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스탈린 등과 함께 혁명을 이끌었던 트로츠키가 쓴 '혁명의 기록'.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자 적군을 지휘하는 군사위원장이었던 트로츠키는 혁명의 주역으로서 러시아 혁명의 모든 과정과 그 법칙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를 세 권으로 집필했는데, 이번에 번역 출간된 이 책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한 권으로 편집된 것이다. 이 방대한 책에서 트로츠키는 혁명 시기 계급투쟁의 양상, 혁명의 역학,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서로 다르면서도 전형적인 양상을 드러내는 인물들의 모습 등을 자세히 서술했다.
여기에 더해 여성해방, 연속혁명론, 인민전선, 이중권력, 극우 쿠데타와 파시즘, 공동전선, 혁명의 조건과 혁명정당의 역할, 민족 문제 등 혁명을 둘러싼 수많은 문제들을 담아냈다. 또한 노동계급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그리며, 일개 농민, 병사,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저자 : 레온 트로츠키 (Leon Trotsky)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Lev Davidovich Bronstein). 1879년 러시아 남부 야노프카에서 유대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 나로드니키 비합법 서클에 가담했다가 곧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남러시아노동자연합을 창설했다. 1898년 체포돼 시베리아로 유배됐다가 1902년 탈출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런던에서 레닌을 만나 이스크라 그룹에 합류한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2차 대회에서 멘셰비키에 가담했으나 1904년에 결별하고, 1917년 7월 볼셰비키에 가입하기 전까지 양 분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1905년 혁명에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이 됐다. 1906년 다시 체포돼 시베리아 종신 유배형을 받았으나 1907년 탈출했다. 국외에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통일을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1914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0년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다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 되어 10월 혁명 당시 무장봉기를 지도했다. 그후 적군을 창설해 1925년까지 군사인민위원을 역임하면서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레닌과 함께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레닌 사... 후 당의 노선을 놓고 스탈린과 대립하다가 1927년 제명돼 1929년 국외로 추방됐다. 각국을 전전하다가 1936년 멕시코에 정착했다. 1940년 8월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될 때까지 스탈린에 맞서 투쟁하며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정수를 지켜냈다. 한국에 소개된 주요 저서로는 『연속혁명, 평가와 전망』, 『나의 생애』, 『러시아 혁명사』, 『인민전선 비판』, 『반파시즘 투쟁』, 『배반당한 혁명』 등이 있다.
역자 : 볼셰비키그룹
트로츠키주의에 입각하여 ‘제4인터내셔널 창립강령(이행강령)’을 계승하고 국제 혁명지도부를 수립하기 위해 투쟁하는 국제볼셰비키그룹의 정치를 지지하는 한국 활동가 모임이다. 볼셰비키그룹의 성과들은 러시아 혁명의 강령이자 실천적 내용인 레닌주의를 계승한 제4인터내셔널, 스파르타쿠스동맹, 국제볼셰비키그룹으로 이어지는 혁명 운동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대중은 비판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 행동으로 나아간다. 이들의 분노는 처음에는 식량 공급에 대한 항의로 표출됐고, 때에 따라 지역 차원의 봉기로 이어졌다. 시장이나 광장에서는 공장에서 근로의 짐을 지고 있는 노동자들보다 여성, 노인, 청소년 들이 보다 대담하고 독자적으로 투쟁했다. 5월에 모스크바에서는 대중운동이 독일인 학살로 변질된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자들은 대부분 경찰이 보호하는 도시의 인간쓰레기들이었다. 그러나 공업도시인 모스크바에서 이런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은 노동자들이 불만에 찬 소읍의 인민에게 자신의 구호와 규율을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각성된 상태가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전쟁의 최면을 깨고 파업투쟁의 길을 연 것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던 식량 공급에 대한 항의 투쟁이었다.
적대감과 두려움의 압력이 커짐에 따라 조정의 중세적 미신은 더 큰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 전체를 뒤덮는 구역질나는 악몽이 연출됐다.
1905년 11월 첫 혁명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차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토볼스크 지역에서 우리는 신이 보낸 사람 그레고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시베리아의 농민 라스푸...대중은 비판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 행동으로 나아간다. 이들의 분노는 처음에는 식량 공급에 대한 항의로 표출됐고, 때에 따라 지역 차원의 봉기로 이어졌다. 시장이나 광장에서는 공장에서 근로의 짐을 지고 있는 노동자들보다 여성, 노인, 청소년 들이 보다 대담하고 독자적으로 투쟁했다. 5월에 모스크바에서는 대중운동이 독일인 학살로 변질된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자들은 대부분 경찰이 보호하는 도시의 인간쓰레기들이었다. 그러나 공업도시인 모스크바에서 이런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은 노동자들이 불만에 찬 소읍의 인민에게 자신의 구호와 규율을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각성된 상태가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전쟁의 최면을 깨고 파업투쟁의 길을 연 것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던 식량 공급에 대한 항의 투쟁이었다.
적대감과 두려움의 압력이 커짐에 따라 조정의 중세적 미신은 더 큰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 전체를 뒤덮는 구역질나는 악몽이 연출됐다.
1905년 11월 첫 혁명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차르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토볼스크 지역에서 우리는 신이 보낸 사람 그레고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시베리아의 농민 라스푸틴이었다. 그의 머리에는 말을 훔친 벌로 구타를 당한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적당한 순간에 나타난 이 “신이 보낸 사람”은 곧 보조 역할을 해줄 관리들을 찾아냈다. 아니, 그들이 그를 찾아낸 셈이었다. 이렇게 황후에게 딱 빌붙어 있는, 그리고 그녀를 통해 차르에게 단단히 매달려 있는 새로운 친위 파벌이 형성되었다.
2월 혁명은 혁명조직들의 반대를 뚫고 아래로부터 시작되었다. 노동계급의 가장 억압받고 핍박받은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스스로 합의하여 선두에 나섰다. 물론 이들 중에는 병사의 부인들이 많이 있었다. 너무 길게 늘어선 빵 배급 줄이 혁명을 촉발시킨 마지막 자극이 되었다. 이날 남녀 모두 합쳐 9만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파업 참가자들은 데모, 집회,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전투성을 드러냈다. 시위는 대규모 공장들이 밀집한 비보르크 지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쪽으로 옮아갔다. 비밀경찰의 증언에 따르면 다른 곳에서는 파업이나 시위가 없었다. 이날 경찰을 돕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으나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이들과 대치하지 않았다. 노동자든 아니든 상관 없이, 여성의 무리는 빵을 요구하며 시 두마 건물로 몰려갔다. 그러나 이것은 염소 수컷에게 젖을 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도시 여기저기에 붉은 깃발이 등장했다. 깃발의 구호는 노동자들이 왕정이나 전쟁이 아니라 빵을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본문 중에서