 16세기는 다음의 두 측면에서 분열과 대립의 시기였다. 첫째는 국제 정치적 측면에 해당하는 것으로, 16세기는 17∼18세기 절대주의 시대의 기반을 다지는 전 단계로서 유럽 각 국의 군주들은 잃어버린 옛 영토의 회복과 새로운 영토의 확장을 위해서 혹은 패권의 유지와 확보를 위해서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신성로마황제 찰스 5세를 하나의 지도자로 하여 네덜란드·스페인·독일·북부 이탈리아 등을 묶어 좀 느슨하지만 하나의 제국(찰스 대제 이후 최대의 판도)을 형성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의 존재는 당시 유럽 국제 분쟁의 큰 배경이 되었다. 즉 유럽에서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에 의해 4방으로 포위되어 있던 프랑스는 그 포위망을 분쇄하는 것을 국가의 최우선 정책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전쟁에 영국 왕 헨리 8세와 교황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참여함으로써 16세기 유럽의 국제정치는 혼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6세기 유럽의 분열과 대립을 몰고 온 또 다른 요인은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이었다. 즉 종교개혁은 크게는 유럽을 구교 진영과 신교 진영으로 분열시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 양 진영도 다시 각각 강·온건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 진영의 강·온 파도 다시 각각 여러 미묘한 노선 차이로 일치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정·교가 아직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 신앙의 문제는 신앙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고 각국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연결되어 복잡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예컨대,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은 신성로마황제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제후들의 지원을 받아 전개되어 가고 있었고, 네덜란드는 카톨릭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신교를 채택하였으며, 프랑스는 카톨릭을 고수하면서도 카톨릭 합스부르크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독일에서 반 황제 편에 있는 신교의 제후들과 제휴하고자 하였다. 영국에서 이혼 문제를 계기로 헨리 8세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궁극적으로 영국을 교황의 패권주의에서 해방시키는데 있었고 또한 수도원 등의 재산을 노리는 신흥 상공업자 시민 계급의 지원도 작용하였다.
이처럼 16세기 유럽은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근대국가에의 지향과 종교개혁이라는 근대적 노력으로 분열과 대립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대 환경 속에서 유럽 세계는 평화와 단합 그리고 일치라는 중요한 시대적 가치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평화적 가치의 부상은 비교적 통일과 평화가 큰 기저를 이루었던 기존의 중세적 가치의 재 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마치 혼란스럽게 끝난 불란서 혁명 이후 반동체제를 통해 절대왕정기의 안정을 되찾으려한 움직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의 이러한 현상은 역사의 한 항구적인 모습, 즉 통일은 다시 개별화의 가치를 지향하고 실현된 개별화는 혼란을 수반하면서 다시 통일의 가치를 지향하는 대립적인 이중적 가치의 한 자연스런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바로 에라스무스는 그의 활동의 초창기에는 '유럽의 황금시대'를 예견했으나 곧 이상의 사태 전개로 인한 깊은 좌절감 속에서 개혁과 평화라는 16세기의 이중적 현상과 갈등을 적절하게 표현해준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우신 예찬』의 저자요 신약성경을 새롭게 번역하고 주해 작업을 펼쳤던 에라스무스는 분명히 교회의 개혁자였지만, 「평화의 탄원」(Querela pacis)등을 저술하여 전쟁만을 일삼는 유럽의 군주들을 비판하고 평화의 군주가 되기를 호소하면서, 한편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야기되어간 신앙적 불화를 극복하고자 최선을 다한 평화의 사도였다. 유럽의 정치적 분열과 더불어 종교개혁과 더불어 시작된 유럽 교회의 분열은 평화주의자 에라스무스에게 더욱 심각한 위기감을 갖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을 단순히 정치적 공동체라기보다는 종교적·정신적·영적 공동체로 보아온 그에게 있어서 교회가 분열된다는 것은 보편적 평화를 그 뿌리부터 잠식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유럽에서 통일된 하나의 교회가 존속되기를 원했는가하는 사실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점차 강렬하게 부상됨에 따라 그가 보여준 여러 가지 태도에서 증명된다. 그의 삶의 모토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평화와 개혁과 화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을 관철하기 위한 그의 전 삶은 신·구교의 양 진영 중 어느 한 쪽에도 서지 않는 <화합의 중재자>로 표현될 수 있다.
필자는 본고에서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분열과 관련하여 교회개혁자요 평화주의자인 에라스무스가 개혁 과정에서 교회간에 파생되는 불화와 분열을 어떻게 극복하고 개혁을 성사시키면서도 유럽의 화합을 달성시키고자 노력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에라스무스의 루터와의 결별:
교회 화합 이념의 반증
영적 측면을 강조하고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에라스무스의 종교개혁 사상은 루터의 종교개혁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처음 루터의 출현은 에라스무스가 주도하는 움직임의 연장으로 보여졌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감하며 그 운동을 옹호했는데, 그는 처음에 루터가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운동이 초기부터 자제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느낌은 가지고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볼 때 루터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운동을 새롭게 전환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518년 그는 『그리스도교도 전사 교본』(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1503)을 쉴레트쉬타트(Schlettstadt)의 수도원 원장인 파울 볼츠(Paul Volz)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만든 중요한 서문을 달아 다시 출판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루터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의 투쟁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구교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자들에게는 종교개혁은 아주 단순한 문제였다. 즉 루터가 현존하는 교회의 교리를 반대하자, 그의 이단적 운동은 탄압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판단의 기준을 가졌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최초 몇 년 동안 루터가 스콜라 학문과 구교의 많은 의식에 관해 비판한 것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전적으로 공감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루터가 선한 삶을 살아 왔다는 점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가 볼 때 루터는 분명히 기독교인이었다.
루터에 대한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그는 큰 곤경에 처한다. 에라스무스가 체류했던 1517년에서 1521년의 루벵(Leuven)에서 지난 몇 년간 계속되고 있던 그에 대한 반대는 더욱 거칠어졌다. 주로 스콜라 신학자들은 에라스무스가 루터와 한 통속의 인물이며 심지어 루터의 활동은 에라스무스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간주하였다. 루벵 대학 총장이었던 니콜라우스(Nicholas Egmond)는 강단에서조차 에라스무스를 루터교도라고 비방하곤 했다. 그러자 후텐(Ulrich von Hutten)은 에라스무스에게 이렇게 피신한 것을 요청했다.
당신은 루터의 책이 소각된 다음에도 여전히 안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지요? 혹 루터에 대한 유죄판결이 당신에 대한 유죄판결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거나 루터의 이단 심사를 맡은 재판관이 당신을 보호해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피신하세요. 그래요. 피신해서 당신 자신을 지키고. 우리에게 […] 이미 그자들은 공공연히 불만을 터뜨립니다. 당신이 이 모든 사건들의 원흉이라고.3)
그럼에도 이 일이 있었던 1520년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후텐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는 것과 루터와 종교개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거의 무관하다는 점을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루터에 관한 일은 다소간 보고를 받았네. 가능한 한 나는 그를 보호하고 있거니와, 나와 그 사람의 일은 여러 면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 […]. 루터의 일로 심사숙고하는 사람들이라면―그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방도는 거의 모두 검토되었지만―오로지 그가 좀 정중하고 적당하게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야 할 것이네. 하지만 이러한 충고도 지금으로서는 이미 때늦은 거지. 나는 사태가 폭동으로 번지고 있음을 알고 있고, 이 모든 일이 오직 그리스도에게 명예로운 일이 되기만을 기도하고 있네. 사람들이 틀림없이 분개할 것이지만, 내가 그 분노를 유발하는 장본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네 […]. 루터 박사와 자네의 벗들 모두에게 인사 전해주기를 부탁하네.4)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루터 종교개혁의 과격화를 염려하면서도 아직 루터를 지지하고 있는 동시에 점차 급진적인 방향으로 선회해가는 루터와 거리를 두는 차원에서 카톨릭 교회의 일원임을 선명히 하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갈등이 격렬해지기 시작한 해인 1519년에 출판한『신학에 대한 추론』(Ratio verae theologiae)의 두 번째 판에서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그의 저술의 음조를 완화시켜줄 것을 충고하면서, 자신이 루터 진영에 속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교황과 로마 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을 공언한다. 1520년 9월 그는 교황 레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의 최고 대리자에게 대담하게 대적할 만큼 미친 것은 아니다"5)
라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하여 1520년 12월 6일에는 추기경 캄페기(Lorenzo Campeggi)에게, 1522년에는 Palencia의 주교 모타(Pedro Ruiz de la Mota)에게, 자기는 카톨릭 교회를 떠나지 않았으며 로마 교회를 존중한다는 내용의 선언을 한다. 그는 1523년 후텐과 루터의 나머지 추종자들에게도 로마 교회가 악을 지니고 있음에도 정통이라고 선언한다.6)
엄격히 말하면 카톨릭 측에 있으면서 루터를 동정하는 에라스무스의 그러한 태도는 아직 중립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에 대한 모든 경고가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함에 따라 에라스무스는 루터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결심을 보이지 않으면 안되어 갔다.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점차 과격성을 더해 가는 루터가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바로 교회의 통일이 깨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는 에라스무스가 볼 때,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는 1521년 루터에 대적하는 싸움에 휘말려들지 않으려고 루벵에서 바젤(Bazel)로 이사했으나 더 이상의 중립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타협하고자 하는 에라스무스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런 시도 중 최후의 노력은 1524년 자유의지를 다룬 『자유 의지론』(De libero arbitrio)의 출판이었다.7)
에라스무스는 이 책을 통해 루터의 문제를 찬·반이라는 성토의 입장을 떠나 학문적인 영역으로 끌어 올려 우호적인 논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자신의 관점을 아주 훌륭하게 제시하였다. 비록 자유 의지에 대한 입장이 자신과 루터가 다르다는 점을 알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이런 우호적인 시도는 완전히 실패하였다. 루터의 『노예적 의지』(De servo arbitrio)에 대해 그는 매우 분노했으며, 이 문제는 계속 가장 큰 쟁점이 되었다. 루터의 『노예적 의지』에 대한 반박문인 『광신』(Hyper -aspistes)에서 에라스무스는 루터와의 관계를 깨버렸다.
에라스무스가 루터와 결별한 것은 궁극적으로 루터 종교개혁의 타협 없는 급진적 성격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전 교회를 분열과 분쟁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었다. 바꾸어 말해서 에라스무스의 평화주의는 그의 로마 교회에 대한 충성과 루터와의 결별의 주된 이유이다. 그는 1525년 그의 신약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자기 옹호에서 로마 교회의 공동체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일치를 사랑하고 싸움을 증오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8)
1521년 그는 루벵 대학 신학교수들에게 이렇게 약속한다. "가능하다면 나는 카톨릭 교회의 평화도, 복음의 진리도, 로마 교황의 위엄도 버리지 않을 것이다"(CWE 8: Ep. 1217, lines 161-63). 호전적인 후텐과 그의 무리에게 에라스무스는 로마 교황청이 모든 것을 혼동으로 몰아 넣는 호전적인 폭동에 의해 개혁될 수 있다면, 차라리 잠자는 악으로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ASD 9-1 : 174).9)
에라스무스는 스트라스부르그 개혁자들에게 이렇게까지 말한다. "바울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교회의 사태를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악덕들에 대하여 그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이 악덕들은 제거되어야 하나 물론 폭동이 없이 해야한다(ASD 9-1: 308). 에라스무스에게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리하여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는 것은 기독교 세계 내의 불화와 불일치를 의미하며, 루터가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바로 교회의 통일이 깨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에라스무스가 볼 때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즉 기독교 신앙은 평화와 일치를 향하여 추진되어야 하는데, 지금 종교개혁은 바른 길에서 벗어나 이 일치를 고의적으로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볼 때, 종교개혁자들의 최악의 죄는 교회 평화의 파괴이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이 급진적인 변화를 초래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전복시키고 있다고 느꼈다.10)
그 지도자들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무엇이든 좋아하지 않으며, 세상을 갑자기 변화시키려는 그들의 시도는 "전 교회의 일치를 무너뜨렸다".11)고 그는 생각한다. 에라스무스가 볼 때, '불화의 사과'를 세상과 교회에 던진 자는 다름 아닌 루터이다. 더 중요한 것은 평화가 종교개혁자들의 진영에 존재하지 않는 데 있다. 그는 멜랑히톤에게 그와 쯔빙글리 사이의 교리의 차이를 상기시키고, 부커(Martin Bucer)에게 쯔빙글리(Ulrich Zwingli), 루터, 오시안더(Osiander) 가 신앙고백상의 문제로 서로 분쟁하고 있는 것에 놀라움을 표현한다.12)
로마교황청에 대한 반대자들은 교회의 필수적인 요소인 평화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13)
종교개혁의 시작과 더불어 에라스무스의 교회 내의 평화와 일치에 대한 관심은 덕에 대한 관심보다 더 큰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종교개혁의 시작과 더불어 그것들은 교회에서 최고의 덕목이 된다. 부패한 교황청은 교회 일치의 보존을 위해 지불해야 할 그렇게 큰 대가는 아니다.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사악한 교황들이라도 그 권위를 관대하게 인정해주어야 한다(ASD 9-1: 38). 따라서 에라스무스는 이단이나 분파와 같은 불화와 불일치를 최고의 악덕으로 본다. 그는 교회의 일치가 다른 어떤 덕목보다 위의 서열에 있으며, 교회의 불일치보다 더욱 악한 것은 없다고 본다. 루터는 신앙이 없는 인간의 선행이 사실상 치명적인 죄라고 믿는다. 반면에 에라스무스는 이단과 종파분리자의 경건과 덕은 오히려 죄와 악덕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카톨릭 교회에는 많은 사악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죄는 면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교회 밖에는 평화도 덕도 경건도 없다. 그러나 덕과 경건은 평화에 종속되어 있다. 평화 없이 이러한 것들이 교회에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단과 분파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죄악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통옷을 찢는데 있다.14)
Ⅲ. 에라스무스의 교회 화합을 위한
중재·중도의 모색
이처럼 에라스무스는 교회 분열의 책임을 루터에게 돌리고 그와 결별했지만 그것 때문에 교회의 재결합을 위한 시도를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루터와의 결별을 선언한 이후에도 카톨릭 측과 루터파 양쪽을 재결합시키려는 중재자로서의 시도를 계속한다. 그는 루터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브란덴부르크의 알버트 대주교에게 설명하면서 그가 결코 고의로 오류를 가르치거나 혼란을 야기하거나 하지 않고 불화를 피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자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15)
이것은 그 후의 저서들에서 되풀이된 주제이다. 모든 노력은 평화(pax)와 일치(concordia)를 유지하는데 집중되어야 한다.
1520년 에라스무스는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자 이런 제안을 하고 있다. 즉 카알 5세(Karl V), 헨리 8세(Henry Ⅷ), 및 헝거리의 로드비이크 2세(Lodewijk) 등이 각자 자신의 백성 가운데서 루터로부터나 교황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몇 사람의 심판관을 지명하고, 이 심판관들은 루터의 저술을 반드시 읽고 루터와 대화를 나눈 후 최후로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하자는 제의였다. 이 제안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루터에 대한 41개조 죄목이 이미 선고되고 2개월간의 복종 기간이 주어진 이후 제안되었다는 데 있다. 바로 교회의 수직 구조 대신 기독교 정신이 우선이 되어 교회를 교정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16)
루터가 1521년 보름스(Worms)의 제국회의에서 정죄된 이후에도 계속 자신의 방향을 고집하고, 이로 인해 기독교의 일치와 평화를 위태롭게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위치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줄 루터에 대한 반대 세력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루터를 이단자라 보지 않았고, 또 이 점을 공적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여러 방면에서 그는 화해를 위해 애썼다. 스위스 내의 여러 지역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있을 때에도 에라스무스는 개방된 교회를 옹호했다. 그는 『육식 금지에 대한 서한』(Epistola de interdicto esu carnium)에서도, 의무적인 금식을 폐지하고, 몇 성자의 날을 줄이고, 성직자들의 결혼을 허용하며 강제성을 자유로 대체하도록 권고하고 있다.17)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에라스무스는 기독교 세계의 일치와 평화의 회복을 위해 두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그 하나는 교회의 전 신자의 도덕적·영적 갱신이다. 도덕적·영적인 갱신은 두 가지 일을 수반하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악덕보다는 좋은 점들을 장려해야 한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마땅히 있어야할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18)
평화와 일치의 회복을 위한 에라스무스의 두 번째 큰 방안은 에라스무스의 핵심적인 방안으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서로 논쟁거리들을 양보하며 대화하고 타협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의지의 자유선택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랑의 실천이 전제된 이신칭의의 공식을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제안한다.19)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일치』(Liber de sacrienda ecclesiae concordia)에서 카톨릭이 신교들과 타협할 수 있어야 하며 이들의 운동에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허용해 줄 수 있는 그러한 형태의 개방된 교회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LB. Ⅴ469-506). 당시의 거친 조류에서는 비현실적인 이상이며 더 이상 환영받을 수 없는 생각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그가 말년에 쓴 소책자『교회에서의 화합의 회복』(On Restoring Concord in the Church)(1533)에서 교회 화합의 방안으로 양보와 관용을 통한 중도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자유의지, 사자(死者)를 위한 기도, 성인들의 기원, 성상, 성물, 고해, 미사, 성일, 단식 등 교회의 논쟁적인 주제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동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하는 물음에 대하여 에라스무스의 간결한 답변은 "서로 관용하라"이다. 에라스무스는, 우리가 신의 평화를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구해야 할 두 가지 필수적인 것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신학의 문제가 아닌 도덕의 문제로 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들, 즉 교황과 군주, 행정관, 사제들은 물론 상인, 방앗간 운영자, 대장장이, 재봉사 등은 화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한 또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는 전통에 의해 전승되어온 모든 것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떠난다는 것은 안전하지도 유용하지도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20)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대립하고 있는 주제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결정해야 하며 이 같은 것을 상대방에게도 허락할 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들은 신에 의해 성결하게 된 성자들이 기도하면 신은 악령을 추방하고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운다고 믿는가 하면 다른 어떤 사람들은 직접 신실한 마음으로 성부·성자·성령에게 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으로 서로 논쟁해서는 안되고 서로 관용해야 한다.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분명히 관례화 된 미신들은 일소되어져야 하나 단순하고 헌신적인 마음은 그것이 비록 작은 오류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관용되어야 한다.21)
같은 맥락에서 성상과 관련하여 에라스무스는 우상은 허용되어서는 안되나 적절하게 그리스도의 삶을 표현하는 조상이나 그림들은 용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물도 성인들의 삶을 소중히 하고 모방하는 차원의 것이라면 관용될 수 있다. 에라스무스 자신은 고해성사가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 믿지 않지만, 그것은 옛 유용한 관습으로서 그것을 보존하고 올바로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즉 무엇이 잘 못 되자마자 성급히 사제에게 달려간다거나 그것을 기계적으로 다루어서는 안되고 우리의 죄를 먼저 신에게 고백하고 적절한 기회에 고해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사 제도의 경우 그것을 방해하는 사적인 미사 풍습은 제거되어야 하나 많은 세기에 걸쳐 용인된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예배의 요소를 버릴 필요는 없다.22)
에라스무스는 각자 자신의 선택을 따를 것과 하찮은 것들에 대하여 불필요한 고집을 피하라고 한다. 그는 성찬식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존재를 믿으나, 그는 항상 그것의 존재를 규정하려는 신학자들의 노력을 비난한다. 그에게 화체의 교리는 교회의 초창기 믿음에 대한 불필요한 부가물로서 보였다. 규정하고 설명하려는 루터의 열광은 둔 스코트(Duns Scotus)의 복잡한 이론만큼이나 나쁘다. 에라스무스에게 형제애는 형이상학적 관조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기존의 모든 엄격한 신앙 관례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에라스무스의 이 같은 근대주의(modern -ism)는 영적 복음주의의 가장 순수한 본질로 환원시키면서, 카톨릭 교회도 예수가 부여하지 않을 신앙의 관례들을 강요하지 말고 문을 활짝 열어놓을 것을 원한다.23)
그는 남용되고 있는 것을 즉각적으로 폐지할 것을 주장하지는 않으나, 그것들을 점차 제거하여 계몽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규칙과 의식들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그것들의 무거운 짐과 영향력은 곧 인간의 양심에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교회는 진지하게 성직자들의 결혼의 문제를 생각해야 하고,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고, 수많은 규칙과 규제들을 폐기해야 한다. 배우지 않은 자들을 위해 성경 번역판은 필요하며, 모든 일반적인 기도와 찬송 그리고 설교는 서민적인 언어로 행해져야 한다. 교회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위선과 형식주의 그리고 마음과 감정을 빈곤케 하는 모든 것을 폐기해야 한다.24)
실제로 에라스무스의 이러한 근대주의는 종교개혁 훨씬 이전에 속하는 1501년부터 그가 가르쳐온 것이었다. 그의『그리스도교도 전사 교본』은 의식·성상·성물 등에 관해 모든 의문을 제기했고, 균형감각과 영적인 가치만이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탄원했다(LB. Ⅴ 28D). 그러나 그것은 이 모든 상징물들의 완전한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장난감의 관계와 같이 아직 신앙적으로 미숙한 자들이 진정한 신앙적 지식에 이르기 위해 기존의 엄격한 신앙적 관례들을 적절하게 완화시켜야 한다는 탄원이었다. 그것은 또한 에라스무스에게 단순히 그리스도의 성품을 모방하는 시도를 의미했다. 이 같은 시도는 오직 지식을 통해 발견될 수 있으니, 여기에 바로 그리스도의 언행이 기록된 성경을 편견 없이 이성의 눈을 가지고 자유스럽게 관찰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다. 그의 신약성서에 대한 끊임없는 주해와 개역(改譯)은 이러한 해방 운동의 작업을 의미했다.25)
요컨대, 이처럼 교회의 화합을 위해 신앙의 영적인 근대성을 강조하면서도 기존의 신앙적 관행에 대한 양보와 관용에 의한 에라스무스의 중도적 노력은 그가 카톨릭 측에 남아 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본질적으로 카톨릭 측은 물론 루터 진영의 어느 한쪽에 서기를 거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그가 스스로 한 쪽과 관련을 맺는다면, 그가 지금까지 내세워온 모든 것을 저버리게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루터를 비난하는 것은 그가 그토록 미워한 형식주의를 지지하는 승려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었다. 반면에 개혁자들과 함께 하는 것은 그가 진정한 개혁이라고 생각한 그러한 개혁에 반기를 드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불관용과 여러 종류의 새로운 형식주의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의 이 같은 중도적 태도로 에라스무스는 그의 적들 사이에 분노를 발생시켰고, 아직도 그의 이름과 함께 따라 다니는 비겁하다는 비난을 만들어 내도록 했다. 호이징가(Johan Huizinga)는 "그의 전 인격을 지배하는 비극적 약점, 이 궁극적 결론을 끌어내기를 거부하거나 그렇게 할 수 없는 무능"26)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판단은 중도(middle way)가 에라스무스의 궁극적 결론이었음을 간과하고 있다.
결국 에라스무스의 화해를 위한 모든 시도는 전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평화를 전혀 원하지 않는 쌍방으로부터 버림받고 절망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그는 처음 로마 교회 안에서 어느 정도 개인적 자유를 유지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급진적으로 되어 감에 따라 구교 내에서의 이 자유는 더욱 강력히 규제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적인 기운이 일어나 옛 것에 대한 집착이 고집되고, 더욱 강한 차단에 의해 교회의 존속을 보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곧 바로 반동종교개혁의 시대가 와서 에라스무스의 이상은 설자리를 잃고 제 3차 트리엔트 공의회(1561/1563)의 결정에 따라 그의 저서들은 금서 목록에 들어가게 된다.27)
Ⅳ. 에라스무스의 교회 화합의 궁극적 근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관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분열되어 가는 과정에서 에라스무스가 얼마나 교회의 재 화합을 간절히 원했는가는 전 교회를 분열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보는데서 절정을 이룬다. 바꾸어 말해서 에라스무스의 교회 화합을 위한 지금까지의 모든 시도는 궁극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관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에라스무스의 사상 구조에서 근본적인 요소의 하나로서 채택되고 있을 만큼 그의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28)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가장 신성한 몸의 살아있는 구성원"이 되는 것은 인간의 행복과 위엄의 본질적인 표시(CWE 29: 69)라고 말하면서, 이 그리스도 몸의 개념에 근거하여 사랑과 일치와 평화의 개념을 도출한다.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이미지로서의 그리스도 몸이라는 개념을 그의 『그리스도교도 전사 교본』에서 많이 취급하고 있다. 그는 그 근거로써 널리 로마서 12: 4-6, 고린도전서 12: 12-27, 에배소서 4: 15-16을 인용하면서 교회의 통일, 즉 그리스도의 통일의 원리 아래 통일된 조화로운 구조로서의 교회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믿음을 증명한다.29)
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한 몸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 에라스무스는 결론 맺기를 "하나님, 그리스도, 그 몸과 구성원들은 모두 하나이다"(CWE 66: 95).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의 평화스런 통일체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교회 공동체의 폭은 어디까지인가? 그 비전의 폭은 창조로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전 기간의 인류를 다 포함할 만큼 넓다. 즉 에라스무스에게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공식적으로 믿는 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창조(아벨의 교회)와 더불어 시작하고 마지막 승리로 끝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 몸의 구성원이 되는 필수적인 조건은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정당하게 살고자하는 진지한 욕망이다. 교회는 이러한 삶을 살려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는 동서남북의 어떤 주민이 되었건 모두를 끌어들인다. 세상에는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항해사나 지리학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나 섬 혹은 대륙이 있을 수 있다"(LB.Ⅴ1175A).라고 말한다. 그는 제논, 크세노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나 현자들이 유대-기독교도는 아니지만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거룩함이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에라스무스는 토마스 모어보다 폭이 넓었다. 모어는 내적 교회의 경계선을 유대-기독교 계시에 대한 맹목적이지만 공식적인 신앙을 지닌 자들의 한계선 너머로까지 확대하지는 않았다.30)
한편,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들의 공통의 머리인 그리스도로 인하여 통일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계열의 위엄과 기능을 지닌 많은 구성원들을 이루고 있다(CWE 66: 95-96). 즉, 교회는 동일한 부분들로 구성된 하나의 몸체가 아니다. 각 구성원들은 각기 독특한 성격과 기능을 지니며, 이 같은 다양성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조화 있는 통일체로 함께 묶어진다.31)
따라서 한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도움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형제애의 실천을 통하여 한 몸을 이룬다.32)
"전체 그리스도인"인 교회는 크게 그리스도를 공동의 중심점으로 하여 그 기능이 다른 세 개의 동심원, 즉 복음 전도의 임무를 띤 성직자 층(사제들, 주교들, 추기경들, 교황 등), 그리스도를 위해 정의의 전쟁을 수행하는 세속 군주들(CWE 14), 그리스도와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평민들로 구성된다(CWE 15). 여기에는 중세기의 경우처럼 수직적인 가치의 차별은 없다.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각 기독교인들은 각자 자기의 자리를 지켜야 하며 각자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개인주의는 인정되지 않는다.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전체에게 영향을 미친다. "당신과 그 몸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며, 하나님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고전12: 26). 하나님, 그리스도, 그 몸, 그 구성원들은 함께 하나의 단일한 공동체를 구성한다.33)
그러면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이처럼 기능이 다르지만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점이다. 에른스트빌헬름 콜스(Ernst-Wilhelm Kohls)는 에라스무스의 『그리스도교도 전사 교본』에서의 교회 개념을 "사랑의 공동체"34) 라고 부른다.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사랑은 신으로부터 나와서 결국 신으로 되돌아간다. 교회는 신적 사랑의 역사적, 사회적, 제도적인 표현이다.35)
교회의 몸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우리 모두는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이웃을 위해서 사용해야만 하는 지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에 따라서 공동체에 선한 일을 하며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모든 것으로 영광을 돌리게" 해야한다(LB.Ⅴ45F). 에라스무스에 따르면 농촌 사람과 도시인들, 농부와 시민들,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약자, 성직자와 평민 사이에 싸움이 있다면 그것은 비 기독교적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는 오직 하나의 법, 즉 사랑의 법만이 적용될 뿐이다(LB.Ⅴ45DE). 교회 생활의 제도적인 양상은 성신의 내적이며 역동적인 힘의 표현으로서, 그리고 구성원 서로에 대한 사랑의 삶에 깊게 참여해 가는 것으로서 그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36) 기독교인의 교제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교제이다.37)
『그리스도교도 전사 교본』의 유명한 다섯 번째 규칙에서 에라스무스는 사랑(charity)의 성격을 밝혀준다. "빈번한 교회 출석이나, 성자 상이나 타는 촛불 앞에서 무릎을 끓거나, 지정된 수의 기도를 반복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에라스무스는 바울의 사랑에 대한 개념을 "우리들의 이웃을 교화하는 것, 모든 사람을 같은 몸의 구성원들로 배려하는 것,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 형제의 번창을 자신의 것인 양 주 안에서 기뻐하고 그의 불행을 자신의 것인 양 해결하는 것"(CWE 66: 79)이라고 설명한다.
에라스무스는 성인으로 불렸던 영국의 토마스 베켓(Thomas Becket)의 온갖 보화로 뒤덮인 무덤과 흰 대리석으로 치장된 이탈리아의 성당에 대해 크게 분노하면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교회를 이렇게 비판한다. "그러므로 내가 알기로는 수많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고, 헐벗어 유랑하며 비참함과 궁핍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데, 수도원이나 교회를 짓고 치장하는데 엄청난 돈을 퍼붓는 자들은 결코 영원한 죄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LB.Ⅰ684 F-685C).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기독교의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가 가장 높은 규범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이 규범에 의해 평가된다. 그는 카톨릭 교회가 내세우는 '권세'나 '지배권' 등의 권력적인 용어를 격렬히 비판하면서, 주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며, '아버지'란 의미를 가진 말인 교황이나 대 수도원장은 권력을 지칭하지 않고 사랑을 뜻하는 말이며, 마찬가지로 사도, 목사, 주교도 봉사 직을 뜻하는 명칭이지 권력을 나타내는 직함이 아님을 명백히 한다(LB.Ⅴ49AB).
둘째로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있는 교회를 평화의 공동체로 본다. 사랑의 공동체가 지향하는 최고의 선은 평화이다. 에라스무스가 『그리스도교도 전사 교본』에서 분명히 해주는 바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 지배권 아래서 서로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의 평화스런 통일체다.38)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평화스럽게 삶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 개인적이고도 공동적인 책임을 지닌다. 그는 1521년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파문되고 카알 5세에 의해 <제국 금지령>을 받았을 때, 독일의 인문주의자요 루터파였던 조나스(Justus Jonas)에게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하고 최선의 것인 기독교 세계의 보편적 일치"39)에 대해 말하면서 만약 교회에 평화와 일치가 없다면 교회의 이름은 무가치할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이 성령 안에서의 평화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A.Ⅳ1202. 9 s.)라고 그는 말한다.40)
루터가 그의 「95개조」를 제시했던 해인 1517년에 처음 출판했던『평화의 탄원』(Querela pacis)에서 그는 사람들에게서, 기독교인에게서, 도시에서, 궁정에서, 학자들에게서, 교회와 수도원에서, 어디에서든지 평화가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어떻게 그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문한다.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가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것의 화해자로 오실 그리스도를 말했을 때, 이 그리스도는 독재자의 모습으로 약속되었던가? 아니면 제왕으로서? 영웅적인 장군으로? 정복자로?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떤 모습이었던가? 바로 평화의 왕으로 약속되었다"(LB. Ⅳ 628B-629E).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일치와 상호 사랑"(CWE 27: 299)의 교사이다.41)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주와 주인에게 복종하고 따르기 위해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오직 교회 내에서만이 평화가 진실로 꽃피울 수 있다. "교회의 경계선 밖에는 평화가 없다"(ASD 5-2 ; 344). 에라스무스는 교회에 평화적 개념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용어 외에 '그리스도의 신부', '그리스도의 무리'나 '양의 우리', '그리스도의 집', '그리스도의 새도시', '그리스도의 비둘기' 등의 이미지들을 사용한다(ASD 5-2: 344).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로서 하나가 되는데 있어서 성례전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점에서 헨쩨(Hentze)는 "성례전 공동체"를 에라스무스 교회관의 주요한 특징으로 언급한다.42)
에라스무스가 볼 때, 성례전들은 은혜를 부여하며, 더욱이 그것들은 많은 사람을 하나로 모은다.43) 또한 그것들은 구원의 수단이면서 교회 통일의 표시로 작용한다.44) 신성한 성례전들은 교인들을 하나로 가장 가깝게 묶는 특별한 상징이다(CWE 27: 304). 특히 세례와 유카리스트는 기독교 통일의 가장 신성한 상징들이다.45) 그리스도인은 세례 시 성령에 의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형제애의 실천을 통해 한 몸으로 융합된다.46) 마찬가지로 유카리스트는 이 같은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삶을 심화시키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것을 통해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하는 하나의 영,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하는 하나의 몸이 된다.47) 세례가 통일과 조화로의 진입을 의미한다면 유카리스트는 교회의 통일을 유지한다.
V. 결 언
지나친 외형화와 형식화 그리고 전제화에 빠진 기존 교회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에라스무스의 종교개혁은 한 마디로 신앙의 개인화와 영성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질상 루터의 종교개혁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루터의 종교개혁 초기에 루터 진영과 완전히 결별하기를 망설인 이유였고, 루터에게 처음 동정을 표명한 동기였다. 그러나 그가 끝내 루터의 종교개혁 진영과 결별한 것은 기독교 전 세계의 합의를 무시하고 종교개혁이 기존 기독교 세계의 통일을 무너뜨리고 평화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간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에게 루터와의 결별은 교회의 재결합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관용과 양보를 통한 끊임없는 중재와 중도의 노력을 통해 기독교 세계를 하나로 화합시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신·구교의 어느 한 쪽에 뚜렷이 서지 않는 그의 이러한 중도적 노력은 그가 양 진영 모두로부터 배척을 받은 원인이 되고, 오늘날 그의 전기작가까지도 그를 우유부단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중도는 바로 그의 확고한 인생의 결론이었다.
에라스무스의 교회 화합의 호소는 교회 화합의 궁극적 근거를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교회관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 공동체는 예수를 머리로 하여 각기 직능이 다른 여러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크게 두 가지의 성격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평화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이웃을 배려하고 아낌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습을 나타내야 하며, 교황을 비롯한 모든 성직자는 봉사하는 도구요 섬기는 자에 불과하다. 둘째, 에라스무스에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서로의 사랑과 일치를 통해 평화를 건설해야하는 평화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사랑과 평화는 동전의 앞뒤와도 같다.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성례전 특히, 세례와 유카리스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데, 그런 역할의 중심에는 성령의 활동이 있다. 에라스무스의 평화적인 공동체로서의 교회관은 이미 루터의 종교 개혁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지만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현실에 부딪쳐 더욱 적극적이고 강하게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때 에라스무스는 불화를 그리스도가 가장 미워하는 죄라고 단정하였다.
에라스무스가 기존의 가시적인 보편 교회를 영성화 내지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하려한 개혁자이지만 다른 차원에서 교회 화합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강조한 점은 개인주의와 보편주의의 절묘한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에라무스의 내면적인 영성주의는 신앙의 추구에 있어서 로마 교회라는 외부의 제도적이고 보편적인 압력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에 속한다. 반면 전 교회(기존의 제도적 교회의 경계선 너머까지 확대되는)를 그리스도의 한 몸이요 사랑과 평화의 한 공동체로 보는 것은 분명히 보편주의에 해당하며 이 보편주의는 중세의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획일적·계서제적인 보편주의와는 다르다.
에라스무스의 이 같은 균형은 처음과 달리 루터의 종교개혁이 격렬해짐에 따라 그 평형이 좀 흔들린 감이 있다. 왜냐하면 중도자 에라스무스는 기존 카톨릭 교회의 외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이전보다는 조금 더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그 때까지 책을 통해 주장한 내용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본질적인 자세의 변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동종교개혁과 더불어 그의 책들은 카톨릭측의 종교회의에 의해 금서목록에 들어갔다. 에라스무스의 그러한 후기의 태도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승리할 경우 그가 기존의 교회를 비판하면서 본래 초기에 품었던 그의 비전 즉, 예수님의 한 몸으로서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보편 공동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근대사에서 신·구교간의 피나는 대립과 갈등을 겪어온 오늘날, 에라스무스적인 종교개혁이 진정한 개혁방향이 되었어야 했다는 평가가 많은 동감을 얻고 있다. 어떤 좋은 명분도 화합의 가치만큼 높지 않으며, 화합이 파괴된 개혁은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임을 16세기 에라스무스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